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신성 로마 제국의 출발은 오토 1세가 황제 대관을 받은 962년부터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이라는 사건은 어느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오토 1세의 대관은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게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며, 이 대관식이 없던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의 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교황의 권위를 통해 복구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 국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로마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를 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시각은 800년 12월 25일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서유럽 지역의 '황제'로 선포된 사건을 흑역사 취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카롤루스 이후에도 '황제'의 지위는 계승되었으며,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로마 교황 아가페투스 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란 제국을 최초로 건립한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서유럽에 재건된 제국의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이후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의 또다른 이름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며, 이탈리아 북부에 진출한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프랑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과의 연관성이 강화된 서유럽의 제국'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는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사실상 실질적 역량을 상실한 제국을 독일 왕국 중심으로 재편시킨 군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적 성격과 연관지어 정의한다면 오토 1세를 창업 군주로 평가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2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외국과 달리 중앙집권화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오히려 타 국가에 비해 중앙집권화된 국가였다.
이 오류는 이원복이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복잡하고 오랜 설명이 필요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부분을 간단하게 뭉그러뜨려 설명하는 과정에서 퍼진 오류다. 그러면서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왕권을 회복한 반면, 독일은 그러지 못했다는 주장을 했다. [1]
애초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그렇게 낮지 않았다. 대영주-황제-교황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고 그 세력 균형이 깨질 때는 프리드리히 1세때처럼 황제가 황권을 확대하기 위해 선수를 칠 때나 제위 계승이 불안정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본다면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이 오히려 높은 축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당장 이원복이 신성 로마 제국과 비교한 프랑스의 경우 위그 카페 시절에는 대주교가 대놓고 왕을 무시하고 국왕을 선거제로 뽑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왕 역시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선거왕제였다. 다만, 왕조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이 많았던 초기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운 좋게 부자계승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면서 카페 왕조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이다. 그나마도 백년전쟁때까지 프랑스 왕 자체의 세력은 오히려 다른 대영주들에 비해 크게 못미치는 상황이었다. 또 잉글랜드의 사례와 비교는 불가능한 것이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공국 출신 외세인 정복왕 윌리엄 1세가 기존의 색슨인들을 몰아내고 대륙인들을 등용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혹은 프랑스와 1:1로 대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거제는 대단히 안정된 체제였다. 7명의 선제후들은 황제가 죽기 전부터 다음 황제를 미리 선출해놓았으며 그것도 대부분은 온갖 사탕발림과 갈굼 등으로 현 황제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허울에 즐거워하고 (북)이탈리아에만 신경을 쓰느라 독일 지역의 영주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방관했다고 써놓은 부분을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제국의 황제에 이런 멍청이들만 올랐을 리가 없다(...).[2] 제국 황제들의 중앙집권화 노력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항목 등을 참조하자. 여기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그 황제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후일담으로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종국에는 시칠리아로 쫓아버려 죽게 한다(...). 이처럼 중세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황제와 교황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다투는 시기였고 그나마 카노사의 굴욕 전까지(=중세 중기 이전)만 해도 교황은 황제의 봉신(封臣. 봉토를 받은 제후)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오히려 제국의 분권화는 중세가 지난 이후부터 급속히 진행된다. 중세 말기부터 이웃한 유럽 국가들은 점차 근대의 국민 국가로서 군주가 봉건제후의 영지를 서서히 흡수해갔다. 반면 제국은 황제를 선거로 뽑는 제도와 그에 의한 봉건제후의 갈등, 여러 왕조들의 단명, 독일 지역의 높은 인구 밀도[3], 그리고 제국 내의 여러 민족 등으로 인해 봉신들의 영지 하나하나가 근대국민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결과' 역시 원인을 소급하자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성 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실패는 여러 왕조들이 단명하였고, 왕조가 단절될 때마다 선거 왕제로 복귀하거나, 심하면 대공위 시대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웃한 프랑스 왕국의 경우 1,000년 가까이 카페 왕조가 유일한 왕가로서 존재하였으며, 발루아 왕조나 부르봉 왕조도 결국 따지고 보면 카페 왕조의 방계에 불과하다. 이러한 안정적인 왕위 계승 덕분에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중앙집권으로 가는 길이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제국 내부에서 성직자 서임권을 가지지 못하고 주교령의 독립적인 정치적 지위 까지 인정해야 했던 신성 로마 제국와는 달리, 프랑스 왕은 아비뇽 유수 이래 서구 대이교때까지 왕국 내의 교회를 높은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중앙 집권 능력에 차이가 나게 된다. 다만,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특수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 프랑스 카페 왕조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버티면서, 서서히 중앙집권을 강화해온 왕조는 훗날 이탈리아를 건국하게 되는 사보이 왕조 뿐이다.
결국 제국은 30년 전쟁과 그에 따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영방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판정지어졌고 19세기 초 결국 나폴레옹의 손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3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만의 나라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한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하면서 호엔촐레른 왕가의 독일 제국을 제2제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으로 하면서 발생한 오류. 쉽게 말해 이 오해는 나치가 싸지른 똥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만의 제국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 논리 대로라면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인 만의 나라이며, 프랑크 왕국 역시 프랑스인 만의 나라가 되기 때문. 엇쩃거나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프랑크 왕국 자체가 독일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를 포괄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이후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베르됭 조약을 통해 셋으로 분리될 때에도 그 기준은 민족이나 언어가 아니라 단순한 지형이었다.
오토 1세 이후 독일 왕국 중심의 제국을 놓고 봐도 독일 민족만의 국가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동부로의 팽창을 자주 시도했고,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정확히는 독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인)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보헤미아인, 이탈리아인, 프랑크인, 그외 동부의 슬라브족 등 수많은 민족들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30년 전쟁 시절 까지 제국을 구성하는 속주들 중에서 단일 국가로서는 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했던 보헤미아 왕국은 모두 아시다시피 체코계 국가이다. 사실 고대 로마만 하더라도 라틴족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국가였다. 로마시에서는 라틴어가 통하지만,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 문화권이었고 그 외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당장 이스라엘 지역만 하더라도 아람어(예수의 모어)가 쓰였다. 비잔티움 제국도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인, 페르시아인, 이탈리아인 등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옛 제국들을 현대의 민족국가에 대입하여 보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비슷한 예로, 비잔티움 제국을 보고 '라틴어를 안 쓰다니!',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니!'하면서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오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미 고대 로마에서도 그리스어가 잘만 쓰였다. 당장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고대 로마인들은 라틴어만 쓴 줄 아나 보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은 아무리 일찍 잡아도 근대를 넘길 수는 없다. 아니, 그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부터이다. 크리스트교를 믿지않는 사라센인이나 본격적으로 개종하고 카르파티안 분지에 정착하기 전인, 9세기 즈음의 마자르인이 아니라면 딱히 이질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우 결코 현대 민족적인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중세 유럽의 유일무이의 진리나 아니면 정주민이 아닌 기마 유목민이라는 딱 봐도 눈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자르, 폴란드 등 저러한 생활 문화적 관점에서 이질감을 유발했던 이민족 또한 10세기를 넘어 점차 정주민화 되어 가고, 기독교와 봉건제를 받아들이며 중세 보편 기독교 세계 (Christendom)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융화되어 갔다. 심지어 국가간의 국경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적 관점에서 '독일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19세기의 일이니, 나중에 온 민족 국가 독일의 관점에서 역사적 전례이기는 하지만 근대 민족 국가 독일과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관점에서 오류이다.
결정적으로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제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의 뿌리를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찾으려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뿐만이 아닌 것이다. 참고로 독일인들이 자신의 조상을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게르만족들에게 찾으려고 한 것은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등 근대나 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만의 제국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이를 억지로 부인하고 독일인만의 제국이나 독일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나치즘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근거한 행위거나 서양 중세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발언이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 중 오늘날 독일계로 분류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독일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계, 이탈리아계, 보헤미아계 등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가 된 카톨릭 제국으로 보는게 훨씬 적합하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신성 로마 제국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은, 먼나라 이웃나라가 베스트셀러 국민 학습만화(?)이기에 시도때도 없이 까이는 것일 뿐이지, 애초에 이런 저연령층 유럽교양서(역사책도 아니다)를 가지고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 ↑ 그건 그렇고, 사실 중세시대 북이탈리아가 알토란 같은 땅인 것도 분명 사실이다.
- ↑ 제국 성립 초기의 독일 지역은 그냥 촌구석이자 훨씬 좁은 프랑스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되는 인구를 자랑하는 동네였지만, 중세 말부터는 한자동맹의 개발이나 남독일 지역의 공업 발달 등으로 인해 유럽 내에서 손꼽히는 인구밀집 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