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정권의 지지가 낮고 부정부패가 매우 심했다는 게 가장 컸다.[2]
응오딘지엠이 초기처럼 제대로 통치했으면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잡았겠지만,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데다가, 거기다 베트남인들이 대다수 믿는 불교를 탄압한지라 국민의 지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전면적 마비에 가까운 남베트남 정부 기관과 관료제의 취약함,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남베트남 농촌과 도시에 대한 너무나도 쉬웠던 침투, 그리고 수 많은 농촌과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국가 내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베트콩의 세력은 바로 이러한 남베트남 정부의 취약함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한국과 비교하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논란이 많긴 해도 어쨌든 독립운동을 했고, 수도인 서울 자체도 조선 왕조 500년의 수도란 정통성이 있고, 국민의 국가에 대한 공감도 남베트남과 달리 있었고[3], 확실한 반공사상을 갖고 있었다.[4] 게다가 국제적인 정통성 또한 대한민국에게 있었다.[5]
북베트남은 항불/항일 투쟁을 위해 만든 조직인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기고 식민통치를 종결한 후 그대로 북베트남 정부를 구성했으므로 국가 주석인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 정부 수뇌부의 상당수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유공자였으며, 이는 당연히 북베트남 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은 당장 집권 시작 부터 1945년 8월 대봉기 당시 독립 선언과 동시에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지금까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있었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에게 정식 이양식을 받고, 옥새와 왕검(王劍)을 대중 앞에서 넘겨 받은 걸로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응우옌 왕조의 계승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베트남 황족들이 그럭저럭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토지 몰수/분배 정책, 인구 집계, 행정 구역 재편 등 실질적인 행정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이념적으로도 대대적인 국사학 재편을 실시했다. 또한 1960년 10월에 개전 준비에 정신 없을때도 북베트남은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하노이 수도 건설 950주년 행사를 거대하게 치루며 대중에게 베트남 민족 국가의 후계성을 제대로 과시했다. 이후로도 육상 전쟁은 남베트남 내에서만 벌어졌다.
위의 월맹 정권 치하 베트남의 민족 국가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역사학적 재편성 과정은 P.M. Pelley, Postcolonial Vietnam: New Histories of the National Past, (Durham: 2002)에 자세히 저술 되어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당시 사이공 정권의 철권 반공 색출, 절멸 작업에 숨어서 모가지 간수 하는데도 바쁜 남베트남 공산당 지하 조직원들에게 유적 답사를 시켰을 만큼 치밀하게 전국에서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를 긁어 모은 뒤 식민 당국 치하 고급 교육을 받아 전적이 구릴 수 밖에 없는 역사학자들 마저도 복권 시켜주며 민족 국가적 역사관을 짜맞춘 뒤 이를 보급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근대 민족적 관점에서 월족, 즉 킨 족과는 궤도나 정체성이 확연히 다른 참파도 은근슬쩍 자기들 역사로 포장하는 등 학자적 관점에서 보면 어두운 면이 있으나, 이 문맥에서 중요한 건 북베트남 정권은 오히려 기존의 문화와 역사를 부르주아 봉건 반동 드립이나 치며 멀쩡한 절, 교회, 문화재를 박살내기 일쑤였던 다른 나라의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저만큼 치열한 역사적 정통성을 설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이다.
반면 남베트남은 정부 구성원들이라고는 응오 딘 지엠 같은 간판만 빼고는 태반이 구 프랑스 식민 정권 인사에, 당장 정부 통제력 자체가 개판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는 어느 정치 세력도 정국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쥐지못해 쿠데타가 여러번 일어나는 등 혼돈의 카오스로 치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식민 정권 인사들을 기용하는 거야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고 하겠지만, 북베트남식의 민간 차원의 학술적, 이념적 레벨의 근대 민족 국가로서 재형성 과정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국기조차 남베트남은 바로 전의 정권인 베트남국의 깃발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이 베트남국의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도 애초에 1890년, 이미 나라가 프랑스에게 넘어 가고 왕실이 있는 후에시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만 안남 보호국이란 이름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점에 프랑스가 대충 꼭두각시로 옹립해 두었던 황제 성태제(Thành Thái, 成泰, 타인타이 1879~1954)가 디자인하고 도입했던 것이기 때문에 베트남 입장에서는 애초에 그리 애착도 없는 깃발이었다. 식민화 이전 쯔엉조의 황제들은 주황색 바탕에 붉은 원이 있는 깃발을 사용했고, 그 이전에 베트남은 다른 전근대 아시아 국가들 처럼 딱히 국기라 할 만한 게 없었다.
한편 남베트남이 종교 정책에서 크나큰 병크를 저질러서 이것이 대부분의 국민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비교하자면 대한민국의 이승만같은 경우는 친기독교 정책을 취하긴 했어도 최소한 자기 주변 인사들을 기독교들로만 뽑는 병크는 저지르지 않았다. 더구나 해방 이후에서 최소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기독교는 식민제국의 종교라고 욕을 먹는 편이 아니었다.
물론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와 측근 정치는 일단 쿠데타로 좀 수습이 되었기에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구엔 티우 대통령과 구엔 카오키 부통령 체제가 1967년 9월에 들어서면서 민심은 적어도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수그러 들었다.
또한 당시의 북베트남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국가였다. 애당초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톨릭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가톨릭 계열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으로 보고 대량 탄압했다. 그러다보니 그 전까지는 정권에 충성스러운 편이었던 수십만 가톨릭 교도들은 월남을 택했고, 이들은 당연하지만 남베트남을 지지하게 되었다. 또 베트남 통일 이후 공산정권은 중공이 그랬던 것처럼 남베트남의 불교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베트남은 1992년 헌법을 개정하고서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당시의 애매한 남베트남 민심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하나 있다. 전쟁 직후 테트 공세에서도 베트콩은 주요 도시를 공격하며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했지만 실제 베트콩에 호응하는 민중 봉기는 도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남베트남에 국민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했기 때문이고, 남과 북의 문화적, 이념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대놓고 호응하는 사례는 적었다. 쉽게 말해 남베트남 정부건, 북베트남 정부건, 남베트남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즉, 남베트남의 당시 평균 민심은 북베트남과의 통일은 지지하며, 남베트남 국가를 지지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북베트남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애매한 정도였다. 일부 한국인들이 국가 자체는 인정하되 사회 고위층과 정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자국을 싫어하는 거라면, 남베트남인은 지도층 뿐만 아니라 아예 남베트남이라는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외세의 침략이 있으면 전자의 경우 남의 노예되기는 싫어서라도 국가와 국토는 지키려 하겠지만, 후자의 경우 아예 국가가 망하든 말든 아예 신경도 안 쓸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베트남에 대한 반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적으로 1973년 통계에서 집계된 남베트남 인구가 19,370,000명인데, 통일 이후 바다로 도망친 보트 피플만 최소 100만 이상이다. 이들 가운데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게 허망하게 망한 것은, 남베트남 자체가 속빈 강정에 가까웠던데 있다. 무엇보다 극도의 부패와 막장행동으로 인해 지지받을 여지를 스스로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1950~70년대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이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쪽은 공산당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 돈 받고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6] 먼나라 이웃나라 3권 독일편에서도 부정부패와 관련해서 적국 막으라고 준 무기를 적국에게 팔아념겨 공산당에게 나라를 뺏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남베트남[7]]이다. 이렇게 남아 있었어도 국가 막장 테크가 확실했기에, 북베트남이 한 일은 남베트남의 썩은 문을 걷어찬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위의 상황을 한반도로 비유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도 아닌 한반도 내에서 꾸준히 지하 활동을 통해 활동 조직 및 지지 기반을 확대한(현실보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 해방 작전을 감행해서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의 탈환에 성공한다. 서울을 탈환한 후 경복궁 앞에서 조선 총독 및 구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공식적으로 국가 권력을 이양받는 건국 행사를 거행하고, 수도를 옛 조선-대한제국의 수도인 서울로 지정하고 국명을 임시정부의 성격과 명칭에 의거해 '대한 인민 공화국'(혹은 '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지정한다.
하지만 대략 북위 36.5~37도선을 기준으로 미처 한반도 전체를 탈환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 인민 공화국'의 남북동시총선거 제안을 미국과 일본이 거부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과 일본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미처 대한 인민 공화국이 행정력을 확보하지 못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가칭) '조선 민주 공화국'(다른 명칭으로는 '자유 조선')이라는 괴뢰국이 수립된다. 조선 총독부의 잔여 인사를 포함한 일본계, 미군정 이후에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구미권 국가에서 건너온 백인계, 한반도 현지의 친일 정치 인사들로 정부를 꾸린다음 일본 신토 관련 인사들과 일본 불교 인사들도 요직에 앉혀 놓는다. 그리고 일본의 신토(그 중에서 국가신토)와 일본식 불교(그 중에서 일본식 선종인 젠 불교)를 토착민들에게 강요하는 간판만 민주주의 세속국가일 뿐 실상은 자유적이지도 않고 민주주의와는 괴리되어 있으며 오히려 종교의 영향력이 강한 종교 국가 즉, 신정국가의 성향을 가진다. 게다가 수도 또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계획적으로 키운 도시인 군산이나 진해, 혹은 일본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지역인 부산을 수도로 삼아서 자리를 잡았다고 가정하자. '대한 인민 공화국(=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조선 민주 공화국과 일본,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에서의 폄칭:조선 공산 괴뢰국 또는 조선 공산당 비적)'과 '조선 민주 공화국(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에서의 호칭:자유 조선)' 중 한반도 전체의 한국인들이 어느 쪽을 자신들의 정통 정부로 인정할지, 최소한 '조선 민주 공화국'을 제대로 정통 정부로 인정할 지의 여부에 대해선 뻔히 보이는 이야기이다.[8]
1 역사적 문제
사실 베트남은 이념논쟁 이전에 남북 간의 이질적인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원래 베트남 역사에서 남부의 참파는 아예 다른 나라였다. 베트남의 주류인 킨족과 참파의 주민들이었던 참족은 아예 계통도 문화도 완전히 달랐다. 킨족은 중국 남부 계통의 민족으로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한자-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반면, 참족은 말레이계 민족으로 이슬람교를 믿으며 인도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만약 참족이 킨족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근대까지 그 이질성을 크게 유지했다면, 아예 민족자결주의를 명목으로 삼아서 '참족 민족 국가'라는 형태로 분리 독립을 할 명분이라도 있었다. 문제는 현재 베트남의 참족은 9천만 인구 중 고작 20만명도 채우지 못할 정도의 말 그대로 소수민족이라는 것이다(...) 베트남 남부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죄다 주류민족인 킨족에게 점거당한 상태라서 베트남에서 떨어져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뭔가 역사적 정통성 같은 건 전혀 없는 신개척지 정도가 당시 북부의 시선에서 본 남부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주류인 북베트남인들의 시선에서 남베트남은 저 촌것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따로 노네? 제정신임?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로 비유해보면 북베트남은 충청,전라,경상의 삼남지방[9]과 서울, 인천, 경기도에 해당하고, 중부 베트남은 황해도와 강원도, 평안도[10] 정도, 호치민 시가 있는 남부 베트남은 함경도[11], 간도 정도가 적당하다. 남쪽으로 갈수록 역사적인 정통성이 적은 것이 베트남사의 특징.
이에 대해 소수민족 비중이 높은 곳은 북쪽에 몰려 있다...라는 지적도 있으나 사실 남부 내륙의 떠이응우옌(Tây Nguyên, 西原) 지역은 남베트남과 이후 통일 베트남의 베트남인 이주 정책으로 소수민족이 소수가 된 지역이지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소수민족이 다수인 지역이었다. 실제 1930년대만 해도 이 지역 인구의 95%는 소수민족이었다.#
수도의 상징성도 마찬가지여서 북베트남의 하노이는 수백년 동안 역대 베트남 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역사 도시였다. 반면 남베트남의 사이공은 17세기 말 응웬 씨가 막 진출한 메콩 강 델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거점에 불과했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프랑스가 점령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이후였다.
2 전략적 문제
남 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응오딘지엠 일가의 독재와 부패가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초기엔) UN에서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명분이 없다시피 했다.같은 편이 지뢰라니;;
반면 북베트남은 직접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베트콩을 지원하여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했으며, 북베트남 자체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대하여 방어적인 움직임만을 보였다. 즉, 베트콩을 '자발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하여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남베트남의 혼란상 속에서, 결국 베트콩이 상당부분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현실 탓에 미국의 개입은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고 미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3 지리적 문제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동쪽, 서쪽, 남쪽이 모두 바다이기 때문에 육상으로 우회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해상은 미국의 강력한 해군으로 철저하게 봉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남쪽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은 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죄다 말라 죽어버렸으며(...), 오히려 남한 쪽에서 북한의 해안 도서를 점령하고 게릴라전을 펼칠 정도였다. 이후에도 1960년대 북한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게릴라전을 시도했으나, 확실한 보급로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공비는 남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간 내에 소탕되었다.
남북베트남은 친좌파적인 정책을 펼치던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해서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육상을 통해서 호치민 루트를 만들고 베트콩을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었다. 길이가 길고 정글로 뒤덮힌 베트남의 국경 지대는 경비가 무척 어려웠다. 남한(과 UN군)은 비교적 좁은 휴전선만을 주 전선으로 삼을 수 있고 바다를 통해서는 제2,제3의 전선을 형성하여 북한을 반포위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반대로 남베트남은 넓은 서부 국경이 남베트남을 공격하는 제2,제3 전선이 되었던 것이다.- ↑ 당연히 취소선이 그어진 농담일 뿐. 베트남이 망한 것은 결코 월남에서 암약하던 간첩들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도 현재 간첩이 암약하지만 그들이 국가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서독 또한 동독간첩이 통일이후 자료로 보면 3만명이나 되었으나 별문제 없이 서독주도로 독일통일이 되었다. 그냥 간첩이 활개치고 간첩들의 이간질이 먹힐정도로 나라가 막장을 달린것이 진짜 망한 이유이다.
- ↑ 대한민국의 경우도 그렇다는 주장이 있지만, 일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의 정식 수립 이후 바로 해체한 점. 조선왕조가 이미 진작에 망해 굳이 계승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북한이 정통성에서 우월한 입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는 총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38선 이남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완전히 인정받았다. 김일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오히려 침략자 전범의 위치가 된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폭락시키는 꼴이 되었다.
- ↑ 명목상이긴 하지만 독립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헌법에다 적어놨다. 새 정부가 독립운동을 한 망명정부를 계승한다고 하니 일단 공감을 받은 셈.
- ↑ 남한 내 좌익세력의 분란으로 이들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진 데다가 결정적으로 농지개혁 시행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충성할 이유를 주었다.
- ↑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제안한 남북 총선거를 조선노동당과 소련 군정이 거부하여 어쩔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하여 설립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처럼 베트남도 일단 분단되었다가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했는데,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오히려 남쪽이 총선거를 거부했다. 총선거를 하면 호치민과 베트남 노동당이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 ↑ 실제로 대일청구권 협정에서 얻어낸 돈의 경우엔 전부 경제 개발 자금으로 쓰였지 부정부패로 흐르지는 않았다.
- ↑ 그리고 또 하나는 중화민국. 정확히는 대륙통치시기의 중화민국이다.
- ↑ 사실 이렇게 끼워 넣기에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민족 국가의 지리적 중심지가 고구려~고려 시대의 평양~개성 일대와 신라, 조선시대의 서울과 양남 지방 사이에 시대적으로 남북을 골고루 왔다 갔다 했던 반면, 베트남의 경우 정직하게 19세기 이전에는 사이공 일대는 캄보디아어로 프레이노코르라 하는 아예 다른 민족 땅이었고, 근대 이전 베트남 역사의 중심지는 언제까지나 하노이, 하이퐁 일대의 홍강 델타였기 때문에 직접 대입하기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로 생각하자.
- ↑ 심지어 하노이는 경주시처럼 천년의 세월에 육박하는 수준의 시간을 수도로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 ↑ 20세기 후반 이후 정통성과 정당성이 없는 북한의 통치 하에 놓여서 그렇지 평안도권의 중심도시인 평양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했었기 때문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 중부 베트남의 도시 중 하나인 후에도 한 때 베트남 왕조의 수도라는 정통성이 있었다.
- ↑ 다만 함경도는 고대에 옥저 영역이었고 이후 고구려와 발해에 속했던 적도 있었던 만큼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