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 바이올린 협주곡 Op.8 No.1 RV.269 "봄"(La Primavera) 전악장. 이 무지치 2014 내한공연 당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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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프랑수아 모헤롱 데 사바 작, 1723년

1 개요

1678년 3월 4일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출생 ~ 1741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에서 사망.

이탈리아작곡가사제 겸 바이올리니스트.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그가 작곡한 《사계》(특히 '봄 제1악장')는 들어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세계 유명 음악가중 거의 유일하게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보다도 먼져 태어난 사람이다.

베네치아의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비발디를 임신하고 있던 어머니가 벽에 부딪혀 큰 충격을 받는 바람에 열 달을 다 못 채우고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칠삭둥이가 얼마나 살까 했던 부모는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백 일을 넘겼는데, 비발디가 그 때까지 죽지 않자 5월 6일에야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유전인 적발 때문에 붙은 별명은 '붉은 사제(il Prete Rosso)'인데, 붉은 머리를 주변 사람들이 썩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적발항목 참고.

연약했던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 9월 18일 올레오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건강 문제로 집에서 출퇴근 배려를 받았는데, 그 때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25세 때인 1703년 3월 23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사제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하거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미사 집전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또 45세 때인 1723년 이후로는 나이 차가 20살이 넘게 나던 여제자인 안나 지로의 심상치 않은 염문으로 비난받았다. 소프라노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그녀는 언니와 같이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하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베네치아 시민들은 결국 비발디와 안나를 빈으로 내쫓았다.

앞서의 안나와의 불륜으로 베네치아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나는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을 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자만심도 상당했던 듯 하다. 아무튼 바흐텔레만 등의 다른 작곡가들 같은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이 별로 없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상술했듯이 사제 치고 미사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하며, 흥청망청 즐기는 것도 잘 했다고 한다.당시 베네치아에서 활약하던 극작가 골도니의 비발디 평인즉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골도니에 대한 평으로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영점이다."[1](...)

하지만 작곡할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으며 작곡을 하면서도 비발디 본인의 신앙심의 흔적이 나타나 있어 그가 결코 사이비 사제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그 때 베네치아는 항구도시라 이런저런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만큼 분위기가 많이 문란했다고 하니[2] 비발디는 그 당시의 평범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런저런 소문 때문에 그를 파문시키려는 세력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끝내 파문은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성기 때는 전 유럽에 비발디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말년에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짜게 식었기 때문에 빈이라는 타지에서 쓸쓸하게 객사하였다. 앞서 말했던 특유한 낭비벽 때문에 오페라 상영이나 바이올린 연주로 벌었던 재산도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극빈자로서 장례식을 치렀으며, 요제프 하이든이 그 당시 소년 합창단으로서 장례식에 있었다고 한다. 비발디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묘지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해가 분실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잊혀 있던 비발디는, 20세기 초 그를 존경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비발디 편곡집이 재평가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숨겨져 있던 비발디의 곡들이 발굴되면서 합주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의 양식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2 음악세계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인들은 사계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하는지라 원 히트 원더 정도로 이해하고 있고, 클래식덕후들 사이에서도 비발디에 대해서는 그냥저냥한 작곡가로 평가하는 분위기. 하지만 비발디는 사계의 작곡가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기기에는 여러 모로 아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그 바흐가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비발디다.
비발디의 음악은 딱 이탈리아스럽게도(…) 굉장히 열정적이고 생기가 약동하는 느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발디는 자신의 작품들의 거의 대부분을 협주곡으로 썼기 때문에 일본 등에서는 "협주곡의 아버지" 라고 부르기도 하며, 협주곡 중에서도 주로 3악장 형식의, 빠름 - 느림 - 빠름 구성이 아주 극명하게 대비되는 곡들을 많이 썼다. 특히나 느린 악장은 빠른 악장과 장단조를 반대로 해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3]

비발디 음악에서 굉장히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대비 효과인데, 위의 악장 간의 대비는 말할 것도 없고, 리토르넬로(ritornello)라 불리는 형식을 통해서 전체 협주(tutti) 부분과 독주악기의 솔로(solo) 부분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게다가 협주 내에서도 셈여림(다이내믹스)을 바꾸면서 일종의 "메아리 효과" 를 주어서 동일한 동기나 악절이라도 상황에 맞게 대비시키는 것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사실 셈여림 하나만으로도 비발디는 음악학자들에게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크 당대에 비발디는 셈여림의 활용에 있어서는 거의 끝판왕급의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그가 사용했던 셈여림 지시들은 현대에 활용되는 ppp - pp - p - mp - mf - f - ff - fff 구분보다 훨씬 더 세분화됐다고 한다. 비발디의 셈여림 지시를 크기 순으로 일렬로 늘어놓으면 현대의 크레센도(crescendo)나 디크레센도(decrescendo)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니 흠좀무. 바로크 시대 자체가 포르테랑 피아노 정도 외에는 찾아보기도 어렵던 시대였고, 특히 건반 악기의 경우에는 음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연주하는 것이 정격연주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적 트렌드를 잘 반영한 연주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음을 생각한다면, 시대를 초월한 그의 안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혼자서 음악 전체 사운드의 변화까지 염두에 두고 작곡활동을 했던 것.

빠른 악장에서의 협주는 대부분의 경우 네 번 등장하는 것이 기본인데, 거의 동일한 악절이 조성만 바뀌면서 등장한다. 그 조성의 변화도 규칙성이 있어서, 예를 들어 C major 에서 시작했다면 두 번째 등장하는 협주는 G major, 세 번째는 A minor,[4] 네 번째는 C major 이런 식으로 계속 옮겨간다. 하여간 잊을 만하면 자꾸 똑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므로(…) 테크닉이 중시되는 독주 파트와는 별개의 중독성 있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대조적으로 독주 파트의 경우 선율 중심보다는 화성 중심으로 현란한 아르페지오가 두드러지며, 첼로의 통주저음(basso continuo) 혹은 제1 바이올린의 은근한 반주가 따라붙는다.

빠른 악장에서의 또 다른 유별난 특징은 바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리듬감으로, 어떤 하나의 리듬을 정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걸 작정하고 밀어주는 모습을 보인다.(…)[5]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잘 캐치해서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을 뚜렷하게 강조할 경우, 비발디의 음악은 정줄놓고 춤추는 가장 무도회 수준의 흥겨움을 자아내게 된다. 사실 비발디 음악이 대체로 이런 스타일이긴 하다. 작곡가부터가 동네 바보형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가 이런 측면을 잘 잡아내고 있으며, 좀 더 하드코어(…)한 해석으로는 앙상블 마테우스(Ensemble Matheus)[6]가 있다. 이런 식으로 연주한다.[7]

느린 악장의 경우 악보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특히 독주 파트에서 뜻밖에도 어린이용 교재 수준(…)으로 간략하게 쓰인 악보를 볼 수 있는데,[8] 이대로 연주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바로크적인 모든 가능한 꾸밈음들과 소소한 애드립들을 넣어서 그럴싸하게 꾸미라는 얘기다. 즉 독주 멜로디의 기본 얼개는 비발디가 대충 던져주고, 그걸 멋있게 꾸미는 건 연주자의 재량. 바로크 당대에 이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비발디가 유독 그런 게 심했다. 그래도 잘 꾸미면 이건 그야말로 지중해의 우아하고 느긋한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나온다.

비발디는 그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으며, 과연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가장 많이 작곡했다. 물론 그 외에도 바순을 위해서도 협주곡집 하나를 썼으며, 플루트 협주곡집도 작곡한 적이 있다. 특이하게도 건반 악기를 위한 작품은 거의 쓰지 않았는데,[9]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솔로 건반 협주곡인 RV.780조차 애초에 그런 작품은 없음에도 후대의 오해로 인해 RV.546의 편곡 버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실제로 두 대의 첼로를 위한 RV.546과는 달리, 동일 내용임에도 RV.780은 건반 독주를 위한 내용이라고 보기에는 영 아니다. 심하게 말해서 초등학교 근처 피아노 학원 다니는 꼬마들도 약간만 연습하면 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구성들이 비슷해서 자기표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0]한스 짐머, 제임스 호너 대표적으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똑같은 곡을 100곡 이상 작곡한 사람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나 요한 요아킴 프로베르거 같은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어찌보면 비발디가 바로크 작곡가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기에 유독 비발디만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일지도.

한번은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Kreisler)가 비발디의 모작을 쓴 적이 있다. 크라이슬러는 처음에는 이것이 비발디의 잊혀진 작품이라고 대대적으로 언플을 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작품의 진짜 정체는 그가 훗날 이 작품을 자신이 썼다고 실토하면서 밝혀졌다. 문제의 곡 듣기[11] 근데 사실 크라이슬러 이 양반은 평소에도 이것저것 자주 위작을 쓰곤 했었다고. 프랑수아 쿠프랭, 아르칸젤로 코렐리, 주제페 타르티니 등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 중에 그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 외에도 현대 작곡가 막스 리히터에 의해 《사계》가 재작곡된 바 있다. 전곡 듣기

3 알려진 곡들

기록상으로 대략 760곡 가량의 많은 곡을 남겼음에도 대중적으로는 사계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비발디의 작품번호는 모차르트의 쾨헬 번호처럼 Ryom-Verzeichnis(RV, 뤼옴 번호)라는 고유 표기가 있는데, 20세기 덴마크의 음악학자 '페터 뤼옴(Peter Ryom)'이 비발디의 악곡들을 분류한 것이다.

사계 말고도 그가 작곡한 유명한 곡으로 작품번호 3번 '화성의 영감' 또는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이 있다. 제목은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이 음악도 광고, 영화, 드라마 등등에서 많이 쓰여서 들어보면 아 그 음악!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한때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지하철 노선들 환승 알림음이 이 화성의 영감 중 6번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가단조(RV 356) 1악장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예후디 메뉴인 경의 협주.

"이번역은 경의선이나 공항철도로 갈아타실 수 있는 합정, 합정 역입니다."[12] 단정하고 차분한 비발디 해석을 선보이는 이 무지치(I Musici)[13]의 연주.

▲ 모테트 'Nulla in mundo pax sincera(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RV 630. 《샤인》 OST로 유명해진 곡이다.

▲ "Cessate, omai cessate" 中 "Ah ch'infelice sempre", RV.684. 《친절한 금자씨》 OST로 유명해진 곡이다.

3.1 표제가 붙은 곡 모음

비발디 작품들 중 표제가 붙어 있는 것만 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축일을 위한 협주곡은 제외.

  • 협주곡집/작품집
    • 합주 협주곡집 Op.3 "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4 "화려함" (La Stravaganza)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8 "화성과 창의의 시도" (Il Cimento Dell'amonia e Dell'invenzione)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9 "La Cetra"
    • 플루트 소나타집 Op.13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
  1. 골도니는 원래 법률을 공부하다 희곡을 쓰는 일로 전향한 사람이었다.
  2. 당시 유럽에서는 베네치아 사람들은 생애의 절반은 종교에서 말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하느님의 용서를 비는 데 바치고 있다라고 까지 평하고 있다.
  3. 그래서 표제가 긍정적이고 밝은 것으로 붙어있는 작품의 경우, 1악장과 3악장은 표제에 걸맞는 밝은 분위기인데 2악장은 무지막지 어둡고 꿈도 희망도 없어 수준의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청취자를 멍뎅하게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RV.180.
  4. 보통 여기서 협주 주제가 좀 더 심층적으로 전개되곤 한다.
  5. 대표적인 사례가 RV.363의 3악장. 전체적으로 |♩ ♪♪♪♪| 리듬이 굉장히 강조되는 걸 알 수 있다.
  6. 지휘자는 스피노시(J.C.Spinosi)라는 인물인데, 바이올린을 켜는 게 아니라 거의 두들겨대고, 연주중에 추임새를 넣는 것도 모자라서 무슨 작두무당처럼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
  7. 이건 비발디 작품은 아니고 텔레만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이 양반들이 어떤 식으로 연주하는지 감이 잡히는 영상이다.(…) 이런 자극적인 연주 탓에 매우 호불호가 갈린다.
  8. 대표적인 사례가 RV.359 (Op.9 No.7) 2악장, RV.347 (Op.10 No.6) 2악장 등등.
  9. 그나마 오르간이 독주악기군에 포함되는 작품은 몇 있긴 하다.
  10. 심지어 RV.179 3악장 솔로와 RV.263a 1악장 솔로는 일부이긴 하지만 아예 대놓고 베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11. 솔직히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 비발디의 작풍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
  12. 물론 상술했듯이 이제 이것도 옛말이다. 한때 비발디의 RV.356 1악장은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 환승 알림음이었지만, 곧 얼씨구야로 대체되었다.
  13. 특히 1963년에 펠릭스 아요(Felix Ayo)와 함께 녹음했을 때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단정하게 연주했었다. 또 다른 유명한 협주곡인 RV.580를 들어보자. (듣기)
  14. 비발디 본인이 지은 부제인지 확인바람.
  15. RV.253과 같은 부제이지만 전혀 다른 곡이며 둘 다 똑같이 유명하다.
  16. 5악장은 가을 2악장을 재탕(?)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