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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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봉상왕(烽上王) / 치갈왕(雉葛王) | |
성 | 고(高) | |
휘 | 상부[1](相夫) / 삽시루(歃矢婁) | |
생몰년도 | 음력 | 264년? ~ 300년 9월 |
재위기간 | 음력 | 292년 3월 ~ 300년 9월 (8년 6개월) |
고구려판 연산군
고구려의 제14대 왕. 폭군스타일의 왕이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1 외모
강호동 같은 외모를 가진 왕도 일반적으로는 '체구가 호방하고 큰 기상이 있다'고 기록하는 식의 미화가 비일비재한 왕의 성품에 대한 평가에서도,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고 평하고 있는 걸로 보아 확실히 폭군의 성품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내정
초기에는 국상 창조리를 중용하고[2] 명장 고노자를 등용하여[3] 연(燕)의 모용외의 침략을 막아냈다. 293년의 1차 침공에서 연의 모용외는 수도로 바로 진격하는 작전을 감행했고, 이에 당황하여 신성(新城)으로 대피하던 봉상왕을 곡림에서 따라잡았으나 마침 신성태수로 부임해있던 고노자의 500 기병대에 쫓겨났고, 296년의 2차침공에서는 서천왕의 능이 있는 고국원까지 도달하여 시체를 파해치려고 했으나 작업에 투입된 인부가 끊임없이 병사하고 무덤에서 풍악이 울린다며 도망쳤다. 이는 고구려군의 반격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많다. 애초에 연은 중요 방어선을 뚫지 않고 평양이나 고국원으로 그대로 달려가는 전략을 사용했기에, 수도 근교까지 적이 들이닥쳤지만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 이전의 동천왕이나 뒷날의 고국원왕의 경우를 생각하면 분명 선방했다는 것이 뚜렷해진다.
그런 한편 내부적으로는 반역음모를 경계해서 친족들을 항상 의심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형제상속제에서 부자상속제로 전환되던 시기인지라 할아버지인 중천왕, 아버지인 서천왕이 모두 자기 동생들의 반란을 겪었다. 더 앞으로 나가면 고조할아버지인 신대왕의 아들들 즉 두 고발기가 자기 동생들 즉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즉위에 반발한 사례도 있다. 결국 292년에는 숙신을 격파하여 국민적 영웅이 된 숙부 달가, 그리고 후에 동생 돌고도 죽였다.[4] 이러한 왕가 내부의 혼란한 틈을 타서 연의 침공을 불렀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라가 흉년을 겪고 있음에도 궁실을 대규모로 중축하기도 했다.[5]
결국 보다못한 창조리가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욕만 실컷 얻어먹고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 정변을 일으켜 폐위된 뒤 유폐되었고, 그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자살해버렸다. 다만 클레오파트라 등 다른 여러 경우처럼 자살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에, 일각에서는 창조리 일파가 그들을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도 어디까지나 심증일뿐, 물증에 해당할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처음 묘사가 그렇듯 미천왕의 즉위를 위해 왜곡되어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록에는 확실한 폭군이다. 폭정에 논란이 있는 모본왕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다.[6] 게다가 국방에 신경을 쓴다고 썼으면서도 결국 재위도중 외침에 시달리는 등 치적이 영 엉망이다.[7] 딱히 정략적 사안때문이 아닌, 충혜왕과 연산군의 예처럼 신하들이 그 폭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쫓아냈다고 봐야 맞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 봉상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안국군 달가를 죽이다
一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二年秋九月 아우 돌고를 자결하게 하다
三年秋九月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다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七年秋九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七年冬十月 궁실을 증축하다
七年冬十一月 을불을 찾아서 죽이려 하다
八年秋九月 귀신이 봉산에서 울다
八年冬十二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다
九年秋八月 봉상왕이 죽다
九年秋八月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오게 하다
4 기타
세간에는 자살한 왕으로 알려졌는데, 부여의 왕 의려와 신라의 희강왕, 경애왕[8]도 죽은 방식은 자결이었다. 다만 자살하지 않았어도 목숨을 보장받았으리라 보기 힘든 이 셋과는 달리 봉상왕은 어쨌든 자살하는 시점까지 목숨은 보장받는 상태였다. 애초에 자살이란 소재를 가지고 무리하게 얽은 감도 있다.
외치에는 능했으나 궁궐 중축 등을 벌여 내치에는 소홀했고, 친족에 대한 의심이 많아 숙청을 자행했으나 결국 의심하던 그 친족에게 쫓겨났다는 점에서 조선의 광해군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결하지 않았고, 인조가 미천왕만큼 유능하지 않았다는 게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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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아버지인 서천왕의 후궁, 소태후가 봉상왕을 공격하고자 옛날 애인인 봉상왕의 숙부 달가를 찾아가 봉상왕이 자신을 고문하며 괴롭히고 있다고 사기를 치며 봉상왕을 공격하자고 충동질한다. 그런데 봉상왕 또한 숙부 달가의 명성을 질투하고 있어서, 달가를 제거 하기 위해 달가가 소태후와 놀아나거나 소태후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음모를 꾸며서 몰아 달가를 사형시키고 소태후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 ↑ 이것으로 검색 시, 여기로 넘어온다.
- ↑ 초기엔 상루가 국상이었으나 사망했다.
- ↑ 창조리의 건의로 신성 태수로 삼았다.
- ↑ 훗날 돌고의 아들 미천왕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해준다.
- ↑ 창조리랑 신하들이 제발 백성을 구제하라고 간언을 하는데도 무시하고 향락에 빠져사니 암군이라고 까여도 마땅하다.
- ↑ 모본왕때에는 뚜렷한 내침은 없었고 되려 한나라를 공격하고도 한나라(후한)가 화평을 제의할 정도였는데 이때 한나라가 아무리 나라를 갓 안정시켰다지만 한나라는 통일 제국이며 연은 이 당시 지방군벌 정도의 세력이었다. 또한 처음부터 대놓고 막장짓 벌인 봉상왕과는 달리 모본왕은 백성들을 진휼하는 등 괜찮은 면모도 있었다.
- ↑ 그나마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은게 효과가 컸다. 다시는 모용외가 얼씬도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 ↑ 경애왕은 견훤의 협박 때문이니 자기 의지로 목숨을 끊었다기엔 좀 그렇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