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대학살

  • 참고로 전남 신안군이 아니니 유의할 것. 기존의 중,고교 등의 역사 과목에서 초한지 분야를 다루는 부분적 역사가 아니라면 따로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는 사건이라(역덕후라면 몰라도) 역사에 대해 내공이 깊지 않은 경우 처음에 제목만 보고 전남 신안군에서 일어난 한국 근현대사 사건인 줄 아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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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많이 겁먹고 놀란 외침에 속절없이 묻혀 버렸다. 그리고 죽음의 덫에 걸려 반나마 넋이 나간 20만의 항졸은 막을 길 없는 거센 물결처럼 골짜기를 휩쓸며 모든 것을 앞으로만 밀어냈다.

 
이윽고 골짜기 끝으로 몰리던 항졸들의 선두가 비명과 함께 골짜기 끝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 수백 명 대부분이 떨어지는 대로 머리가 깨지고 창자가 터져 바로 죽었다. 그러나 다음 줄, 다음 줄 차례로 떨어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두텁게 쌓인 사람의 시체 위에 떨어지니 쉬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들 위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떨어져 눌려 죽거나 숨이 막혀 죽어갔다.
 
나중에는 골짜기 끝의 사정이 골짜기 중간에서 몰리고 있는 항졸들에게도 알려졌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대로 이를 악문 항졸들이 맨손으로 초나라 군사들에게 맞서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온몸을 갑주로 두른 초나라 기병이나 보갑(步甲)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창칼에 사냥 당하는 짐승처럼 죽어갔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항졸들 중에는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그렇게 애처로운 목소리로 빌어보기도 했지만 살 수 없기는 맞서는 패거리나 다름없었다. 피 맛을 보고 눈이 뒤집힌 초나라 군사들은 군령을 핑계로 마음껏 그런 항졸들을 찌르고 베었다.
민음사 이문열 초한지 中 4권 pp.143

1 개요

BC 207년, 현 중국 허난 성(河南省) 뤄양 시(洛阳市) 신안 현(新安)에서 항우(項羽)가 자행한 대학살극. 신안의 갱이라고도 한다. 문헌 상 무려 2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해 죽은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장평대전(長平大戰) 당시 진나라(秦)의 백기(白起)가 자행한 학살과 함께 고대 중국에서 전쟁포로에게 저지른 전대미문의 학살 사례로 손꼽힌다. 게다가 전자의 학살은 그나마 나름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었지만 이 사건은 그냥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으며, 그리고 뒤에 언급되겠지만 사실 학살은 신안의 진나라군에 대해서만 자행된 것도 아니었다. 여하간, 초한전쟁 당시 항우가 저지른 수많은 막장 짓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이다.

2 전개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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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대전(巨鹿大戰)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며 끝없는 시간 동안 분열을 거듭하던 중국은 마침내 진나라 시황제의 손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너무나 엄격한 법치주의와 거대한 토목공사로 삽시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진승 · 오광의 난은 위태로운 제국의 나약한 기반을 날려버리는 일대 대사건이 되었다. 비록 진승의 난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진압 할 수 있었지만, 이미 천하는 진나라에 반기를 든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후였다.

그러한 여러 인물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단연 항량(項梁)이었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楚)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었던 항량은 이러한 혼란을 틈 타 기반을 쌓아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여 망국의 한을 갚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한과의 싸움에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항량의 조카로 엄청난 용력을 가진 젊은이, 항우가 되었다.

송의(宋義)를 살해하고 군권을 모조리 손아귀에 쥔 항우는 이후 북상을 감행, 조나라(趙) 구원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장한은 수하의 장수 왕리(王離)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압박하던 참이었는데, 항우는 이 거록대전(巨鹿大戰)에서 실로 초인과도 같은 용력을 떨침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장초(張楚) 멸망 후 여러 제후들에게 가해졌던 장한의 엄청난 압력은 삽시간에 걷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건 장한이었다. 장한은 극원(棘原)[1]에 진을 치고 항우와 대치 상태를 이루었으나, 형세가 그리 좋지 않아 퇴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였던 무능한 군주 호해(胡亥)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장한을 여러 번 꾸짖기만 하였다. 답답한 장한은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부하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은 사악한 간신 조고(趙高)가 장악한 지 오래였는데, 조고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난리가 호해의 귀에 들어가는 일을 막고, 그저 호해가 먹고 놀며 즐기는 일에만 정신이 팔리게 하였다. 그래야 부재 중인 황제를 대신해서 자신이 전권을 부릴 수 있기 때문.[2] 사마흔은 함양에 도착하여 3일간 기다렸으나 답변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고 곧바로 도망쳤는데, 일부러 길을 다른 곳으로 돌아서 도망쳤다. 실제로 조고는 사마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마흔은 장한에게 충고했다.

"조고가 조정 안에서 정사를 독단하고 있어,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반군과 싸워 이긴다면 조고는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편, 조나라의 진여(陳餘)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 하였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는 남정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켜 초나라를 동쪽으로 내쫓았으며, 북정하여 장평에서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를 죽이고 그 군사 40여 만을 구덩이에 묻었소.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고, 땅을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했으나 결국은 진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소. 몽염(蒙恬)은 장군이 되어 북쪽의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고 유중(楡中)의 수천 리 땅을 넓혀 불세출의 큰공을 세웠으나 그 역시 양주(陽周)에서 참수되었소. 그 이유는 진나라에는 공을 세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모두 봉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하여 주살했기 때문이오.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을 일삼았으나,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조고는 장군이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 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腰斬刑)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것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 사기 항우 본기 中

장한은 처음에는 이러한 제안들을 의심스럽게 여겨, 시성(始成)이라는 인물을 사자로 보내 항우와 협상을 했지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에 몇차례 교전이 벌어졌고, 항우는 진나라 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장한은 다시 항복 의사를 밝혔고, 마침 군량이 떨어져가던 항우는 이를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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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항우

이에 장한과 항우는 은허(殷墟)[3]에서 직접 만나 항복에 관한 의식을 치루었다. 이 자리에서 장한은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왈칵 눈물까지 흘리면서 조고의 일을 이야기 하였고,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임명하고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진나라를 향해 진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항우와 장한 두 명의 걸물, 그리고 초나라의 군사와 진나라의 대군의 대결은 좋게 좋게 끝나는 듯 싶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2.2 징조

그렇게 항우의 본대와, 과거 장한의 부하였던 진나라 병사들이 함양으로 터벅터벅 진격하던 중,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률로 여러 사람들을 대단히 못살게 굴었고,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던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압제에 오랫동안 억눌려서 지내고 있었다. 또한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병사들 중에는 여산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끌려가서 개고생을 했거나, 멀고 먼 국경까지 끌려가 춥고 서러움을 견디며 수비병으로 지내거나 만리장성 공사에서 혹독한 대우를 받다가 가족이 굶어 죽었다는 걸 알고 눈이 뒤집혀 탈주하여 부흥군에 합류한 이가 많았다. 그런 병사들이 비록 투항병이라지만 진나라 병사들에게 좋은 심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항복한 총사령관인 장한은 왕에 임명되고 사마흔 역시 상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던 상황으로 보면 당시 진나라 항복군은 일반적인 포로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진나라 병사들을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대하면서 수많은 모욕을 주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것은 수치와 부끄러움보다도 '이러다가 정말 우리 죽는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근거렸다.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군에게 항복을 했다. 오늘 우리가 진군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우리들을 그들의 노예로 삼아 동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는 진나라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온한 움직임이 여러 장수들에게 포착 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소식은 결국 위로 올라가서 항우에게 전해졌는데, 항우는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을 불러 대응 방법을 논의했는데, 상식대로라면 세뇌를 시키건 뭔 방법을 쓰건 이들을 설득하고 승리를 확신하도록 하거나 좋은 대우를 대가로 전장의 맨 앞에 세우던지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항우는 그런 정상적인 개념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이것이 바로 불만에 대한 항우의 대응 방법이었다.

2.3 대학살과 초나라군의 함양 입성

"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 항졸들을 기습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였다." ─ 사기 항우 본기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신안(新安)에 당도하자 경포를 시켜 깊은 밤을 이용하여 장한이 데리고 항복한 진나라 군졸 20여 만 명을 습격하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 사기 경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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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하는 진나라 군

항우의 결정 한번에 20만 진나라 군은 모조리 생매장됐다. 사기에서는 이 일을 간략하게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는지라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는데[4], 경포 열전에서의 기록을 보면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일을 직접 시행한 사람은 경포로 보인다. 경포 열전에서는 야밤을 틈타 기습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

간혹 이 학살된 인원이 계곡에 떨어져서 죽은 것으료 묘사가 되기도 하나, 기록을 보면 묻어서 죽인 경우다. 당시 학살의 이유에 대해 항우 본인의 언급은 '복종하지 않는다.'이지만, 이미 그 이전 대치 상황부터 군량이 부족하다는 언급이 나오는것으로 보아 군량 문제도 얽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항우의 부대만으로도 빠듯한 군량이기에 진나라 병사들까지 포함되면 필요한 군량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기를 빼앗은 뒤 시골로 낙향시키면 안되는 거였을까? 차라리 후방에 남겨서 둔전이라도 하게 했으면 좋았잖아 항우가 먼저 둔전을 하면 안되지

이렇게 대학살을 저지른 항우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고, 잠시 유방의 부대와 대치한 후에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고 난 후 며칠 뒤, 함양에 입성했고 여기서 다시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다.

그리고 이미 항복을 했던 자영(子嬰)을 살해했으며, 진나라의 궁궐에도 불을 질렀는데 불은 3개월이 지나서야 꺼졌다. 항우는 함양의 온갖 보물과 여자들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이 행동에 대해 항우의 신하인 한생(韓生)[5]이 충고했다.

"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은 비옥하여 패왕의 도성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의 궁전은 항우가 다 태워 먹은 후라 함양은 허허벌판이었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항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중에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자 한생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비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관을 쓴 원숭이와 같다(沐猴而冠耳)'고 하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구나!"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 사람을 가마솥에 삶아서 죽이고 기어코 동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한생은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결국 항우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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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을 불태우는 항우

3 영향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에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장수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그 죄가 여섯이다!"[7]사기 고조 본기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짐으로 해서 진나라의 부형[8]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9]사기 회음후 열전

보통 항우의 학살을 이야기하면 진나라군 20만을 학살한 이야기를 주로 언급하지만, 실제로 항우는 이 전대미문의 학살이 있은 후에, 함양에 입성한 후에도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됐고 명분도 가장 없었던 것이 바로 이 학살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한신이 나중에 이걸 거론하면서 항우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확신했겠는가.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종류의 학살은 항우에게 있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항우는 이미 이러한 전례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아직 항량이 살아있던 시절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이라는 곳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쉬울 것 같았던 싸움은 성안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움으로서 의외로 어렵게 전개되었는데, 기어코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성 내의 모든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고 죽여 버렸다.

이후 신안에서의 학살이 있던 후에 제나라를 공격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전영(田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항우는 항복한 전영의 병사들을 모조리 파묻어 생매장 했다. 이러한 면으로 볼때 신안에서의 대학살은 급작스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항우가 밥먹듯이 자행하던 만행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 장한이 처음 부대를 일으켰을 당시 주력은 여산에서 일하던 죄수들이었다. 그 죄수들이 죽어도 그닥 동정받지 못할 살인범이나 연쇄 강도범 같이 중범죄자가 아닌[10], 각지에서 세금을 못 내서, 만리장성 노역에 제때 합류 못 했다는 이유로, 혹은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끌려온, 즉 경범죄자나 아예 억울하게 끌려온 무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로 학살된 인원 중에는 진나라 출신이 아닌 타국 사람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장한이 역산의 죄수들을 끌어내 진승-오광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무장시킬때 노역수들 설득했던 말은 "함곡관 동쪽은 진승, 오광이가 반란을 일으켜서 난리도 아니다. 야 니들 집에 어떻게 갈래? 나랑 같이 진승,오광 두들겨 잡고 집으로 가지 않을래?" 였다. 실례로 이 당시 항우 밑에 있던 영포도 여산에서 노역을 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 무리를 지어 세력을 만들었었고, 유방도 여산으로 노역자들을 호송하다 중간에 튀어서 세력을 만들었었다. 게다가 장한이 항복하고 20만의 진나라 병사들 대부분이 백기를 든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진나라에 대한 반감은 진나라 사람들에게도 상당수 있었다.

물론 학살은 윤리적으로도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이며, 그 점만으로도 항우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현대의 윤리를 고대에 적용하지 않는다 해도[11] 이 학살은 전략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였는데, 이러한 학살로 항우가 얻은 이득은 당장의 수고로움을 던 정도 밖에 없었고, 이는 모두 장기적으로 항우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우선, 진나라는 이 당시 결국 망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 열국을 호령하던 진나라의 그 생산력이 어디로 가는것은 아니었다. 전국칠웅이 쟁패할 당시 진나라의 생산력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할 정도였고, 항우가 모든 진나라 사람들을 개미 잡아 죽이듯 학살하고 진나라의 강산을 모조리 불태우지 않는 한 이것들이 단시간 내에 사라질 일은 절대 없었다. 만일 항우가 진나라 사람들을 잘 대했다면 영씨 왕족이 쫓겨난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안에서 저질러진 도살 행위가 널리 알려지면서 진나라 사람들은 항우에게 모조리 등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항우는 이를 자제하긴 커녕 이후 함양에서 만행을 부린 후 진나라의 왕인 자영마저 살해하였다. 상식이 있는 진나라 사람들이라면 항우에 대해서 이를 갈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방이라는 괜찮은 대안마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제나라에서의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생매장하고 힘없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모조리 묶어 포로로 만들어 버리고, 많은 고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공포감을 주어 더이상 반항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제나라 사람들은 이에 대해 겁을 먹기는 커녕, 초나라의 만행에 분노하여 오히려 더 크게 들고 일어서면서 더욱 결사적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틈을 타 제나라의 전횡(田橫)은 다시 수만명의 군세를 일으킬 수 있었다. 결국 항우는 이렇게 제나라에서 시간을 허비한 끝에 유방이 팽성까지 함락하는 것을 두고봐야 했다. 물론, 이후 항우는 그 유명한 팽성대전으로 유방을 박살내었다. 그러나 이미 유방의 세력은 자리잡고 점점 커지는 반면 항우는 비효율적인 소모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항우의 이러한 행위와 이로 인해 나타나는 역효과들은 이러한 작전으로 게릴라를 뿌리 뽑기는 커녕, 오히려 저항만 거세지게 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한데, 초한전쟁 말기에 항우는 외황(外黃)을 공략하다 쉽게 항복되지 않아 짜증이 나(...) 이곳에서도 15살 이상의 사람은 모조리 죽이려고 시도했다. 미친놈아 그만해 이때, 13살 된 아이가 항우를 만나 충고를 해주었던 일이 있었다.

"사나운 팽월이 우리를 해칠 수 있기에,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외항의 주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는데, 이후 항우가 동쪽으로 진군하자 여러 성들이 항복을 해 왔다. 죽이고 겁을 주어서 굴복시키려고 했을때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자비로움을 보이며 유화책을 쓰자 동조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은 뒤였다.

반면에 유방은 항우와는 대조적인 포지션으로 인해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함양에 입성하던 한나라군은 장량의 충고를 들은 유방의 결정으로 인해[12] 아예 함양 내에 발도 들이지 않고 주변에 진영을 차려 백성들이 엄한 피해를 입는것을 막았다. 이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이 유방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후에 입성한 항우가 저지른 만행을 생각해보면 이후 진나라 사람들이 어느 쪽 편을 들었을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후에 초한 전쟁 당시 관중을 장악했던 유방은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숱한 병사들이 죽어나가도 항우에게 증오를 품는 이들이 자진해서 한군에 입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조원소군 포로 생매장이나 서주 대학살이 실제 정사 삼국지에서 특별히 사건 이후에도 비난이 있거나 하는 경우가 없어 당대에 인식이 낮게 취급되는 측면에 비하여, 이 항우의 학살들은 여러 차례 만행으로 언급이 되고, 유방 역시 항우를 비난하는 소재로 썼으며, 한신은 한술 더 떠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 학살이 한나라가 중원으로 나서는 것을 막는 삼진(三秦)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소로 평가하는등 당대에도 충분히 주목을 받은 일이었다. 즉, 얄짤 없이 쉴드 불가능한 악행이라는 것.[13]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한 짓이 자기 목을 조르게 되었다는 걸 모르는지 전사할 때 이런 말을 남겼는데,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사기 항우 본기"

즉, 나는 잘못을 한게 없고, 졸라 잘 싸우기만 했는데, 지금 내가 망하게 된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살 관련한 부분만 해도 그렇고, 그외에 항우의 여러 실책을 고려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발언.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다. 패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항우의 인식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그러니,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양웅[14]

...약 2천년 후 어떤 콧수염 대마왕이 생각나는 유언이다.

4 그 외

드라마 초한전기에도 42화에 신안학살이 나온다.

장한이 항복한 이후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는데, 20만명이나 불어난지라 진격속도가 늦어진데다, 원래 군량도 부족한데 숫자만 늘어난지라 항우 입장에선 이래저래 골치아픈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나라 병사들에겐 형편없는 식량이 지급되자 진나라 병사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 몇 몇 병사들이 난동을 피우기도 한다. 신안에 도달할 때 쯤 항우는 진나라 병사들의 배급을 초나라 병사들 것과 같게 지급하라고 지시하나, 이미 병사들의 불만은 끝에 도달했고, 결국 몇 천명의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용저가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개박살나고 용저 혼자 간신히 살아남는다. 물론 반란은 곧 진압된다.

이 사건 직후 항우는 부하 장수들을 불러놓고 진나라 병사들을 어찌 처리할지 의논하는데, 항우가 다 죽이자고 하자 범증도 별 수가 없었는지 항우의 의견에 따른다. 결국 병사들을 골짜기에 몰아넣은 뒤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은 찔러 죽이다가 막판에는 기름을 뿌려서 다 태워버린다.

항우는 이 광경을 보면서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죽은 초나라 장병들의 명복을 빈다. 울먹이는 이 장면이 사실 더 무섭다

이전에 나온 양성 학살에서 항우는 사이코패스 적 모습을 보인 반면에, 이 드라마에서 나온 신안학살은 항우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나온다.
  1.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남쪽
  2. 이미 일전의 이사는 일의 전말을 고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3. 옛 상나라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
  4. 이는 장평대전에서의 대학살도 마찬가지다.
  5. 이름이 아니라 한나라 출신 선비라는 뜻이다.
  6. 초한전기에선 대국을 볼 줄 모르고 금의환향에만 정신이 팔린 항우에게 실망한 한생에게 항우가 역정을 내며 팽형을 내리자 "어차피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라고 말하고 항우를 비웃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다.
  7. 광무 대치할 당시 유방이 항우의 열가지 만행을 비난할때 했던 발언이다.
  8. 이 시기의 병력은 농민이나 죄수 출신이며, 그것도 중죄인은 거의 다 사형이 원칙이라 노역에 종사하는 죄수는 대부분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을 20만이나, 그것도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였으면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9. 한신이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여건들을 설명할때 했던 발언이다.
  10. 사실 19세기 말 이전까지 어지간한 범죄에 대한 처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형이 원칙이었다. 그나마 조선의 처벌 방법이 좀 관대하다고 평가된 것도 당대 서양이나 중국, 일본에서 이뤄진 온갖 잔혹한 사형 방법을 역적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시행하지 않고 그냥 참형과 교형만을 집행했기 때문이다.
  11. 물론 고대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포로처리 방법이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장에 당대의 유방만 해도 저걸 빌미로 항우를 까고 있고, 백기도 자결할 때 처음엔 자기가 뭔 잘못을 했냐며 비통해하다가 장평에서 포로들 죽인 걸 떠올리고 그런 짓을 한 자기는 죽어도 마땅하다고 했을 정도. 고대라서 지금보다 윤리적인 부분에서 느슨한 면은 있었겠지만, 그 때도 저런 대량학살은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행위인 것은 확실하다.
  12. 물론 함양에 입성했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학살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한군의 구성을 생각하면 약탈이나 강간은 피하기 어려웠다.
  13.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조의 학살이 당대에 아예 무시되었냐면 그건 아니다. 서주대학살은 여포가 조조를 공격할 당시 빌미로 써먹었고 유비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조에게 사실상 등을 돌렸으며 이후에도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촉한동오에서 잘 써먹었기 때문. 무엇보다 조조 자신도 관도 대전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14. 양웅은 한나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에 박학하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이 평론은 양웅의 저서인 법언(法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