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而不作
1 소개
기술(述)[1]만 하였을 뿐(而) 창작(作)하지 않았다(不)는 말.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자신의 저술이 옛 일을 따라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라며 겸손을 보인 표현이다.[2]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은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입각해 제작되었다. 다만 사기나 삼국사기에서도 민족의 자긍심 고취등을 이유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던 고대사나 국가 창설 설화등은 그대로 기입해놨다.[3]
2 조선시대 일화
이후 대부분 저자가 겸양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때로 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과연 아가리 파이터답다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선거는 생전 행적에, 당시 기준으로는 흠이 될만한 일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부친 윤황은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포위되었고, 윤증과 어머니, 부인은 강화도에 피신해 있었다. 거기서 일가족은 모두 자결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그의 부인은 실제로 자결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아버지와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에서 최후를 맞이하려고 결정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나왔다. 그러나 청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자결도 포기한 채 숨어 살아남았다.
윤선거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이후 다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위와 같은 행적을 좋게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송 논쟁을 놓고 송시열이 남인을 배척함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송시열의 태도를 비판했기 때문에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윤휴 및 남인에 대한 태도를 놓고 여러 번 논쟁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여기서 술이부작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렇다. 송시열이 인용한 것이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인데, 송시열이 그것을 인용하면서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박세채가 윤선거를 찬양함이 참 아름답다. 하지만 난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망자의 묘비문이고, 박세채의 글도 참 좋아서 인용하기는 하겠는데(述而) 내가 쓴 글이 아니다(不作). 하여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라는 뜻이 된다. 생전에 있었던 갈등의 원망을 묘비문에 표현한 것이다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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