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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항목 : 홀로코스트
1 개요
나치 독일에 존재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친위조직 슈츠슈타펠의 사설 무장부대이며 인종청소만을 목적으로 삼은 나치 독일의 대량살상조직이다. 현재는 독일의 흑역사. 공식적인 본래의 명칭은 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였으며 비공식적으로는 Einsatzgruppen으로 통했다고 한다. 아인자츠그루펜의 번역명에는 각 백과사전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특무부대(Task force)', 혹은 '배치부대(Deployment Groups)'로 통하며, 보통은 '특무대'나 '아인자츠그루펜'으로 통한다. 그냥 인간 쓰레기들. 이 한 마디로 압축이 가능하다. 이들의 악명은 너무나도 유명한데, 독일 내 다른 부대들과의 사이도 더럽게 나빠서 국방군[1]은 물론이고 무장SS 사단들로부터 독일군의 수치라고 불렸을 정도이니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국방군이든 무장SS든 지들도 민간인, 포로 학살은 꾸준히 했다.물론 아인자츠그루펜처럼 학살만 목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게다가 국방군도 이들의 활동에 협력하기까지 했으니...
2 창설
기본적으로 SS와 게슈타포로 이루어진 부대였던 이들은 그 당시 SS-제국 총통이었던 하인리히 힘러와 독일 보안방첩대(SD)와 치안경찰대(SIPO)의 총사령관이며 SS-소령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감독과 지시에 따라 아인자츠그루펜은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폴란드 침공, 독소전쟁과 같이 독일이 동부로 영토를 확장하려 할 때마다 보안경찰 혹은 국가보안본부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렇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의해 아인자츠그루펜은 1938년에 조직되어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고 한다.[2] 이들이 본격적으로 인종청소 및 학살에 뛰어든 것은 독일이 소련에 침략전쟁을 개시한 이후이며, 아인자츠그루펜은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자살할 때까지 제3제국이 점령한 각 지역에서 인종-정치적 적대 세력의 학살 임무 및 장애인 학살 임무를 수행하였다. 본부는 베를린의 프린츠 알브레히트 8번가(Prinz-Albrecht-Strasse 8)에 있는 국가보안본부(RSHA)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3 폴란드에서의 전쟁범죄
폴란드 침공 이전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주로 지식인, 성직자, 정치가 등 지도자 층을 대상으로 총살시키는 학살을 실시했다.[3] 그 지휘관은 국가보안본부의 장교들로 임명되었는데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국가보안본부에서 승진과 지위의 보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편 그 지휘를 받는 대원은 무장친위대 및 친위대 상급대장인 쿠르트 달루게 휘하의 질서경찰의 경찰관이 많았다. 아이자츠그루펜의 기원은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보안경찰장관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독일군의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등 정치적인 적들을 심판 후 총살하기 위해 창설한 이동학살부대를 만든 것이 시작이다. 아인자츠 코만도라 불린 이 이동학살부대는 1938년 9월에 슈다덴의 합병과 1939년 3월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호령과 함께 규모를 확대했다. 슈다덴에서 조직개편 당시에 "아인자츠 코만도"의 사령부로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이다.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의 점령통치를 위해 아인자츠그루펜은 다시 조직되었는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39년 9월 21일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들 앞에서 "폴란드의 지도자층, 지식인층을 뿌리 뽑을 것"을 훈시했다. 폴란드의 아인자츠그루펜은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폰 뷜슈 대의 일곱 부대로 구성되어 각각의 부대 휘하에 수많은 "아인자츠 코만도"가 조직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아인자츠그루펜의 대원 숫자는 2,700명이었다. 폴란드가 점령된 후 총살 대상이 된 것은 주로 교사, 성직자, 귀족, 훈공자, 퇴역군인 등의 폴란드 지도자 층 및 유대인, 집시 등이었다.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에 걸쳐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는 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40%가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학살이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39년 9월 21일에 농촌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도시로 모은 후 도시마다 유대인 평의회를 창설시켜 유대인을 일괄 관리하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제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4 독소전쟁 당시의 학살
파일:Attachment/아인자츠그루펜/Kiev Jew Killings in Ivangorod (1942).jpg
독일의 전쟁범죄 중 잘 알려진 사진 중 하나. 동부전선 이반고로드(우크라이나지역) 인근에서의 유대인 민간인 학살. 촬영한 사람은 폴란드 기자였던 예지 토마셰프스키라는 사람으로 그 외에도 다양한 전쟁범죄 증거를 찍거나 폴란드 레지스탕스 등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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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자츠그루펜 D의 일원이 1942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시신들이 채워지고 있는 집단 학살 무덤 앞에 꿇어앉아있는 유태인을 향해 쏘기 바로 전에 찍힌 사진. 이 사진은 1943년 미확인된 독일군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사진 뒤에는 "빈니차의 마지막 유태인"이라 쓰여져 있다. 사진 뒤에 있는 사람들은 독일군, 독일 노동국과 히틀러 청소년단 소속이다.
1941년 7월 4일 유대인 청소년을 총살하기 직전의 아인자츠그루펜 대원들. 소년의 가족은 이미 살해되어서 소년 앞에 시체가 되어있다. 소년 오른쪽의 사람들은 부대원을 지원하는 독일인들, 소련, 슬라로프인들이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의 학살이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독소전쟁 당시였다. 독소전쟁에 앞서 1941년 6월에 동유럽과 소련 내에 존재하는 정치적인 적들을 총살하기 위해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때 아인자츠그루펜은 A대, B대, C대, D대의 네 부대로 구성되어 각각의 휘하에 "아인자츠 코만도"와 "존더 코만도"라는 부대들을 창설했다.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군에 대한 빨치산 활동이 격렬해지자 파르티잔, 공산주의자 등의 혐의가 의심되면 무조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민간인의 피해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만 갔다. 그리고 전쟁 중에 나치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추진했기에 아인자츠그루펜도 이 때문에 더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러 희생자 숫자는 이전의 폴란드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승했다. 독소전쟁 당시 아인자츠그루펜 D의 사령관이였던 오토 올렌도르프의 증언에 의하면 1942년 봄에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여자와 아이들에 대해선 총이 아닌 가스 트럭에 의해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련 점령지역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인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4]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41년 8월에 하인리히 힘러가 민스크를 방문시 아르투어 네베가 사령관으로 아인자츠그루펜 B의 총살 광경을 시찰했는데 시체를 본 하인리히 힘러가 기분이 나빠졌다고 한다. 이때 힘러는 총 쏘는 법이 서투르다고 화를 냈다고 하며 이에 총살 외에 다양한 수단으로 학살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트럭의 배기 가스인 일산화탄소를 연결한 이동식 가스실을 트럭에 장착하여 희생자들을 죽이는 가스 차였다. 가스 차는 1941년 늦가을, 동부전선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아인자츠그루펜이 작전을 수행하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과 다른 희생자들 학살에 총살과 병행되어 사용되었고 이러한 만행으로 독소전쟁 당시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숫자는 약 85만명~130만명에 이른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이 시작된 후,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 침략군과 함께 소련 지역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군과 경찰조직의 지원 아래 지방의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하였다. 보통 독일 침략군의 인종청소가 마을과 도시에서 게토로, 게토에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하여 손쉽고 빠른 학살을 도모하려한 것과는 달리 아인자츠그루펜은 직접 유태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살해하였다.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대부분 우크라이나인, 라트비아인 및 리투아니아인 등으로 구성된 일부 거주민들은 보조 경찰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소련인들과 폴란드인들, 눈엣가시였던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밀고하면서 아인자츠그루펜을 도왔다고 한다.
독일군은 아인자츠그루펜에 물자와 운송 수단, 주거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경비병의 형태로 인력을 지원하고 수감자들을 수송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주로 유태인 남성들만을 총살하였다. 그러나 1941년 늦여름 경부터 아인자츠그루펜은 가는 곳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유태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총살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신속하게 소련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도망갈 여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학살 부대는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가서는 모든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로마니(집시)들도 잡아갔다. 희생자들은 귀중품을 내놓고 옷을 벗도록 강요 받았는데, 그것들은 나중에 독일에 보내지거나 지역 협력자들에게 배급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때에 따라 그들은 지역 정보 제공자와 통역관의 도움으로 해당 지역의 유태인들을 지목하여 지정된 장소에 모이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행군을 하거나 트럭을 타고 참호가 미리 준비된 학살 장소로 이동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은 희생자들을 따로 구분해낸 뒤, 희생자들을 묻기 위해 이들을 점령지 마을과 도시의 외곽에 있는 공터, 숲 및 협곡으로 행진하도록 만들었고 그곳에는 미리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져 있거나 총살당할 피해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몰수하고 강제로 탈의하게 한 다음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열린 참호 앞에 서거나 엎드리게 했고 그 후 2명 이상의 사수를 세워 연발로 총을 쏴 살해한 다음 희생자들이 떨어진 구덩이를 흙으로 덮고 땅을 밟아 평평하게 해놓아 흔적을 없앴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스차로 학살한 다음 대형 매장지에 시체들을 버리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부족한 인원은 점령지에 주둔한 독일군이나 점령지의 치안유지를 맡은 경찰 조직, 그리고 강제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점령지 주민들을 동원하였고, 주민들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이 길거리나 공터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장평의 학살과 신안대학살과 같은 만행을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지르고 다닌 것이다.
소련을 침공하는 독일군을 따라 이동하는 아인자츠그루펜은 4개의 대대 규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 A는 동부 프러시아로부터 리투아니아, 라투비아 그리고 에스토니아를 지나 레닌그라드[5]로 향하였다. 그들은 코프토와 리가, 그리고 빌나에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아인자츠그루펜 B는 폴란드 내 점령 바르샤바 지역에서 시작하여 벨로러시아를 거쳐 스몰렌스크와 민스크를 지나 그로드노, 민스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슬로님, 고멜과 모길레프 등 기타 지역의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아인자츠그루펜 C는 크라쿠프로부터 작전을 시작하여 서부 우크라이나를 거쳐 크라쿠프와 로스토프-온-돈을 향했다. 그 부대원들은 르포프, 타르노폴, 졸로체프, 크레메네츠, 카르코프, 지토미르와 키에프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그렇게 아인자츠그루펜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3개월 후인 1941년 9월 19일에 바비야르[6]에서 겨우 36시간 만에 3만7천771명을 살해하였는데 이를 바비야르 학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럼블라[7] 숲에서는 2만 5천여명의 유대인을 이틀 만에 학살하는 등 끔찍한 전쟁범죄를 일으켰다.
1941년 6월 27일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한 독일군 대령이 대중으로 둘러싸인 한 주유소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함성들과 박수 소리들이 있었다. 어머니들은 그들이 잘 보도록 하기 위해, 아이들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 장교는 거기에 다가가서, 그가 참여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콘크리트로 된 사형대에 중간 키에, 금발에, 대략 25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그는 손도끼로 짓눌린 상태였고, 그 도끼는 그의 가슴을 내리칠 기세였고, 그는 그런 상태였다. 그의 발 쪽에는 15에서 20구의 시체들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관을 통해 물이 흘러나왔고, 도랑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사람의 몇 발자국 뒤에, 무장한 사람들의 감시를 받는,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있었고, 자포자기하고 얼빠진 듯 보였고,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신호 후에, 다음 사람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도끼로 죽을 때까지 가격을 당했고, 각각의 가격은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았다." 모든 희생자들이 살해되자마자, 이 금발의 살인마는 시체들 위에 올라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은 리투아니아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치 이 도살극이 민족적 행사인 것처럼 말이다. - 독일 슈피겔 지 보도 중 일부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과 다른 추축국 군인들 및 지역 협력자들과 다른 SS 부대원들의 협조를 많이 받았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원들은 Allgemeine-SS(일반 친위대)나, 무장친위대, SD, Sipo, 특명 경찰과 기타 경찰 부대로부터 차출되었다. 1943년 봄까지, 아인자츠그루펜과 특명 경찰 부대는 백만 명 이상의 소련 유태인과 수천만 명의 소련 정치 인민 위원장들, 빨치산, 로마 집시들, 그리고 병원 시설에 수용된 장애자들을 살해하였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자주 쓴 방법으로는 총살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비효율적이고 총살 시행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는 방법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독일 당국은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 살상을 자행하기 위하여 가스실이 설치된 중추적 집단 학살 센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도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 이런 학살된 이들이 묻힌 곳이 더 있을지도 모르나 워낙 넓은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그나마도 밝혀지지 않은 학살도 있었던 데다 세월이 지나면서 풍경까지 변해버렸기 때문에 현재까지 살아있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세월이 지나면서 목격자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둘 죽음을 맞이하고 있어 밝혀진 곳 외의 학살 현장을 추가로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5 주요 학살 요약
1941년 6월 22일부터 아인자츠그루펜에게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진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부대는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깊숙이 진격함에 따라 대량 학살 임무를 수행한다. 먼저, 이동 학살 부대는 주로 유태인 남성들을 사살한다. 얼마 되지 않아 이동 학살 부대는 가는 곳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유태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무조건 총살한다. 1943년 봄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은 1백만명 이상의 유태인과 수십만 명의 유격대원, 로마니(집시), 그리고 소련 정치인 등을 학살한다.
1941년 9월 21일 유대인의 신년 하루 전날, 리투아니아의 작은 마을인 에쉬스키(Ejszyszki)로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들어왔다. 학살 부대원들은 마을과 주변 지역에 있는 4,000명의 유태인들을 3개의 예배당으로 몰아 넣고는 2일간 음식이나 물을 주지 않은 상태로 감금했다. 그 다음 이틀간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은 묘지로 끌려 가서 학살 당했는데, 그들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져 총살 당했다. 이러한 학살극으로 오늘날 에쉬스키에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에서의 학살은 홀로코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이 살해된 수백개의 도시, 마을 및 유대인 촌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1941년 9월 29-30일 바비야르에서 약 3만 4,000명의 유태인 학살, 이른바 바비야르 학살.
독일군은 키예프(Kiev)의 유태인 주민들에게 도시 외곽으로 이주해야 하므로 멜릭 거리(Melnik Street)로 집결하도록 명령한다. 실제로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멜릭 거리를 따라 유태인 묘지와 바비야르(Babi Yar)라고 하는 협곡으로 향하게 된다. 유태인들은 귀중품을 내놓고, 옷을 벗고,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협곡으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러고는 독일 학살 부대와 우크라이나인 보조 부대가 이들을 총살했다. 대량 학살은 이틀간 계속된다. 여기에서 약 3만 4,000명의 유태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이 학살된다. 이후 수 개월간 수천 명의 유태인들이 바비야르에서 추가로 총살된다. 로마니(집시)와 소련 전쟁 포로를 비롯한 비유태인들도 협곡에서 살해되었다.
1941년 12월 1일 "예거 보고서(Jaeger Report)"에서 SS 대령인 칼 예거(Karl Jaeger)는 자신의 부대가 1941년 7월 2일부터 12월 1일 사이에 리투아니아에서 실시한 학살 기록과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부대가 13만 7,346명의 유대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을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1941년 여름동안 코프노, 우크머주 및 빌나의 유대인들이 일련의 대량 학살에서 살해되었고 리투아니아의 작은 도시와 마을에 살던 거의 모든 유태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재거는 코브노, 빌나 및 샬룰랴이 게토에 겨우 3만 5,000여명의 유대인들만이 강제 노동자들로 남아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6 절멸 수용소와의 연관성
나치의 수뇌부들은 이들의 학살 사례를 연구하면서 세 가지의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먼저 보안의 문제가 심각했다. 학살이 마을에서 자행되다보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학살에 참여한 대원들이 사적으로 학살 현장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 보관하거나 집에 보내 자랑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물론 이 덕분에 아인자츠그루펜의 천인공노할 범죄의 증거가 많이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학살을 부인하던 나치 수뇌부들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또한 처형 방식도 문제점이였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한 발 한 발 아껴도 모자란 판인 총알을 학살 따위에 사용하는 것은 물자 낭비라는 지적이 나왔다. 마지막 문제는 처형을 집행하는 대원의 정신 문제였다. 학살이 일상처럼 계속되다보니 학살에 무감각해지는 대원도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대원들이 발생했다.[8] 나치는 대원들의 정신적 피로를 덜기 위해 처형에 현지 치안 조직 같은 대체인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나치는 이런 일련의 경험으로 물자가 적게 들면서 비밀을 유지하기 쉽고 무엇보다 대원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가까운 게 가스실이 존재하는 절멸수용소였다.[9] 물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애당초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는 게 맞는 일이나...
유감스럽게도 나치는 정상이 아니였다.
7 전후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인자츠그루펜은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결국 전후 대부분의 범죄가 드러나 전범 재판에서 지휘관을 비롯한 수뇌부들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이 이루어졌다. 특히 미군이 주최한 뉘른베르크 연속재판의 하나인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은 아인자츠그루펜만을 법정에서 다룬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24명의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들이 기소되어 그 중 22명이 사형 또는 징역형에 처해졌다. 물론 현재에도 많은 대원들이 정체를 숨기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지금까지도 시몬 비젠탈 센터를 비롯한 나치 잔당을 추적하는 단체들은 이들을 쫓고 있다.
8 관련 항목
- ↑ 일례로 육군의 전차 에이스인 쿠르트 크니스펠 기갑 상사는 동부전선에서 아인자츠그루펜 장교가 소련군 포로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그 장교를 폭행한 사례도 있다. 단, 쿠르트 크니스펠은 나치즘이 인종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싫어한 사람이었고 이런 이유로 진급까지 더뎠다. 정작 본인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지만. 게다가 그가 이런 성향에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던것은 오로지 그의 뛰어난 전공 덕분이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독일 국방군 장성들이 인종 범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묵인하는 정도였으니 크니스펠 기갑상사의 행동으로 국방군의 입장을 일반화할 수 없다.
- ↑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권은 1942년 5월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영국 특수작전행정부(SOE)의 요원들과 체코인들에게 암살당해 죽을 때까지 쭈욱 맡았다고 하며, 하이드리히가 죽고 난 이후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권은 SS-소령이었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 ↑ 하지만 독소전쟁 이후 아인자츠그루펜은 유대인 및 집시, 공산주의자 등을 상대로 총살을 실시했다.
- ↑ 이 놈은 나중에 폴란드에서 20만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 ↑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 ↑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외곽에 위치한 골짜기. 동쪽으로 진군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온 독일군이 29일간의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입성했으나 곧 시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탄 공격으로 수많은 독일 병사를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NKVD에 의해 실시된 테러 공작이었으나 이를 유대인들의 테러로 오판한 SS는 테러 행위를 보복하는 의미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 키예프에 거주 중이던 유태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쇼스타코비치의 13번 교향곡도 이 학살 사건을 소재로 작곡된 작품이다.
- ↑ 라트비아 근처에 위치한 숲. 나치 독일은 1941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까지 이 지역에 유대인들을 모아 인종청소를 실시했다.
- ↑ 심지어 이것 때문에 나치에 반감을 가진 일부 극소수 대원들은 상부 몰래 유태인들이나 집시족을 석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문에 들통날 경우에는 총살을 받았고 전후 재판에서 이들의 행적을 인정받아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 ↑ 이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을 내놓은 자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하였던 아르투어 네베였다. 이 자는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자로서 아인자츠 그루펜B의 총책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