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항목은 해당 인물의 별명인 스칸데르베그, 영어식인 스칸데르베그를 알바니아어식으로 발음한 스컨데르베우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
목차
1 소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알바니아어: Gjergj Kastrioti)는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이다. 그는 발칸 반도의 군소 저항세력들을 싹 쓸어버린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대향하였던 발칸 지역 지도자들 중 한명이자 가장 성공적인 저항자였다. 그는 25년에 걸친 장기간의 저항을 주도하였고 메흐메트 2세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 알바니아를 정복할 수 없었다. 알바니아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오스만 제국에 굴복하게 된다.
그는 알바니아의 실질적인 시조격인 인물로 높이 추양되며, 오늘날,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고, 알바니아의 국기는 카르트리오티의 가문 문양인 검은 독수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사실상 알바니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보다 별명으로 훨신 유명하다. 스컨데르베우(알바니아어: Skënderbeu) 또는 스칸데르베그(Skanderbeg)라는 별명이 그것인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이던 시절에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용맹함을 인정한 오스만인들이 그에게 준 '이스칸다르'라는 이름과 그에게 수여했던 작위인 '베이'(태수)를 합처서 부른 것(이스칸다르베이, İskenderBey) 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단히 유명한 별명이라 사실상 이름과 맞먹을 정도. 실제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자신도 스칸데르베그라는 별명을 자신의 이름처럼 사용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알바니아 중부의 귀족 가문인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이 가문은 알바니아 중부에 그럭저럭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에 속하는 지역의 귀족이었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8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아들이었다고 한다.
카스트리오티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문원들은 오스만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자식들이 징집되거나 인질로 끌려가 오스만식 교육을 받기도 하고 전쟁시에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 군대의 일원으로 참가해야 했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2.2 오스만 제국의 신하(1423~1443)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데브쉬르메 제도에 의해 징집되어 1415년부터 1423년까지 아드리아노플의 오스만 제국 수도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오스만 제국의 왕립학교[1]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최소 3년 이상의 군사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그에 대한 기록은 알바니아 지역의 몇몇 법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엔데룬에서의 교육을 마친 그에게 오스만 제국은 그의 아버지 영지 옆에 있는 하나의 티마르(영지)를 수여하였다. 그의 아버지, 지온 카스트리오티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이자 동시에 베네치아 공화국 등 근방의 기독교 세력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엔데룬에서 교육받은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바로 근처의 티마르를 수여받아 부임했다는 것은 지온 카스트리오티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빼앗아 오스만 제국의 교육을 받은 제르지에게 주어진 티마르에 이를 합치겠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아버지인 지온 카스트리오티가 오스만 제국 지사와 싸우다가 패해 영지가 줄어들기도 하고, 그의 친척들이 오스만 제국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의 저항활동을 거듭하는 동안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충실한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한 친척들의 영지가 그에게 수여되기도 하였으며, 1437년에서 1438년 사이에는 알바니아 지역의 지방관(터키어로 subaşi라고 한다)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시기 그는 충실하고 능력있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였으며, 그가 지방관 직무를 다한 1438년에는 그의 아버지 영지를 포함하는 더 큰 티마르이 수여되기도 하였다. 무라트 2세가 그에게 태수('베이')직을 수여하면서 그의 유명한 별명, '스칸데르베그'를 얻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기병 5천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대영주가 되어 있었다.
1437년 그의 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는 아버지의 남은 영지들, 그리고 카스트리오티 가문이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2]과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를 계승하였다. 그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신하이자 1443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주요 장수 중 한명으로 야노슈 후냐디의 지휘를 받는 기독교 세력 군대와 싸워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계승한 가문원들과의 교류와 주변 세력과의 관계 계승은 그가 1444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3 알바니아 저항운동의 지도자(1444~1468)
2.3.1 몸을 일으키다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즉 스칸데르베그가 오스만 제국을 떠난 것은 헝가리에서 출발한 바르샤 십자군이 불가리아의 니스를 공격할 때 1443년 11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알바니아인으로서 오스만 제국에 복무하던 3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을 이탈, 알바니아로 가서 위조편지를 통해 알바니아 산간의 크루여(Krujë) 요새를 점거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써오던 투르크식 이름을 버리고 알바니아식 이름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Gjergj Kastrioti)를 내걸었으며, 가문의 문양인 검은 쌍두 독수리를 내걸었다[3].
알바니아에서는 이미 1443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반하는 반란이 일어난 상태였다. 이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고자 하는 기독교계의 동시다발적인 반격이 있었던 시기인데, 헝가리에서는 2만 5천에 달하는 '콘스탄티노플 구호 십자군'이 결성되어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 교황청의 교황 대리 체사리니 추기경, 헝가리 및 폴란드의 왕 블라디스와프 3세 등의 지휘 하에 진격하여 니스에서의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대파하는 등의 전적을 올렸고, 남부 그리스에서는 모레아의 군주 콘스탄티노스 친왕(후의 콘스탄티노스 11세)이 마찬가지로 로마의 후원을 받아가면서 중부 그리스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알바니아에서는 대대적인 반오스만 반란이 일어나 있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신임하던 장군이자 알바니아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스칸데르베그가 동참한 것. 이는 오스만 제국이 알바니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2.3.2 저항 초기
1444년 3월,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영주들을 모아 '레즈헤 동맹'을 결성하여 그들의 민족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초기 동맹의 군사력은 1만에서 1만 5천에 달하였으나 스칸데르베그는 자신의 직속병력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지휘만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군사력은 레즈헤 동맹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거대했기 때문에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체로 알바니아의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활용해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였다.
알바니아의 대대적인 반란에 오스만 제국은 즉각적으로 진압군을 보냈다. 무라드 2세는 자신이 신임하던 지휘관 알리 파샤에게 2만 5천~4만에 달하는 군을 맡겨 레즈헤 동맹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는 1444년 6월 29일 토르비올에서 일부러 언덕 바로 아래에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기병이 주력인 오스만 제국군을 유인했고, 후방에 미리 배치해두었던 기병이 기습을 감행하는 방식으로 격파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오스만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와 십자군이 재결성되어 콘스탄티노플 구원을 위해 남하하도록 하였다.[4]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군은 반복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히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레즈헤 동맹은 얼마 안 가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다. 초창기 주요 지원자였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중요한 요새인 Dagnum의 소유권을 두고 1447~1448년에 걸처 전쟁을 치르게 된 것.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요새의 중요성을 매우 중시하여 군사적, 외교적 공세와 더불어 스칸데르베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이와 동시에 무라드 2세에 대해 스칸데르베그에 대한 합동공격까지 제안할 정도였다. 이로인한 양면전쟁에서 스칸데르베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는 우세를 점하는 데 성공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공세, 특히 무라드 2세의 친정에 의해 스베티그라드[5]가 함락당하는 큰 타격을 받아 동맹의 수도이자 스칸데르베그의 본거지인 크루여 요새가 오스만 제국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위기를 불러온다. 스칸데르베그는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움직였으나 베네치아와의 전쟁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포위를 풀기에는 전력이 부족하였다.
1448년 레즈헤 동맹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서로 타협하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알바니아와 전쟁을 벌이던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군을 움직이려 했고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1448년의 오라니크 전투에서 또다시 오스만군이 패배하고 말았기 때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스컨데르베우는 오스만 제국에게 다시 눈을 돌릴 수 있었는데, 때마침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는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그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야노슈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인 세르비아가 협력해줄 것을 전제로 하고 원정을 준비했던 반면, 당시 세르비아의 공작이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헝가리군과 연합하기는커녕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에 헝가리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고해바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스컨데르베우가 군대를 이끌고 야노슈와 합류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세르비아군을 보내어 경로를 틀어막기까지 했는데, 1439년에 세르비아가 일시 멸망하고 1444년에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와 강화를 맺어 세르비아의 재건을 인정한 사실이 있었기에[6] 오스만 제국군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 결국 헝가리군은 2차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참패했고, 스컨데르베우도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스칸데르베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신할 후원자로 아라곤 왕국을 선택했으며, 당시의 아라곤 왕이었던 알폰소 5세(나폴리 왕으로서는 알폰소 1세)도 서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에 이르는 대제국을 창건할 허황된꿈을 꾸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스컨데르베우의 입장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이고, 알폰소로서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는 발칸 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후로도 스컨데르베우는 아라곤과의 관계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고, 1458년에 알폰소가 죽고 페르디난도 1세가 그 뒤를 이었을 때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기도 했다.
1450년, 스베티그라드가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함락된 지 2년 뒤, 레즈헤 동맹의 중심이자 스칸데르베그의 거성인 크루여는 오스만 군대의 포위 공격을 받는다. 무라드 2세가 직접 이를 이끌었으며 규모는 10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알바니아측의 전력은 고작해야 8천여였고, 스베티그라드의 함락과 2차 코소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사기도 낮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알바니아의 산악지형에서는 대군의 전개와 보급이 대단히 어려웠고, 공격 목표인 크루여 요새는 극히 견고하여 거의 산의 일부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견고하였다. 또한 스칸데르베그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응하여 16개월을 버틸만한 물자를 비축하였고 게릴라전을 위해 병력의 절반을 거느리고 요새 밖으로 출격, 오스만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교란하였다. 결국 6개월의 포위전 끝에 오스만측은 2만의 병력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스칸데르베그가 베네치아측에 오스만 제국에의 식량 공급을 통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먹혀들자[7] 결국 물자부족으로 오스만 제국군은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스칸데르베그는 시칠리아 섬의 라구사로 가서 지원을 요청했고, 아라곤과 교황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상실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2.3.3 전성기
1차 크루여 공방전에서 레즈헤 동맹이 승리하였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장기간의 공성전으로 레즈헤 동맹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물자부족이 심각했던 것이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관계가 약화되어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언제든 재침하여 알바니아를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칸데르베그에게는 후원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폴리를 장악하고 그보다도 더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노력했던 아라곤 왕국이 바로 그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1451년 무라드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드 2세가 술탄이 되었다. 그는 즉위하면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알바니아에 대한 공격도 진행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레즈헤 동맹에 적대적인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는 바로 1452년에 알바니아를 공격하였다. 총 2만에서 2만 7천 사이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군은 오스만측에 귀순한 알바니아 족장들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두갈래로 갈라져 알바니아로 진입해 들어갔으나, 스칸데르베그는 이를 재빠르게 각개격파해 내는데 성공하여 다시한번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정복 시도를 저지해 내었다. 그러나 이 승전보는 직후 벌어진 콘스탄티노플 방어전과 그로인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동로마제국 멸망이라는 충격 속에 빛이 바랬고,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 자신에게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 예측한 스칸데르베그는 서방 세계에 지원을 요청하고 다녔다.
레즈헤 동맹에 위기가 닥친 것은 1455년 베라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였다. 베라트는 남부 알바니아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요충지로, 오스만 제국의 공작[8]으로 이 도시가 오스만의 것이 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레즈헤 동맹군이 아라곤에서 지원한 포병과 함께 이 도시를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것. 오스만 제국은 이 도시가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자 바로 2만에 달하는 지원군을 보냈고, 스칸데르베그는 이 군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베라트 탈환에는 실패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는 레즈헤 동맹에 가담했던 알바니아 영주들을 흔들었고, 가장 스칸데르베그의 신뢰를 받던 인물인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 심지어 그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까지도 오스만 제국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9][10].
그러나 얼마 안가 1457년, 알불레나에서 스칸데르베그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스칸데르베그의 조카와 측근들까지 투항하자 이를 기회로 여긴 오스만 제국은 5만에서 8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알바니아로 진격시켰고, 게릴라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움직였으나 스칸데르베그는 이 군대에 대해 기습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과 군대의 위치를 완벽하게 숨겨 오스만 제국군으로 하여금 스칸데르베그가 알바니아를 포기하고 도망갔다고 여기게 하는 데 성공한 후[11] 주둔지에 전 병력을 동원한 기습을 가해 오스만 군대의 반을 날려버리는 대성과를 거둔 것(전사, 포로 도합 3만여) 바로 전해에 벌어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뒤이어 다시한번 당한 이 참패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큰 피해였다. 거기다 이 소식에 호응하여 남부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대대적인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메흐메드 2세는 3년동안의 휴전협정에 동의할 수밖엔 없었다[12].
이후 오스만과의 평화가 유지되는동안 스칸데르베그는 후원자인 아라곤 왕국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아라곤 왕국이 앙주 세력과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분쟁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에 대향하기 위해 레즈헤 동맹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공격이 재차 시작되는 1462년때까지가 사실상 스칸데르베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2.3.4 후반기
오스만과의 평화는 1462년 끝이 났다. 메흐메드 2세는 이동안 트레비존드 제국과 모레아 공국을 정복하여 동로마 제국의 잔존세력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완수하였으며, 골칫거리인 알바니아의 레즈헤 동맹을 재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는 우선 진격해 오는 오스만 군대를 기습해 격파한 후 오늘날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있는 지역까지 공격해 나아가는 대담함을 보였으며, 한달동안 세번의 교전으로 이 지역을 지키던 오스만 군대들을 모두 격파해 이 일대의 오스만 제국의 통치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메흐메드 2세는 10년간의 휴전협정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메흐메드 2세와 스칸데르베그 양측 모두 이것이 길게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시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국이 확보하고 있었던 에게해의 섬들에 가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선 장기간에 걸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성공적인 투쟁을 벌여온 스칸데르베그와 레즈헤 동맹은 귀중한 동맹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양측은 1448년 맺어진 평화협정을 갱신하고 더 나아가 냉전 상태였던 양측의 관계를 동맹 상태로 회복하여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방어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1463년, 교황 비오 2세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하는 십자군을 선언하였고, 이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 레즈해 동맹, 헝가리 왕국은 바로 이에 호응하여 평화조약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세력들은 이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고, 실망한 비오 2세가 얼마 안가 선종하자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출신의 군사 지휘관인 발라반 바데라[13]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공격에 나섰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공격하자 스칸데르베그는 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진입하여 오스만 제국의 측후방을 교란하려 하였으며 베네치아의 병력과 연합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바이칼 계곡에서의 교전에서 피로스의 승리라 할만한 피해를 입어 물러나야만 했다[14].
이에 기선을 잡았다 여긴 메흐메드 2세는 총력전을 시작했다. 1465년 4만의 병력으로 알바니아를 들이첬고, 이것이 격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 재차 공격에 나선 것. 메흐메드 2세가 직접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1466년 크루여에 육박한다. 이 과정에서 메흐메드 2세는 이제까지의 알바니아 전쟁의 실패는 알바니아의 복잡한 지형과 민중들의 비협조에 있다고 판단하고, 알바니아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살상과 난민들을 크루여로 몰아넣는 것을 병행하여 진격로 주변을 정리하였으며 숲을 뚫고 군사용 도로를 개설하여 보급선을 구축하는 등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15]. 스칸데르베그 역시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이 국력을 집중하여 진지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제까지의 후원자였던 나폴리측에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메흐메드 2세의 의도는 크루여 요새 주변에 콘스탄티노플 때 그러했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요새를 구축하여 다른 알바니아 지역과의 연계를 끊고 장기간의 공성전으로 함락시켜 레즈헤 동맹의 핵심축을 제거한 후 이곳을 기점으로 잔존세력까지 모두 제거한다는 장기적인 정복계획이었다. 그러나 스칸데르베그는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맹공을 다시한번 견뎌내었고, 메메드 2세는 엘바산에 요새를 축조하여 알바니아를 남북으로 분단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16].
2차 크루여 공방전 또한 실패하자 메흐메드는 곧바로 엘바산 요새와 크루여에 3차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메메드가 직접 이끄는 대군도 크루여 성벽을 넘지 못한 마당에 이들이 알바니아를 정복할 수 있을 리는 없었고, 몇몇 대도시 인근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무렵, 레즈헤 동맹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족족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 가운데 어떤 것도 알바니아군의 사상자가 아예 없던 적은 없었고, 1460년대 중후반 당시 알바니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17]. 따라서 스컨데르베우와 다른 알바니아 영주들은 대응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으나, 여기서 그만 말라리아에 걸려버린 스칸데르베그는 1468년 1월 17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2.4 사후
스칸데르베그가 죽었을 당시, 그 아들인 지온 2세는 열 다섯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이후 레즈헤 동맹은 분열되었으며 후원자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기회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은 1474년 재차 공격을 시작했고, 스컨데르베우의 본거지였던 크루여는 1478년에 함락. 알바니아의 마지막 보루였던 슈코더르마저 1479년에 함락되면서 알바니아의 저항은 끝을 맺는다.
3 기타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 팽창기에 이에 대향한 여러 민족영웅 중 한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오랫동안 성공적인 투쟁을 이끌어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블라드 가시공은 고작 6년이었고, 야노슈 후냐디는 동유럽에서 손꼽히는 강국 헝가리의 섭정이었으나 일찍 죽었다[18]. 콘스탄티노스 11세 역시 유명하기로는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장기간 버텨내지 못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곧 스칸데르베그는 매우 제한적인 힘만으로 무려 25년을 버텨내었으며 때로는 성공적인 공세까지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에 대향하는 기독교 세력의 투사로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이러한 명성, 군사적 성과, 외교적 능력을 활용해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솜씨도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날 알바니아의 민족 의식 자체를 일깨우고[19] 알바니아인이라는 존재를 형성시킨 인물 중 하나로 추양받는다. 스칸데르베그의 투쟁은 알바니아인의 정체성이자 국가 통일, 자유, 독립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는 알바니아의 많은 전설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근대 알바니아의 최초이자 유일한 국왕인 조구 1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스칸데르베그의 후손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스칸데르베그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그의 전설적인 무용도 포함되어 있다. 메흐메드 2세로부터 받은 마법의 힘이 담긴 검과 존재만으로도 상대 말을 겁먹게 하는 키높이 효과도 있다고 전해지는 신령스런 말을 지닌 그는 언제나 전투에 앞장섰고 그의 칼 아래 평생 3천에 달하는 오스만 군인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평생 하루 5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고 그의 검을 딱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2명의 적을 철투구째 배어버렸다고 하며 야생 곰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죽이고 다음 공격 한번에 야생 버팔로를 베어버렸다는 등의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무용담은 이런 류의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여겨질 정도로 무패의 지휘관[20]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하지만 스컨데르베우의 활약상은 오스만 제국군마저 감복시켜서, 알바니아를 정복한 후 오스만 제국 병사들은 그가 묻힌 교회로 가서 그의 뼈를 서로 나눠서 부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또한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은 후대에도 널리 추양받아,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과 싸워 이겨낸 탁월한 지휘관으로 칭송받았다[21].
스컨데르베우의 초상이나 동상 가운데 투구를 쓴 모습을 보면 투구에 염소 머리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건 정말로 염소가 맞다. 이는 1450년의 1차 크루여 공방전 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오스만 제국군을 기습공격하던 와중에 한 번은 밤중에 염소 한 무리를 오스만군 진영으로 달리게 한 것. 그리고 그 염소들은 저마다 뿔에 등불을 매달고 있었고, 당연히 알바니아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있던 오스만 제국군은 그쪽으로 몰려들었지만 그 결과는 망했어요. 스컨데르베우 스스로도 염소 작전은 기발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자신이 쓸 투구를 새로 제작하며 염소 머리 장식을 덧붙였고, 그의 투구라고 전해지는 물건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단 알바니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미술사 박물관에 있다는 건 함정.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가족을 비롯해 알바니아 저항군을 지휘했던 귀족들과 오스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나폴리 왕국으로 피신해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알버레셔인(Arbëreshë people)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덕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도로 표지판에 이탈리아어와 알바니아어가 병기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은 나폴리 왕국의 귀족으로 대를 이어갔고, 오늘날의 알바니아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에도 참가했다.
스컨데르베우는 16,17세기 발칸 반도와 유럽의 각종 문학에도 종종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볼테르가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언급한 적도 있고 안토니오 비발디와 안토니오 살비가 제작한 오페라 스칸데르베그(1718년 상연)에서도 등장하는 등 이후에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와 가장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한국의 이순신과 곽재우나 대만의 정성공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거나, 해당 국가들 국민들에게 존경 받는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말이다.- ↑ 오스만 제국 내궁(엔데룬, Enderun)에 부속되어 있는 교육기관, 역사상 최초의 영재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데브시르메 제도 하에서 뽑혀온 소년 중 엔데룬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상당히 우수한 인재로 여겨진다. 예니체리도 이쪽에서 나온다.
- ↑ 크로아티아의 달마치아 지역에 있었던 작은 공화국,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한다
- ↑ 이때 그는 크루여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그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여기에서. 그대들 가운데에서 찾았노라.'
- ↑ 그러나 이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한 방어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다.
- ↑ 오늘날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Kodžadžik 마을
- ↑ 당시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오스만 제국에 대한 완충국으로 여기고 있어, 세르비아 공작에게 넓은 영지를 주는 등 봉신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이기도 했지만 헝가리의 신하이기도 했고, 야노슈 후냐디가 세르비아의 참전을 전제했던 것도 이러한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 하지만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헝가리에 세르비아의 재건을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했으면서도 그 부탁이 자신에게 '치욕' 이라고 여기고 있었던데다, 공작인 자신이 왕도 아니고 일개 장군의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 베네치아는 이시기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상인들이 양쪽 모두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였다. 스칸데르베그는 이것을 통제해 달라고 요구한 것.
- ↑ 당시 베라트를 통치하던 알바니아의 지방 귀족이 병사하면서 스컨데르베우에게 도시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걸 넘겨받는 과정에서 방어가 일시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간파한 오스만 제국이 군대를 보내 꿀꺽한 것.
- ↑ 이후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알바니아를 공격하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알바니아의 독립은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며 이 이상의 저항은 오히려 알바니아에 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나름 애국자였던 셈이지만 메메드는 그를 이용하고 버릴 작정이었으며, 모이시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알바니아군에게 또다시 박살나게 된다. 이에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하여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오지만, 스컨데르베우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추후에 그를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부른다면 엄벌에 처하겠노라고 공포했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스컨데르베우를 배반하지 않았으며, 1464년에 오스만군에 포로로 잡힐 때까지 알바니아의 편에서 싸웠다.
- ↑ 한편 함자 카스트리오티는 아들이 없는 삼촌이 죽으면 알바니아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1454년에 스컨데르베우가 아들인 지온 2세를 낳은 것이 불만이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배신한 것이다. 이후 그는 1457년의 알불레나 전투에서 스컨데르베우와 싸웠지만 포로로 잡혔고,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는지 나폴리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하지만 이후 풀려나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고, 고위 지휘관으로 살다 죽었다. 행적을 보면 이뭐병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지만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기에,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그의 배반을 아쉬워했다고.
- ↑ 기습이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오스만군은 스칸데르베르가 알바니아에서 도망친 줄 알았다고. 스컨데르베우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가 포로로 잡힌 전투가 바로 이 전투다.
- ↑ 알불레나 전투는 오늘날 우여바르다 전투라고도 하는데, '스컨데르베우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프란츠 바빙거)'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먼저 교황령과 나폴리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스컨데르베우를 배신한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명에 불과했으리라고 추정된다는 것.
- ↑ 스컨데르베우가 엔데룬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동창(?)이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스컨데르베우가 알바니아 저항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있던 당시에는, 발라반의 입장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사적으로는 밉상인 동시에 공적으로는 국가의 반역자였다.
- ↑ 구체적으로는 발라반 바데라가 이끄는 군대를 계곡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사방에서 협공을 가하려 했는데, 발라반이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바람에 기습이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군을 계곡 위로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는데, 고위급 지휘관 가운데 몇몇이 퇴각하는 적을 쫓지 말라는 스컨데르베우의 명령을
까먹고잊어버리고 적군을 신나게 추격. 하지만 발라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세를 정비했고, 알바니아군 지휘관들은 줄줄이 포로로 잡혔다. 그 가운데에는 스컨데르베우가 총애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던 인물도 있었고, 스컨데르베우는 원하는 건 다 지불할 테니 포로들을 돌려달라고 간청. 하지만 메메드 2세는 포로로 잡은 지휘관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자신을 섬기라고 설득했고, 누구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모조리 고문한 다음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로 알바니아군의 군사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어, 스컨데르베우가 사망한 뒤 알바니아가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 ↑ 사실 이러한 일들은 이전의 지휘관들이 멍청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휘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밖의 일이었기에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도를 찾아보면 금세 알 수 있지만, 그 넓은 알바니아 곳곳을 정리하고 다닌다는 건 황제가 아니라 일개 지휘관으로서는 어려운 일.
- ↑ 하지만 이곳을 지키던 알바니아 출신의 군지휘관 발라반 바데라가 전사하는 바람에, 메메드는 급히 지원을 보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3차 원정'.
- ↑ 이건 당시 오스만 제국과 알바니아의 인구와 경제력 차이만 따져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다. 물론 스컨데르베우의 활약은 눈부셨고. 따라서 오늘날의 알바니아인들이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지만, 알바니아와 오스만의 전쟁은 고구려와 당의 싸움과 같은 격이었다.
- ↑ 1456년 사망. 대신 그 아들로 헝가리의 왕이 된 마티아슈 1세가 뒤를 이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항쟁을 이끌었으며, 그 결과 오스만은 마티아슈가 죽고 헝가리가 스스로 무너진 뒤인 1526년에야 헝가리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그리고 이건 훗날 빈 포위라는 거한 삽을 두차례나 뜨면서 기독교측이나, 오스만 쪽이나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헝가리 중부 평원을 끝으로 오스만 제국의 안그래도 전근대 국가 치고 엄청나게 넒고 길었던 병참, 보급선은 결국 더 멀리 뻗어 나가는데 실패한다. 당장 헝가리 평원 넘어 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이 만나는 지점은 동계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출발 시점을 이스탄불로 잡는다면 늦어도 초여름에는 출정을 해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비엔나 현관문이라도 두들겨 볼 수 있는데, 헝가리 평원은 가을을 기점으로 본격 우기가 시작 되어 러시아의 라스푸티차 못지 않은 엄청난 자연 방어막이 형성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 이전까지 알바니아 역사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알바니아 전체가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컨데르베우는 25년 동안이나마 알바니아인 전체를 한데 모으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알바니아의 국기가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 충분히 납득되는 부분.
- ↑ 실제로 오스만 제국군에 맞선 그의 통산 성적은 21전 19승 2패에 달한다.
- ↑ 가령 퀘벡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18세기 영국의 지휘관 제임스 울프의 경우, '소규모 방어군을 지휘하는 데에는 고금을 통틀어 모든 지휘관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