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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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 ()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
약칭КПСС ()
CPSU ()
창립자블라디미르 레닌
표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당가볼셰비키 찬가 (Гимн партии большевиков)
당보프라우다
창당1912년 1월 1일
해산1991년 8월 29일
당원[1]약 1,900만 명
이념마르크스-레닌주의 , 공산주의
스펙트럼극좌
승계정당러시아 연방 공산당

1 개요

소련 공산당은 1912년 1월 1일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가 이끄는 볼셰비키[2]가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계승하는 정당이며, 이 정당은 일당제 구소련의 유일정당 [3]이란 한마디로 정리 할 수 있다. 이 정당은 1917년 에 일어난 10월 혁명 이후에 급속도로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1991년에 당이 해체될 때까지 소련의 유일정당이었다. 정치 성향은 당연히 공산주의[4] 였으며, 당수는 서기장이라고 한다.[5][6]

역대 서기장은 다음과 같다.

역대 소련 서기장
1대2대3대4대5대6대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2 역사

2.1 창당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외적으로 핀란드에서부터 캅카스, 중앙아시아까지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이었다. 하지만 내적으로 들여다보면 러시아의 부를 독점한 소수의 귀족 계층과 절대 다수의 농민들로 이루어진 후진적인 사회였다. 비슷한 시기 서유럽이 산업혁명을 통해 현대 시민국가로 바뀔 때, 러시아는 1861년 개혁적인 군주였던 알렉산드르 2세의 노력으로 겨우 농노제가 철폐되었다.[7] 이처럼 당시 러시아 제국은 근대 시민국가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이러한 사회상에 불만을 품었고, 수 차례나 차르로 대표되는 전제군주정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다.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말인 1773년 푸가쵸프의 난부터 시작해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등 사회적 변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전복 시도를 극복한 전제군주정은 어떠한 개혁이나 변화 없이 더욱 더 반대파들을 권위적으로 탄압했고, 이는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체제를 완전히 뒤엎는 혁명을 통해 국가를 변혁해야 한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유행하자,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전제군주정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개혁시킬 매력적인 이념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지식인들도 점차 사회주의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해 1898년, 러시아 제국 민스크에서 첫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설되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정당을 달갑게 보지 않았던 러시아는 이들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이들은 곧 서유럽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노동당원들은 곧 러시아 내 사회주의 실현을 두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민주노동당 내 율리 마르토프를 비롯한 온건파는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파한 바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를 실현한 뒤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의 낡은 사회상을 급격히 바꾸길 원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과정을 사회주의 국가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다고 보며 즉각적인 사회주의 국가 설립을 주장했다.[8] 당시 이들의 해석은 사회주의라는 이름만 쓰는 전혀 다른 노선에 가까웠다. 결국 레닌을 비롯한 급진파는 1903년 2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자기 세력을 형성, 볼셰비키로 자칭했고, 사회민주노동당 내 남아있는 온건파들은 멘셰비키라고 지칭되며 온건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대중선거가 아닌 전문적인 혁명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주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 레닌은 서유럽과 같은 선거로 집권하는 대중정당이 아닌,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혁명을 지도하는 조직체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을 지향하였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정식으로 결별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로 당명을 변경했다. 이후 10월 혁명이 성공한 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집권당이 되면서 1918년 당명을 전러시아공산당으로 변경했다.

2.2 레닌에서부터 스탈린까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된 후 1925년부터 전연방공산당(Всесою́з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1951년 소련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공산당이라는 명칭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구별하여 러시아의 레닌 추종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소련공산당은 내전에서 승리한 후 1924년 레닌이 사망할 때까지 신경제정책을 통해서 제한된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4~1938년 대숙청을 통해서 당 내부에 남아 있는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정적과 혐의자들이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수백만 명이 투옥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3 해빙기와 정체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의 권력자로 급부상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4년 비밀리에 열린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그동안 독재자를 숭배하다시피 했던 소련에 큰 변혁을 예고하는 사건이였고, 이후 대숙청 당시 굴락에 보내진 사람을 석방시키고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을 허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격적인 해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이 실패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당 내 보수파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정치국은 1964년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브레즈네프는 이후 체제를 현상유지시키는 선에서 어떠한 개혁이나 변화 없이 1982년까지 사실상 정체기라 불리는 시기를 이끌게 되었다.
1982년에는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승계하였다.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15개월 만에,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13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지도력의 부재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 정치국은 변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서기장에 선출하였다.

2.4 페레스트로이카와 쿠데타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고르바초프는 80년대를 겪으면서 침체된 소련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사업체들이 자율적으로 지정하게 하는 한편, 그동안 금지되었던 표현,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곧 지속되는 경기침체에 지쳐있던 민중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소련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 조치로 인해 타격을 입은 공산당 간부들이 고르바초프에게 반발하면서 고르바초프의 지도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989년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민주화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권에서 이탈하면서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사실상 끝났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1989년 인민대표회의 창설, 1990년 다당제 허용 등으로 소련을 민주적으로 바꾸며 서방 국가들과 비슷한 국가로 탈바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옛 체제로 회귀하는 방향으로 소련을 복원시키려 했다. 하지만 TV로 쿠데타가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쿠데타군에 등을 돌렸고, 결국 쿠데타는 4일 만에 실패했다.

2.5 해산

1991년 8월 23일 보수파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확정받았다. 이후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써 소련 공산당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시키고 공산당이 소유한 재산을 전부 각 공화국 정부에게 환원시켰다. 이로써 소련공산당은 정부와 소련 내 보안기구 및 소련군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사라졌다.

3 당 조직

소련 공산당은 혁명을 준비하던 시기 때부터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과 페레스트로이카, 소련 해체까지 굴곡진 역사를 겪어온 만큼 워낙 구조가 많이 변했다.
다음은 소련 중, 후반기에 정리된 대략적인 구조다.

소련 공산당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 1898년부터 1991년까지 총 28번 개최되었으며, 위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명실 상부한 소련 최고의 권력이었다. 스탈린 시기까지는 정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었으나, 스탈린 사후 5년을 두고 개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 대회에서는 전반적인 당의 운영노선과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 КПСС)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 선출되어, 전당대회가 없는 평상시 당의 운영을 책임졌던 기관.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뽑힌 당의 지도부... 이기는 했지만 사실 정치국에 가려 빛을 많이 못봤다. 물론 그래도 당의 실무를 담당하고 조율한다는 점에서 나름 영향력있는 기관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당이나 국가 내 중요한 직책은 전부 정치국 출신이 독점하다보니 사실상 당의 실무를 조율하는 기관에 가까웠다. 그래도 정치국이 소속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나름 최고 권력이라면 권력이었다.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드러내는 인물이 모인 부서는 정치국(Политбюро), 당의 행정이나 재정, 기타 실무 쪽을 주로 맡는 부서는 사무국(또는 서기국, Секретариат)으로 분류했다.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
말그대로 소련 권력의 핵심. 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간부회(Президиу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옛날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누군가가 정치국원이었다는 것은 권력의 최종 핵심부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당장 소련에서 서기장을 포함해, 장관회의 의장이나 최고회의 의장, 심지어 나름 이름을 알린 정치인 중 정치국 출신이 아닌 인사는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정치국원 후보(Кандидат члена Полибюро)까지 따로 선출해서 둘 만큼 정치국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누구보다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즉, 차기 서기장 후보이거나 서기장의 최측근들이 포진한 권력의 핵심부가 정치국이었다.
  • 당내 교육기관
이렇게 소련 공산당은 소련 내에서도 워낙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보니, 독자적인 학교와 연구소를 소유할 만큼 세가 강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Институт Марксизма-Ленинизма)라던지 당상급학교(Высшая партийная школа)를 운영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다듬고 차기 당을 이끌어갈 엘리트를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 아동 및 청년기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유아, 청소년들의 이념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옥타브랴타, 피오네르, 콤소몰로 이어지는 공산당 내 청년기관이었다. 보통 공산당에 가입한 소련인은 7세부터 9세까지는 옥탸브랴타, 9세부터 14세까지는 피오네르, 14부터 28세까지는 콤소몰, 그 이후부터는 정규 당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 1986년 기준
  2. 레닌이 주도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당파 중 하나
  3. 동유럽 위성국가들이나 중국,북한이 명목상 다당제를 하는데 비해서 소련은 진짜 일당제였다.
  4. 정확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5. 스탈린 이후 기준이다, 레닌 시절에는 서기장이라는 직책은 없었다
  6. 참고로 공산당 서기장은 실질적으로 소련 국가원수를 역임한다
  7. 당장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사라진게 언제인 지 생각해보자.
  8. 당시 이와 같은 논쟁은 러시아 얘기만은 아니어서, 독일 사회민주당만 해도 당 내 논쟁 끝에 로자 룩셈부르크같은 혁명파들이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혁명파 공산주의자들은 독일 제국이 무너진 이후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과 사회민주당 정부를 공격함으로써 같은 좌파계 정당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일까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