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Sanctus Pius PP. X
이탈리아어: Papa San Pio X
스페인어: Papa Pío X
영어: Saint Pope Pius X
독일어: Papst Pius X.
프랑스어: Pape Pie X
교황명 | 비오 10세 (Pius X) |
세속명 |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Giuseppe Melchiorre Sarto) |
출생지 | 이탈리아 리에세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생몰년도 | 1835년 6월 2일 ~ 1914년 8월 20일 (79세) |
재위기간 | 1903년 8월 4일 ~ 1914년 8월 20일 (11년 16일) |
시복 | 1951년 6월 3일, 비오 12세 |
시성 |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 |
축일 | 8월 21일 |
역대 교황 | |||||
256대 레오 13세 | ← | 257대 비오 10세 | → | 258대 베네딕토 15세 |
비오 10세의 문장 |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57대 교황이자 성인. 축일은 8월 21일.
1 즉위 전
1835년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검소하게 살았고 심지어는 신발이 닳아 빠질까봐 맨발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오랫동안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트레비소의 주교가 되었고, 이후엔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재직하였다. 1903년 7월 20일, 교황 레오 13세가 사망하자 새 교황 선출을 위해 7월 26일 베네치아를 떠났다. 신자들이 "곧 다시 돌아오십시오, 추기경님!"이라고 외치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열렬한 군중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로마에 안장되었다)다시 못 올 착한 추기경에게 갈채를 보냈다.
2 교황 선출
실제로 본인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려 하면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농담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을 것임을 당신은 압니다. 이는 깰 수 없는 사건이지요. 나는 9년 동안 톰볼로에서 보좌신부를 지냈고, 그 다음 9년 동안은 살자노에서 주임신부였으며, 다음 9년 동안 트레비소에서는 종교법 고문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9년 동안 만투아의 주교였고, 이제는 다시 9년 동안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지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동료가 "그렇다면 나는 전자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후자를 바랍니다. 교황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또한 그는 교황선거가 끝나면 베네치아로 돌아가려고 표를 미리 끊어 놓았는데 교황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설마 본인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모양. 행운의 기차표???
사실 행운의 기차표 덕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의 윗동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이 있었다. 전임 교황 레오 13세의 온건한 진보 성향, 그리고 반(反) 헝가리 정책[1]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자신의 명의로 크라쿠프 대주교인 푸치나 추기경이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던 것. 레오 13세 재임기 1887년부터 국무장관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1843~1913)이 콘클라베에서 유력 후보자로 떠올랐는데,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추기경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거의 대부분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람폴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거부감을 가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람폴라 추기경은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2] 결국 1903년 8월 4일 실시된 제7차 투표에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사르토, 즉 비오 10세가 선출되었던 것.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비오 10세는 이듬해 개별 국가의 콘클라베 간섭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거 개입권을 폐지했다. 그리고 아쉽게 교황 자리를 놓친 람폴라 추기경에게는 성무회의 의장직이 주어졌다.#
3 재위기간
레오 13세 때에 불었던 가톨릭 교회의 자유주의 바람이 비오 10세 교황 때에 많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오 10세의 치세는 반동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신학자들은 집필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몇몇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비오 10세의 이름을 따서 성 비오 10세회를 세울 때 단체 이름에 비오 10세의 이름을 올린 데에는 이러한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부터 14년까지, 요한 23세가 고향 베르가모 교구장 라디니-타데스키(Giacomo Radini-Tedeschi) 주교 밑에서 비서 신부로 일하던 시절, 주교는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 좌파적인 신념을 지니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비오 10세는 주교에게 벌려놓은 사업을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주교는 비오 10세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내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요한 23세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요한 23세가 근대주의자라고 찍혔던 것도 라디니-타데스키 주교의 영향이 컸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에게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 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다.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해도 보통 1달에 한두 번 정도 영성체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하였다. 또한 비오 10세는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인 7살이 지나고도 한참 후까지 첫 영성체 시기를 미루는 것은 성체를 치유가 아니라 보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또 "존엄한 성체성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관행은 많은 악의 원인이 됐다"며 이런 관습이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영적 양식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도 어렸을 적 비오 10세의 영성체 개혁의 혜택을 입어 만6살인 1911년 말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또한 1910년 프랑스의 잔 다르크를 복녀로 시복했다.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설정했다.
4 예언과 기적
생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켜 이미 살아있는 성인 취급을 받았다. 팔이 마비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의 팔을 잡았는데 팔이 순식간에 고쳐지자, 그 남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성인 교황 성하! 성인 교황 성하!" 하고 외쳤으나 비오 10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조용히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온통 종기로 뒤덮인 한 아일랜드 소녀가 찾아오자, 소녀의 머리에 손을 대자 즉시 나았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는 듯, 임신을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잉태하리라는 것을, 갈라진 부부들에게는 재결합을 그리고 아주 기쁜 다른 사건들도 미리 말해 주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예언은 어쩌면 제1차 세계대전이다. 교황비서였던 메리 델 발 추기경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혹은 여러 해 동안 없을 거라고 말할 때마다, "1914년이 가기 전에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신학생들이 서로 대적하기 위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애긍심과 동정심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5 시성
교황의 시신 |
시성 이전의 지하 무덤 | 시성 이후 현재의 무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