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위서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하후돈하후연조인조홍조휴조진하후상


曹眞
(? ~ 23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자는 자단(子丹). 조조조카.

1.1 정사

1.1.1 아버지의 죽음

위략에 따르면 조진의 원래 성은 조씨가 아니고 진씨였다고 한다. 위략에는 이 부분을 '일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진의 부친 진백남은 조조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조조가 원술와 싸우려고 출병하였다가 도적에게 쫓겨 진백남에게로 달아났는데, 진백남이 문을 열고 조조를 받아들였다. 도적이 조조가 있는 곳을 묻자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여 (조조 대신) 죽임을 당했다. 이에 조조가 그 공적을 기려 성씨를 바꾸었다.

위서에는 "소(邵)는 충성하고 도타우며 재지가 있음으로써, 태조(조조)의 사랑과 믿음을 받았다. 초평 중, 태조가 의병을 일으키자, 소는 무리를 모아 태조를 좇아 떠돌았다. 당시 예주자사 황완이 태조를 죽이려 하였고, 태조는 이를 피하고 소만 해를 받았다."라고 적혔다. 조소가 본디 진씨라는 말은 없다.

위략과 위서의 말을 비교해 보면 조진의 부친이 죽은 시점이나 조소를 죽인 사람이 서로 다르다. 조진전에서 조진의 부친이 주·군(곧 지방 정부)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과 비교해 보면 조소를 죽인 자로 조정의 예주자사인 황완을 지목하는 위서의 설이 더 그럴 듯한데, 그러면 조소가 진백남이라고 하는 설 자체도 위략에 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삼국지 팬덤에서는 위략의 설에 배송지가 이의를 안 달아서 조진은 본디 진씨였다고 생각하는 편.

1.1.2 위나라의 중진

조조는 조진이 어려서 고아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서 여러 자식들과 함께 길렀는데 조비와 함께 하도록 했다. 그는 호방하여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자 뒤돌아 활을 쏘아 호랑이를 쓰러뜨린 일이 있었다. 조조가 조진의 용맹함을 장하게 여겨 최정예기병인 호표기를 이끌게 했다.

영구(靈丘)의 도적을 토벌하여 영수정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편장군으로 군사들을 지휘해 유비의 별장(別將)을 하변(下辯)에서 공격해 깨뜨리고 중견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하후연의 사후에 정촉호군으로 임명되어 한중 공방전에서 서황 등을 지휘해 양평관의 유비군의 장수 고상을 격파했다.

조비 즉위 후, 장진(張進)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칙이 토벌하는 것을 비요를 보내 도왔다. 또한 조비의 오나라 정벌에서도 동행했다.

1.1.3 아이덴티티: 비만

조진은 정사에 따르면 비만이었다고 전하며 오질이 이를 놀렸던 일화도 있다.

224년, 조비가 연 연회에서 조비가 총애하는 오질은 광대로 하여금 조진이 뚱뚱하고 주삭은 빼빼하다고 놀리게 하였다. 조진이 수치스러워

"공은 나를 부곡장[1]으로서 대우하려는 것인가?"

라며 화를 내자 조홍왕충마저 은근히 오질 편을 들며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걱정해서 살을 빼라고 말한 것이라며(...) 살을 빼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둘은 조비에게 제대로 찍혀 있던 상태였고 실제로 피를 본 전적이 있는지라, 조비가 총애한 실세였던 오질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조진이 칼을 빼 들고 욕하며 광대를 죽이겠다고 하였다.[2] 오질도 칼을 어루만지며

"조자단, 푸줏간 돼지고기 같은 자여. 너는 상 위의 고기도 썰지 못한다. 오질은 너를 삼켜도 목구멍도 안 떨리고 너를 씹어도 이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감히 세를 믿고 교만하게 구느냐?"

라고 말했다.

보다 못한 주삭이

"폐하께서는 우리더러 경을 즐겁게 하길 바랐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시오?!"

라고 외쳤다.

오질이 되려 주삭까지 꾸짖으니 주삭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자리에 찍었다. 결국 연회는 결딴나고 말았다고 한다.

1.1.4 제갈량의 1차 북벌

조비가 나이 마흔에 죽자, 진군사마의 등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불려가 조예의 보좌를 부탁받았고 조예가 즉위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조예는 조진에게는 관서(關西)의 군대를 맡겨 미현(郿縣)에 주둔케 하고, 장합은 가정으로 나아가게 했다. 조진은 옹양 방면 지휘관으로서 곽회와 더불어 최일선에서 적을 저지했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조진은 기곡(箕谷)에서 조운등지를 격퇴하나[3] 이는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이 놓은 미끼였다. 그가 적의 의도를 읽지 못한 채, 조운 등의 의군에 낚여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으로 진출했고, 3군이 촉군에 호응하여 넘어갔으며 관중 방면 위군의 진입로인 가정까지 탈취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장합이 가정에서 마속을 깨트렸고 제갈량은 물러났다. 조진은 촉나라에 호응한 3군을 직접 쳐서 항복을 받아내어 뒷정리를 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그러나 조진은 제갈량에게 낚였던 탓인지[4] 1차 북벌의 논공행상에서도 장합, 곽회, 유초와 달리 조진은 제외되었고 (조진전), 명제(조예)가 1차 북벌 이후 발표한 포고문에서도, 장합이 거둔 가정 방면의 승리를 강조할 뿐, 기곡의 전공은 취급하지 않고 있다. (명제기)

1.1.5 제갈량의 2차 북벌

조진은 기산 루트가 공고해졌으니 제갈량이 다음에는 반드시 진창 쪽으로 올 것이라 여기고 전략적 요충지인 진창에 학소와 왕생을 남겨 두어 방비하게 하고 제갈량이 침공하자 비요를 보내 구원하게 하는 등 228년, 제갈량의 2차 북벌을 지연시켜 막는데 일조했다.

일단 제갈량의 2차 북벌의 결정적인 후퇴 요인 자체는 장합의 신속한 구원이었다. 조진은 오나라 견제를 위해 형주에 있던 장합에게 또 다시 방성→하남→진창의 슈퍼 장거리 코스를 선사하며 본의 아닌 민폐[5]를 끼치고 나서야 비로소 제갈량을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장합이 이끄는 관중군을 빼내어 형주 방면에 투입시킨 조예의 잘못도 있어서 조진의 탓으로만 돌리긴 뭣하긴 하다.[6] 애시당초 제갈량의 진창성 공략 자체가 이런 상황에 의해 성립된 것이고, 또 촉군의 목적이 해당지역으로 위나라의 시선을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기에 조진의 잘못으로 두긴 어렵다.

1.1.6 제갈량의 3차 북벌

진창전 직후에 전개된 229년, 제갈량의 3차 북벌에선 곽회를 지원조차 못하고 무도와 음평 2군을 빼앗겼다.[7]

1.1.7 제갈량의 3.5차 북벌

230년에 대사마로 승진하고 검리상전, 입조불추의 특전을 받았고 황제에게 촉한을 칠 것을 권하였다. 8월,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도를 따라 들어가나 큰 비가 내려 결국 소득없이 회군한다. 직후에 제갈량이 위연과 오의를 양계와 남안을 습격하도록 보내어 이 지역 위군이 패퇴하였다.[8]

1.1.8 죽음

조진은 어려서부터 일족인 조준, 고향 사람인 주찬과 함께 조조를 섬겼는데 조준, 주찬이 일찍 죽자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식읍을 나누어 주준, 주찬의 자식들에게 내려 주도록 청했다.

한편으로는 정벌 때마다 사졸들과 노고를 함께 하며, 상이 부족하면 자신의 재산마저 나눠주는 덕장의 면모도 보였다.

조진이 병에 걸려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예가 와병 중인 그를 직접 찾아 살필 정도였다. 231년, 40대의 나이에 중병으로 죽고 아들 조상이 후사를 이었다.[9]

1.2 평가

정사가 한국 대중에 보급되면서 실질을 넘는 과도한 재조명을 받은 케이스이기도 한데, 항간엔 연의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인물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위의 실책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연의처럼 심하게 무능하진 않으나 장합이나 사마의 같은 1류로 보기도 어려운 인물. 이는 친족인 조휴와도 공유하는 부분인데,

1) 일찍이 조조를 따라 종군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2) 조씨 혈연 덕분에 사령관의 지위를 차지했다.
3) 그러나 실속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4) 실질적인 군재/군공 면에서 부장과 후임들[10]이 더욱 뛰어났다는 점.

이 비슷한다.

단지 그 제갈량과 붙었다는 부분에서 과장이 붙기 쉬우나, 제갈량 시대 이전부터 하북/관중을 평정하며 명장으로 공인되던 장합과, 제갈량 사후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쌓은 사마의 중 어느 쪽과 비교해도, 조진의 알맹이는 초라한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중용되었고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는 조조란 군벌이 지방 호족들을 포섭해가며 세운 조위 정권 특성상 군부요직은 믿을 수 있는 조씨/하후씨가 철저히 장악하는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조 시절에는 헌제의 조정과 조조의 부(府)와 암암리에 견제와 대립을 거듭했고 호족들의 입김으로 선위 이후로도 탁류에 속하는 환관,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해야했던 조위 정권은 군권을 놓칠 경우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때문에 조조는 군재가 떨어짐을 알고도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삼았고 조비도 태위는 명예직으로 남기고 대사마 조인을 실질적인 군부 1인자로 세웠다. 그리고 조예 시절에는 이 역할이 조휴와 조진에게 넘어갔다. 다시말해 군재가 뛰어난 지휘관이 아니라 정권보위의 핵심인 정치군인으로서의 중요성이 높았던 인물. 하후상, 조휴, 조진이 차례로 사망하자 군권은 거대호족 사마씨에 기울었고 그 결과는 조예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터진 쿠데타였다.

1.3 연의

제갈량 북벌 파트의 온갖 굴욕을 떠안는 삼국지연의의 대표적 피해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연의에서도 공명은 조진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구상하고, 앞서 미리 계산한대로 조진이 죽자 기뻐하기까지 한다. 조진이 진짜 무능했다면 그냥 놔두고 계속 털어먹지 뭐하러 죽이겠는가? 하후무가 공명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공명을 막을 상대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진을 왕랑이 추천하였다. 조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공명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함부로 나서지 않아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병환이 깊어 자리에 누운 채 여러날을 보내던 중에 공명이 진창을 함락하자, 그는 병에 걸린 몸을 움직여 위나라를 위해 사마의에게 대도독의 인수를 위임하였다. 최후는 사마의와의 내기에서 져 부끄러움으로 병이 든 상태에서 제갈량의 도발성 편지를 받고 격분하여 가슴이 막혀 죽는걸로 묘사되는데 이는 허구다.

왕랑의 평가처럼 조진은 사마의를 제외한 위의 장수중에서 공명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연의에서도 그는 제법 유능한 장군으로 그려지나 문제는 공명에게 항상 그의 의중을 간파당해 매번 싸움에서 패했다는 것이었다.

1.4 미디어 믹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曹珍

생몰년도 미상

위나라에서 사마사조방을 폐위하고 조모를 즉위시키는 등 전횡을 부리자 255년에 관구검, 문흠 등이 거병해서 이에 대항하면서 악가에서 싸웠는데, 이 때 손준여거, 유찬 등과 함께 수춘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문흠이 위군에게 패해 투항하자 정봉을 호위장군으로 삼고 손준을 따라 수춘에 가서 맞이하도록 하면서 오군은 수춘을 공격하려 했는데, 제갈탄이 수춘에 들어갔기에 군사를 물리게 되었다. 이 때 여거, 정봉 등이 돌아가는 길에 조진은 이들을 추격했다가 고정에서 싸웠지만 정봉이 적의 진중에 돌입해 수백 명의 머리를 베는 등의 활약을 해서 격파되었고 이로 인해 군기들을 빼앗겼다.

2.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 6에서는 관구검, 문흠의 난에서 등장해 후편에서 제갈탄과 함께 관구검군의 본진에서 관구검, 관구중 등을 공격해서 싸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관구검이 도망가고 제갈탄이 수춘을 함락하면서 조진이 문흠, 문앙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되어 내 추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말했으며, 문흠 부자를 구하기 위해 오군에서 파견된 정봉에게 한 칼에 썰린다.
  1. 오질이 부리던 부하 장수 정도의 계급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니 시다바리가?
  2. 오질에게 직접 욕을 하지 못하고 애둘러 광대를 겁주는 것으로 보아 조진 정도되는 중진마저 오질의 권위를 함부로 대할 수 없던 것이다. 조비의 삼촌이자 개국공신인 조홍조차도 은근슬쩍 오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진을 달래는 것을 보았을 때 조씨일족을 웃도는 권세였던 것이 확실하다.
  3. 조운은 패하였기에 진군장군으로 강등 당한다.
  4. 사실 이것은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큰 실책이었다. 1선에서 해결을 못 보고 지원이 파견되고 나서야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새가 조직에서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보자.
  5. 장합을 파견한 것은 조예지만, 조진의 선에서 정리가 될 상황이었다면 굳이 반대편 전선에 있던 장합을 천릿길로 보낼 이유가 없다.
  6. 장합전에 보면 조예가 친히 하남성으로 행차해 수도방위병력과 본인의 호위병까지 긁어서 장합에게 주고 이렇게 더디게 출발하면 진창성 떨어지는거 아니냐고 묻는 부분이 있다. 조예가 상당히 다급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장면.
  7. 이 지역은 과거 조진 본인이 유비에게서 지켜낸 지역이다.
  8. 조진은 옹양제군사를 역임한 인물이자, 당대의 중외제군사였으므로 해당 지역은 그가 전담하던 방면이었다.
  9. 그러나 그의 아들 조상, 조훈, 조희, 조언호부견자 케이스를 타고 말았다.
  10. 조진의 경우엔 장합-사마의, 조휴의 경우엔 가규-만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