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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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열을 보여주는 만평.[1]
1컷: "우리 여기서는 드레퓌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
2컷: "했네, 했어."

1 개요

국가와 군대에게는 무조건 까방권을!

프랑스어: Affaire Dreyfus

한 국가가 작당하고 한 개인을 매장시키려고 한 사건이자, 더 나아가 20세기 21세기 까지전 세계의 운명을 뒤엎어놓은 사건.

2 배경

발단이 터져나온 시기는 1894년으로, 당시 프랑스는 이전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는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 이상 서유럽의 육군 최강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보불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는 급격하게 국수주의,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2]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 내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 애썼기에 프랑스가 이러한 분위기로 흐르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해온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신생 독일 제국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당시 프랑스인들의 인식도 여기에 한몫을 한 듯하다.

물론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였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더불어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 내 국가 간의 세력이 균형을 잡아감에 따라 이전 프랑스의 영광[3]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패전으로 인한 혼란 + 국가제일주의 + 반유대주의 정서의 혼합 짬뽕이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막장 드라마를 탄생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3 전개

3.1 1894년 9월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막스 폰 슈바르츠코펜 육군 대령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에 해당하는 한 장의 명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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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

조사에 들어간 정보국은 스파이를 색출해냈는데, 지목된 사람은 유대인이었던 프랑스군 육군 포병 대위로 당시 수습참모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실 이 때 핵심증거가 된 필적은 그저 조금 유사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발견된 종이는 13개 다음절 단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 중 4개의 단어가 드레퓌스의 필체와 비슷했고 이것이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희박한 증거만으로 반유대주의에 물든 군 상층부는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단정해 버렸다.[4]

드레퓌스는 검거된 후 1895년 1월,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당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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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의 불명예 강등식을 묘사한 삽화)

이 때 분위기만으로는 거의 드레퓌스를 탈탈 털어 뼈도 안 남길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프랑스 육군, 가톨릭 교회, 보수주의 언론들도 일제히 유대인과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나섰다. 보통 처벌당하는 장교의 경우 군의 명예를 생각해 조용히 끝내는 게 보통인데,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연병장에서 예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다른 장교가 예도를 빼앗아 부러뜨리고, 계급장과 훈장, 단추[6] 등을 군복에서 떼어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3.2 1896년

2년이 흐른 후,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7]이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열람한 후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근거가 없다'는 것과, 정보국에서 방첩대 실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헝가리 태생의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육군소령의 문체가 명세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8]

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고 재심을 요구하지만, 상부가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자기들 목이 날아갈 판인데? 결국 피카르 중령은 식민지 근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자체가 워낙 큰 이슈였던 탓에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일단 좌천 직전에 피카르 중령이 잘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유포시킨 것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르 마텡’이라는 보수주의 계열의 신문이 '그 놈의 범죄를 입증해 보이겠다'란 식으로 명세서의 사본을 공개하면서 오히려 기름통에 불을 붙였다. 사본의 서체가 누구의 것이네, 아니네에서 불붙은 논쟁이 재심 반대파와 재심 요구파로 갈리며, 마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때의 대한민국을 생각해보자.

당시 재심반대파(즉 드레퓌스 유죄파)는 대부분 공화제/프랑스 혁명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들, 옛 귀족들, 군부세력과 과격한 가톨릭주의자들, 보수우익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와 연계된 신문들로 이들은 '국가안보 위해 세력에 대한 경고와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반대편의 재심요구파에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들이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을 초기에는 유산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이 뒤늦게 가담한다

기득권을 형성했던 대다수의 신문들이 드레퓌스를 정죄하는 편파보도를 하는 동안, 피가로#s-3. 신문이 처음으로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주목하는 보도를 냈다.[9] 하지만 이런 소수 신문들의 의견은 대다수의 보수신문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가톨릭과 보수세력은 군의 위신을 국가의 생명으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게 보는 군국주의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군은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다.", "군의 위신이 곧 국가의 위신이다.", "따라서 군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결국 에스테라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인 국제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한직에 좌천당했던 피카르 중령은 좌천도 모자라서 군사기밀 누설죄로 잡혀들어갔다.

또한, 드레퓌스가 체포된 지 3년 만에 우연히 명세서의 필적과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이 동일함을 알게 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에스테라지를 고발하지만, 당국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며 고발을 묵살했다.

3.3 1898년 1월

에스테라지가 유대인 국제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추앙되고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사회에 만연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혹은, '나는 탄핵한다.' 'J'accuse!')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냈다.[10][11] 졸라는 이 글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첫 번째 군사법정과 증거가 명확한 스파이 에스테라지를 무죄석방한 두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하는 동시에,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하게 요구했다.

로로르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12]는 “프랑스를 치명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였다”라고 말했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라며 에밀 졸라를 옹호했다. 그밖에 홍당무로 알려진 작가 쥘 르나르도 졸라를 옹호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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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심 반대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는가 하면 초상을 목매달았으며, 군중을 선동하여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상을 팽개친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으로 시간을 보냈고,[13]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도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전제 사이에서 극렬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군부는 에밀 졸라에게,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유죄선고를 내렸고 졸라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1902년 갑자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마는데 지금도 살해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많이 나오고 있다.

당시 에밀 졸라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상원과 하원, 문민 권력, 군부 권력, 거대 신문, 거대 신문이 중독시킨 여론 등 모든 것이 저에게 적대적입니다. 제 편으로는 오직 하나의 관념, 즉 진실과 정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정녕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14]

3.4 1898년 여름

이 사건은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 진보적 지식인들의 항의와 비난이 이어지고 졸라를 옹호하는 각국의 여론이 줄을 이었다.

그러던 중 1898년 8월 30일, 드레퓌스 사건의 모의자 중 하나인 위베르 앙리 중령이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함께 조작한 증거가 거짓으로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 이 사건의 분수령이 되었다. 같은 시점에서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앙리 중령의 자살은 재심파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주었다. 군의 명예와 국가주의를 부르짖었던 가톨릭계의 재심 반대파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양심적인 재심파의 거센 재심요구에 다시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재심파가 제출한 탄원서가 고등법원에서 승인되어 재심이 결정되었다.

3.5 1899년 9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의 재심은 1899년 6월 3일에 열렸다.

법원은 명세서가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에 의해 쓰인 것임을 근거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 드레퓌스는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증인으로 출석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전히 증거날조와 위증으로 일관했고, 법원은 정상을 참작하여 드레퓌스에게 10년형을 언도했다.

"드디어 진실이 승리하는구나!" 하고 기대했던 여론이 또다시 끓어올랐다. 이 충격은 프랑스 내 지식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까지 미쳐서, 각국 프랑스 대사관에 시위대들이 진을 치고 항의하는가 하면, 프랑스 국기 공개 화형식에,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콧 결의안까지 나왔다. 에밀 졸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혐의가 풀려 영국에서 귀국했던 졸라였지만, 다시 펜을 들어 재심판결의 부당함을 폭로하면서 여론을 주도해나갔다.

결국 국내/외 여론에 밀린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특별사면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많은 재심파의 인사들은 사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 여겨 이를 반대했지만, 정작 드레퓌스 본인이 5년 간의 감옥생활에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투쟁을 버티지 못하고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의 한 막이 종결되었다.

3.6 1906년 7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불완전 연소에 불과했다. 결국 1899년 친 드레퓌스파가 정부를 구성하였고 계속된 지식인들의 격려에 힘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들을 첨부하여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

결국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판결을 오판으로 파기,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와 피카르를 복권시켰다.[15]

드레퓌스는 복권되기는 했지만 유형기간 내내 쇠약해진 몸 때문에 다음 해 전역하면서 현역 육군 대위에서 예비역 소령으로 진급조치됐다. 그 후 드레퓌스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소집되어, 갈티에리 장군 휘하의 파리 방위군 포병참모가 되었다.

이후 중령으로 진급하여 포병병과 후방지원임무에 종사, 베르됭 전투 등 프랑스군의 굵직한 전투 다수에 참가했다. 이 공적으로 1918년 종전 직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종전후 퇴역하여 파리에서 살다가 1935년에 사망했다. 엄청난 고통과 수모를 준 국가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전쟁까지 나간 것을 볼 때 진정한 영웅인 듯.

그러나 드레퓌스의 손녀 마들렌 레비는 비시 프랑스 시기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서,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비시 정부는 나치 독일에 영합해서 반유대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1942년에는 벨디브 사건이 발생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문제의 에스테라지는 판결이 나왔을 땐 이미 변장 후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영국으로 도주한 뒤였으며, 1932년까지 반 유태인성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의 삶을 살며 천수를 누리다 갔다. 유해는 그가 거주하던 마을 인근의 성 니콜라스 교회[16] 무덤에 묻혀있다고 하나 진실은 저 너머에….

3.7 1995년 9월

1995년 9월 12일자 ‘리베라시옹’ 지에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육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해에, 프랑스 군사(軍史) 담당이었던 육군의 Jean Louis Mourrut 장군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논란이 끝났다.

1906년 당시 대법원에 의해 드레퓌스가 복권되기는 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법원에서 무죄라고 했으니 무죄 취급을 할 뿐이라고 우긴 것이다. 프랑스군은 예로부터 초특급 보수적 성향을 견지하는 입장에 서왔다가 마침내 그가 무죄라고 시인한 것. 물론 당시 사건을 주도한 군인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이로써 한 개인의 인권을 말살시킨 것이 군 정보기관의 음모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데 100년이 걸렸다.

4 여파

흔히 19세기 반유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지만, 모순되게도 드레퓌스 자신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본인을 유대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듯.[17]

당시 서유럽에서는 사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문화적, 혈연적으로 서유럽에 거의 '동화'되어버려서 유대인 정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대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동유럽 및 러시아인들을 비웃거나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게 당시 서유럽의 풍토였다.[18] 그랬기에 드레퓌스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인식 자체를 갖지 않았던 것인데, 정작 유대인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전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일었던 것.

1900년대 초 사건이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정계에서는 일부 보수인사들이 아직도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주장했고 심지어 '나는 그가 아직도 유죄임을 믿는다'라는 투의 논문과 서적도 수차례 발간되었다.

국가와 군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군국주의 세력, 극우파의 선동에 휩싸인 대중의 광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말 그대로 프랑스가 두 개로 쪼개졌다. 실제 재심판결 전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대학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나고,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하는 등 한때 진보파가 거의 궤멸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여담이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에서 논란이 되자 결투가 급증했다. 이 당시에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일이 생기면 결투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드레퓌스 사건 이전과 비교해보면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건의 관련자였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진범인 에스테라지까지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결투를 했다고.

한편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외치면서 전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프랑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개인을 완전히 말살하고, 유대인 전체를 잠재적인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는 행태를 보인 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였다. 전 유럽의 유대인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이 충격과 공포는 날개짓이 되어 세계 역사를 뒤흔들어놓았다. 이미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계 인사들은 "우리는 (우월한) 유대인. 우리는 우리끼리 산다"[19]라면서 주류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 고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회에서 차별 받는 이유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통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스스로를 독일인 혹은 오스트리아인으로 규정지으면서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에 있었다.[20][21]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든 유대계라는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이 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이럴바에는 주류사회에 동화되느니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오니즘 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유대인들을 결집시켰고, 이것이 1차세계대전 와중에 (멀쩡히 아랍인들이 잘 살고 있는 )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보장하겠다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22]

즉,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이 지내던 중동은 이스라엘이라는 깡패 중의 깡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과 그로 인해 생긴 여러가지 분란을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이만한 나비효과가 없다 하겠다.여기에 글로벌 개자식들이 발생하는 계기도 되었고

게다가 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다시 드러난 반유대주의가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바이마르 공화국)로 전이되는 바람에 이른바 배후중상설이 떠올랐고 이 음모론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는 최악의 유대인 학살이란 결과를 낳게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각해진 시오니즘은 한 층더 결속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여하튼 드레퓌스 사건은 현재는 인권탄압 등의 사례로 주로 인용되며, 국가가 일단 결정한 사안을 일개 개인이 뒤집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5 기타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니콜라스 할라즈가 쓴《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23]이 1982년에 출간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88년에 유시민이 출간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내용이 일부 편역되었는데 유시민의 책이 인기를 끌면서 해당 내용도 많이 알려지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선 위기철의 논리야 시리즈에 드레퓌스 사건이 등장해 꽤 많은 어린이들에게 알려졌다.

진범이었던 페르디낭 에스테라지의 경우 영국에 망명한 뒤 그대로 눌러앉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끝끝내 그를 잡아다 재판하려 하지도 않았고 진범으로 인정하지도 않은 점[24]을 보면 '이중간첩 아니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친 이후 자신은 상부의 명령으로 독일무관에게 접근한 이중첩자였다는 내용으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떡밥을 던진 것은 '진 도이세'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로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여러 가지로 수집하였다. 도이세가 제기한 근거 중 하나는 에스테라지는 독일에게 포병대의 정보를 누설하였는데 이 정보를 '앙리'라는 장교로부터 제공받았다. 그런데 앙리도 첩보부에서 일하는 장교로 포병대의 핵심정보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앙리가 제공한 정보는 첩보부에서 독일에게 일부러 넘기기 위해 정성들여 작성한 가짜 정보이고 이를 이중첩자였던 에스테라지가 독일에게 진짜인 것처럼 속이고 넘겼다는 것이다.

만일 에스테라지가 이중첩자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심각한데, 그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진상을 알면서도 국익(?)을 위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 정부가 천하의 개쌍놈이라는 말이 되므로 지금의 프랑스 정부는 이를 끝까지 부정할 테니 진실은 저 너머에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드레퓌스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1917년 죽기 직전에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회고록에서 자신은 드레퓌스를 알지 못했다고 기술했다.(독일 위키 참조 #)

미국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더욱 질이 나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역시 무고한 군인 한 명을 죄인으로 몬 사건도 하나 더 있었다.

훗날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매우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 2012년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이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은 오랜 법정 공방 끝에 2015년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 조작 사건도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또한 간첩 조작에 가담한 자들 역시 현재 법정에 넘겨진 상태다.

<킬빌>에서 루시 리우가 맡은 악역인 오렌 이시이의 오른팔인 소피 파탈 역을 맡은 프랑스의 여배우 줄리 드레퓌스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방계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남자 형제 중 한 명이 줄리 드레퓌스의 조상이다.

<프라하의 묘지>에서 작품 후반에 주요하게 다루는 사건 중 하나이다. 문제가 되는 문서는 위조된 것이며 범인은 작품의 주인공인 시모네 시모니니. 다만 문서 위조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일감이랍시고 온 필적견본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의 것이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이중 스파이였던 에스테라지를 기회가 될 경우 좌천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

미국 영화에도 큰 궤적을 남겼는데, 해당 사건을 영화화하여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에밀 졸라의 생애》가 그것. 에밀 졸라의 열변과 논리적인 변호로 드레퓌스 측이 승리할 것 같은 법정 다툼이 패배로 끝날 때의 반전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JFK를 연출할 당시《에밀 졸라의 생애》를 많은 부분 참고했다고 한다.[25]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오랫동안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2018년 개봉 목표로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1. 1898년 2월 14일 피가로지에 실린 카랑 다슈의 삽화.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가족간의 저녁 식사임에도 저 꼴이라는 풍자이다. 덤으로 '이야기 거리로 올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둘로 갈라져 싸울 정도로 극심한 논란 거리였음을 보여준다.
  2. 웃기게도 이 시기에 불어 역사상 특이한 언어 운동도 일어났는데 '구개수 전동음'으로 발음되던 r을, 라틴어처럼 '치경 전동음'으로 발음하자는 복고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적대국인 프로이센/독일을 위시한) 주변국에서 유럽의 중심이라면서 정작 대부분 유럽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동음을 구사할 수 없다고 깐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패전한 뒤에 얼마 안 있어 1888년 국제음성기호가 막 발표되던 참이라 음성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태동되고 있던 시기였다.
  3. 프랑스는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서유럽 내에서 단일국가로는 언제나 육군 최강국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시절에는 한때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나폴레옹 3세 시절에는 최소한 표면으로라도 해외진출 및 경제발전, 국위선양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불전쟁의 패배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믿었다.
  4. 한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참고한 책의 저자도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한 단어에서 우연히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 0.2이고, 따라서 4개 단어에서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0.2〗^4=0.0016라고 증언하였는데 군사재판이 그 증언을 수용한 것이다. 1896년 진범이 잡혔으나 비밀리에 방면되었고 1899년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에서 군사재판은 원심을 확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확률은 단순히 4개 단어가 우연히 모두 일치할 확률이 아니라 "13개 단어 중에서" 4개 이상의 단어가 우연하게 일치할 확률인 0.253이다. 파일:Attachment/2013-07-18 AM 10-54-41 식 1.jpg 이라는 과정을 통해 계산이 가능하다.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가정과 상관없이 우연히 필적이 일치할 확률은 25.3%나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드레퓌스는 정당한 증거에 의해 죄가 정립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허명회,『법과 통계학』, 한나래, 2011
  5. 영화 <빠삐용>의 그 곳이다. 중간에 '드레퓌스 대위의 자리'라는 대사가 나온다.
  6. 당시 프랑스 육군의 단추에는 소속 연대 등을 나타내는 숫자나 문양이 들어갔다. 단추를 뗀다는 것은 더 이상 그를 연대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7.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대위가 다닌 군사전술학교의 교관 출신으로 드레퓌스도 피카르에게 교육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8. 간첩 잡는 게 임무인 장교가 간첩질을 했다는 얘기. 소련의 간첩 로버트 핸슨이나 올드리지 에임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원래 방첩 책임자가 간첩이 되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9. 재미있는 건 르 피가로는 오늘날에는 우파 신문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는 데 좌우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10. 당시 에밀 졸라는 공개편지를 들고 주요 대형신문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거절 당했고 군소신문인 로로르에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다. 모든 언론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군부와 보수세력에 완전 쫄아 있었던 것. 완전 듣보잡이었던 로로르는 에밀 졸라의 편지가 실린 날, 3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11. 하나 재미 있는 사실은 그 공개편지의 제목에 관한 것이다. 본디 에밀 졸라가 쓴 공개편지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아주 온건한 것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고발한다!'라는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바꾼 건 로로르의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클레망소는 이 글이 불러올 어마어마한 파장을 각오하고 좀 더 호소력을 더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고 하겠다. 이로써 명성을 얻은 클레망소는 나중에 프랑스의 총리를 지냈다.
  12. 조르주 벵자맹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1841~1929. 뒷날 총리 겸 육군장관을 맡아 제1차 세계대전을 지휘했다.
  13. 본 항목 맨 위의 신문만평이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14. 에밀 졸라가 영면 중인 팡테옹의 정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 (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다) 그의 예언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15. 유감스럽게도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복권을 보지 못한 채 수면 중 난로에서 불완전 연소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한편 피카르 중령은 이후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16. 같은 이름의 교회가 유럽 전역에 많으니 주의할 것. 즉 영국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에도 이런 이름의 교회가 많이 있다.
  17. 아트 슈피겔만 만화인 <>를 보면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어느 노인이 '나는 유대인이 아니란 말이오! 나는 오래 전 독일 황제에게 훈장도 받은 몸이란 말이오!'라며 하소연하는 게 나오는데, 실제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했는데도 나치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유대계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아우슈비츠에는 독일인(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다!!)도 있었다. 따라서 위에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하던 사람이 실제로 독일인일 수도 있다.
  18. 다만 어째서인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는 꼭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애초에 테오도르 헤르츨이 오스트리아에서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다가 프랑스로 건너갔기 때문. 문제는 얼마안가 더 충격적인걸 목격하는 바람에...
  19.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중세부터 내려온 유대인거주 구역에 모여서 랍비를 중심으로한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다. 교육, 육아, 결혼, 취미생활 등 모든 것을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 해결할려고 노력했다.
  20. 이때 많은 유대계들은 개종 이후에 유대계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 자신이 유대계라는 것을 알고 충격으로 까무러친 사람들도 많았다.
  21. 예를 들어 나치의 유태인 박해의 희생자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 가족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잘 들어난다. 프랑크의 아버지는 1차대전 시기 독일제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무공훈장까지 받았고, 전후 은행가로 성공하면서 독일내에서 기독교를 믿는 주류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상류층 생활을 하였다. 유대교를 믿긴 하지만, 딱히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이디시어히브리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했다. 자식들에게 유대교 관습이나 이디시어를 교육하는데 그렇게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참고로 프랑크의 일기도 독일어로 쓰여져있다.)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유대계 독일인 정도로 인식하면서 살다가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네덜란드로 이민을 간것이다.
  22. 이 와중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지고 여기저기에 사기행각을 벌려서 문제를 더 꼬아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역사#s-5 항목 참조
  23. 1998년에《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에밀 졸라》란 제목으로 재출간
  24. 가령 조금만 건들면 불어버릴 테니 프랑스 정부는 필사적으로 보호해야만 했다.
  25. 클레이 쇼를 법정에 세우고, 다양한 증거와 논리로 그가 케네디 암살범임을 증명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된다. 당시 관객들이 매우 당황했다고. 물론 음모론일 뿐, 실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