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2세

교황명비오 12세 (Pius XII)
세속명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
(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
출생지이탈리아 로마
사망지이탈리아 카스텔 간돌포
생몰년도1876년 3월 2일 ~ 1958년 10월 9일 (82세)
재위기간1939년 3월 2일 ~ 1958년 10월 9일 (19년 221일)
라틴어Pius PP. XII
이탈리아어Papa Pio XII
스페인어Papa Pío XII
영어Pope Pius XII
독일어Papst Pius XII
프랑스어Pape Pie XII
그리스어Πάπας Πίος ΙΒ΄
역대 교황
259대 비오 11세260대 비오 12세261대 요한 23세


교황 대관식 후 첫 강복을 하는 비오 12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60대 교황. 사목표어는 'Opus Justitiae Pax(평화는 정의가 이룬 작품)'.

비오 12세의 문장

1 주교 및 추기경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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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교황 시절부터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한 뛰어난 인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연간에 각국 군주들과 교황권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이 주요 업적이다. 후술할 신경증 증상도 사실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1] 그도 그럴 것이 이때 비오 12세는 그야말로 산전 수전을 다 겪었는데, 한 예로 뮌헨에서 머물 때는 쿠르트 아이스너의 혁명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들고 주교관으로 쳐들어와 코앞에서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까지 겪었다.[2]

참고로 뮌헨에서 머물 때 아돌프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는데,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다.[3] 그러나 사실은 비오 12세도 히틀러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는 증거가 더 많고, 실제로 1935년 루르드에서 나치에 대한 선언문이 증언해준다. 아래는 그 선언에 대한 일부.

반짝이는 새 장신구로 옛 과오를 덮은 불쌍한 사기꾼들이 있다. 그들이 사회 개혁의 기치 아래 모인 것이어도, 세상과 인생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른 것이어도, 혹은 인종이나 혈통에 관한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힌 것이어도, 모두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치 독일크로아티아와의 회담 때문에 후일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바티칸 시국간의 권력 분배에 대한 확실한 처리가 파첼리의 주요 업적이었다.

2 교황 재위기간

2.1 깐깐한 상사

늘 그렇듯이 부지런하면서 명석한 상급자 때문에 바티칸의 성직자들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몇몇 논자들은 비오 12세를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 겸 가정부 노릇을 한, 비오 12세 재임 내내 여교황 소리까지 들었던 바티칸 정계의 1인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들고 있다. 파스칼리나 수녀와 당시 교황청 국무차관이었던 도미니크 타르디니 추기경과의 배틀은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근위병들을 불러 추기경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자, 근위병도 추기경도 모두 당황하고 어이없어 잠시 멍하니 있었을 정도. 여장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적이 많아서 비오 12세가 선종한 뒤, 배웅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로이 바티칸을 떠나야 했다.[4] 더군다나 후임 교황이, 하필 그녀가 평생 경계했던 인물이었으니 더더욱...

또한 활동 시기가 2차 세계대전 때인지라 그에 따른 일화도 많다.

2.2 정치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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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 본인은 부패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고[5], 정치적 능력도 탁월했기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바티칸 정계는 2차대전 시기를 제외하건 항상 정쟁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다. 친 교황파와 반 교황파의[6] 대립이 거셌는데, 비오 12세는 친 교황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반 교황파를 견제하는 등의 수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가졌던 교황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문제는 비오 12세의 건강이었다. 재임 후반기에 건강이 악화된 비오 12세는, 도저히 교황으로서 종교적 책무와 정치적 책무를 함께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교황 본인은 종교적 책무에만 집중하고 정치적 책무는 대부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넘겼다.[7] 비오 12세가 한껏 강화시킨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파스칼리나 수녀는 이후 수년간 일명 여교황 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바티칸 정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런 상황은 비오 12세가 선종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임자인 요한 23세는 당시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이 보기엔 너무 탈권위적이라 그걸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2.3 나치 협조 의혹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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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대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있고 미국의 연극 '신의 대리인'[8]부터 해서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이라는 전기까지 출판될 정도인데 관련 이야기는 끝없는 논쟁에 휩싸여 있다. 적어도 그가 어느 정도 유대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왜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 침묵하고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다른 의미지만 축복했는지, 또한 나치 전범 도피에 바티칸이 개입했다는 이야기 등은 여러모로 논쟁거리이다.[9][10]

물론 비오 12세는 1937년[11] 나치즘을 비판하는 독일어로 된 회칙을 만든 바 있으며[12], 1939~1941년 사이 3,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 남아메리카로 무사히 이주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약 5,000명 이상 유대인 난민이 이주할수 있도록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사를 마련했으며, 1940년 시카고의 유대인 연맹은 바티칸에 종교나 인종 문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해달라며 12만 5천달러를 기부한바 있다. 이에 나치가 1942년 네덜란드주교들이 '조국에서 압제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자행되고 무자비하고 부당한 대우'를 규탄하는 문서를 발행한 것을 빌미로 성직자와 수도자 등 300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어 처형한 일을 계기로 공연히 성명을 발표하여 나치를 자극하여 박해대상을 구하거나 돕는데 지장을 주지 않으려 했으나, 1942년 성탄 사목교서를 통해 유대인, 집시, 슬라브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의 박해 행위를 간접적으로 규탄하며 전 인류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또한 비오 12세는 바티칸 성직자들에게 유대인 등 난민들을 성당과 수도원에 숨겨주라고 강력히 촉구했으며 바티칸만 해도 477명, 교황의 여름 휴양지인 카스텔간돌프에는 3,000명 이상 숨겨주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비오 12세는 3,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남미로 피신시켰고, 5,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위해 여권, 경비, 비행기표, 외국 정부에 제출할 추천서, 서류들을 마련해주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유대인 생존자들이 자신들이 목숨을 구한 이야기를 전하자 전 세계의 랍비장과 유대인 단체들이 바티칸에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그중 이탈리아 유대인 원조위원회 회장이던 라파엘레 칸토니 박사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600만명의 우리 유대교 신자들이 나치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비오 12세의 효율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도 로마 게토에 있던 유대인 200여명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을 내주기도 했다.

비오 12세에 대하여 비판적인 전기 "히틀러의 교황"을 쓴 존 콘웰의 논지에 따르면, 교황 개인적으로 히틀러나치즘에 대해 혐오한 것도 사실이고 몇몇의 활동은 분명히 나치에 반대한 건 사실이지만, 교황의 권위를 통해서 충분히 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황뿐 아니라 적어도 전쟁 전에 유럽 전반에 퍼진 반유태주의나 반공주의에 파첼리 자신이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고 교황 선출전 외교 활동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는 것. 홀로코스트 관련 문제도 문제지만 유고슬라비아 내 크로아티아계 친독 가톨릭 정권의 부대 우스타샤 관련자들의 만행[13]에 대해서 상당히 미화한 점은 비판받을 일이고 로마 점령 이후 로마의 유태인 지구 소개 작전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은 점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14]

결국 2013년에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재임중에 비오 12세의 나치 협력 의혹을 밝힐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2.4 히틀러에 의한 납치미수 의혹설

전쟁 말엽 히틀러가 그를 납치하려고 한 적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납치뿐만 아니라 아예 바티칸으로 쳐들어가서 바티칸을 불태우고 교황을 성 베드로 광장에 끌어내 총살시키려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치아노의 일기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탈리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말로만 그랬고, 부하들조차도 위험하다고 만류할 정도였다.[15] 만약 히틀러가 진짜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빼도박도 못하고 적그리스도 딱지가 붙었을 것이다.

나치는 바티칸을 포위만 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교황청의 끄나풀이 어디까지 뻗어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하긴 바티칸이 온갖 음모론의 진원지이긴 하다 교황청과 돌이킬 수 없이 척을 지지 말고 적당히 구슬러 이용하는 쪽이 낫기 때문이었다.[16] 헤르만 괴링도 반대론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교황청은 나치가 교황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3국으로 교황청을 옮기려 한 적이 했다. 하지만 비오 12세가 자신은 로마 주교이므로[17] 로마에서 죽겠다며 바티칸에 남기를 고집하자, 추기경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바티칸에 남았다. 나치 기갑 사단이 교황청을 포위하자 교황은 근위병들과 나치군 사이 교전이 일어나면 근위병들이 전멸하리라 예상, 아예 총기류 해제를 명령한다. 그래서 포위 당시 근위병들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나치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을 들고 순찰을 돌고 경계를 섰다(…).바바 예투예투 울리예...[18]

2016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가 슈츠슈타펠이 비오 12세를 납치하려 했다고 보도했는데,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던 다른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이번 기사에서는 비오 12세가 이 위협으로부터 피하는 과정을 새롭게 [보도했다].


2.5 건강 문제

비오 12세와 애완용 새

힘든 시기를 살았던 교황으로, 그 자신도 말년에는 꽤 심한 신경병 증세를 보였다. 가령 파리를 보면 잡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이었다.[19]또 치아가 좋지 않아 자기가 신뢰하는 치과의사가 특별히 처방한 치약[20]으로 이를 섬세하게 닦았는데, 이 의사가 돌팔이라(…) 해당 치약이 치아에 좋지 않을 뿐더러, 신경병 증세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건강이 썩 좋지 않았는데다가 의사운이 지독하게도 없었다(...). 위의 치과의사 에피소드도 그러려니와 주치의도 실력이 썩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오죽하면 교황 성하의 주치의는 성하의 애완용 새도 고칠 능력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원래 의사수의사의 영역은 다르지 말입니다 게다가 이 주치의는 인성도 좀 막장이었는데 비오 12세가 임종하기 직전 혼란스런 와중에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를 따라다니며 파파라치 짓을 하다가 걸려서(...) 이탈리아 의료계에서 생매장당했다.[21]

2.6 동아시아 관련 행보

1939년 제일성성훈령(第一聖省訓令)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전통적 문화인 조상 제사신사 참배가 그리스도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22]

18~19세기에 이루어진 조선 조정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에는 국내의 정치적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탄압이 민중의 호응을 얻거나 적어도 큰 반감을 자아내지 않게 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관혼상제, 특히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가톨릭 교리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동양의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그런 충돌의 문을 연 셈이었다. 그러나 1939년 비오 12세가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를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충돌은 끝나게 되었다.

비오 12세는 동아시아 문화의 존중 차원에서 이를 허용하는 교시를 내렸지만, 이에 대한 일본 제국의 다음 대답은 성당 폐쇄 및 징발과 성직자의 징집이었다.

중국의 공산화에 우려를 표한 교황이기도 한데 이를 보면 비오 12세가 동북아시아의 선교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비오 12세는 8.15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제 무대에서 승인받기 위해 경쟁할 때 1947년 교황특사 패트릭 번 주교를 한국으로 파견해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힘을 실어줬다. 1948년 제2차 유엔총회 때는 교황 비서 조반니 몬티니 몬시뇰과 주프랑스 교황대사 주세페 론칼리 대주교에게 대한민국 대표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남미 가톨릭 국가의 지지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교황특사로 한국에 체류하던 번 주교를 주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패트릭 번 주교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0년 7월 납북되어 11월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1939년에는 춘천교구, 1948년에는 대전교구, 1957년에는 부산교구, 1958년에는 청주교구를 설정했다.

2.7 성모 마리아 몽소승천 교의 반포

1950년 11월 1일 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발표하여 교황 무류성[23]을 통해 성모몽소승천을 믿을 교리로 정했다.

다만 이것은 1950년에 갑자기 생긴 교리가 아니고, 오랫동안 성전(거룩한 전승)의 형태로 믿어오던 교리에 대해 교황이 "이거 틀림없으니까 앞으로 쓸데없이 트롤링하지 맙시다"라고 재확인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교황 항목의 무류지권 문단을 참조하자. 그리고 성모승천이라는 교리 자체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과 성모 마리아 항목을 참조하면 좋다.

3 선종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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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2세의 시신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12세의 무덤

비오 12세는 1958년 10월 7일 가스텔 간돌포 성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사실 교황은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아 여름이 지났는데도 로마로 이동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심장질환이 어느 정도 나아지려고 할 때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선종하였다. 선종 직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 추기경단 수석인 티세랑 추기경은 비오 12세의 유품처리 문제를 두고 대판 싸웠다. 비오 12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중요한 메모를 즉각 소각해 달라고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부탁하였는데, 파스칼리나 수녀는 교황의 마지막 부탁을 충실히 들어주었다. 티세랑 추기경은 비오 12세의 메모가 교회의 중대사와 관련된 것인데 자기와 아무런 상의 없이 소각한 것에 열이 뻗혀 파스칼리나 수녀와 마지막 배틀을 벌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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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론칼리 추기경몬티니 몬시뇰과 교황

재임 기간 내내 비오 12세의 고집과 싸우느라 지쳤던 추기경단은 좀 쉬고 싶은 뜻에서(…) 나이도 많고 성격도 모난 데 없이 부드럽고 야망이 없는 늙은 이탈리아인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한다. 속세의 이름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교황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이 교황은 비오 12세와는 달리 좀 쉬어가고 싶다는 뜻이 반영되었는데... 이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명함으로써 교회에 폭탄을 떨어트렸다. 만약 비오 12세가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다면 요한 23세가 선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비오 12세는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뒤에나 끼친 영향이 크다.


  1.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과 동맹군간의 중재를 위해서 갈 때는, 전쟁 중에 배급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라서 기차에 따로 음식을 실어날랐다고 한다.
  2. 이때 각국의 외교관들도 뮌헨을 빠져나가는 개판난전의 상황이었지만, 비오 12세는 끝까지 뮌헨의 주교관을 벗어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훗날 나치의 위협에도 바티칸을 지킨 배짱이 그냥 나온 게 아닌 셈.
  3. 이 일은 비오 12세의 흑역사라면 흑역사인데...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때 훗날 히틀러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가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히틀러의 위험성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찰리 채플린 등 극소수의 인물들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정도였다.
  4.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말년을 그냥 외롭게 보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티칸을 나온 뒤 몇 년 후 바오로 6세의 지원을 받고 거물급 자선 사업가가 되어 죽기 직전까지 정열적인 삶을 살았다.
  5. 후임이 탈권위적이었던 요한 23세라 더 부각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비오 12세의 권위주의적 면모는 재임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거의 중세에서나 쓸법한 극존칭이나 예의범절을 요구한다거나…
  6. 물론 반 교황파는 교황의 지나친 권력 집중을 반대했다는 것이지 무슨 쿠테타를 획책했다는 건 아니다.
  7.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는 굉장히 유능했고, 교황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으며, 정치ㆍ종교적 성향까지 비오 12세와 비슷했다. 당장 비오 12세가 권력을 강화할 때도 파스칼리나 수녀가 참모 겸 행동대장으로 맹활약했다. 능력이나 공로로 보면 비오 12세가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긴 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일개 수녀였다는 것. 일개 수녀가 바티칸의 추기경 저리가라 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바티칸 정계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8. 사실 이 작품 자체는 블랙 코미디로서 홀로코스트보다는 주식매매와 이권에 눈이 어두운 가상의 교황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몇몇 설정은 홀로코스트 방조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암시한다.
  9. 그렇다고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항의하는 학자들조차도, 교황 자신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나 인신공격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런 건 배워 두자 이점은 전쟁 당시 교황의 침묵에 대해서 비판적인 영국의 학자 콘웰조차도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진 반유태운동이나 반유태적인 시각, 그리고 반공주의에 교황 자신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벌인 일이 워낙 일이니.
  10.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교황의 역사'에도 나오는데 그도 유대인 차별 및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이 없던 것에 대해 비판한다.
  11. 사실 그는 전쟁 전부터 유대인들을 돕기는 했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유대인 차별 정책을 펼쳐 대학 교수들이 쫓겨나게 되었는데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로베르토 알마지아 교수를 위시해 전 로마 대학 법학과장이던 조르조 델 베키오 교수, 이슬람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조르조 레비 델라 비다 교수, 이탈리아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툴리오 레비치비타 박사등을 바티칸 도서관 분과로 데려왔고, 수학자 비토 볼테라, 폐 전문의인 구이도 멘데스 교수 등이 다른 국가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2. 이 회칙은 비오 11세가 교황이고 비오 12세가 교황청 국무장관이던 시절 만든 회칙이다. 이때 이 회칙을 모든 교구에서 낭독하게 했다.
  13. 라이프 2차 대전에 나와 있는 잔학행위를 보면 춤을 추면서 정교회 수사의 살을 저민다던가 고문당하며 죽는 아들의 피를 어머니에게 받게 한다던가…
  14. 대체역사 떡밥을 모은 책 What if 2권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교황이 만약 공식 교서를 통해 나치의 학살을 비판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나치에게 저항하고 유대인을 도울 것을 부탁했다면… 하는 가정을 했는데, 분노한 히틀러가 교황을 바로 아래 단락에 나온 것처럼 체포해 처형하자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들고 일어나 나치 정권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15. 물론 케셀링이 신속하게 로마를 비롯한 중, 북부의 이태리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대해 방어전을 펼친 것도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로마를 포기하고 이태리의 북부의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생각하기도 했다.
  16. 히틀러 자신도 지나친 나치의 괴뢰로서 가톨릭 신도들조차도 등을 돌리는 교황보다는 이런식으로 저항을 하더라도 자기 말을 하는 교황이 국내 가톨릭 정치 세력을 다독이는 쪽이 더 나았다.
  17. 교황은 로마 교구의 총대주교이다.
  18. 그런데 플래툰의 기사에 의하면 스위스 근위병들이 회색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기관총박격포를 꺼내 들고 독일군과 대치했다고도 한다. 정말 창만 들고 다닌 것은 일부 근무자들뿐일 수도 있고, 저 대치 이후에 교황이 무장해제령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인을 요함.
  19. 한 번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는데, 신경병에 따른 딸꾹질로 하마터면 굴욕을 겪을 뻔했다.
  20. 그 치약의 재료가 크롬성분이어서 딸꾹질 증상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21. 여교황이라 불릴 만큼 바티칸의 실권자로 군림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린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였는지라 그녀의 사진은 언론에 팔든 본인에게 뭘 뜯어내든 찍을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 무슨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교황이 죽어가는데 그 와중에 교황 주치의라는 인간이 파파라치 짓을 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다. 의료계에서 생매장 당해도 할 말 없는 짓이었으니 그야말로 자업자득.
  22. 다만, 제사는 조상의 혼백이 돌아와 음식을 흠향한다(그리고 복을 줄 수 있다)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의 실천이라는 부분에서 허용한 것이고, 신사 참배의 경우 이미 신토가 국가에 편입된 하나의 민족의식이 되었기에 국가에 대한 신자의 의무 실천 차원에서 허용하였다.
  23. 교황이 교리에 관해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여 발표한 것은 성령의 인도로 오류가 없다는 가톨릭의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