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와 반제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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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주인공 니콜라 사코바르톨로메오 반제티
  • Sacco and Vanzetti Case
Here's to you, Nicola and Bart.

(당신들을 위해, 니콜라, 그리고 바트)
Rest forever here in our hearts.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쉬기를)
The last and final moment is yours.
(마지막 순간은 당신들의 것이니)
That agony is your triumph.
(그 고통은 당신들의 승리입니다)
 
- Joan Baez, Here's to you

1 개요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사법살인 사건.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프랑스와 달리 이 사건의 누명을 쓴 사람들은 결국 재판 후 전기의자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2 전개

2.1 재판과정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브레인트리 구두공장에서 두명의 남자가 침입하여 경리직원과 경비를 살해하고 16.000달러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용의자로 구두수선공 페르디난도 니콜라 사코와 생선장수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를 체포한다. 이들은 가난한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참전을 거부했던 무정부주의자였다.

프레드릭 G. 캐츠먼 검사웹스터 세이어 판사

검사 프레더릭 G. 캐츠먼은 이들을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에게서 현금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발견되었고 여권을 소지한 점으로 보아 범행후 해외로 도주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벌어지는 내내 자신들은 그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갔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또한 검찰 측이 증거로 제시한 사코의 모자는 정작 사코에게 맞지 않는 크기였으며,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총기 역시 조작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증인들의 진술 역시 모호하거나 번복되기 일쑤였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사코와 반제티는 당연히 무죄 석방되었겠지만, 판사 웹스터 세이어[1]는 노골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사건과 아무 관련없는 애국주의와 이념을 호소하였고 유도신문을 자행해 일부러 피고인에게 불리한 재판을 진행했다.

셀레스티노 마데이로스프레드 H. 무어 변호사

이런 와중에 1925년 11월 셀레스티노 마데이로스라는 죄수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의 진짜 범인이 로드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조 모렐리 갱단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시 주목인 조 모렐리와 또 다른 범인이 살인강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변호인 프레드 H. 무어는 마데이로스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한편, 당시 주지사인 앨번 터프츠 풀러는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런스 로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장[2] 새뮤얼 웨슬리 스트래턴, 전직판사 로버트 그랜트로 구성된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폴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독립조사위원회는 주지사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이것들이 대체... 1927년 4월 9일 대법원 사코와 반제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1927년 8월 23일 사코와 반제티는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다.

2.2 재판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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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사형이 임박해지자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파리의 미국대사관에 몰려든 시위군중들 때문에 탱크가 동원되었으며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스위스 제노바에서는 미국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공격받았았고 남아프리카(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성조기가 불타버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시드니, 도쿄, 부쿠레슈티, 로마,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의 거리에는 성난 군중들로 몰려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때만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이념이었고, 현지 좌파가 전멸한 지금은 상상도 힘들지만,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 노조였던 국제 산업 노동자 동맹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만 하더라도 십만의 정회원을 자랑하는 당대 최강의 노동자 조직일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기에 사코와 반제티 사형에 대한 반응은 처음으로 국제적이고, 의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미 운동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이런 일이 쌓이고 쌓여서 점차 미국이란 나라와 사회 자체를 적대시하는 현대적 의미의 반미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일시적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아인슈타인쿨리지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며, 아나톨 프랑스는 '유럽 노인의 호소'를 발표하였고, 작가 존 더스 패서스는 '두 개의 미국'을 선언하였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정부주의 조직인 '그루포 아우토노모(Gruppo Autonomo)' 소속이었으며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라는 무정부 신문을 구독하고 글을 투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해당 위키백과 항목참조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들었다. 사코는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책을 쓰며 자신들의 무죄를 항변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사코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야."

반제티는 '뉴욕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3]

그리고, 당당하게 죽었다. 니콜라 사코는 당시 33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당시 36세였다.

3 후대의 평가

그리고 50년이 지난 후 1970년대가 돼서야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의 신원을 복권하였다 [4] 그리고 마이클 듀카키스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도전하나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하였다.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줄곧 앞서가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생방송 TV토론에서 사형제도에 관한 답변이 치명타가 되어서 낙선하였다. [5] 참고로 이 사건은 유가족의 분노, 사회적 인식, 범죄자의 교정 가능성, 오판 가능성 등 최대한 예측 가능한 변수 모두를 분석하여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형벌 집행 문제를 대중의 감정에 호소한 오류의 좋은 사례로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몇몇 역사가들은 사코와 반제티의 테러 가담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으며, 사코가 살인의 주범일 가능성이 높고 반제티는 종범이거나 미미한 역할만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6] 하지만 이것도 저자들의 성향을 가려봐야 하는 게 하필 저자들이 미국의 병크에 대해 역사의 재해석을 명분 삼아 궤변에 가까운 저술을 자주 내세우는 사람들이고 게다가 근거로 주장하는 바는 주로 이들의 출신성분과 과거 전력이다. 한마디로 할만 했던 인간들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인데...하지만 현대의 수사기법 상으로 보면 이 두명을 체포하게 된 계기 자체가 거의 심증에 근거한 엉망진창의 수사기법이라서(...) 큰 설득력은 얻지 못하는 저술서들이다. 그러니까 아무 책이나 인용하지 말고 저자들에 대해 조사 좀 해 보고 언급을 하자. 데이비드 어빙 같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의 책 읽고서는 "최근에는 홀로코스트가 과장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라고 쓰는 그런 경우가 생기면 곤란하잖아

시인 임화는 이 사건을 토대로 <曇―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라는 프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
  1. 반제티는 사형판결이 나기 전 "나는 웹스터 세이어가 우리의 판결을 내리기 전에 그의 죽음을 볼 수 있도록 해볼 것이다."라며, 무정부주의자 친구들에게 "복수, 우리의 생사와 이름을 건 복수"라는 말을 남겼다. 웹스터 세이어는 은퇴한 후 복수가 두려워 경찰과 개인 경호원의 보호를 받았다. 곧 그를 노린 폭탄 테러가 있었으나 그는 다치지 않았고 애꿎게도 그의 아내와 하녀가 사망했다. 웹스터는 천수를 누린 후 75세로 사망했는데 이때 그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는 "그의 영혼이 변기에 떠내려갔군"이라고 논평했다.
  2. 당시는 단과대였다.
  3. 이 말은 위에 있는 Here's to you의 가사에서 인용된다(마지막 2행).
  4. 진범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듀카키스가 사코와 반제티를 무죄라고 선고하지도 않았다. 듀카키스는 이 재판에서 일어난 여러 인종차별적인 문제점을 들어 이 재판이 잘못 치루어졌고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재심도 불가능한 만큼 둘을 복권한 것이다.
  5. 당시 한 탈옥범이 강간, 살인을 저지른 일이 있었다. 듀카키스에게 "당신 부인이 그렇게 당한 후 살해되어도 범인에게 사형을 내려선 안된다고 주장할거냐?" 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그렇다고 답한 것. 이에 상대 토론자인 부시가 감정도 없는 냉혈한, 어떻게 그런 일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가정도 모르는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 토론회 이후 듀카키스의 지지도는 7% 하락했다. "평소부터 저는 사형제를 반대했습니다." 라는 발언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형제가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그의 소신에서 나온 합리적인 답변이지만, 유권자들이 원하던 따뜻한 가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6. 1) Avrich, Paul,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AK Press, ISBN 1-904859-27-5, ISBN 978-1-904859-27-7 (2005), Interview of Charles Poggi, pp. 132-133 2) Francis Russell, "Clinching the Case," in New York Review of Books, March 13,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