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미 해군 구축함에 대해서는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소개
불패의 제독
레이먼드 에임스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1886년 7월 3일 출생 - 1969년 12월 13일 사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대장. 한때 미군이 운용했던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선에서 태평양함대에서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했던 제독들은 대개 전간기에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군 항공 특기로 빠졌던 소위 '개척자'들이었다. 하지만 스프루언스는 구축함, 전함 함장을 거쳐 제독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에서 소장 계급을 달고 순양전대장을 맡았던 정통파 수상함대 사령관 출신이었다.
그런 스프루언스 제독이 태평양 함대의 핵심 인물로 대두된 시기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전함 전력을 모조리 상실한 태평양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 위주로 편성된 태스크포스였고 이 부대를 총괄하던 인물이 바로 홀시 중장이었다. 하지만 우연히도 홀시 제독이 풍토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는 바람에 전투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홀시의 후임으로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항공모함 부대 TF 16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비록 항공 쪽 출신이 아니란 약점이 있긴 했으나 오랜 기간 홀시의 휘하에서 순양전대장으로 근무했고, 기존 홀시의 참모진과도 안면이 있고 손발을 맞춰 온 인물이었기에 추천을 받은 덕분이었다.
미드웨이 전투의 활약으로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군 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스프루언스는 그저 TF 16을 지휘한 하위 제대의 지휘관이었고, 실제 미드웨이에 투입된 미군 요격 부대는 스프루언스보다 훨씬 선임자였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했다. 다만 일본군의 타격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프루언스에게 휘하 부대를 분리시키도록 지시했고, 이후 요크타운이 피격당하여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자 사실상 작전의 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넘겨줬다. 또한 플레처 제독도 자신보다 스프루언스가 적임자임을 인정하고 사실상 모든 지휘를 스프루언스에게 위임하는 훌륭한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미드웨이 중반부 이후로는 사실상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 함대를 지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드웨이 전투가 끝난 후에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 함대 참모장으로 지명하면서 잠시 함대 지휘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종합적인 근무 평가를 통해 중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이 1943년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전투 부대를 총망라하여 5함대를 편성하면서 초대 사령관으로 지명받아 다시 함대 지휘관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이후 필리핀 상륙 작전 직전까지 일본함대를 상대로 굵직한 공적을 세우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부터는 미 해군에서 3함대 사령관 홀시 제독과 1년마다 교대로 함대를 지휘하는 독특한 정책을 세워서 잠시 진주만으로 복귀하여 휴식을 취했고, 일본 본토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시 함대 지휘를 맡았다. 이 시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지휘했으며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키는 실적을 올렸다.
종전 후에는 주일 미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1945년 9월 15일 와키야마에 도착하여 17일에 요코하마로 넘어가 본국으로 귀국하는 홀시를 환송했다. 11월에 제5함대 사령관 지위를 존 타워즈 중장에게 넘긴 스프루언스는 니미츠의 후임으로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두 달 후에 여기서 물러난 스프루언스는 1946년 2월 1일부터 해군대학의 교장으로 재임하다 1948년 7월 1일에 퇴역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페이블 비치에서 아내와 함께 은퇴 생활을 즐겼지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으로 1952년 1월에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원래 1953년에 임기를 마쳤으나 다시 차기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유임시켰기에 1955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다시 은퇴 생활을 즐기던 스프루언스는 1966년에 탈장과 백내장에 시달리다가 동맥경화증이 악화되었다. 1969년에는 장남 에드워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이상을 느끼는 지적인지증까지 시달리던 스프루언스는 1969년 12월 13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해군에 의해 장례가 진행되어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니미츠, 터너제독의 묘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1]
2 평가
"난 미 해군에서 제일 똑똑하다. 스프루언스를 빼고 말이다."
사실 태평양 전쟁 내내 미 해군 내에서 평가가 좋지 못했던 제독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박살냈음에도 밤에 계속 도망만 쳤다는 점, 마리아나 해협에서 일본 해군 함대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오로지 적기 요격에만 전념했다는 점으로 인해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요격에 전념하여 일본 함재기 세력은 전멸시키고 잠수함으로 일본의 정규 항모 2척을 격침시켰지만, 그외 대부분의 주력함은 살려 보냈기 때문에 대차게 까였다(…). 당장 "항공 쪽 경험도 없는 놈이 지휘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을 골로 보낼 기회를 번번히 무산시켰다"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 윌리엄 홀시와 달리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미국 정부가 스프루언스를 승진시키려고 해도 미국 의회에서 제동을 걸어서 결국 연금이나 기타 예전 등등을 원수급에 맞추는 꽁수를 쓴 것도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후 일본 측 자료를 열람한 결과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매번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미드웨이와 마리아나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야간전을 시도하거나[2], 미 해군이 쫒아오면 매복했다가 영격할 태세를 갖추었지만 스프루언스가 전혀 넘어가지 않았으므로 그냥 무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후에는 전략적인 식견이 아주 높은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스프루언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불패의 제독. 참전한 전투 중 아무리 전력차가 심하게 벌어졌어도 패한 전투는 한 번도 없었고, 그가 거둔 승리 또한 전과 확대에 욕심을 부리는 일 없이 성급하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을 자제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극대화시키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탁월하다는 점 등에서 현대 해전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스프루언스 제독과 관련된 일화
- 미드웨이 전투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은 함재기 부대를 항공모함 상공에서 편대를 형성한 후 적을 향해 날아갈 것을 지시했다. 문제는 출격 과정에서 항공기 몇 대가 말썽을 부려 스케줄이 어긋날 것 같자 상공에 대기하지 말고 적을 찾아 날아갈 것을 지시했는데 이로 인해 항공기 편대가 어그러지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이 때문에 뇌격기 편대는 충분한 전투기 엄호를 받지 못했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급박한 당시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다.
- 다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순차적으로 내보낸 뇌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일본군의 제로센들이 저고도로 내려와야 했고, 그 덕에 길 잃고 헤매던 급강하폭격기들이 별 방해를 받지 않고 폭탄을 내리꽂을 수 있었다.
본의 아닌 시간차 공격
- 5함대 사령관을 맡는 동안 휘하의 주력 부대인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미드웨이 전투 당시에 스프루언스 제독 밑에 있었던 인물이며, 항공모함 호넷의 함장으로 작전 수행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에 언급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나타내서 스프루언스의 신임을 확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 당시 통신 불통 및 정보 전달의 미비, 휘하 비행단장과 부하들의 불화로 그의 지휘 하에 있던 호넷 항공대는 거의 공적을 세우지 못했고, 후의 전투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몇몇 사실을 누락[3]시켜서 은폐하려다 걸려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무능한 인물로 찍히는 바람에 전투 일선에서 쫓겨났던 전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후 다시 니미츠 제독이 미처를 함대 사령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 강력히 반발한 인물이 바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하지만 마셜 제도 공략 작전에서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환상적인 항공모함 및 해군 항공대 운용 능력을 보여주자 곧 미처 제독의 능력을 인정했다.
-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홀시 제독이 3함대를 이끌고 일본 함대의 추적에 나섰다는 소식을 접하자, "나라면 원래 위치를 지켰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필리핀 해전 직후라 스프루언스 제독의 평가가 좋지 못했던 관계로 다들 무시했고, 본인도 그냥 넘어가는 투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실제 홀시 제독이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유인에 휘말려 함대를 몽땅 이끌고 올라가는 바람에 구리타 제독의 수상함 부대(전함 야마토가 포함)에 미군 상륙 부대가 큰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실제로 상륙 부대를 지원하던 호위 항공모함 한 척이 격침당했다. 다행히도 스프레이그 제독이 이끌던 호위 항모 함대가 분전하는 바람에 구리타 제독이 오판을 하고 후퇴 명령을 내림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홀시 제독도 이를 두고 필리핀 해에 내가 있었고 레이테 만에 스프루언스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란 말을 했었다고......
-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연합군의 수많은 장군과 제독들이 일본의 항복식에 참여하였지만, 스프루언스 제독만은 수상함대를 이끌고 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는 만약 일본이 엉뚱한 생각을 품어서 좋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함대를 지휘하여 일본을 끝장내라는 의미였다. 참고로 이 지시를 내린 것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 불의의 사태시에는 스프루언스가 미 태평양 해군 사령부를 인수하게 되어있었다.
- 전쟁 내내 수상함 지휘관이나 전투기 조종사들이 자신에 세운 전과보다 훨씬 더 뻥튀기를 한다는 미명 하에 전과를 대폭 깎아서 보고를 올린 인물로 유명하다. 물론 이런 조치는 병력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만 일본군처럼 스스로를 대전과를 기록했다고 속여서 전략 수립에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는 함정을 피할 수 있다는 면에서 바람직하다. 그 때문에 전후 일본 측 자료를 열람하게 되었을 때, 다른 장군이나 제독들과는 달리 전과가 훨씬 상향 조정되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앞서 언급한 미처 제독 또한 이런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스프루언스만큼 공적을 막 깎지는 못했다.
- 높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끝내 해군 원수 계급을 달지 못했는데, 이는 윌리엄 홀시의 정치적 지지자였던 상원의원 칼 빈슨이 번번히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습. 더 안습인 것은 스프루언스급은 구축함인데, 칼 빈슨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3번함(CVN-70).... 미 상원에서는 칼 빈슨의 반대로 인해 원수 진급을 승인하지 못했지만,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원수 계급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 스프루언스급이 전부 퇴역한 이후로는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에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알레이 버크 제독은 위에 언급한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인물이다(…).
- 스프루언스 제독은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겸손한 성격이었다. 한번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에게 스스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뭔가 깊은 전략 전술적 심사숙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난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을 때가 많다."[4]
- 스프루언스 제독이 은퇴하고 나서 가잠 많은 시간을 할해했던 것은 정원과 온실 다듬기었다. 오래된 카키색 잠바와 작업화를 신고서 정원을 가꾸었다고. 자신이 직접 꾸민 정원에 애착이 강했는지 집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항상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 기묘할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다. 옆에 있는 게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시기가 어디든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맨 위의 저 표정이다. 그저 눈동자 위치만 바뀔 뿐이다.
그래서 별명이 '전자두뇌'라고[5]
- ↑ 태평양 전쟁을 같이 이끌어온 이 세명은 살아있을때 "죽어서는 서로의 옆에 묻히자"고 약속을 했었고, 이 약속이 이행된것이다.
- ↑ 참고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항공전에서의 대패 후 전함을 동원해서 포격전을 할 요량이었는데, 스프루언스가 말려들지 않았다. 이것도 처음에는 스프루언스가 주구장창 까이다가 나중에 일본 측 기록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면서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입증되는데, 왜냐 하면 그 당시 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피해로 쓸 수 있는 전함이 한 척도 없었기 때문.(일본은 미드웨이 공략을 위해 전함만 11척을 동원해서 오고 있었다.)
- ↑ 특히 위의 비행단장을 상당히 신임했었기 때문에 쉴드 쳐 주려고 은폐했었다.
- ↑ 실제 역사에서 스프루언스 제독은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도통 모를 사람이기도 했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고도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적에게 속아 넘어간 부하를 보고도 말리지 않는 등 속이 시커먼 듯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반대로 부하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자신을 뭐라고 비난하든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는 등 흡사 생불 같은 모습도 보여 주었으며 태평양 함대 제독까지 오르고도 "아 난 교장일 하고 싶었어."하고 두 달 만에 자리를 옮기는 등 여러모로 복잡한 인물이다.
- ↑ 사실 스프루언스 제독은 폭뢰를 함미에 떨궈버렸다는 보고를 받고서 한 말이 "흠. 그럼 그거 주워서 원래 있던곳에 다시 집어넣지?" 라고 명령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간략한 보고를 좋아한건지 그냥 감정표현이 없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