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코지로

佐々木 小次郎
1585년 경 ~ 1612년 4월 13일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일본검호.

1 설명

사사키 코지로는 미야모토 무사시라이벌로서 모노호시자오(物干し竿;빨래너는 장대)라는 3척에 달하는 장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성명절기는 츠바메가에시인 듯하며 전해지는 묘사를 보면 내려치다가 갑자기 베는 기술인듯 하다.
이름의 유래는 제비를 잡으려고 만든 기술이라든가 제비의 모습을 본뜬 기술이라든가 혹은 나룻배에서 강 위를 날라가던 제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베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이와 관련되어 코세츠(虎切)이라는 것이 유명하다. 사실 츠바메가에시 자체가 수수께끼의 기술인데 그 기술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여러가지의 기술 중 하나가 코세츠이며, 돗토리 현 지방에서 내려오는 고류 검술인 간류우(岩流)의 오의이다.
이 기술이 츠바메가에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은 이유는 코세츠가 크게 횡베기를 해 상대방의 칼을 흔들리게 한 뒤 그 방어하는 칼이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역으로 다시 횡베기를 해서 상대의 칼을 날려버리고, 가사베기로 적을 참살하는 기술이어서 츠바메가에시처럼 빠르게 3번 베고, 막을 수 없다는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사자와 사호의 소설에서는 코세츠가 바닥을 쓸듯이 한바퀴 돈 검이 갑자기 위에서부터 원베기를 시전한다고 나와있다. 이 또한 츠바메가에시의 유력한 추측 중 하나로서 제비'뒤집기'라는 이름에 착안한 것. 내려친 후 날을 뒤집어서 빈틈을 노려 들어오는 적의 손목을 올려베는 필살의 반격 기술로서 별도의 명칭이 있으나 코세츠는 아니다.

간류(岩流 또는 巖流)라는 유파를 창시하여 간류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 그의 호가 간류우(岩龍 또는 岸柳)인 관계로 이를 유파로 착각했다는 설도 있다.

무사시와의 대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건 결투 약속시간을 무사시가 고의로 안 지켜 열받아있던 상태를 노린 무사시에게 목검으로 깎다 만 노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사사키 집안은 원래 전국시대 이즈모 슈고[1]였던 아마고 집안의 원류이자 무가에선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집안인데, 사사키 코지로가 이 집안의 후손인지, 성을 사칭한 것인지, 자기가 맘대로 붙인 것인지, 아무 상관이 없는 지는 알 수 없다.

묘하게 어디서 나오든 대부분 미소년 기믹을 자랑한다. 미소년이 아니더라도 미남계. 이것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에서의 묘사를 따른 것으로, 이 작품에서는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은 전형적인 재수없는 미남형으로 등장.

2 실존 여부

사사키 코지로의 기록에는 불분명하고 모순된 것이 많으며, 또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서인 오륜서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실존 여부에 대해 분분한 의견이 많다. 실제로는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은 후세의 창작에 가까우며, 기록상으로는 대부분 '간류'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때문에 간류가 유파의 이름이냐 아니면 해당 인물의 호이냐 하는 논란이 있는 듯.

그리고 애초에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이천기(二天記)의 기록 자체가 확실하지가 않다. 사사키 코지로가 18세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대결하였다는 기술 역시 무공전(武公伝)에서 간류가 18세에 일파를 일으켰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꾸며낸 것(...) 이러한 '이천기'의 창작-혹은 불확실성-은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대결에서도 나타나는데, 실제 요시오카의 세이쥬로나 덴시치로라는 인물 역시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나오츠나와 나오시게라는 인물로 나오고 있다.

한편 간류는 츄죠류(中条流)의 토다 세이겐(富田勢源)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들의 활동 연대를 기반으로 역추산 해보면 늙은 검객일 가능성이 크다. 토다 세이겐 스승설을 채택한다면 간류섬 결투 당시 아무리 낮춰 잡아도 오십대다.

이 때문에 사사키 코지로가 실제로는 노인이었다는 루머가 퍼지고 있으나, 이는 현실성이 없고 그보다는 카네마키 지사이(鐘捲自斎)의 제자라는 설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역시 미야모토 무사시보다는 나이든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최근에는 이토 잇토사이의 제자라는 설도 있는 듯.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창작물 중 국내에서 잘 알려진 축에 들어가는 만화 배가본드에서는 두가지 설을 모두 차용하여 버려진 아기 코지로를 카네마키 지사이가 거두어 기르다가 이토 잇토사이가 데려간다는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

3 간류지마(巖流島)

미야모토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에는 많은 기록의 차이가 있다.

무공전(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 '이천기'의 원사료)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해주시고는 간류를 패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코쿠라한(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대리인 누마타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쪽의 병법이 짱먹는가 입배틀을 벌이다 싸부끼리 현피시켜서 누가 짱인지 대보자로 결판나서 무사시와 간류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巖流島) 결투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

만약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은 엄연히 일대일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면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巌流島)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巌流島)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간류가 무사시와 약속을 해, 이자키로부터 후나지마(후일의 간류지마)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어부가 간류를 말렸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

이와 관련한 음모론도 존재하는데 사실 사사키 코지로는 카쿠레키리시탄이었고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결투는 사실 결투가 아니라 코지로를 끌어내 암살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누마타카기의 기록을 염두에 보면 결투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사시의 제자들이 코지로를 죽였다는 부분이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카쿠레키리시탄인 코지로를 부담스러워한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사주해 결투를 빙자해 코지로를 암살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나 실제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의문. 그저 흥미로운 한가지 주장으로 보면 될듯.



관련 음모론을 다룬 동영상.

4 대중문화 속의 사사키 코지로

파일:佐々木小次郎.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만화 불문율에서 무사시와 코지로의 대결이 언급되었는데 그냥 노로 한방에 맞아 죽었다.
루팡 3세도 그 설을 따르고 있는지 무사시가 코지로를 때려죽인 노가 등장하기도 한다.
  • 검용전설 야이바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선 호색한에 모노호시자오가 여의봉처럼 칼날이 무한대로 쭉쭉 늘어나는 검으로 돌변. 한국에서 로컬라이징 된 이름은 독고검. 그가 사용하는 검은 대교방송에선 여의검으로 로컬 라이징 되었고 나중에 발간된 정발판에서는 마검 빨랫줄로 나온다.
성우는 코스기 쥬로타/권혁수(비디오), 신한호(대교방송)
  • 왕천재검객 간류라는 민망한(…) 제목의 만화[2]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왔다. 물론 고증따윈 날로 먹은 액션물이라 간류는 꼬맹이인데다가 무사시와의 결투에서 가슴에 흉터만 남고 살아남아서 다시 무사시랑 싸우러 가는 이야기다. :p
사나다 유키무라도 등장하며, 최종보스는 악령이 빙의한 야규 쥬베이[3].
  • 태합입지전 5에서도 등장. 태합에서 다른 검호들이 그렇듯이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후진 편이지만 무력만큼은 94로 절륜. 물론 95를 찍은 무사시에겐 한끝차로 뒤진다. 하지만 코지로에겐 모노호시자오가 있기 때문에 무사시보다 실제 무력이 높다.다만 무력말고 다른 능력치는 20대을 자랑해서 좀 그런편 적성도 B이다. 물론 무사시도 마찬가지(...) 태합에서 무사시보다는 짧지만 전용 스토리가 주어져 있다. 쿄토에서 요시오카 형제를 쓰러뜨리는 무사시와 만나는 이벤트, 도쿠가와 가문의 병법지남역 오노 타다아키를 쓰러뜨리는 이벤트, 츠바메가에시를 습득하는 이벤트, 간류지마에서 무사시와 결투를 하는 이벤트 등이 준비되어 있다. 모든 전용 이벤트를 마치기 전까지는 스승 카네마키 지사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검호와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으며[4] 세키가하라 전투 이벤트를 비롯한 역사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사시를 쓰러뜨린 후 호소카와 가문에 사관할지 안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사관할 경우 이름을 간류로 바꾸고 유파도 간류가 되며 호소카와 가문에 가로로 사관하게 된다. 사관하지 않을 경우 자택으로 돌아가면 무사시의 편지와 함께 무사시의 병법서 오륜서를 획득하게 되며 전용 엔딩을 볼지 안볼지 결정할 수 있다.
  • 자, 출진! 연전에서는 공략 대상 중 한 명으로, 주인공을 호위하여 여행하는 검객으로 등장한다.
  • 무사시 건도에서는 무사시의 라이벌로 최종화 부분에 등장한다. 건도 실력은 다쿠안 화상도 이길 정도로 건도의 달인이며 무사시보다 한 수 위인 듯 한데...여자이다. 작화로 볼 때는 전혀 여성스럽지 않지만 절세의 미녀라 하고 애니 내 여성들 중 가슴사이즈가 가장 크다고 한다(...).
성우는 사쿠라이 타카히로.
  • 꾸러기 수비대에서 나오는 술의 자리를 담당하는 개의 정령 포치는 자기 이름을 사사키 포치로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더불어 원숭이 정령을 제치고 뼈다귀 형태의 여의봉을 갖고 있다는 점을 보아 확실히 사사키 코지로와 모노호시자오의 설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용과 같이 켄잔!에서는 세키가하라 때부터 무사시 앞을 막아서는 최강의 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그 정체는 야규 세키슈사이의 아들 야규 무네노리. 야규번(藩)의 재흥을 위해 난코보 텐카이의 야망에 가담했다. 후반부에 간류도에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해진 무사시와의 싸움에서 패배, 텐카이에게 총을 맞지만 놈을 베어 복수한다.
  • 코에이 삼국지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삼국지 12에서 능력치는 42/93/23/24로 무력만 하늘을 찌르는 지라 통솔이 낮아서 순삭당하는 경우가 많다(...)[5]
  • 겐키의 게임 검호3(PS2)에서는 플레이어가 간류지마의 결투를 무사시 대신 할 수 있는데, 이길 경우 코지로는 사망하고 그의 모노호시자오를 소유할 수 있다. 이 칼의 리치가 '매우' 길기때문에 이후 대전 상대를 매우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대결 이후 코지로가 소속된 지역이 일정기간 동안 출입금지가 된다.
  1. 슈고다이묘(守護大名)이라 하며, 무로마치 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영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2. 작가는 야마네 카즈토시(山根和俊), 원제는 간류(ガンリュウ)
  3. 이 악령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깃들어있다가 그를 암살한 핫토리 한조, 야규 쥬베이 순으로 옮겨가며, 최후에는 무사시의 몸을 노리다 사망.
  4. 이는 무사시도 마찬가지다. 검술계 칭호를 다는데는 유명한 검호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가장 빠른데도 검호들과 싸울 수 없어 매우 곤란하다.
  5. 정확히 노부나가의 전생에서 등장하는게 아니라 추가바람
  6. 이도류를 쓰고 외모가 비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