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왕국

체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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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공화국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




왕조
















보헤미아 왕국
České královstv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 1806)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일부
(1526 ~1804)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
(1804 ~ 67)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부
(1867 ~ 1918)
국기국장
존속기간1198년 ~ 1918년
위치중동부 유럽
수도프라하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
언어체코어, 독일어
종교가톨릭, 개신교[1], 정교회[2]
주요사건1198년 건국
1918년 멸망
통화프라하 그로센
오스트리아-헝가리 굴덴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
성립 이전보헤미아 공국
멸망 이후체코슬로바키아

1 룩셈부르크 왕조 이전

보헤미아 지역은 게르만족 대이동 후 슬라브인들이 들어와 살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처음 국가가 나타난 것은 사모 왕국으로 623년 아바르인이 침입을 하자 프랑크족 상인이었단 사모가 슬라브인들을 규합해서 국가를 세우고 아바르인을 물리치나 사모가 죽은 후 왕국은 해체되었고, 이후 들어선 국가는 대 모라비아 왕국이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 때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9세기 이후 기독교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 모라비아 왕국은 마자르(지금의 헝가리인들)인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보헤미아 일대는 이후 프르셰미슬 왕조에 의해 통합되어 보헤미아 공국이 건립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휘하 영역으로 들어가 봉신인 보헤미아 공국 활동을 하다가 1198년 왕작으로 승작하게 되었다. 제국 내의 유일한 독립 왕국이 된 것이다.

2 룩셈부르크 왕조

1310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금인칙서로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1355년 ~ 1378년)가 자신의 영지인 보헤미아의 중심도시인 프라하를 제국 수도로 정함에 따라 14세기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보헤미아는 금융과 무역, 학문의 중심지였다. 프라하 대학이 이 때 세워졌다. 이 시기에 급격하게 성장한 보헤미아의 저력은 윗대가리인 왕관을 어떤 가문의 누가 쓰던 간에 제국 내 정치적 지분, 경제력, 군사력 등 물질적인 측면에서 30년 전쟁 시절 까지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 중에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제후국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3 헝가리-보헤미아(야기에우어 왕조)

지기스문트 황제(1437년 사망)를 마지막으로 룩셈부르크 왕가는 단절되고,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지기스문트의 유언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에 넘어갔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현지 귀족들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곧 명목상 섭정이지만 실제로는 왕위나 다름없던 자리를 놓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양국에서 귀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으며 앞선 1419년 지기스문트 통치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신앙을 인정받았던 후스파. 1457년 실권이 없었던 국왕이 사망하자 의 우두머리 이리 지 포데브라드가 왕위에 올라(재위 : 1457–1471) 보헤미아에 더해 폴란드의 왕과 헝가리의 왕, 그리고 부르고뉴 공과 바이에른(바바리아) 공이 즉각 참여하는 대연방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네이버 역사캐스트 - 중세의 유럽연합 계획 그의 치세는 후스파와 로마(가톨릭)파의 줄다리기로 얼룩졌다. 교황이 보헤미아의 내정에 간섭하여 후스파의 개종을 요구하자 그 스스로가 후스파였던 이리 왕은 이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파문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리를 파문한 교황은 보헤미아 내의 로마파 귀족들과 헝가리를 끌여들여 보헤미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이리는 이에 대응해 군사적으로 헝가리군에 맞서는 한편 폴란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의 아들들을 제치고 당시 폴란드 카지미에쉬 4세 국왕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계승자로 선언하였는데, 이후 곧바로 이리 왕이 갑자기 죽어버리면서 장성하고 능력있던 이리의 아들들 대신 졸지에 15살 먹은 외국 출신 어린 왕이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르고 말았다.

전쟁 중이었고 폴란드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므로 왕으로 모시기는 하였으나, 경험없는 소년왕은 귀족들 사이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더군다나 브와디스와프는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므로 후스파 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1478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침공한 것을 틈타 보헤미아가 헝가리와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와 공공연하게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귀족들은 후스파에 의해 추대된 왕을 석연치않게 여겼으며, 후스파는 왕이 가톨릭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에 반발했다. 폴란드 출신이었던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 안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은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켰고, 귀족들은 무력해진 왕을 무시하고 본디 보헤미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던 농노제를 도입하는 등 자신들의 힘을 늘려나갔다.

1490년 브와디스와프가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헝가리-보헤미아 동군연합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함께 리투아니아계 왕가인 야기에우어 왕가(Jagiellonowie)가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왕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애초에 귀족들이 브와디스와프를 선출한 이유도 "무능하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 양국을 모두 몰락시킨 야기에우어 왕가는 1526년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루드비히 2세)가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2대 만에 대통이 끊겼고, 1차 빈 포위가 오스만의 패배로 끝난 뒤 보헤미아의 의회는 러요시 2세의 매제인 오스트리아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3.1 합스부르크 왕조

보헤미아는 페르디난트 1세가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갈라진 이래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약 500년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 있었다.

프라하가 두번째로 황금기를 누린게 이 시기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인 루돌프 2세(재위 1576~1611)는 연금술에 심취해서 궁정을 에서 프라하로 다시 옮길 정도였다.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했다. 당시 프라하는 연금술의 본거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사실 이 시기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입장에서도 빈은 아직 지방 도시 정도에 불과했고, 슈타이어마르크나 티롤 같은 지방에는 개신교들의 영향력이 강해 제국을 경영할 만한 인구와 재력을 갖춘 실질적인 꿀땅은 보헤미아였다. 게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에서 보헤미아의 왕은 자리가 있지만 오스트리아 대공은 선출권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도자들이 제국 내 제위 선출 과정 등 정치적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은 어디까지나 보헤미아의 왕으로서였지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가 아니었던 만큼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땅이었고, 본격적으로 종교 문제로 충돌하기 이전 까지는 보헤미아 왕국의 영주와 도시민들 또한 바로 이웃의 헝가리 왕국오스만 제국에게 반세기가 넘는 기나긴 소모전 끝에 하나 둘 씩 집어먹히고 유린 당하는 꼴을 보면서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어느정도 환영했다.

이 때부터 보헤미아의 역사는 가톨릭 전제왕조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착취와 탄압에 맞선 저항과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 점철된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합스부르크 세습령 중 오스트리아 본령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하고 발언권도 큰 지역이었다. 보헤미아의 반항의 역사는 17세기 1세기 남짓으로,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은 보헤미아 귀족들의 선출로 즉위한 선출직 국왕이었으며, 한국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악랄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제적 착취와 고귀한 민족주의자들의 투쟁인 역사는 절대 아니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강성함에 따라 루돌프 2세가 개신교 출신 보헤미아 제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며 질질 끌려다녔고, 루돌프 2세를 밀어내고 추대 된 사촌 마티아스(마티아슈) 황제[3] 역시 유화책으로 일관하였다.

다만 이 보헤미아가 중앙 유럽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마티아스가 세상을 떠난 뒤 즉위한 사촌 페르디난트 2세의 강경한 구교 정책으로 반합스부르크 기운이 폭발했고, 이에 발생한 것이 유명한 30년전쟁(1618~1648)이다. 이 전쟁으로 보헤미아는 스웨덴군을 포함한 각종 외국군에게 유린당하며 그야말로 절대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전쟁의 결과로 보헤미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공고해졌다. 1683년의 2차 빈 포위에서도 보헤미아는 오스만에 휩쓸리지 않았다.

3.2 오스트리아 치하와 독립 이후

이후 1918년까지 보헤미아는 다른 나라에서는 웬만해서는 넘보지 못하는 합스부르크의 양대 알짜배기가 되었다(다른 곳은 헝가리). 되려 체코 등의 민족 정체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란 2중 제국 하에서 자란 감이 크며, 대부분의 독립 시도는 일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운동에 가까웠다. 500년이라는 합스부르크의 긴 지배기간을 거치는 동안 체코인들의 사상도 오스트리아(독일계)에 가까워져 정체성이 희미해졌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 분산정책에 힘입어 많은 독일인이 보헤미아에 이주했다.

상술했듯이 보헤미아 지역은 원래 중세 후기 때 부터 슐레지엔 지방과 더불어 중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지방.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러한 보헤미아의 역사적 산업을 잘 키워 19세기에는 스코다를 포함한 전반적으로 다른 열강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던 이중제국의 영토 중에 그나마 가장 도시화와 산업화가 잘 된 지방이었고, 평균 소득과 삶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실상 보헤미아의 많은 시민들은 독립보다는 합스부르크 왕조 아래 잔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체코 독립의 아버지 토마스 마사리크만 해도 전쟁이 발발하고 이중 제국의 국운이 본격적으로 간당간당 할 때 까지는 헝가리 수준의 여전히 합스부르크 군주를 모시는 연방 내 자치국가 수준의 '독립'을 추구했고, 오스트리아와 본격적인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수준의 강성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는 대전 도중에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국 자체가 나가리 될 분위기가 되어서야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848년 혁명(3월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대항한 슬라브-체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하고,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귀속되었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일부로서 독립을 획득했다.

이후 1939년 이곳의 상병에 의해 뮌헨 조약으로 나치에 병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1945년 이래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오늘날 체코 공화국까지 체코인의 영토로 남아 있다.
  1. 마르틴 루터 보다 100년 빠른 얀 후스의 교회가 있었고, 이후 독일계, 헝가리계 주민들의 유입으로 루터파칼뱅주의 개신교도들도 생겼다.
  2. 중세 보헤미아 일대가 카톨릭 쪽으로 정식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모라비아 지역과 현대 슬로바키아 쪽에 넘어간 지역에 정교회 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7세기에 동방 카톨릭 교회 형식으로 정교회식 전례를 유지하되 바티칸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카톨릭으로 넘어갔다
  3. 모라바(모라비아) 변경백, 헝가리 왕위 등을 우선 취득한 뒤에 다시 루돌프 2세를 핍박하여 나머지 보헤미아 등의 왕위 등도 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