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전투

(성채 작전에서 넘어옴)

영어 : Battle of Kursk, Operation Citadel
러시아어 : Курская битва
독일어 : Unternehmen Zitadelle(성채 작전), Die Schlacht bei Kursk(Schlacht am Kursker Bogen)
마케도니아어 : Курската битка
벨라루스어 : Курская бітва
불가리아어 : Битка при Курск
세르비아어 : Битка код Курска
우크라이나어 : Битва на Курській дузі
타타르어 : Курск сугышы
우즈베크어 : Kursk jangi
카자흐어 : Курск шайқасы
핀란드어 : Kurskin taistelu

쿠르스크 전투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일부

진격하는 독일군의 전차들
날짜
1943년 7월 5일 ~ 1943년 8월 23일[1]
장소
소련, 쿠르스크
교전국소련군
소비에트 연방
추축군
나치 독일
지휘관 게오르기 주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니콜라이 바투틴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귄터 폰 클루게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베르너 켐프
파울 하우서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동부 전선의 주도권이 소련군에게 넘어옴.
병력[2]성채 작전
- 1,910,361명
- 전차 5,128대
- 포 25,013문
소련군 반격기간
- 약 250만 명
- 전차 7,360대
- 포 47,416문
- 항공기 약 3000기
성채 작전
- 780,900명
- 전차 2,928대
- 포 9,966문
소련군 반격기간
- 940,900 명
- 전차 3,253대
- 포 9,467문
- 항공기 2,110기
피해규모약 970,000명
전차 약 7,000대
항공기 약 1,600기
약 250,000명
전차 약 1,000대
항공기 약 800기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투

이제 우리 독일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 독일 제6보병사단장 호르스트 그로스만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독일군 간의 전투. 점차 소련군의 우세로 흘러가던 동부전선의 전세를 완전히 확인시킨 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동부전선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졌던 전투이기도 하다.[3] 또한 1달도 되지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전투였다.

당시 소련측 영상

2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

1942년 겨울, 러시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남부 러시아의 중심지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에는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된다.

3 성채 작전

파일:Attachment/Kursk.jpg

한편 이 무렵 독일군은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이제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선 에르빈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집단군은 연합군의 공격에 섬멸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영토 어딘가에 연합군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한 본격적인 양면 전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러한 상황은 독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가능한 많이 소련군의 전략 예비군을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며 독소전의 주도권을 되찾는 골자의 성채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배한 지금 연합군이 유럽 어딘가에 제2전선을 형성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따라서 동부전선을 안정시켜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이 무렵 많은 독일 장성들은 이미 소련군이 더 이상 쉽게 볼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장군이 선공에 나서는 것보다는 소련군의 공격을 일단 방어한 뒤에 공세를 추진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주장했고, 기갑총감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도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성채 작전 자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선제 공세를 고수하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총통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이 맡았다.

이에 만슈타인은 공세를 취한다면 하르코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지금이 적절한 시점이며,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공격을 연기했다.[4] 그러나 그는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다시 작전을 연기시킨다.

한편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히틀러가 주관한 작전 회의에서는 성채 작전에 적극 찬성했다고 하지만, 항공 정찰로 쿠르스크 방면의 두터운 소련군 방어 진지와 오렐 돌출부 주위에 100만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한 발터 모델은 성채 작전에 회의적이었고, 클루게 또한 이에 동의하여 모델이 제안한 오렐 돌출부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허락한다(이는 히틀러가 명시적으로 금지시킨 사항이었다). 특히 모델은 '치타델(성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오렐 방면에 위치한 소련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치타델 작전을 아예 완전히 포기하여 오렐에 집중된 중부집단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이 되어 치타델 작전을 포기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9군을 완전히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5]

그리하여 독일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50개 사단으로 편성된 병력 90만, 전차 및 자주포 2,700대[6], 비행기 2,000대, 대포 10,000문 이상 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히틀러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됐다.

4 소련군의 방어

4.1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소련군은 첩보전으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목표가 쿠르스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았다는 것은 사실상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또한 쿠르스크 일대에는 민간인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가 구축됐고,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으며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가 매설됐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그리고 말뚝 탱크 덫도 구축되었다. 포병의 우세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야포가 약 13,000문, 920대의 카츄사 로켓발사기를 배치하여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어 진지의 구축을 완료했다.진정한 우주방어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4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을 배치하는 등 막강한 전력이 집결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화포 19,000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7],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이런 엄청난 병력이 겨우 40%라니![8]

4.2 정보전의 승리

독일군이 일대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거였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말 한마디에 쳐내버릴수 있는 최강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이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첩보전에 있어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잠깐의 혼란함이 지나가고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성채 작전이 또다시 연기되자, 슬슬 소련군 내부에서도 사기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우려했듯이 점차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지만, 다행히 42년도의 그와는 다르게 끈기를 보이며 방어전의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이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번째 사나이'가 활약하게 된다.[9]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포섭한 5명의 대학생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애초에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을 가해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기습적인 포격에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이상 포격이 없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대치 기간은 끝나고 쿠르스크의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5 독일군의 공세

5.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사격을 등에 업고 독일 9군이 소련 13군의 정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43년의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Ju 87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됐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개별 기체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량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세는 소련 공군의 수적 우세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만큼 소련 공군의 기량 또한 성장해있었고 예전처럼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정면을 향해 돌격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 호와 강철 피아노 선, 지뢰와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전투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23군단과 47기갑군단이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는 사이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우익과 좌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해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신속한 소련군의 증원에 저지당하며 진격이 멈췄지만,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과 132보병사단을 격파하며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46기갑군단의 맹공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며 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사상자를 낳고 결국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5.2 쿠르스크 북부 전선 - 포니리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저지당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거의 300여 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모델 원수는 7월7일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400여 대의 전차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요충지였기에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 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방어에 저지당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계속돼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강철 같은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소련군의 병력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3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7월 8일 저녁, 모델 대장은 야전 작전 회의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군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강철 같았고, 믿었던 공군마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모델 대장은 지쳐가는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중부집단군에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더 이상의 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하지만 폰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개 사단을 보충하여 7월 11일 밤에 올호바트카를 점령하기 위해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 70군을 향해 11일 밤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공세를 가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 9군은 완벽히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또한 중구축전차 페르디난트도 2개 대대 90대가 투입되었고 원거리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으나 야지기동시 엔진 과부하 및 지뢰로 절반가량이 손실된것은 덤.

5.3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도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7월 5일 일제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남부 전선의 초기 공세는 북부 전선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공세의 주공으로 판단, 남부 전선에 비해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16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장비해 북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에 비해 월등한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은 4기갑군 예하 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10]과 제3, 제11기갑사단 및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200대나 장비한 10기갑여단을 예하에 두고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48기갑군단이 무장SS 2기갑군단과 함께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함과 동시에,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48기갑군단의 공세는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판터 200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조치로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장비한 막강한 타격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GD사단의 이러한 기갑 전력은 무장SS 2기갑군단의 전체 기갑 전력과 맞먹는 것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이 GD사단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이 측면을 엄호하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강력한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의 폭격에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 전차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고장이 속출하면서 전체 판터의 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또한 GD사단의 대규모 전차를 통제하기위한 10기갑여단의 임무도 GD전차연대장의 비협조, 판터의 기계고장에 따른 불신이 겹쳐 유명무실화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측면의 3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성공적으로 진격했고, 이에 힘입어 48기갑군단은 적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각 부대들이 입은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이었던 48기갑군단의 이렇게 꺾여가면서 쿠르스크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초반부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5.4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무장SS 제2기갑군단의 약진

한편 무장SS 2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에 비해 한결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무장SS 2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6근위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방어선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7월 7일에는 이틀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SS 2기갑군단은 점점 힘에 부쳤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전선에 뚫고 나아가, 해골 사단이 선두로 하는 독일군과 쿠르스크 사이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 강을 뚫고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파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인 쿠르스크쪽으로 진격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5.5 쿠르스크 남부 전선 - 프로호로프카 대(大)전차전

파일:Attachment/kursk 148.jpg

마침내 두 군대가 격돌했을 때,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한 양 측의 병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구릉지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킨 전차전은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시간에 걸친 맹렬한 전투 끝에 두 부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소련은 300여대의 전차를 남겨둔 채 퇴각했고, 독일 역시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이 손실을 신속하게 보강한 반면, 독일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망했어요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프로호로프카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직사 거리[11]안에 있었어요. 만약 한 전차가 당신을 놓친다고 해도, 바로 다음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략 700대 가량의 전차가 있었어요. 적들도 비슷했죠. 그러니까 거기에 총 1500대의 전차가 있었다는 거에요. 상상이 됩니까? 1500대라구요. 우리는 24시간 동안 싸웠지만 고작 5~7km를 전진했어요. 전차들은 서로 밀어내고 밀렸죠. (중략) 그건 전술이나 뭐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야만적인 살육이었죠.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악취와 연기는 끔찍했습니다. 연기로 둘러싸여 마치 저녁처럼 어두컴컴했습니다. 전차나 다른 차량들은 불타고 있었고, 덕분에 서로간의 소통은 전혀 되지 않았죠. 무선통신도 먹통이었습니다.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이 때의 대전차전은 대(對)전차전이 아닌 대(大)전차전이다.

결국 호트는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프로호로프카로 돌렸다.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공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1 SS기갑사단 LSSAH, 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들을 앞세운 독일기갑부대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500[12]대가 넘는 중전차를 굴리며 진격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 생일축하 겸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프로호르프카를 지키라고 하였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소련 5근위전차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Ju87 급강하 폭격기와 맞닥트리며 밤낮으로 행군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기차로 이동을 해야 정상인데 전차가 직접 주행한 탓에 승무원이나 기계에 많은 무리를 줬으나 사기는 왕성했다.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가 판터와 티거에게 화력에서는 제압당하지만 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150~300대 가량[13]의 독일군 전차와 63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대치했다. 이는 독소전쟁 최대의 전차전이었으며 단일 전투로서는 역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었다. 이는 향후 성채작전의 결과, 그리고 더 나아가 독일의 동부전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전투였다.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SS기갑군의 머리 위로 쉬지 않고 폭탄과 로켓을 투하하였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내리고, 곧이어 독일 쪽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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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가 뒤엉켰다. 소련군 전차들은 독일군 기갑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들이받으면서[14] 포화를 퍼부었으며[15],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불능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고 마지막까지 포화를 쏟아부었다. 양측은 전투불능이 되면 밖으로 나와 상대편의 전차에 유탄을 던지는 등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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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일전투에서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은 소련군 전차였다. 독일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소련군은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전진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바투틴과 바실레프스키의 재빠른 방어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근위 전차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 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다.[16]

사실상 이 전투만으로 따져 봤을때는 독일 기갑군의 승리로 봐도 좋을것이었지만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더 이상 전진을 계속할 수 없었고,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목표는 실패했다. 덕분에 전과만으로 본다면 독일군이 소련군을 압도했지만, 작전 전체로 봐서는 독일군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이와 같은 규모의 전차전은 이전까지도 그 이후로도 없었다[17][18]라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 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프로호로프카 전투가 부풀려진 전투라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래 내용은 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19] .에서 인용.

  • 우선 프로호로프카 전투보다 더 규모가 컸던 기갑전이 없지 않다.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전차전은 1940년 5월 14일 벌여진 벨기에 장블루 전투로 독일군 600여대의 기갑차량과 프랑스군 520여대가 격돌한 전차전이었다.
  • 당시 전투에 투입된 LSSAH 사단의 전차와 돌격포는 총 109여대 정도였다. 그중 티거는 4대밖에 없었고 대다수가 4호전차와 3호돌격포,마르더였다. 정찰용으로 사용하는 1,2호전차와 4호전차의 보조 전력으로 운용하는 3호전차 11대가 사단의 모든 기갑장비였다. 소련의 경우 총 421량.

또한, 소련군이 전차를 직접 티거에 들이받는 식으로 티거를 격파했다고 나와 있었으나 LSSAH 사단의 티거는 달랑 4대가 전부였는데다가 전투 중 대전차지뢰에 의한 손실이 있었을뿐 적 전차에 의해 격파된 경우는 보고되지 않았다. 고 책은 기술한다.

특히 티거 숫자에 관해서는 2010년대 들어 독일 측 사료가 많이 풀리기 전에 러시아의 기록에 많이 근거하여 나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비록 쿠르스크 전투가 전략적으로는 소련의 승리이긴 하나, 소련군이 입은 손실이 독일군에 비해 막대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 학자들은 소련이 피해를 어느정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록에 의도적으로 티거의 숫자를 부풀렸다던가, 아니면 그때 당시에도 번번히 있었던 전차병들의 전과 부풀리기를 위해 4호 전차를 티거로 보고한 것이 프로호로프카의 부풀려진 기록에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LSSAH 사단의 손실은 전차 완전격파는 7대,파손 차량은 25대였고 티거는 1대였다. 반면에 소련은 134대가 격파되었고 125량은 손실로 전투에서 탈락했다. 전체 손실 비율은 32:259로 이 전투만 본다면 소련군의 패배였으나 독일군 역시 일단 공세를 접을 수 밖에 없었고 목표달성에 실패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부분은 지금도 논란이 되는 부분으로 딱 무엇이 사실이다! 라고 할 수는 없다 위키러들이 직접 자료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판단해보길 바란다.

5.6 독일군 공세 종료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설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만슈타인 주장대로 공세를 지속했으면 역시나 발리는 쪽은 독일군이였다.왜냐면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48 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데로 쌓여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 밖에 없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끝났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단축하여 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 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6 소련군의 반격과 전투 종료

6.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쿠투조프 작전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는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트릴 계획으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처음에 3개군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진이 힘들었지만, 추가로 3개군을 더 투입하여 독일군의 한쪽이 뚫리면서 소련군은 물밀듯이 쳐들어가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군은 얌전하게 후퇴하지 않았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클루게와 모델은 쿠르스크 방면의 공세를 준비하면서도 오렐 전투를 예상하여 방어에 용이한 예비 전투 지구를 확보해 두었고, 9군 사령관 모델이 제2기갑군의 사령관을 겸임하며 지휘 체계를 통일시켰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퇴각했음에도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의 전력을 보존하여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6.2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루미안체프 작전

쿠르스크 남쪽에서의 반격은 한참 후인 8월 3일에 주코프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목표는 하르코프의 탈환이었다. 이 공격은 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초원(스텝) 예비 전선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의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리를 잠시 비운 직후인,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과 스텝 예비 전선군, 그리고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을 동원해 반격 작전을 개시하자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어 소련군이 결국 8월 5일에 벨고로드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중부집단군으로 부터 차출된 증원부대와 루미안체프 작전 저지를 위해 파견된 기갑부대 일부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독일군은 일시적으로 소련군을 저지하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르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 지키고 싶어 했지만 8월 7일에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의 좌익은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르코프에 돌입하여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 시도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7 결과

전쟁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소련으로 완전히 넘어가다

비록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아서 인명피해가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는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20] 승리는 소련의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전쟁사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 역시 후에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은 인정했다.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는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추축국을 도왔던 중립국 스웨덴)와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던 나치독일이 소련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이나 공업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치독일은 이런 공업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에 이는 독일이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역시 물량도 능력이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이후 반격부터 해서 드네프르강을 완전히 뚫어버리기까지 200만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얻었지만 1941년 독소전 직전 인구 2500만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해서,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실을 어느정도 보충할 수 있을것이었다.

이렇게 군사적인면 본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가 맞기는 하다. 지형적으로 봐도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으로 제대로 막혀있고 중부에도 아펜니노 산맥 + 많은 강들로 지연전을 펼칠수 있기때문에 어차피 뚫릴 이탈리아 남부로, 동부전선의 정예기갑 병력을 뺸것은 아무리 봐도 전략적 미스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드네프르강이 뚫리고 서부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이 확보하면 거기서 또 보충할 수 있는 규모도 상당할것이며 이는 독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내용만을 살핀 결론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1943년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추축국의 대열을 광탈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180도 전환하여 연합국 편을 들어 독일군의 이탈리아 반도 추출을 거들었으므로, 이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게 아니었다. 이때문에 히틀러는 급히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체포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어 이탈리아 북부를 맡겼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연합국의 공세를 잘 막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과 연합국이 대치상태로 있다가 독일이 멸망해서 별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곤 하지만, 만약 이탈리아가 통채로 연합국으로 넘어갔다면 멀리 있어서 도움 안되는 일본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추축국중이 가장 먼저 항복했다는 점에서 독일 국민이나 다른 2류 추축국(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등등..)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충격은 상당했다. 즉, 이탈리아의 군사적 가치는 동부전선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추축국의 안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안정화를 위해 작전을 취소한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건 근시안적인 견해다.

8 트리비아

독일에선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훈련에 터키군 수뇌부를 초청, 참관케 하고 히틀러와 접견하게 하는 등 터키에 호의를 보이려 애썼다. 당시 친독 성향의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터키 옆동네가 독일이 소련군의 연료를 책임지고 있다 생각한 캅카스(...) 독소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터키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1차대전에서 터키와 독일은 같은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는 연합국에 있었다.

그러나 터키는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공중분해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패전의 대가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으니까. [21]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패배로 귀결되었고 터키는 전쟁 막판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1945년 2월 23일에서야 줄서기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진영에 선전포고했다.[22]

이 전투에는 한 여성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올가 체코바. 그녀는 독일에서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히틀러의 환심을 샀는데, 이렇게 해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 물론 그녀가 얼마나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소련 정보부에 그녀가 감사를 표한 서신이 남은 걸로 보면 그녀가 첩자였던 건 분명한 듯.[23]
  1. 7월 5일부터 7월 15~16일까지는 독일군의 공세, 7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
  2.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양 측 병력이 기록에 따라 다 다릅니다. 작성 시점에서 수치는 Axis Forum 등의 여러 웹사이트들과 다른 문헌들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나, 정확한 수치가 있다면 수정 부탁드립니다.
  3.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전차전은 1940년 5월 14일 벌여진 벨기에 장블루 전투로 독일군 600여대의 기갑차량과 프랑스군 520여대가 격돌한 전차전이었다.
  4. 이 점에서는 히틀러의 주장이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만슈타인의 하르코프 공방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소련군은 아직도 엄청난 예비부대가 남아있었다. 5월의 공세가 성공한다고 한들, 독일군은 이미 두들겨 맞을대로 맞은 상태였고, 기갑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는 어려웠다. 물론 히틀러의 말대로 기갑전력을 보충한다 하더라도 이제 전력에서 완전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5. Kursk: The German View
  6. 전차만 3,000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7. Niklas Zetterling, Kursk 1943 (Frank Cass 2000) 140p에 따르면 8,000대 까지 올라간다. 세상에.
  8. 근데 이 수치가 과장된게 아닌 것이, 이 시기쯤 되면 소련군 전체 병력이 500만을 돌파하던 시점이었다(...)
  9. 이 다섯번째 사나이라는 네이밍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4명의 첩자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되지만, 이 다섯번째는 오랜기간 잡히지 않았다. 영국 정보부는 첩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고, 이것이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다섯번째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게되었다. 후일 관련 영화도 제작된다.
  10. 독일 국방군 내에서도 나치당의 이념에 충실한 병사들로 구성된 정예사단.
  11. point-blank range 별다른 조준과정 필요없이, 대충 쏴도 맞는 거리, 지향사격이 가능한 거리를 말한다.
  12. 소련군 추정, 독일군 기록에는 300여대 정도가 남아있었다고 기록되었다.
  13. 이 날 프로호르프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전차 전력에 대한 주장은 기존에는 600대가 일반적인 설이었지만, 7월 12일 당일 프로호르프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기갑부대의 총 전차 전력은 200대 안팎이며 SS사단들의 5호 판터로 구성된 전차대대는 아직 독일에서 편성 훈련중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정설이다. 기존 600대 설은 소련측의 일방적 주장이었으며, 독일군 전차 전력에 대해서는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이 소속 군단에 사단의 전투 가능한 전차 대수를 보고한 보고서 사료들이 발견된 덕분에 재평가된 것이다. 현재는 당시 독일군의 가용 전차 전력이 200대 내외이며 2SS기갑군단은 4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게다가 2SS기갑군단 전체가 프로호르프카로 진격한 것도 아니었다. 프로호르프카 방면으로 진격한 SS사단은 1 SS기갑사단 LSSAH뿐이었으며, 토텐코프 사단은 프숄 강을 건너 공격 중이었고, 다스 라이히 사단은 LSSAH의 우측방을 엄호하며 로트미스트로프 예하 5근위전차군이 아닌 자도프 장군의 5근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14. 제대로 박으면 들이받은 쪽과 받힌 쪽 둘다 엄청난 타격을 입으나, 알다시피 소련군 전차는 훨씬 빨리 재보급이 가능해서...
  15. 보통 때라면 독일 전차가 여유롭게 튕겨낼 수 있었으나, 거리가 가까워졌으니 이제는 맞으면 쉽사리 관통당했다
  16. 훗날 바실레프스키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으며, 한 종군 기자에 따르면 그 지역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주가 지날 동안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17. 걸프전 중 최대 전차전은 미 제1기갑사단 휘하 2연대와 이라크 메디나 사단이 벌인 <메디나 리지 전투>인데, 미 제 1기갑사단이 보유한 전체 전차는 348량이지만 이들 전부가 가담한게 아니다. 이라크 측도 메디나 사단 휘하의 연대급 부대들이 참가했으며 참가 규모는 미 육군보다 크긴 했고 현대전치고는 유래없는 대규모 전차전이긴 했으나 역시 쿠르스크, 특히 프로호로프카와 비교할 규모는 아니었다. 프로호로프카에서 손실된 전차만 세도 메디나 리지 전투에 참가한 양측의 상급부대인 두 사단의 총 보유 전차 합에 달한다. 앞으로도 이처럼 대규모의 전차를 보유하기도 쉽지 않고 이를 집중적으로 한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더욱 힘들테니 프로호로프카 규모의 전차전은 다시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18. 사실 단 두개의 국가만으로 이런 미친 규모의 전차전을 벌일만한 조건이 형성된 지역이 있는데.... 바로 한반도서부전선이다. 단순 물량으로 보면 북한 조선인민군 육군은 전차를 약 4100량을 보유하고 있고, 그에 대적하는 대한민국대한민국 육군은 3세대 이상급의 전차만 1600량이상 보유, 2세대급 전차를 포함해선 2400량이상 보유하고 있다. 물론 북한군은 전차 성능의 명백한 열세를 알고 있어 대규모 전차전을 피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높으나, 서부전선에서 밀려 개성을 빼앗기고 연백평야를 잃으면 평양직할시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열려버리기에 조선인민군의 입장에선 전차전을 피할 수 없다. 반대로 한국 역시 휴전선에서 서울이 매우 가까운 특성상 서부전선에 전차 밀도를 높게 유지할 수밖에 없다.
  19. Valeriy N. Zamulin 저자의 책 책 내용이 '전반적으로 소련의 전투기록들이 부풀려진 전투기록들'이라고 주장한다.
  20. 독일군의 작전 쿠르스크를 방어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수는 600여대에서 50대로 줄어 간신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21. 그나마 남은 영토도 케말 파샤로 대표되는 터키인들의 강력한 저항끝에 영국과 프랑스가 포기하고 끝까지 물고늘어졌던 그리스도 나가떨어지면서 겨우 지켜낸 것이다.1차대전 당시 같은 아군이던 불가리아나 독일이 많은 영토를 잃은 거랑 달리 그래도 상당수 영토(그리스가 그리도 노리던 아나톨리아 지역까지)라도 지킨 셈.
  22. 또다른 터키 전쟁학자의 의견도 있는데, 이미 독소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터키는 독일의 패배를 직감하고 독일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이게 가능성이 있는 게 터키 건국자인 아타튀르크는 1930년대, 살아 생전에 히틀러를 미쳤다고 봤으며 2차대전을 예측하고 미국이 강력하게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파악까지 했으며 2인자인 이뇌뉘(2차대전 당시 터키 수상)에게 히틀러를 편들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23. 이 때는 스타브카가 독일 야전제대들 보다 먼저 작전 명령서를 받을 정도로 소련의 정보력이 쩔었고 심지어 독일군 내에 친공 성향 장성이 20여 명에 달했다는 소리 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 개인이 결정적 제보를 했다고 보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