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프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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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군과 전투를 치루는 비아프라군

Biafra War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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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서 1970년까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967년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한 나이지리아 동부 비아프라 공화국과 이를 진압하려는 나이지리아 정부군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수단 내전, 서사하라 전쟁, 르완다 내전, 소말리아 내전과 더불어 아프리카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주의 열강 종주국들의 잘못된 식민유산에 의해 생겨난 많은 아프리카 지역 국가의 분쟁 중 하나이다.

2 나이지리아의 독립, 그리고 혼란

1900년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된 나이지리아는 종교문화, 배경이 저마다 다른 지역들을 영국이 한 국가로 통합시켜 이를 지배했다. 이때 남부의 이보족과 요루바족이 영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협조하여 영국의 지원하에 더욱 발전하였고 이슬람을 믿었던 다수 하우사족을 억압하는 식민정책을 취하면서 민족, 종족, 지역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면서 나이지리아도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이 서로 다른 민족들과 지역들을 한나라로 통합하면서 생겨난 나이지리아는 지역갈등, 종교갈등, 민족갈등에 빠지게 되었고 부족밑 종족 구성도 매우 복잡하여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 정부는 힘을 쓰질 못했고 1966년 1월 남부 이보족 출신의 이론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대통령이 된 이론시는 독립 초 연방제로 유지되고 있었던 나이지리아를 연방제를 폐지하고 강압적인 중앙집권주의로 나이지리아를 제어, 통제하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시의 정책은 복잡한 민족구성들로 이루어진 나이지리아 내의 여러 종족 집단들 특히 다수 하우사족이 차지하고 있던 북부의 반발을 키웠고 결국 이론시는 같은해 반대파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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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부 고원 이 놈은 절대로 사람이 아니다

한편 이론시가 암살당하자 나이지리아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다툼이 벌어졌다.그 결과 북부 출신의 야쿠부 고원 장군이 여러 경쟁자들을 억누르고 대통령이 되었고 고원 대통령은 나이지리아의 불안정한 정국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여러 부족 대표들과 지역대표들을 모아 전국 대표자 회의을 계획하려 했으나 같은해 벌어진 이보족과 하우사족간 유혈 충돌로 회의는 결국 취소되었다.

3 비아프라의 탄생, 그리고 내전


▲ 비아프라 국기

▲ 비아프라 국가(당시)[1]

한편 상황이 이렇게되자 고원 대통령은 기존 연방제를 유지하되 나이지리아의 주를 4개주에서 12개 주로 행정주를 더욱 통제하기 쉽게 개편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원 대통령의 나이지리아 행정주 개편에 이보족 출신의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이 고원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이에 오주쿠 중령은 자신을 지지하던 이보족 출신 장교들과 남부의 이보족들을 이끌고 이듬해인 1967년 5월 30일 나이지리아 동부의 3개 주들을 통합시켜 비아프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오주쿠는 이보족의 지지를 받아 비아프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비아프라의 독립 선언에 고원 대통령은 멍 하니 보고만 있진 않았다. 이에 고원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리고 7월 7일 비아프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여 비아프라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나이지리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4 비아프라 전쟁

4.1 전쟁 초~전쟁 중기

내전 발발 초기에만 해도 전세는 비아프라에게 매우 유리했었다. 8월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를 함락하고 수도 라고스까지 진격할 정도로 승산은 절대적으로 비아프라에게 불리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소련과 옛 나이지리아의 식민 종주국이자 나이지리아 등 옛 아프리카 식민국가들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영국이 나이지리아 정부에게 무기와 자금 등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나이지리아 정부군에게 유리해졌고 이에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오레에서 비아프라군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전략을 사용하여 비아프라의 수도인 에누구를 공격하는 전략을 펼쳤고 급기야 비아프라군은 소련과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나이지리아군에게 패퇴에 패퇴를 반복하였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군은 비아프라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여 비아프라 공화국은 에누구에서 바하, 움바히아, 오웨리로 수도 이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어 비아프라의 영토는 1/10로 줄어들게 되었다.

4.2 전쟁 말기

한편 대부분의 영토와 보급로 등을 상실하고 내륙으로 고립되다시피한 비아프라는 나이지리아군에게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련과 영국등 외국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오주쿠 비아프라 대통령은 외국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때 나이지리아를 지원하고 있던 영국과 정치적,외교적으로 앙숙관계에 있었던 프랑스가 비아프라에 무기와 총탄 등을 공급하고 비아프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비아프라는 외국 국가의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포르투갈스페인도 비아프라를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과거 식민지들을 거느렸던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게다가 심지어는 프랑스 같은 일부 서구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백인 지배 역행과 흑인 인종차별 탄압 정책으로 국제사회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고립을 겪고 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등 일부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통치 국가들도 흑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남아공,로디지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제를 지지하던 아프리카 흑인 세계 국가들의 분열을 도모하려고 나이지리아와 전쟁중인 비아프라를 지지했다.[2] 그리고 같은해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등 당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한 아랍권 국가들의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와 총기들, 3차례에 걸친 아랍국가들과의 중동 전쟁에서 운용했던 이스라엘군의 노후 무기들을 재고처리하려던 이스라엘도 비아프라에게 무기 판매,지원을 타진하면서 사실상 비아프라를 지원했고, 비아프라가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자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사우디,알제리,시리아,이집트 같은 아랍 세계 국가들도 나이지리아를 지지하였고[3] 나이지리아를 지원했던 공산주의 진영의 강대국 소련의 동맹국이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불가리아도 비아프라와 싸우고 있던 나이지리아군에게 전투식량과 무기들을 제공하면서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단순한 내전이나 대리전 수준을 넘어 국제사회의 여러 나라들이 무기를 판매하거나 지원하여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대형 국제전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 1969년, 비아프라의 굶주린 아이. Don McCullin 촬영. Life

한편 전쟁이 길어지자 전사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속출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참혹해졌다. 이러한 비아프라 전쟁의 참혹함은 전 세계 여러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되었고 전쟁의 장기화로 굷주림에 허덕이는 비아프라 어린이들과 약과 항생제가 없어 죽어가는 군인 및 민간인 부상자들의 참상은 국제사회의 큰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적었지만 탄자니아, 가봉,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등 몆몆 아프리카 국가들도 비아프라를 정식주권 독립 국가로 승인하였다.[4] 더욱이 이런 비아프라 전쟁의 잔악성은 나이지리아를 지원하고 있던 영국에서도 국내적으로 비아프라와 전쟁중인 나이지리아 정부군에 대한 영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라는 비난 여론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지리아군에게 기울어있었고 비아프라는 외부국가들의 지원 가지고도 전세조차 뒤집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사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한편 이러는 사이 국제연합(UN)이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양국이 전쟁과 무력 사용을 중단할것을 촉구했고,아프리카 통일기구(OAU : 현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 등이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비아프라와 나이지리아 정부를 상대로 평화 협상을 중재했지만 협상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5] 결국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종전 협상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비아프라를 승인하였던 탄자니아,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가봉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프리카 통일기구 회원국들도 비아프라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고 비아프라를 비난하면서 결국 아프리카 통일기구도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려는 평화 협상 중재를 중단하고 말았다.비아프라가 이기든지 나이지리아가 이기든지 너희 둘이 알아서 해라.에휴

한편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평화협상이 매번 실패로 끝나고 쌍방간 충돌이 격화되자 1969년 오주쿠 비아프라 대통령은 평화협상의 조건으로 분리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비아프라 지역에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넓은 수준의 자치 정부 수립을 허락해줄것을 나이지리아 정부에게 요구했다.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는 무조건 투항을 요구하며 오주쿠 대통령의 요구를 무시했고 오히려 더 강경하게 비아프라에 대한 무력 공세를 강화했다.결국 나이지리아군의 강경 무력 공세에 비아프라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5 종전

그리고 1969년 연말에 벌어진 전투에서 비아프라군은 궤멸에 가까울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1월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비아프라군은 사실상 궤멸되다시피했고 이 틈을 타 나이지리아군은 임시수도 오웨리로 진격하였다. 한편 나이지리아군이 오웨리로 진격하자 오주쿠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달아났고 임시수도인 오웨리가 함락되면서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200만명의 전사자와 50만명의 아사자들을 낸 채 비아프라의 패망으로 종료되었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비아프라 측 인사들은 망명정부를 수립해 지금도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지만 후에 야쿠부 고원 대통령이 쫓겨나서 현재까지도 망명생활을 하고있는데다가 당시 비아프라 대통령직을 맡았던 오주쿠는 1982년에 나이지리아 정부로부터 사면받은 후에 나이지리아로 귀국했고, 나이지라 민주화 이후에 두 차례씩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 사망할때까지 나이지리아에서 꽤나 영향력있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덕택에 독립동력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6 그외

국제 구호 활동의 최전선에 나서야 할 적십자는 당시 교전 지역에 함부로 구호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데다, 자칫 비아프라 측에 대한 구호 활동이 비아프라 측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엿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호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적십자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몇몇 의사들이 뜻을 모아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료-구호 활동을 펼치는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바로 국경 없는 의사회가 결성된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처음으로 서양에 아프리카라는 곳이 빈민과 고난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비아프라 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 국가'나 '문명국가' 등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며 아프리카 내의 이스라엘의 이미지로 서양에 이 전쟁을 알리려 했으나, 효과가 없자 인도주의적 고비로 서방에 알리려 했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도덕적 자본(moral capital)을 사용해 각 국가들에게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결국 이 전쟁이 일방적인 '학살'이 아닌 '정치적 내전'이라고 결론을 내린 서방 국가들은 차갑게 비아프라 정부에게 등을 돌렸다. 홀로코스트의 '절대적인 악'이 아닌 정치적인 내분이라고 판단이 되는 순간 비아프라 정부는 모든 신용을 잃었던 것이다.[6] 더불어, 민족자결주의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했으나, 민족자결주의는 반식민주의 사상까지만 허용되는 범위였고,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이 내전 개입에 나이지리아라는 국가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했거나 침묵했다.[7]마지막으로, 애초에 인도주의적 주장들은 인간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나, 국제사회의 엄격한 힘의 논리에는 결국 낄 자리가 없었다. 결국, 비아프라는 패망하였다.
  1. 현재의 비아프라 망명 정부가 정한 국가와는 다르다. 대개 검색 결과로 나온 것은 현 망명 정부가 정한 국가이다.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의 곡조에 개정한 가사를 넣어 만든 노래다.
  2.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70,80년대 모잠비크나 앙골라 같은 주변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에서 벌어진 정부군과 반군 내전에서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때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에게 썼던 분열,지원 정책을 다시 사용하였다.
  3. 이집트는 공군 비행사들까지 보내주며 나이지리아에 군사파병을 했다..
  4. 한편 이들 4개국이 비아프라를 승인하자 몆몆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비아프라를 승인한 이들 나라 정부의 입장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비아프라를 승인할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설정된 국경을 지니고 있던 아프리카 역내 국가들의 민족,종교별에 의한 분리주의를 확대시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한 각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국으로 출범한지 몆년도 안되 사분오열될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5.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두 나라의 입장이 절충이 불가능하여 평화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의 전면투항과 분리 독립 완전 포기를 주장했고 비아프라는 독립 인정과 나이지리아군의 군사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등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바람에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될리 만무했다..
  6. 프랑스와 포르투갈등 일부 서유럽권 국가들이 비아프라를 지원했지만...하지만 이들 나라들도 비아프라가 패망 직전에 몰리자 지원을 끊어버리거나 지원 물자 규모를 축소해버렸다.왜 많이 주다가 총탄을 왜 조금씩만 주는겨?
  7. 애초에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나이지리아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식민지 시기에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해당 지역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면서 민족,언어,종교,문화,역사,지리,생활권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리에 맞게 점령한 식민지 지역에 국경선을 일방적으로 긋고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민족,지역,종교간 대립과 분열을 부추기며 식민 지배를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대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내전전쟁, 영토 분쟁과 종교 분쟁, 민족 분쟁등의 원인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