審配
(? ~ 204년)
목차
1 개요
중국 후한 말의 문관. 원소 세력의 정치가. 자는 정남(正南). 기주 위군 음안현 출신.
특이한 점으로 원소의 핵심 참모들 중 전풍, 곽도, 봉기, 신평, 허유, 순심은 책사로서의 면모만 보이지만 심배는 일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의 정체성도 확실하다는 부분.
2 정사
2.1 원소 생전
심배는 어렸을 때부터 열혈타입에 정의감이 불 같아 의롭지 않은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통 사람들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백이 강했다고 한다. 한복이 기주목이 되었을 때는 올바른 성격 탓에 소외되었으나 곧 한복을 몰아내고 기주를 장악한 원소는 심배를 중용했다.
원소는 개인적으로도 심배를 좋아했는지 속마음을 드러내 맡기며 크게 신임했다고 한다.
191년 이후로 199년 무렵까지 행적을 알 수 없으나 막부를 총괄했다는 기록이 있고 심배가 처음에 임명된 치중이라는 관직도 주의 서류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군사나 정치적인 분야보다는 실제적인 행정 분야쪽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셔틀
199년, 공손찬을 격파한 원소는 곧 조조를 칠 계획을 세웠다. 저수와 전풍이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곽도와 심배가 주장한 단기결전 전략을 채용한다. 또한 저수가 곽도에게 탄핵되어 감군이 폐지되고 삼도독으로 그 권한이 분할되는 등 원소 진영의 2인자였던 그 위세를 잃게 된다. 원소는 남하를 위해 군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심배는 봉기와 함께 군사업무를 총괄했다고 한다.
이 무렵 조조 진영에서도 원소와의 대치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공융은 원소 휘하의 장수들을 칭찬하며 이기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내놓았는데 심배와 봉기를 원소의 충신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순욱이 공융에게 반박하면서 심배는 고집불통에 융통성이 없으며 봉기 역시 과단성은 있지만 자기 판단에만 따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이듬해, 마침내 남하한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고 차츰 원소에게 밀려나다가 관도에서 고립된 조조는 멸망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전쟁 막판에 원소의 모사였던 허유가 배반하여 조조에게 투항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허유가 자식과 조카들을 시켜 횡령 등의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심배에게 발각되어 가족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관도에서 참패한 원소는 한때 생사조차 불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원소의 영지에서도 수많은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원소는 병사들을 수습해 기주로 돌아왔고 반란군들을 모조리 격파하여 평정했는데 이 무렵 원소는 전풍을 죽였다.
관도대전에서의 패배로 심배의 두 아들이 조조에게 사로잡혔는데, 맹대는 평소에 심배와 불화해 장기와 함께 심배는 정치를 독점하는 자리에 있고 그의 종족은 크고 병사가 강하면서 두 아들이 남쪽에 있으니 반드시 배반할 마음을 품을 것이라 했으며, 곽도, 신평도 이에 동조했으나 봉기의 변호로 기각되었다. 원래 심배와 봉기는 사이가 나빴으나 이를 계기로 화해하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
이후 원소는 도독제를 폐하고 감군제를 다시 부활시켰고 감군에 심배를 임명해 심배를 크게 중용한다.
2.1.1 원소군 내의 하남계, 기주계 대립
조조가 헌제를 맞아들인 196년 무렵부터 원소 세력 내에서는 하남 출신이었던 원소와 기주의 호족인 저수, 전풍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원소는 같은 예주 출신의 곽도 등을 전폭적으로 기용하는 방식으로 저수, 전풍을 견제했다.
관도전 무렵에는 2인자였던 저수는 탄핵되어 감군에서 쫓겨나고 감군의 강대했던 권한이 삼분되어 저수/곽도/순우경에게 각각 주어졌다가 저수의 군권이 다시 대폭 축소되어 곽도에게 속하였고, 순우경, 신평, 순심, 안량, 허유, 봉기 등 심배를 제외하면 주요 간부의 절대 다수가 하남 출신으로 이루어졌고,전풍은 형틀에 묶여 투옥되는 등 기주계는 완전히 발려 하남계가 폭주하다시피 위세를 부렸다.
이때 심배는 기주의 유력한 호족이면서도 같은 입장이던 저수, 전풍과 달리 원소의 충성파를 자처했기에 중용되었다. 관도에서 참패해 위상이 반감한 원소가 감군을 부활시켜 호족이었던 심배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1]
심배는 원소와 대립하던 전풍, 저수와 달리 원소 라인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같은 원소와 같은 하남계인 곽도, 신평과는 대립관계였는데 관도전 무렵까지 절정의 위세를 누리던 곽도 파벌은 관도전의 패배가 원인이 되어 설 자리를 잃고 점점 쇠퇴하자 원소에 의해 청주로 쫓겨났지만 중앙 복귀에 나름대로 야심도 있고 심배와도 사이가 나쁜 원담을 부추기며 아첨하기 시작했다.
심배는 역시 하남 출신인 봉기와도 사이가 나빴는데 곽도, 신평이 관도전에서 심배의 두 아들이 조조에게 인질로 잡힌 것을 이유로 심배를 참언하는 맹대와 장기에 동조했는데, 봉기가 심배를 변호하여 끝내 심배를 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소는 이렇게 심배를 중심으로 기용해 내부를 다지는 듯 했다.
2.2 원상 옹립
원소는 병이 들어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급사해버렸다. 원소는 생전에 원담을 폐출시켜 일찌감치 후계에서 잘라버렸고 막내아들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당시 원상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기주 안에서는 곽도와 신평 등을 중심으로 해서 어린 원상보다는 원담이 후계자에 더 적합하다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봉기 역시 평소부터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곽도, 신평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심배와 함께 선수를 쳐 기주를 장악하고 있지도 않은 원소의 유명을 만들어내 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뒤늦게 업에 도착한 원담은 원소의 뒤를 계승할 수 없게 되자 군사를 여양에 주둔시키며 거기장군을 자칭했는데 거기장군은 원소가 처음 거병해서 반동탁 연합의 맹주가 되었을때 칭한 관직이므로 이는 자신이 원소의 후계자라는 공식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원상은 중재역으로 봉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조조가 원소의 부재를 틈타 쳐들어오려는 정황이 감지되자 원담은 원상에게 지원군을 요구한다. 심배는 원상에게 거듭 진언하여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고 이 결과 대노한 원담은 봉기를 참수한다. 이에 원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담을 구원했고 심배는 남아서 업을 지킨다.[2]
원상은 한때 고전했으나 마침내 조조를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원담이 조조를 추격해 궤멸시키자고 제안하나 원상은 이를 의심해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담군에 대한 무기와 병력의 보급을 중단하며 청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2.3 원가 내분
원담은 대노했으나 폐출된 신분으로 정통인 원상을 거스를 명분이 없어 속으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원담한테 곽도와 신평이 "선공에게서 장군이 폐출된 것은 모두 심배가 계책을 꾸며 이간질했기 때문"이라 모함하자 빡돈 원담이 마침내 군사를 끌어모아 원상을 습격했지만 결과는 역관광... 도망친 원담은 다시 군사를 모아 업을 노리는데 이때 원상군은 심배가 주축이 되어 원담을 완전히 털어버렸다고 한다.
참패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근거지인 평원군마저 포위되기에 이른 원담은 정면대결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북상해온다.
한편 업에서는 원담이 원상과 싸우다 패하여 달아난 후, 원상과 심배는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온다. 곽도와 신비의 일족은 업에서 탈출했지만 신평의 일족은 사로잡혔다. 이들은 인질로 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심배는 성문이 열려 조조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곤 곽도와 신평 형제가 참언으로 기주를 망치게 된 것에 이를 갈며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 인질로 잡혀있던 신평의 일족들을 모조리 죽인다.
원상과 심배는 조조와 대치한다. 심배는 원담이 원수와 손을 잡은 것을 질타하며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베고 화해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원담은 이를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곽도에게 실권이 넘어가 겁박당하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이를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별 접전을 벌이지 않은 채로 조조가 다시 황하를 건너 철수한 뒤 물길을 바꿔 군량 수송로를 통하게 하는 등 장기전을 준비하자 원상은 심배를 남겨 업을 지키게 하고 직접 출군해 평원의 원담을 공격했지만 조조는 원상의 부재를 틈타 다시 북상해 기주에 도착했다. 이때 심배와 같이 업을 지키던 소유는 조조에게 호응하며 업을 넘기려 했지만 심배에게 음모가 적발되어 실패했고, 군사를 이끌고 업 내에서 심배와 시가전을 벌였으나 패해서 조조에게 달아났다.
조조가 업을 포위하자 심배는 처음에는 이를 잘 막아 싸웠지만 마침내 조조가 수공을 펼쳐 업을 수몰시키자 성 안의 아사자가 절반을 넘는다. 병주의 고간은 업의 구원에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마침내 원상이 돌아와 심배와 협공해 조조를 물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참패하여 원상은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단기로 도망치게 된다. 이를 지켜본 고간은 마침내 원상을 배반해 독립했고 업의 사기는 무너져 내린다.
심배는 조조군도 지칠대로 지쳐있으며 곧 유주에서 원희가 지원군을 보내올 것이라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조조가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하는 것을 보곤 숨겨 놓았던 쇠뇌를 일제히 쏘게 해 조조에게 화살 몇 발을 맞히며 부상을 입히기도 했으나 조조는 목숨을 건진다.
이때 심배의 조카인 고자 심영이 조조에게 배신하여 성문을 열었고 조조군이 물밀듯 들어오자 심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끌고 조조군에 대항했지만 잡히고 포로가 된다.
2.4 죽음
신비는 업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일족들을 풀어주려고 감옥으로 향했지만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3] 그 날 사로잡힌 심배가 조조에게 호송되어 가는 것을 보고 신비는 그를 말채찍으로 때리며 "이 살인마, 네 놈은 이제 죽었다."라며 분노를 터뜨리자 심배는 "이 개같은 놈아! 너 때문에 조씨가 우리 기주를 격파하게 되었으니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조가 끌려나온 심배에게 심배의 조카 심영이 조조와 내통했음을 알려주자 심배는 심영의 용렬함에 한탄했다. 또한 조조가 말하길 . "전에 내가 성에 갔을때 무슨 궁노를 그렇게 많이 쏘았소?"라며 자기를 쏘아 죽일 뻔한 일을 얘기하자 "너무 적었던 것이 한스럽다."라고 쏘아붙힌다.
조조가 심배의 능력과 기백이 아까워 "경이 원씨 부자에게 충성한 것처럼 또 나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라고 설득했으나 심배는 이미 굽히는 말이 없었고, 신비 또한 원수를 제발 죽여달라고 읍소하길 그치지 않으니 조조는 결국 심배를 참수했다.
먼저 조조에게 항복했던 기주 사람 장자겸은 심배와 사이가 나빴는데, 심배를 보곤 비웃으며 "이보오, 정남. 그대도 나와 같이 하는게 어떻소?"라고 말하자 심배는 "너는 항복한 포로가 되었고 나 심배는 충신이 되었으니,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그렇게 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사형을 받을 때는 "내 임금께서 북쪽에 계신다."라며 집행인을 질타해 자신을 원상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칼을 받았다. 이토록 심배는 마지막까지 허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던 데다 목소리와 기백이 장렬했기 때문에 이를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탄식했다고 한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훗날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심배를 높게 평가해 시대의 열사라며 극찬했으며, 이후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심배를 원소의 주요 막료들 가운데 끝까지 충성을 바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원소 세력 내부의 파벌 다툼을 (곽도,봉기,순우경 등으로 대표되는) 하남 출신 중심의 친위세력을 이용한 원소의 기주 현지의 (저수,전풍으로 대표되는) 토호 세력 숙청 이란 흐름으로 보는 것이 원소 세력 재평가의 일반론적인 경향이나, 기주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면서도 양 파벌의 주요인사들 전원과 극도로 사이가 나빴고, 오직 원소에게만 절대적으로 충성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상을 가진 인물. 이런 일편단심적인 면모와 비장미 넘치는 최후, 특히 원소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원상이 원소 사망 당시 십대 중반 쯤의 어린 나이였다는 정황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한때 여성향 팬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한 여자만을 지켜주는 나쁜남자 이미지 때문인 듯 하다.
3.2 부정적 평가
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심배의 면모는 시궁창에 가까운데, 우선 순욱은 심배를 무모하고 고집불통인 인물로 평했으며, 기록을 통해 살펴본 심배의 행적 역시 이와 들어맞아서 원소의 열렬한 추종자였지만, 대국적인 시야가 넓다고 보긴 어렵고, 의협심이 강해 불의를 참지 못했다곤 하나 정작 본인도 일족들을 주요 관직에 임용시켜 정치를 독점하며 강대한 권력으로 재산을 쌓아올렸고 사사로이 법을 어긴 죄인들을 보호하며 파벌을 키우는 등 원소의 비호를 믿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그러면서도 경쟁 계파라 할 수 있는 허유나 신비의 실책에 대해선 가차없이 처벌하는 등 고결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야심이 강했으며 정치싸움이 가장 심했다. 남에 대해선 견제질이 심했지만 자신의 편에는 관대한 전형적인 내로남불형 인간.
결정적으로 삼국지와 후한서에 공통적으로 서술된 심배의 원상 옹립 동기는 원소가 후사를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급사하고 나이 많은 원담의 계승이 중론이 되자, 평소부터 사이가 나빴던 원담의 집권으로 정치적 보복이 올 것이 두려워 그 승계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내세운 것이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원상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 달리 애초에 원상과 별로 가깝지도 않았으며, 그저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어리고 만만한 원상을 허수아비로 내세웠다고도 해석할 수 있어서 일편단심의 충신 이미지 또한 크게 퇴색된다.(...)
생전에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켜 죽은 백부의 아들로 입적시키며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없도록 못 박아뒀으며 원상을 후계자로 할 뜻을 밝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심배가 있지도 않은 원소의 유명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당시 원상이 나이가 어렸고, 만약 원상의 원복(=성년식)이 있기도 전에 원소가 죽었다면 원상은 적자로 족보에 올라갈 수도 없고 원소의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주장할 수도 없게 된다. 심배가 조작한 원소의 유명이라는 것이 원상의 관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심배는 단지 원담의 집권이 싫다는 이유로 원소가 결정하지도 않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지어 어린 원상을 옹립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원상의 어린 나이와 심배의 입지를 생각해볼때 원상의 강경한 반응은 심배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원담과 곽도만 죽일놈인 것처럼 기술된 곳이 많지만 심배 역시 권력욕이 상상을 초월했으며 실질적으로 원가의 분열에 적극적이었다. 권력욕을 가진 것과 대조되게 충성심도 있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보신만 챙겼던 황호, 잠혼 같은 쓰레기 부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었지만 결국 그게 국가 전체적으론 악영향을 끼친 관정과도 비슷한 케이스.[4]
원소 사망 당시 원상은 자체적인 입지가 없었고, 원담과 사이가 나쁜 심배가 원담의 집권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옹립했다는 점, 곽도,신평이 원담에게 내전을 부추기면서 이간한 대상이 원상이 아닌 심배라는 점, 조조가 개입한 시점에서 화해를 위해 원상 진영에서 원담에게 보낸 서신도 원상이 아닌 심배의 이름으로 보내졌다는 등으로 사료 번역이 충실히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도 원소 사후 원씨 형제의 내전이 실질적으로는 심배와 원담의 대립이었다는 의혹의 눈초리는 많았으나, 번역된 심배의 서신[5] 내용을 요약하면 심배는 원담과 곽도를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과 동시에 조조의 북상이란 위기 상황에 대해 원상의 유약하고 무른 태도[6]로 인해 원담을 조기에 제압하는데 실패하면서 조조의 개입을 허용했기에 생긴 일로 분석하고, 원담이 곽도의 머리를 바치며 투항하지 않으면 군을 내서 원담으로 인한 해악을 쳐 없애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데, 심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담을 죽이거나 배제할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던 초강경파였고, 원상은 오히려 내전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던 온건파에 가까웠다는 점이 교차검증되는 정황상으로도 설득력이 높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까이게 되었다.
3.3 중도적 평가
연의를 필두로 해서 역사적으로는 내전에 소극적이었던 원상이 되려 내전을 주도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가고, 실질적인 주동 인물인 심배는 상대적으로 이에 묻어가면서 성질은 좀 더러워도 유능한 충신 이미지만 크게 남기는 등, 같이 엮이면서 이미지 상의 손해를 많이 보기 때문에, 원상을 옹호하는 편에서는 심배의 취급이 그리 좋지 않다. 사실 내전을 정당화하던 심배의 논리는 원소 특유의 편집적인 정적 배제 성향과도 유사한 면이 있기에, 이런 이미지상의 해석에서 벗어났을때 심배에 대한 옹호는 차라리 원소빠의 그것에 가깝다.
심배의 분석대로 원상이 지나치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조기진압에 실패하고 조조의 개입을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원상의 화해 의지에도 불구하고 심배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이 워낙 모질게 원담을 몰아붙인 끝에 궁지에 몰린 원담[7]이 조조에게 항복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개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원담의 막장성을 받아주려는 원상의 유약함이 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라는 심배의 주장과 달리 심배 자신의 입지를 위해 끝까지 형제간의 싸움을 부추겼다고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신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곽도,신평의 패악질이 워낙 독보적이라 그의 실책이 주목을 못받을 뿐이다.
다만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원상을 옹립하긴 했으나, 여기에는 나름의 확실한 명분이 있었고, 원상을 옹립한 이후에 원상의 권력을 심각하게 침해하거나[8] 적당한 기회에 원상을 팔아넘기며 원담이나 조조와 협상[9]하기엔 가장 최적의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그런 짓을 하지 않음은 물론,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투항하면 후대하겠다는 조조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은 인정받을 만한 부분. 이런 측면이 후대 사가들에게 고평가를 받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지 않는 현대의 기준에서 이 정도의 고평가는 어렵겠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고 평가할 순 있다.
4 연의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 또한 심배를 높게 평가했는지, 대충 묘사하는 관도대전과 조조의 하북 평정 과정에서도 심배의 분량은 어느 정도 챙겨주는 편이고, 심배의 최후 장면에서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죽었지만 충직하고 청렴한 의인이라며 칭송하는 시도 붙여줬다.
최후의 농성전 장면이 인상깊었기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전투에서 심배의 활약으로 조조를 격퇴하며 토산과 땅굴을 파며 몰아붙인 것으로 묘사, 사실 심배는 원소를 따라 종군하지 않고 업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만 이 이후 조조군의 습격이 계속되자 원소가 심배를 업으로 보내 후방지원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는 식으로 설정 오류를 메우는 등 삼국지연의답지 않은 짓을 한다.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딸리는 무력치만 제외하고 지력과 통솔이 80대, 정치력과 매력은 70대인 다용도로 굴릴 수 있는 만능형 장수로 등장한다.
코에이 삼국지에서 일반적으로 통솔, 무력이 다른 모사들에 비해 높게 나오는 이유는 그가 책사 뿐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 싶다.게다가 서황과 일기토도 전풍, 저수는 식견은 뛰어났으나 간언만 하다가 조조군과는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숙청당했고, 봉기와 허유는 계략에 뛰어났으나 군을 이끌진 않았다. 곽도 또한 모략가이면서 전장에서 죽었으나 원담의 보좌역 이미지가 강하고 심배처럼 일군의 사령관으로 전투를 이끈 적은 없었다.
삼국지 3에서 73/72/71/67/80/75[11]으로 원소군에서 유일하게 장군,군사 둘 다 가능한 만능형 능력치를 가지고 등장. 능력치 자체는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원소군은 인재가 부족한 편이라[12] 유용하게 쓰인다. 초기 작품이라서 그런지 후반 작품과는 다르게 지력은 60대이고 무력과 통솔이 70대 밖에 안되는데, 아마 원소의 충신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 전풍, 저수와 대립하였고 연의에서 서황과 일기토를 하다가 굴욕적으로 사로잡힌 부분 덕분에 지략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B급 무장 이미지로 나왔던 듯 하다.
삼국지 5에서는 무지정매 순으로 73/69/87/75, 이상하게 지력을 60대로 돌려깎고 정치력을 87로 높여줬다. 하지만 삼국지 5는 숨겨진 스탯들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정치력 87만으로 외교나 인재담당관으로 써먹으면 망한다(...). 최초 시나리오가 아닌 이상 기본 용명이 상당하므로 원소군 전선에서 중용되는 편. 소유 진형은 어린/구행/기형으로 진형 역시 원소군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소 휘하에서는 배반도 거의 없다. 수명 등 기타 능력들은 모두 보통.
흔히 심배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짤이다. 하지만 이는 8인까지 다인 플레이가 가능한 삼국지 8에서 임의적으로 연출이 가능한데 2인 이상 플레이로 심배 및 심배와 초기 소재 도시가 같은 장수를 선택 후 내정화면에서 자택 클릭 후 연회를 실행하면 장수들을 초대할 수 있는데, 이 때 심배 외에 플레이어가 담당한 장수만 초대하고 초대받은 장수로 연회참가를 거절하면 저런 화면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저 짤은 삼국지 갤러리에서 한 때 유행했던 '삼국지 최악의 조합'이라는 짤의 하후위에서도 쓰인 적이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82/59/85/71. 분전, 연사,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전풍, 저수 다음가는 원소군 모사로서 나름 대우를 받은 셈.
삼국지 10에서도 대접을 꽤 잘 받았다. 나름대로 원소군의 주축이 될만한 인재이고 다른 세력에서도 영입해서 손해는 보지 않을만한 캐릭터다. 83/61/83/73/70의 약간 어설픈 사령관형의 능력치이나 그래도 떨어지는 능력치가 없는 나름대로의 만능 캐릭터인데다 특기가 13개나 되다보니 영입하면 여기저기 굴려먹을 데가 많다. 전쟁에서 무력보다 통솔력이 중요한 시리즈인데 상당히 높은 통솔력을 지니고 있고 지력도 저만하면 전투용으로는 충분. 특기도 군사, 기술, 치안, 화시, 일제 등 쓸 만한 특기가 많다. 특히 통솔이 83인데 군사 특기가 있다는 것은 전장에선 엄청난 강점이 된다. 전반적으로는 책사임에도 내정용보다는 전투용으로 굴리게 되는 특이한 캐릭터다. 단점으로는 무력이 61인데 명사 특기가 없고 일기토 특기 역시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직접 플레이 시엔 도적들 때문에 조금 피곤해진다는 것. 그래도 무력이 61이면 명사 특기가 없고 무력이 낮아 허구한날 삥을 뜯겨야하는 다른 책사 계열 캐릭터보다는 명사를 얻을 때 까지의 상황이 훨씬 나아서 아이템 등으로 무력을 조금만 키워주면 특급 난이도가 아닌 이상 도적들을 패면서 돌아다닐 수도 있다.
삼국지 11에선 84/61/83/73/70의 능력치로 통솔이 1상향 됐지만 개잉여 특기인 철벽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나 쓸모가 전혀 없어서.. 전풍, 저수에겐 특기도 안주더니 여기엔 개잉여 특기를 주는 거 봐서는 역시 코에이는 원소까다.
삼국지 12에서는 80/60/83/73으로 하향되었고 특기도 수집/보수/군사 뿐이라 애매하지만 대신 매우 좋은 전법인 복병을 받았다. 게다가 병과가 궁병이라서 거의 스나이퍼식으로 적을 혼란시키는게 가능하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 병과적성은 창B/기B/궁A에 전법은 궁병한정으로 발동가능한 연사. 특기는 상업(2),농업(3),훈련(3),순찰(5),언변(3),견수(5)이고 중신특성은 없다. 전법이 그다지 좋은 전법이 아닌게 아쉽긴 하지만 병과적성이 준수하고 특기도 원소군치고는 많이 받은편이라 원소군이라면 여전히 쓸만한 인재.
5.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공손찬의 구원군으로 가던 도중 거록 전투와 청하 전투를 선택하는 분기에서 거록 전투를 선택하면 등장하며, 레벨 6의 단병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무력 71, 지력 67, 통솔력 73로 보통 수준이며, 아이템으로 청강검과 오자의 병법서를 갖고 있다.
만약 선택 분기에서 거록이 아닌 청하 전투를 선택했다면 그 다음 전투인 계교 전투에서 레벨 7로 등장하나, 두 전투 모두 큰 임팩트는 없고 전투 이후에는 전투 상황에서 등장히지 않는다. 다만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피해 원소 휘하에 있을 때 회의장에서 볼 수 있으며, 곽도가 여남으로 도망가는 유비를 추격하러 가는 것을 방관한다. 따라갔으면 한 번이라도 더 나왔을텐데
여러모로 영걸전에서의 대우가 별로 좋지 않은데, 비슷한 평가를 받는 곽도나 봉기가 총대장으로 등장하는 전투가 있는 반면 심배는 일개 부장으로 묻어가는 모습.[13]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책사 계열으로 등장하며, 연진 전투부터 등장한다. 연의에서의 설정을 반영하여[14]책사/도사 계열 유닛은 졸개라도 지력이 80이고, 지력이 90이상이어야 네임드다운 능력을 발휘하기에 지력이 90으로 대폭 상승했으나, 무력이 50, 통솔력이 64로 하락했다. 연진 전투와 관도 전투에서는 곽도와 같이 엮여서 등장한다. 이후 여양 전투에서는 봉기가 원군을 부르는 데 성공할 경우 15턴에 지원군으로 등장한다.
그 뒤 업성 전투에서는 원상이 지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며 성 내부의 문과 외부의 문을 잠그는데, 심배가 있는 성 안쪽의 문은 NPC로 등장하는 신비를 통해서만 열 수 있다. 또한 외성의 적이 모두 죽거나 원군으로 온 원상이 퇴각하게 되면 성에 불을 질러 자살하는데,[15] 이 경우 심배를 쓰러뜨리면 얻을 수 있는 오화신염선도 하늘나라로 가버리므로 내성 문이 열릴 때까지 신비를 보호하면서 외성의 적 숫자까지 관리해야 해 많은 게이머들을 빡치게 한다.(...) 자세한 공략법은 위의 오화신염선 항목으로. 심배를 쓰러뜨리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망한다.
5.3 84부작 삼국지
조조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다가 지쳐서 성벽 위에서 잠이 드는데 심영은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모포를 덮어주고 조조군에게 성문을 연다. 간신으로서 투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듯. 그리고나서 자기자신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심배는 생포되며 업성이 함락된다.
5.4 삼국전투기
심배(삼국전투기) 문서 참조.
5.5 이문열 평역 삼국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곽도, 봉기, 신평 등과 비슷한 무리로 등장한다. 전풍과 저수와 달리 주전론을 펼쳤고, 내분을 초래해 원가 몰락의 중추적 역할을 한 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4권 조각나는 원가 편에서 원상을 꾀어내 죽이려는 곽도의 계책을 심배가 간파하는 부분에서 '끼리끼리라 더 잘 상대의 속이 들여다보이는지 심배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로 묘사되었다. 원소와 원상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충신처럼 여겨지나, 실제 심배의 권력투쟁이나 분란조장 모습을 보면 이쪽의 평가가 더 정확할 수도 있다.
6 관련 항목
- ↑ 전풍도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겠지만 '억세고 모질어 주군을 거역한다'라는 평까지 듣던 인물이었던만큼 살려두기엔 위험하게 여겨지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의 "결국은 그에게 조소당할 것이다."라는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
- ↑ 이 무렵의 기록이 매우 불명확한데 한진춘추에 의하면 중재역으로 파견된 봉기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히려 원담을 부추기면서 원상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에 심배가 원상에게 구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하자 마침내 대노한 원담이 봉기를 죽이고 원상의 승계를 인정하면서 원상과 화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인용된 글에 의하면 심배는 봉기를 '원가의 악창'으로 표현하며 맹렬히 디스하고 있고 봉기의 일족도 모조리 숙청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 ↑ 위에서 서술한대로 심배가 신평의 일족을 죽였다.
- ↑ 물론 관정 따위가 심배에 비견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아부를 많이 했다고 하지만 공손찬 일족에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손찬이 죽은 후 승산이 없음에도 결사항전->충신으로서의 죽음을 택한 것과 비슷하다.
- ↑ 원담에게 보내는 글로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 전문이 인용되었는데,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나 세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 ↑ 청주로 달아난 원담의 재차 공세를 시도하자 협상만을 시도할 뿐 반격에 나서지 않아 원담의 기세만 올려줬으며, 뒤늦게나마 원담을 대파하여 엄청난 타격을 주고도 정작 추격하지 않아 후환을 끊지 못했고, 원상의 평원 포위에 대해서도 시간만 끌며 공세를 계속 늦췄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언급.
- ↑ 영웅기에 따르면 본디 원담은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곽도의 제의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지만 극도로 곤궁해지자 이를 수락한다.
- ↑ 원상의 권력이 약했다고는 하나 헌제나 유선처럼 아예 바지사장은 아니었다.
- ↑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취약했던 원상은 이런 식의 치명적인 배신을 허다하게 당했다.
- ↑ 삼국지 1의 능력치 배분이 이상했다는 것은 곽도와 방덕의 능력치가 바뀐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원래 좀 엉망이었다. 원술이 무력 95였는데 더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특히 네임드에서 멀어질수록 엉망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 ↑ 육/수/무/지/정/매
- ↑ 특히 시나리오 3
- ↑ 다만 봉기의 경우에는 선택 분기에 따라 총대장을 맡는 전투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 ↑ 곽도, 마속 등 어지간한 네임드 지략가는 모두 90이상이다.
- ↑ 바깥 요새부터 공격할 경우 심배를 쓰러뜨리기 전에 원상의 원군이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