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시칠리아 전투에서 넘어옴)

북아프리카 전역 종료 직후 시칠리아 섬을 두고 벌어진 연합군추축군 사이의 전역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시칠리아에 상륙하는 연합군
날짜
1943년 7월 10일~8월 17일
장소
시칠리아
이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완전한 장악
교전국연합국
미국
영국
자유 프랑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령 인도 제국
등등...
추축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지휘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조지 S. 패튼
오마 브래들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아서 테더[1]
헤롤드 알렉산더[2]
가이 시몬스[3]
알베르트 케셀링
한스팔렌틴 후베
알프레도 구초니
결과
연합군의 시칠리아 점령
영향
지중해의 완전 확보, 본격적인 이탈리아 전선 개전
병력약 160,000여 명약 230,000여 명
피해규모 미 7군
전사자 및 실종자 2,237명
부상자 5,946명
포로 598명
미 육군항공대
전사자 28명
실종자 88명
부상자 41명
미 해군
전사자 및 실종자 546명
부상자 484명
영국 8군
전사자 및 실종자 2,062명
부상자 7,137명
포로 2,644명
영국 해군
전사자 및 실종자 314명
부상자 411명
포로 4명
캐나다군
전사자 562명
부상자 1,664명
포로 84명
독일군
전사자 4,325명
실종자 4,583명
부상자 13,500명
포로 5,532명
이탈리아군
전사자 4,876명
실종자 36,072명
부상자 32,500명
포로 116,681명

1 배경

북아프리카 전역튀니지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면서 다음 공격 목표를 두고 연합군 사이에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미국과 소련은 늦어도 1943년 이내에 프랑스 북부에 상륙함으로써 제2전선을 형성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영국은 지중해의 완전한 장악과 소련의 동유럽 진출 저지 등 소련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4] 위해 추축국의 연약한 아랫배라 불리는 유럽 남부, 즉 이탈리아에 상륙 후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이탈시키고, 독일의 남쪽에서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연합국의 영원한 물인 미국과 독일 주력군과 피터지게 싸우는 소련의 주장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주장대로 나가되 북아프리카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해도 제2전선 형성에 무리가 없다고 주장, 결국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연합국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한다.[5]

2 양군의 병력 구성 및 배치 상황


지도 기호는 단대호 항목 참조

2.1 연합군

연합군 총사령관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약 160,000여 명

2.2 추축군

  • 독일군 - 알베르트 케셀링
    • 제14 기갑군단
      •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 팔쉬름예거 제1 낙하산 사단
약 230,000여 명

3 허스키 작전

3.1 다진고기 작전

상륙 작전에 앞서 기만 작전으로 연합군 수뇌부는 Operation Mincemeat, 즉 다진 고기 작전을 시작한다. 이 작전은 Charles Cholmondeley 영국 공군 중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건데, 죽은 사람의 시체를 이용해 그가 마치 1급 기밀을 가지고 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위장하는 방식으로 적에게 시칠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한다는 것을 각인시켜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외치는 것이였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한 남자의 시체가 준비되었는데, 이 남자에게 영국 해병 장교복을 입히고 윌리엄 마틴 소령이라는 가짜 신분을 주었고, 좀 더 신빙성 있어 보이게 가족의 편지까지 꾸며쓰고, 가짜 여자친구 사진까지 추가하는 등 누가봐도 실존했던 군인임을 알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 시체는 HMS 세라프 잠수함을 통해 스페인 연안에 투기되어, 마치 탈출했다가 익사한 듯한 모습을 보이도록 했고, 조류를 타고 해안에 닿았고, 이 시체를 회수한 후 독일 첩보기관이 이 시체를 면밀히 조사하고, 같이 버려진 가짜 1급 기밀 문서를 통해 연합군이 그리스나 사르데냐 섬에 상륙한다고 오판을 해버렸다.

3.2 상륙개시

3.2.1 초반부터 꼬이는 공수 작전

상륙 전에 수 많은 함포 지원 사격과 공중 지원으로 상륙 지점을 폭격한 연합군은 7월 9일 자정부터 공수부대 투입을 시작으로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을 실행한다. 이 공수 작전은 9일 밤 11시 30분에 실행되었으며 미 제82 공수사단과 영 제1 공수사단이 투입되어 겔라와 시러큐스 근방에 낙하할 예정이었으나 때 마침 불어온 최대 45 마일(약 시속 72km)의 강풍이 불어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지로 모이지 못하고 분산 낙하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한 영국군은 글라이더 147대를 통해 병력을 공수하려고 시도했는데, 단 12대만 목표지점에 도달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불시착했으며 69기는 바다로 떨어지는 등의 안습한 상황을 맞이했으나 이렇게 넓은 지역에 산개된 공수부대원들이 착륙 지점 주변을 습격하고, 기습을 가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9]

그러나 시칠리아의 방어를 맡았던 이탈리아군은 이미 9일 오전부터 상륙부대가 접근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공수부대 강하 1시간 30분 전인 22시에 벌써 전 부대에 비상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구초니 장군은 자정까지 공수부대가 강하했다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고 연합군이 섬의 남동쪽으로 상륙을 시도하리라는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리고 첫 제파가 상륙을 개시하기로부터 거의 1시간 전인 오전 1시 45분에 해안부대에 방어 명령을 하달했다.

3.2.2 해상 상륙

상륙작전 배치도[10]

병력 공수시 발생한 강한 바람은 상륙 부대에게도 영향을 끼쳐 약 6시간 가까이 지연되어 7월 10일 이른 시간에 상륙 작전이 개시됐다. 시칠리아 남단에 위치한 겔라에는 미 7군이, 시러큐스와 포잘로엔 영 8군과 캐나다군이 각각 상륙하기 시작했다.[11] 사실 연합군의 상륙 지점의(특히 남부 해안의) 모래톱 때문에 상륙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일부 부대는 정해진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하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독일군을 만났다면 그놈의 MG42벌집이 되었겠지만, 상대가 이탈리아군이였기에(...) 상륙에 혼선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피해 없이 상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약체라고 평가받던 이탈리아군 중 겔라 해안에 주둔하던 429해안 부대는 미 레인저를 맞아 부대의 45%가 전투 불능에 빠질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45%면 전멸을 넘어 섬멸 당한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탈리아군을 마주친 제1레인저 대대와 제4레인저 대대는 제39전투공병연대 제1대대, 제531해안공병연대 제1대대, 제83화학대대의 박격포 사격, 해군의 함포사격의 지원에 힘입어 몰아내었다. 이탈리아군의 보병들의 공격 이외에도 13대의 전차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레인저들이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다. 7~8대의 전차가 레인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가 했으나 난전 끝에 격파되었다. 영국군은 시러큐스 인근에서 이탈리아의 나폴리 보병 사단이 반격에 나섰으나 이를 쉽게 격퇴한다.

중요한 진격 루트인 피아노 루포 사거리에서는 이탈리아군 전차 20대가 진입하였으나 강하한 소수의 공수부대가 해군의 함포사격과 제16연대전투단의 도움에 힘입어 격퇴시켰다.

3.2.2.1 겔라 전투

겔라 인근에서 이탈리아 해안 방어 부대의 저항이 일소된 후 이 해안에 미 제1 보병 사단[12]과 제45 보병 사단이 상륙한다. 이에 독일군은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주변에 주둔하던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제4 산악보병 사단을 동원하여 겔라를 향해 반격을 시도했다. 당시 미 7군은 2~4마일 정도의 깊이밖에 교두보를 형성하지 못했고, 더욱이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도 있었고 해안이 가득차 탱크와 같은 중장비를 하역하려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시도도 실패했기 때문에 티거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겔라에 상륙해있던 미 1사단과 45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는데[13], 그 순간 뒤에서 포탄이 날아와 티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글리브스급 구축함 슈브릭(Shubrick)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스(Boise)

위의 사진의 주인공인 슈브릭과 보이스가 이들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해오고 있던 것이였다. 여기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전차와 전투함 간의 포격전이다. 독일군은 탱크로 전투함과 포격전을 벌입니다!! 티거가 해안의 전투함을 향해 포탄을 발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삽질에 불과해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14], 두 전투함은 전차와의 포격전에서 전차 여러 대 파괴하고,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포격으로 인해 추축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독일의 504 전차 부대는 17대의 티거 중 14대를 손실한다. 이런 뼈아픈 손실에도 불구하고 겔라 교두보를 향해 3방향으로 반격을 가했다. 전투함의 포격 지원에도 불구하고 겔라 교두보에서 가장 취약했던 남동쪽 부근에서 독일군 탱크가 교두보에 진입하는 등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나 이를 겨우 막아낸다. 이 전투에서 겔라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하루동안 전투에서 미 육군 2,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5][16]

그 이후 미군의 피해를 보충하기 위해 패튼은 겔라 인근에 82공수사단을 추가로 야간에 공수하기를 결정했다. 그래서 수송기를 타고 겔라 인근으로 날아오는 도중 대공포 사격을 받아 400여 명이 사망하고 천 여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대공포탄의 대부분이 해군 함정에서 날라온 것이였다. 즉 팀킬이란 소리. 이 팀킬은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작전 첫날 독일군 폭격기 슈투카의 공습으로 글리브스급 구축함인 매덕스와 상륙 지원함, 기뢰 제거함 등 여러 척의 군함이 격침돼서 미 해군은 공습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는 것과, 이 공수 작전 내용이 해군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였다. 이 사건 이후로 공수 작전 중엔 대공 사격을 금지하는 지령이 내려졌다.[17][18]

4 시칠리아 전역

4.1 연합군의 진격

겔라 전투 이후 패튼은 교두보 북쪽에 위치한 고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미 1사단과 3사단을 보내 1사단이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을 상대하는 동안 제2 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은 3사단이 니스케미(Niscemi)를 점령하고, 겔라 서쪽에 위치한 리카타를 점령해 1차 목표였던 옐로우 라인까지 진격한다.

영국군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진격해 연합군은 13일 무렵에는 동쪽으로는 오거스타, 서쪽으로는 비치니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지형상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데다 프랑스로부터 독일군 정예인 제1팔쉬름예거 사단이 증파되었기 때문에 돈좌된 상태였다. 지지부진한 진격에 넌덜머리를 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알렉산더 장군에게 패튼의 미 7군과의 서쪽 경계선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즉, 지금 적의 방어선이 굳건하니 적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시칠리아 중부로 찔러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7월 13일 자정에 알렉산더 장군은 패튼 장군에게 경계의 변경을 통고했고 미 7군은 124번 고속도로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영국 8군의 일부가 124번 고속도로를 통해 엔나로 진격했다. 엔나는 중부 시칠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길목이었고, 북동쪽 메시나로 진군하기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알렉산더 장군은 노골적으로 영국군을 미군과 독일군 사이에 끼워 넣어 메시나를 먼저 탈환함으로써 시칠리아 해방의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의도를 내보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미 7군은 영국군의 서쪽 측후방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는데다 영국군이 대놓고 미군 햇병아리들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인 셈[19]이라 그 성질머리 더러운 패튼의 속은 부글부글 끓게 되었는데... 더군다나 124번 고속도로로 잘 가고 있던 미군을 강제로 끌어내고 영국군을 보낸 참이라 카타니아에서 엔나로 이어지는 추축군 방어선이 구축될 시간이 생겨버렸다. 결국 그대로 미 7군에게 맡겨두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고, 알렉산더 본인이 승인을 내리기는 했지만 몽고메리가 강하게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패튼은 몽고메리에게 이를 갈게 되었다.

4.2 미군의 서부 평정

당연하게도 패튼과 미군 장성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당연히 영국 8군의 측면을 따라 옐로우 선을 넘어 중부 시칠리아를 거쳐 북부 메시나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장군의 일방적인 통고로 인해 그 희망은 산산조각났으며, 따돌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평범한 장군이라면 그저 분을 삭이고 순순히 영국군의 의도에 맞춰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 7군의 지휘관은 다름아닌 조지 S. 패튼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주도권을 강탈해 올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 7군의 목표가 정해졌다. 미 7군은 팔레르모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수도로서 정치적인 중요성도 상당히 높을 뿐더러 미 7군이 재보급을 받고 작전을 속행할 수 있는 새로운 군항 및 거점이 될 수 있었다.

패튼은 먼저 알렉산더 장군을 꼬드겨 3사단 수 마일 앞인 아그리젠토로 '정찰'을 나가겠다고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정찰'을 나갔던 트루스캇 장군은 아그리젠토를 '점령'하게 되고, 아그리젠토는 미 7군이 시칠리아 북동부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된다. 패튼은 그대로 알렉산더의 사령부로 쳐들어가 자신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한 편 브래들리 장군의 2군단을 북쪽으로 보내 섬을 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알렉산더 장군은 마지못해 승인했지만 이내 미 7군은 몽고메리의 좌측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으로만 가고 서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20]. 당연히 패튼과 미군 장군들은 뿔이 단단히 나 있었기 때문에 메시지를 상큼하게 씹었다. 핑계도 걸작인데 알렉산더의 메시지가 혼선을 빚어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그 메시지가 정확히 밝혀졌을 때는 이미 패튼이 팔레르모의 정문에 있었다는 것이다.

7군의 서부전선은 동부의 영국군 전선과는 달리 거의 저항이 없었다. 구초니 장군은 연합군이 침공하자마자 제15 장갑척탄병 사단의 증파를 요청했지만 이 시점에 시칠리아 서부에 남은 병력은 전의를 거의 상실한 이탈리아군 병력 뿐이었다. 브래들리 장군의 2군단이 시칠리아를 북으로 종단하는 사이 패튼은 제82공수사단과 제2기갑사단, 제3보병사단을 임시 군단으로 묶어 조프리 장군에게 맡기고 서부로 진군을 개시했다. 72시간만에 팔레르모가 떨어졌고 7월 24일까지 시칠리아 서부는 완전히 평정됐다. 미군은 272명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400대의 차량과 53,000여 명의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4.3 연합군의 메시나 진격

7월 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적들에게 축출되었다. 원래부터도 허스키 작전을 통해 파시스트 정권에 타격을 주고자 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급격한 상황 변화는 연합군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무솔리니의 실각이 단번에 종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Axis)의 근간을 흔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팔레르모가 함락되고 미 7군이 섬의 서부를 완전히 평정하자 알렉산더 장군도 별 수 없이 7월 23일 패튼에게 메시나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8군이 카타니아에서 돈좌된 상태로 도저히 단독으로는 메시나로 갈 수 없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산더 장군은 양군의 경계선을 다시 그어 패튼이 메시나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몽고메리는 계속 남부에서 공격하도록 조치했다.

메시나 공략전은 여태까지 패튼이 보여준 정석적인 기병전술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메시나는 험준한 카로니에 산맥과 에트나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진격하기 더러웠고 영국군이 뻘짓하며 벌어준 시간 덕분에 카타니아를 기점으로 북쪽으로는 해안선인 산 프라텔로까지, 동쪽으로도 해안선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선도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휘하 대다수의 이탈리아군을 상실한 구초니 장군이 아무리 시칠리아를 사수해야 한다고 우기더라도 독일은 점진적으로 시칠리아에서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점부터 시칠리아 추축군의 작전권은 독일군 제14기갑군단장 한스 후베에게 넘어간다.

후베 장군은 점차 에트나까지 물러설 의도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점차 퇴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러서서 방어선을 줄이고, 줄어든 방어선에서 빠질 수 있는 병력부터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로 물러난다는 계획이었다. 후베 휘하에는 이탈리아 잔존병력, 제1팔쉬름예거 사단,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제15장갑척탄병 사단, 제29장갑척탄병 사단이 있었다.

메시나까지 이어지는 통로는 협로 4곳이 있었고 이중 둘은 에트나를 거치지 않고 메시나까지 직접 이어졌다. 영국 8군의 일부는 에트나 산 서쪽 능선을 끼고 도는 아드라노와 란다초를 잇는 가도를 통해 진군했으며 나머지는 동부 해안선의 114번 도로를 따라 메시나로 진군했다. 미 7군에게는 니코시아-트로이나-란다초를 잇는 내부 축선의 120번 도로와 북부 해안을 통해 바로 메시나와 이어지는 113번 도로가 주어졌다.

패튼의 주의를 끈 것은 에트나 방어선 거칠 것 없이 바로 메시나로 이어진 113번 도로였다. 영국군이 미군을 얕잡아 봤다는 것에 단단히 열받은 패튼은 메시나로 먼저 도착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패튼은 이 113번 도로로 진군하는 45사단장 미들턴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이번 경주는 미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반드시 영국 놈들보다 먼저 메시나를 점령해야 한다. 귀관이 우리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러나 패튼의 애가 타든 말든 진척은 매우 느렸다. 날이 더워서 병사들이 열피로로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말라리아까지 돌아서 1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감염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추축군이 산악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미군은 북쪽 113번 도로로 45사단을 진군시키는 한 편 내륙 쪽 120번 도로로는 1사단을 진군시켰다. 45사단이 산토 스테파노의 '피의 능선'[21]을 차지하자 45사단을 트루스캇 장군의 3사단과 교대해 주었다. 1사단은 니코시아를 점거하고 트로이나를 점거하면 교대될 예정이었으나...

4.4 트로이나 전투

시칠리아 전역에서 가장 처절하면서도 가장 규모가 큰 트로이나 전투가 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나는 추축군이 설정한 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으므로 독일군 제15장갑척탄병 사단과 이탈리아군 아오스타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미군 1사단은 9사단으로부터 제39보병연대를 증원받았다. 이 39연대가 7월 31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방어선 돌파에 실패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가 잘 감제되는 고지에서 참호를 깊게 파고 눌러앉아 있었으며 인근은 불모지라 마땅한 엄폐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하기에는 정말 더러운 조건이었는데, 이에 미군은 대규모 포병을 운용했다. 105mm 견인곡사포 9개 대대, 155mm 곡사포 6개 대대, 155mm 롱톰 곡사포 1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대는 총 165개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연합군 특유의 공습이 더해졌다. 이러한 대규모 포병 화력과 항공기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6일간 서로 박터지게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이는 2군단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1사단장 테리 앨런 장군을 당황시켰다.

전투 도중이던 8월 2일, 지휘부는 지지부진한 상태를 깨고자 존 보웬 대령의 1사단의 26연대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쪽 2마일 후방에 위치한 몬테 바실리오[22]로 우회시켰다. 물론 독일군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아서 강력한 포화를 뒤집어썼으나 1개 대대가 먼저 들어가 포화를 얻어맞으면서도 진지화에 성공하여 추축군의 뒷목을 잡아챈 격이 되었다. 바로 그날 오후 독일군 제29장갑척탄병 연대가 반격을 개시했으나 26연대 병사들의 분투와 포병의 화력지원으로 격퇴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에서 되도록 시간을 오래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26연대를 몬테 바실리오에서 치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포병 화력을 집중시키는 한 편 끊임없이 공격부대를 파견했으나 8월 5일까지도 26연대를 몰아내지 못했다. 이러는 중에 26연대는 상위부대인 1사단과는 사실상 단절된 채 고립된 데다 기껏 시도한 항공 보급도 시원찮아서 보급품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인명 손실도 심각해서 1개 중대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 17명 뿐인 중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독일군 보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는데, 제임스 W. 리즈 일병[23]은 자신이 뛰쳐나가 기관총좌의 시선을 끌고는, 자신이 소속된 박격포반이 3발 남은 포탄을 쏘도록 유도하여 마지막 포탄으로 기관총좌를 끝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적의 집중포화에 전사하기 전까지 그는 끈질기게 사격하며 저항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그에게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8월 5일까지 26연대를 몰아내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된 데다, 규모가 9사단 39연대로 증강된 1사단의 파상공세로 인해 제15장갑척탄병 사단은 매우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결국 후베 장군은 15사단을 물렸고, 8월 5일 밤에 추축군은 철수한다. 그리고 드디어 1사단은 힘겹게 휴식을 쟁취하여 후방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

4.5 메시나 점령

1사단이 트로이나에서 분투하는 동안 3사단도 추축군 에트나 방어선의 최북단인 산 프라텔로에서 제29장갑척탄병 사단의 저항과 마주쳤다. 트루스캇 장군은 정면돌파를 하는 대신 소수의 부대를 적 후방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선택했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29사단의 주력이 이미 간밤에 빠져나간 뒤인지라 1,000명의 포로를 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사단은 8월 11일 재차 이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이번에는 투입된 침투부대의 규모가 너무 작아 29사단의 철수를 막지 못했다.

이후로는 독일군이 지뢰밭을 조성한 탓에 진군이 늘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베 장군의 추축국은 속속들이 메시나 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8월 16일에 최후로 후방상륙을 다시 시도했으나 '내리고 보니 아군 후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결국 17일 살아남은 모든 추축군이 시칠리아를 떠났고,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지 한 시간 쯤 지나서 미군 3사단 7연대가 가장 먼저 메시나에 입성했다. 패튼은 혹시나 영국이 전공을 가로챌까봐 윌리엄 이글스 장군의 증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패튼의 걱정과는 별개로 영국군은 패튼이 메시나의 공식적인 항복을 접수한 뒤에나 등장했다. 패튼으로서는 완벽한 승리로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한 셈.

5 결과

메시나의 점령과 함께 시칠리아 전역은 완전히 끝을 맺었다. 미군이 서부를 완전히 평정한데다 추축군이 침착하게 병력을 온존하며 퇴각한 덕분에 잔당 소탕도 거의 필요 없었다.

시칠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사실상 지중해의 제해권은 완전히 연합군으로 넘어갔다. 애초에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지중해에서 산발적인 저항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추축군의 주력의 상당수가 무사히 이탈리아 본토로 탈출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반쪽짜리 승리에 그치고 만 셈이 되었다. 퇴각전 지휘를 맡은 한스팔렌틴 후베 장군이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면서 차근차근 병력을 물렸기 때문에 추축군은 비교적 온존한 병력으로 본토에서 저항을 이어가게 된다. 더군다나 메시나 해협 건너편에 해안포로 도배를 해 버려서 연합군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패튼은 이번 전역으로 완전히 몽고메리라면 이를 갈게 됐으며 몽고메리도 자신이 노린 전공을 가져간 패튼을 경계하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몽고메리는 자신이 보여준 이기적인 처신 때문에 많은 미군 장성들과도 척을 지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으로 대부분의 장병들과 잘 어울렸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 조차도 몽고메리라면 학을 땠다.[24]
  1. 영국 지중해 항공 사령관 겸 연합 공군 사령관
  2. 영국군 제15 집단군 사령관
  3. 캐나다 제1 보병 사단장
  4. 처칠철의 장막발언에서 알 수 있다시피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5. 당시 시칠리아에는 남동해안을 따라 비행장이 여럿 들어서 있었고, 팔레르모같은 항구 도시들이 발달해 있어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어도 딱 중앙에 위치한 시칠리아로 인해 수송로가 위협받을 수 있다.
  6. 제 2군단(제1 보병사단, 제3 보병사단, 제45 보병사단) 지휘
  7. 제 13군단(제5 보병사단, 제50 보병사단), 제 30군단(캐나다 제1 보병사단(제3 보병사단이란 이름으로 참전), 제231 독립 보병 연대, 제51 보병사단) 지휘
  8. 제 12군단, 제 16군단, 4개 보병사단 지휘
  9.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 예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노르망디 공수 이후의 상황
  10. 파랑색이 연합군, 초록색이 이탈리아군, 주황색이 독일군, 낙하산 기호는 공수지역, 비행기 기호는 공습
  11. 상륙 병력 수만 따지면 노르망디 상륙작전(8만 명)보다 더 큰 규모다.
  12. 빅 레드 원으로 유명한 사단 맞다.
  13. 1사단과 45사단은 포병과 해군의 함포사격 등 화력지원 이외에 기갑 전력의 지원은 전혀 받지 못했고, 취사병, 행정병, 해군의 연안 요원까지 전부 전투에 투입될 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고 한다.
  14. 당연한 것인데, 티거의 88mm 주포는 육상에서야 공포의 대전차포였지만 해군에게는 함대의 가장 작은 군함인 구축함의 주포만도 못한 포였다. 당장 우습게 보이는 구축함도 주포는 5인치가 많았는데 5인치면 127mm이고, 이런 포조차 안 먹히는 경우가 많은 군함들에게 88mm는 애교다.
  15. 지옥도라 불리는 이오지마 전투의 첫날 상륙전에서 미 해병대 2,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겔라 전투의 사상자와 비슷한 숫자
  16. 겔라 전투의 사상자가 시칠리아 전역에서 연합군이 입은 가장 큰 피해다.
  17. 이 사건은 패튼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이는 항목 참조
  18. 이 아군 오사는 메달 오브 아너: 에어본에서도 묘사된다.
  19. 위의 피해 규모만 참고해도 알겠지만 전혀 근거없는 편견이었다. 어찌 보면 영국군보다 훨씬 잘 싸웠다.
  20. 즉, "팔레르모 먹지 마!"
  21. 격전지가 능선이면 항상 붙는 별명이다.
  22. 이름을 보면 유추하겠지만 산이다.
  23. Private. 이병일 수도 있으니 아시는 분이 수정 바람
  24. 물론 이러한 반목이 이후 작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인 반목이라고 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