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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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사천왕
시바타 카츠이에니와 나가히데타키가와 카즈마스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あけち みつひで)
(1528 ~ 158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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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복원도아케치 가문의 문장. 도라지꽃.

1 개요

"敵は本能寺にあり!"

적은 혼노지에 있다!

"仏のうそは方便と云う。侍のうそは武略と云う。士民百姓はかわゆきことなり。"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1]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데, 사민 백성(사농공상)들이 가련할 따름이다.[2]

일본에서 배신자 하면 가장 먼저 거론 되는 인물이자 역덕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스테리한 인물

일본 전국시대 무장으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를 잘 모르거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 지명도가 높은 전국무장이다. 어쨌든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반자이자, 브루투스처럼 "배신자"의 대명사이다.

통칭은 쥬베에(十兵衛). 후일 큐슈의 명가인 고레토(惟人)씨로 성을 바꾸었으나 대부분의 생을 아케치씨로 보냈기 때문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관직명인 휴가노카미(日向守)로도 알려져 있다.[3]

2 초년기

경력이 상당히 독특하다. 미노의 주인인 사이토 도산의 처조카로 아명은 모모마루이다. 아케치 집안은 미노 겐지의 토키(土岐)씨 일파로 무가에선 제법 이름을 올리고 있는 가문이다. 모모마루 시절 사이토 도산의 귀여움을 받으며 그 병법, 군학, 예법, 교양 등을 전수받았다.

사이토 도산이 아들인 사이토 요시타츠의 손에 죽자, 미츠히데의 일족은 도산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모두 농성하다 죽었다. 미츠히데는 조카인 사마노스케(귀무자의 주인공이기도 함)를 데리고 탈출하여 처음에는 아사쿠라 가를 의지했다.

아사쿠라라면 토카이도의 이마가와에 버금가는 명문이지만, 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무능으로 영 좋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시기에 후일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많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쇼군과 인연을 맺고 후일의 인척인 호소카와 후지타카와도 친우가 되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3인중의 습격을 받아 죽자, 미츠히데는 중으로 출가해있던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를 미요시의 마수로부터 탈출시키고 아사쿠라에 의탁하게 하는 큰 사업을 해낸다. 이 일은 물론 아사쿠라 가문에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벼슬도 없던 하급 무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쇼군의 직신이 되었고, 요시아키의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미츠히데는 쇼군의 직신 신분으로 아사쿠라를 설득하여 상경할 것을 권했지만 정치적으로 대단히 무능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전혀 상경하려 들지를 않았고, 결국 미츠히데가 자신의 미래와 쇼군의 의지가 될 만한 상대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던 신흥세력 오다 노부나가였다.

3 노부나가 휘하에서

미츠히데는 이 때부터 연락 장교 같은 역할로 오다가에 몸담게 되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을 성공시키고 각종 정복 사업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미츠히데도 오다 가문의 신하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원래 쇼군 가문의 직신인 호소카와 후지타카도 쇼군 요시아키의 무능함과 사람됨에 실망하여 오다와 연줄을 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4][5]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 항상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음모를 꾸미곤 했는데, 미츠히데도 여기엔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요시아키가 오다 포위망을 계획하자 이를 저지시키고 계획을 오다 노부나가에게 누설했다. 요시아키는 다케다 신겐의 교토 진공과 발맞춰 니죠 성에서 반 노부나가를 기치로 정식으로 거병했지만, 이것은 불운하게도 신겐의 급사로 인해 설레발이 되고 말았다. 신겐이라는 제일 큰 위협이 없어진 오다 노부나가는 곧 아사쿠라/아자이 가문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교토로 진격해 니죠 성을 포위했고, 요시아키는 머리를 깎고 목숨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죽이지는 않고 카와치로 내쫓았으며, 이렇게 무로마치 막부는 정식으로 멸망하게 된다.

3.1 노부나가와의 관계

이렇게 미츠히데는 굉장히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였지만,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데다가 자기 이외의 인간을 개무시하는 버릇까지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와 같이 고지식한데다 말귀를 한번에 못 알아듣고, 교양 많고,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데다 자존심도 강한 스타일의 인간을 대단히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미츠히데를 근처에 두고 중용하면서도 기분 나쁘면 부하들 앞에서 금귤머리[6]라고 불렀고 머리채를 잡거나 대머리라며 마구 구타하는 정도였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늦건 이르건 사단이 나게 되어 있는 관계였다. 이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일본 소설 번역가이자 이 작품을 번역한 이길진은 이를 기존의 교양과 관념에 집착하는 구세력과, 새로운 지식으로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려는 신세력의 보혁 갈등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통설로 취급되고 있다. 하루는 공식 석상에서 갑자기 광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소한 이유로 미츠히데를 때려죽일만큼 두들겨 팼다고 한다. 미츠히데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고 하며, 근처의 다른 무장들이 말리고 대피시켜서 살았다고도 하며, 아마 역심을 품었다면 이쯤이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프로이스도 <일본사>에서 "노부나가가 미츠히데를 발길로 걷어찼다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일설에는 노부나가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미츠히데가 술을 사양하자 "내가 주는 술을 마실 수 없다면 이거나 먹어라"라면서 칼을 목에 들이밀었다고도 한다.[7] 자신이 술 강요하는 버릇이 있는 상사라면 술을 잘 못하는 부하직원에게 강요하지 말자. 불길 속에서 할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츠히데는 오다 가문에 늦게 들어온데다 후다이 가신도 아니지만, 공이 혁혁하여 군단장 급의 계급에 이르렀으므로 이에 대한 가문 내의 견제도 심한 데다가 노부나가가 이미 후다이 가신이었던 사쿠마 노부모리, 하야시 히데사다 등을 내친 전력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가신에게는 설령 대대로 오다 가를 섬겼다 할지언정 가차없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에 그의 심리나 그가 처한 상황을 분석한 사람들은 이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고도 한다. 쉽게 말해 회사의 고위 임원이 이대로 가다간 언제 자기가 정리해고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경영자에게 쿠데타를 일으켰단 얘기.

또는 노부나가의 잔인성을 이유로 삼는 이들도 있는데, 노부나가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특별히 잔인무도한 이가 아니었고 이 설의 근거들은 대개 후세에 창작된 것이라 현재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지 정교분리 같은 정치적인 이유를 위해 신성시되던 불교 사원 등을 마구 불태우고 도륙한 행위가 당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고,뭐야 충분히 잔인하잖아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대부분 당연히 불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미츠히데의 독실한 신앙심을 근거로 삼아 불교 신자였던 미츠히데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도륙한 노부나가에게 격노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물론 그 중놈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총포를 사들이며 농민반란을 부추기는 악질 종교세력이긴 했지만.

창작물 등에서는 더욱 다양한 설을 채택하는데, 2009년에 방영된 NHK 사극 '천지인(天地人)'에서는 히데요시의 군대를 지원하러 가라고 한 노부나가의 명령에 반감을 품어 (평소 미츠히데가 죽을만큼 싫어하던 히데요시의 아래로 가서 지휘를 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여기서 미츠히데는 요시츠네에서 무능한 지도자 다이라노 무네모리로 분한 츠루미 신고인데, 고지식한 미츠히데를 그럭저럭 잘 표현한 편이다. 근데 드라마는 이히히 똥이야 똥 똥발싸!! 물론 요리키로 파견근무를 가는 것을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현대의 고증 오류. 요리키는 단순히 출장 나가는 것에 불과하고, 노부나가의 아들도 요리키로 파견근무를 간 적이 있었지만 그게 현장 지휘관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93년작 '히데요시'에서는 적에게 인질교환으로 잡혀간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무시한 채 멋대로 인질을 살해한 무자비한 노부나가의 처사 탓에 자신의 어머니도 끔찍하게 살해당해 그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는 설을 채택했지만, 이는 에도 시대의 그림 이야기책의 창작이라는 설이 지배적. 참고로 이 드라마의 노부나가는 그야말로 마왕이다.

4 적은 혼노지에 있다!

미츠히데의 영지는 구 하타노 가의 영지였는데, 미츠히데는 이 곳을 잘 다스려서 군민이 미츠히데를 잘 따랐고, 병사의 수가 1만2천에 이르렀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켜 동해(일본해)쪽의 변방지역인 주고쿠를 정벌 중이었는데, 미츠히데로 하여금 현재 영지 대신에 격전이 한창인 적대 세력 쥬고쿠 모리 가의 영지로 전봉을 시키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내린다. 노부나가로서는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잃으면 미츠히데의 군대가 죽기살기로 싸울 것이다.'라는 계산이었을지도 모르나, 미츠히데의 입장에서는 주고쿠를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먹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하게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날 버리려고 작정했구나'하고 받아들였을 수 있다

미츠히데는 성을 비우고 곧바로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로 향했다. 혼노지는 단순한 사찰이나 숙소가 아니라 제대로 요새화된 군사 거점이었지만, 당연히 주변에 적군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므로 그리 많은 수비병력이 없었고, '노부나가가 주관하는 열병식이 있다.'라는 미츠히데의 거짓말이 통했기 때문에 그대로 혼노지로 진군할 수 있었고, 곧 미츠히데의 군사는 본색을 드러내어 노부나가와 장남 노부타다, 무라이 사다카츠 등의 중신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 때 나온 미츠히데의 명대사로 알려진 것이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인데, 정작 미츠히데 본인이 정말 이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이 말의 출처는 에도 시대의 학자 '라이 산요'의 시 구절 중 한마디. 근데 이 시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미츠히데의 명대사처럼 굳어진 것이라고. 실제로 미츠히데 아래에 있었던 하급 무사의 수기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을 보면 수뇌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하들은 목표가 이에야스인줄 알았다고 한다.[8]

하여튼 그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은 배후세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독범행인지, 그 동기는 무엇인지 등등이 미츠히데 본인이 죽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모리를 공격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습이 마치 사전에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너무나 신속하고 전격적이었기 때문에[9], 이래저래 일본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혼노지의 변 항목을 참고.

5 삼일천하

하지만 노부나가를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충동적인 거사였던지라 사후 처리가 문제였다. 교토를 장악하고 조정과 교섭하던 미츠히데는 자신이 노부나가를 치면 평소에 친한 호소카와 후지타카츠츠이 준케이는 반드시 달려오리라 생각했지만, 둘 다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오다 가문에 절대충성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배반해 봐야 오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만한 인물은 별로 없다는 것을 미츠히데 정도 되는 지략가가 모를 리 없는 상황에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로 인해 미츠히데의 반란에는 믿을 만한 배후세력이 있었다는 설이 굉장히 많다.

미츠히데의 거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배반행위로 비친 것은 분명하다. 교토의 민심을 사기 위해 돈을 뿌리고 "노부나가는 은의 주왕과 같은 자이므로 쳤다"라고 프로파간다 공작을 하는 등의 행위를 했지만, 난세의 민심은 약삭빠르게 대세를 파악하고, 교토삼척동자조차도 미츠히데를 두고 "흥, 곧 질 놈이 제가 무왕이라니..." 하고 비웃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츄고쿠에서 모리와의 전쟁이 생각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독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모리와 화평을 맺고 강행군을 하여 3일만에 순식간에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쓰러뜨렸다. 이 히데요시가 돌아오는 과정이 말도 안 되게 빨랐기 때문에[10] 사전에 함께 모의를 해놓고 히데요시가 뒤통수를 쳤다는 가설도 있으나, 미츠히데는 평소에 교양 없고 무식한 히데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어찌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히데요시의 군사가 그렇게 엄청난 대군은 아니었지만, 미츠히데 쪽은 기대했던 츠츠이나 호소카와 등의 다이묘가 전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아서 그것보다도 수가 더 적었고, 시작하기 전부터 반쯤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회군한 히데요시는 미츠히데가 기반을 잡기전에 신속하게 공격하였다. 일반적으로 히데요시의 압승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시의 상황은 어느 쪽에게나 급박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미츠히데를 죽여 자신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직전까지 히데요시와 교전하던 모리가가 있으며 주변에는 오다가 출신의 시바타 카츠이에가 있었으며 히데요시의 군은 무리한 강행군때문에 지쳐서 도저히 싸울만한 여건이 안되었다. 한 편으로 미츠히데는 주군을 배신하여 죽였다는 이유로 믿고 있던 호소카와가에서조차 버림받았으며 노부나가가 꽤 인망[11]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가의 녹을 먹던 신하들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무척 낮았다.

이 때문에 양군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 채 전투를 계속했으나 최종적으로 수에서 이겼던 히데요시군이 승리하게 된다.(야마자키 전투) 원래부터 사기가 낮았던 미츠히데군은 패전으로 완전히 붕괴했으며 미츠히데는 후일을 기하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병사들은 미츠히데를 따르지 않고 성에 남아서 투항했다. 도망치던 미츠히데는 낙오병 사냥에 나선 농민의 죽창에 찔려 죽었으며 그 목은 히데요시에게 보내져 죽음이 확인되었다.

가끔 농민에게 죽었다는 이유로 이게 사실이 아니다라는 설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전국시대의 농민은 평화롭게 땅이나 일구며 살던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이묘의 소집령이 떨어지면 제각기 집에 있는 갑옷과 칼을 들고 이에 응하였으며 전투가 끝나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실전경험이 있는 사실상의 예비군, 하급 병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전투인원이었다. 이런 점을 이용해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진 경우 농민들이 패잔병들의 소지품을 노리고 무리를 지어 몰려가서 낙오병들을 찾아 죽이는 일도 잦았고, 다이묘들도 패잔병의 수급을 가져오면 그 만큼의 상을 주는 식으로 이런 행동을 장려했는데 이를 낙오무사[12]사냥 (落武者狩り)이라고 한다.[13]
다이묘들은 일반적으로 영토 내에 침입한 적의 침략군을 패퇴시키면 농민들에게 며칠간의 낙오무사 사냥을 허가했는데, 이 기간 동안 농민들은 낙오무사가 지휘관급일 경우 현상금을 번다거나[14], 낙오무사의 값비싼 무기와 갑옷을 약탈하여 살림에 보태거나 숨겨 뒀다가 쓰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낙오무사를 잔혹하게 사냥했으므로 침공전에서 패퇴한 쪽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속담 중 하나인 落ち武者は薄の穂にも怖ずという (낙오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의미)는 이런 연유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수한 군사력으로 한 때 다케다 신겐과 함께 일본을 통일할 만한 인물로 여겨지던 우에스기 켄신도 농민봉기에 애를 먹었으며 후에 히데요시도 대규모 농민봉기를 우려하고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녹여다 농기구와 불상을 만드니 다들 덕도 쌓고 평화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명목으로 칼사냥(刀狩り)정책을 벌이기도 했다. 즉, 당시에 무장한 농민과 병사의 차이는 전투를 다이묘의 명령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느냐의 차이정도 밖에 없었으니 농민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 편으로 노부나가나 시마 사콘처럼 생존설도 존재하는데 미츠히데의 시체가 묻힌 사이쿄지등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미츠히데의 목으로 추정되는 목은 3개가 있었으나 모두 부패가 심하여 확인하기하 힘들었다는 것이며 야사에서는 미츠히데가 자결하고 곁에 있던 부하가 그의 수급을 거두어 어딘가에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후세의 창작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한 생존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난코보 텐카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

조카인 아케치 히데미츠(사마노스케)는 사카모토 성을 지키다가 미츠히데가 패배했음을 알고는 성의 재보와 부하들을 내보내고 자결했다.[15] 어쨌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게 야마자키에서 패한 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워낙 순식간이어서 '삼일 천하'라고 야유받게 되었다. 실제로 미츠히데가 교토를 장악한 후(1582년 음력 6월 2일) 패사(1582년 음력 6월 13일)에 이르는 기간은 약 9일 정도지만,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삼일 천하하면 미츠히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인다.

사세구는 두 수가 전해지는데, 둘 다 후세의 창작이라고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아케치 미츠히데라는 인물상을 잘 요약한 시라 하겠다.[16]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거스름과 따름에는 두 문이 없으니, 큰 길은 오직 본마음에 철저할 뿐.
오십오년의 꿈이여, 한 근본으로 돌아와 깨는구나)
心しらぬ人は何とも言はばいへ 身をも惜まじ名をも惜ま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뭐라 하든,
몸도 아끼지 않고 이름도 아끼지 않았노라)

6 인물됨

미츠히데의 성실한 성격, 준수한 외모, 교양인, 철포의 달인 등과 같은 이미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国取り物語)'에서 쌓인 이미지이기는 하나, 실제로 와카(和歌`일본의 전통시)와 다도를 즐기는 문화인이었고 학문과 군사적 지략까지 갖춘 지성인이었으며 철포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 "성실한 무사"였는지는 의문이 있는데, 몇 번인가 주군을 바꿨고[17] 당시의 기술에 미츠히데가 인격자라는 식으로 나온 게 없기 때문.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미츠히데는 '배반과 밀회를 좋아하며 형벌에 가혹하고, 인내심이 풍부하고 계략 및 책략, 축성 기술에 뛰어난 데에다 전투에도 숙련된 인재'라는 평이 있다. 프로이스에 의하면 친구들에게 '나는 사람을 속이기 위한 72가지의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프로이스가 묘사한 미츠히데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간웅.[18]

그런가 하면 개인적 사생활은 지극히 결벽했고,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애처가였다. 정실인 히로코와 결혼하기 직전에 히로코가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곰보 자국이 얼굴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히로코의 집안에서는 그녀와 꼭 닮은 여동생을 언니 대신 미츠히데에게 보냈으나 미츠히데는 그것을 알아채고 "나는 처라면 히로코 님을 빼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소이다"라 잘라 말한 뒤 히로코와 혼인했다. 오오 순애보 오오.[19] 또한 히로코는 미츠히데가 낭인 시절 여러 가문을 전전할 때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가면서 남편을 도왔다고 하며 미츠히데도 그런 아내를 매우 아껴 죽을 때까지 단 한 명의 측실도 들이지 않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인 가라샤가 바로 둘 사이의 딸. 이 때문에 효우게모노나 NHK 드라마 <히데요시> 같은 픽션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가정으로 묘사되는데, 남편을 내조하는 현모양처, 그리고 가정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직장에서 분투하는 샐러리맨가장 같은 느낌으로 현대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악마같은 직장상사 노부나가

신뢰도는 낮지만 야담 중에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모리 모토나리의 모리가에 사관을 요청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미츠히데의 임관을 거절했는데 면접 탈락 그 이유가 "그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관상이 늑대와 닮았다. 겉과 속이 다른 자이니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사마의?

혼노지의 변 이전에 렌가[20] 모임을 열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시를 지었다.

時は今(때는 바로 지금)/あめが下知る(비가 아래를 적시는)/五月哉(오월이로다)

이 구절은 때(토키)라는 단어가 미츠히데의 출신 씨족인 겐지의 명문 토키씨와 연결되고, '아메'는 비라는 뜻도 되지만 '하늘'이라는 뜻도 되고, '적시다'는 단어의 '시'는 다스릴 치(治)자로도 새길 수 있다. 특히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시의 특성상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해서 "토키(씨의 후손인 미츠히데가)가 지금 오월에 바야흐로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사건 이전에 신사에 참배해서 운을 점치기 위해 제비를 세번 정도 뽑았다고 하는데, 보통은 거사를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제비뽑기를 여러번 하면서 고민해 보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제비뽑기를 여러번 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미츠히데에 대해서는 배신자의 대명사이자 간웅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지만[21] 대개는 성실하거나 상식, 교양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지는 등 동정적인 평가가 많다. 노부나가 잔혹설이 여러 설화나 군담을 통해 유포되면서 자연스레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평가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혼노지의 변이 지모가 뛰어나다는 미츠히데의 소행치고는 너무나 뒷공작이 허술했기 때문. 물론 현실적으로는 쿠데타라는 것이 완벽한 준비를 거쳐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상관이 그 꼼꼼한 노부나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현재는 많은 대중과 창작물들이 미츠히데가 자신이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 최후의 기회를 노려 모반을 결행했다는 이른바 '야망설'보다는 노부나가의 성격과 평소 소행, 미츠히데 본인에 대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결행했다는 '원한설'에 더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미츠히데에 대한 묘사도 프로이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간웅, 배신자라기보다는 성실한 인물이지만 노부나가와 성격차이가 매우 심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식으로 흘렀다.

7 기타

오다 노부나가후손이 음주 단속으로 붙잡혔을 때, 그 경관의 성씨가 '아케치'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어이없어 했다. 적발된 곳이 혼노지 근처라 카더라 경관도 이 사람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저 소문 자체가 좀 뜬소문에 가까워서 정확한 출처가 없다..

여담이지만 TV 도쿄 창업주[22]인 츠노다 토모시게가 그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시는 분 추가바람.[23]

8 기타 창작물

아케치 미츠히데/기타 창작물 참조.
  1. 방편은 십바라밀의 하나로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쓰는 묘한 수단과 방법을 뜻함.
  2. 불교세력, 무사 등 지배층의 거짓말은 온갖 미사여구로 정당화되고, 이에 휘둘리는 일반 백성이 불쌍할 따름이라는 뜻이다.
  3. 이길진 번역 작품에서 히유가노카미라고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나름 역사소설 번역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어째서인지 ゆ와ゅ를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
  4. 호소카와는 후일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미츠히데를 배신하기도 하는 등 노련한 정치꾼이었고, 요시아키는 영 무능한데다 인간성도 음험한 편이라 뒤로는 동맹자인 노부나가를 경계하고, 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5. 다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요시아키 쇼군이 무능한 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형 요시테루처럼 막부 재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의 편이 아니었을 뿐, 쇼군 본인은 꽤나 능력있었다고 한다.
  6. 대머리에 관해선 이설이 존재한다. 미츠히데(光秀)에서 빛 광의 하단부와 빼어날 수의 상단부를 결합하면 대머리 독(禿)이 되므로, 노부나가 나름의 언어유희이거나 애칭이었을 뿐 비하적 의도는 없었다고도 한다. 물론 이걸 받아들이는 미츠히데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7. 현대 일본에서도 "내 술을 못 마시겠냐!"라는 대사는 술주정부릴 때 하는 소리로 통한다. 즉 유력한 부하 가신에게 다이묘가 칼을 빼들고 주폭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기(...)인데, 하필이면 그 부하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였고, 지위도 높았는데다, 매우 소심했다.
  8. 그래도 대사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인지 오늘날의 창작물에서도 많이 오마쥬되는 대사다. 서브 컬처물에서 '적은 ~에 있다!'는 표현이 나오면서 원문 표현이 敵は~にあり!라고 써 있다면 100% 이 대사의 오마쥬.
  9.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대망)에서는 직접적으로 단정내리지는 않지만 히데요시 집권 후 그의 아내 네네의 회상에서 츄고쿠로 출진하기 직전 히데요시의 묘한 언동을 언급하고 있다. "미츠히데를 화나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라고. 히데요시가 미츠히데와 노부나가의 갈등을 악화시킨 게 아닌가고 작중에서도 의심받는 대목.
  10. 이것이 역사에 남는 히데요시의 츄고쿠 오오가에시(大返し, 대회군)이라고 하는 사건이다.
  11. 이 때문에 이에야스나 카츠이에나 히데요시나 노부나가의 자식들을 옹립하여 명분을 세우는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다.
  12. 패주하여 도망치는 무사라 번역하기도 한다.
  13. 낙오무사란 단어의 유래는 겐페이합전 직후에 생긴 헤이케의 낙인(平家の落人)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코에이의 게임 겐페이합전에서도 낙오무사 사냥 커맨드가 있다). 무로마치 시대때에도 존재했었는데, 이 때의 낙오무사사냥의 대상은 전국시대보다 더 커서 몰락하여 뒤를 봐주는 세력이 없어진 공가나 무가들도 거점이 있던 지역의 거주민들에게 약탈을 당하거나, 유형을 받고 유형지로 가던 죄인을 습격하기도 했을 정도.
  14. 다이묘나 총대장쯤 되는 정말 거물급이면 그 마을의 세금이 몇년동안 전액 면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15. 이는 적에게 자신의 것이 넘어가지 않도록 (그게 사람이 됐던 성채가 됐던)철저히 파괴하던 당시의 관습에선 매우 깨끗하고 고결한 행위였다.
  16.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소심하게 노부나가 때문에 고뇌하고 있었다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미츠히데를 서술하는 작가의 시점은 일관되게 미츠히데 불쌍 ㅠㅠㅠ인데, 어째 미츠히데 사후에는 작중의 미츠히데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소인배로 격하된다.
  17. 다만 당시의 무사들은 대부분 특정 가문을 목숨걸고 섬기는 게 아니라, '특정 가문에서 용맹히 싸웠다는 증서를 받아서 여기저기 가문을 옮겼다. 오늘날 직장인들이 경력증명서 들고 이직하고 다닌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물론 특정 가문의 고정 가신은 후다이(여러 대에 걸쳐 섬긴 가신)라고 하여 특별히 원로로 우대받았다. 그래서 미츠히데처럼 몇 명의 주군을 섬기는 행동은 전국시대 당시의 상식으로는 의리 없는 행동으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18. 프로이스가 유럽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이기에 천주교인이나 천주교에 우호적인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승려나 독실한 불교도를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를 '이교도이지만 훌륭한 인격자'라고 묘사한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19. 그런데 곰보자국이 난 아내를 맞은 이야기는 킷카와 모토하루의 일화로 전해지기도 하며 다른 전국무장들도 유사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제갈량이 외모가 부족하지만 총명한 황씨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처럼, 중세 동양에선 박색한 아내를 얻는 것이 '여색을 멀리하는 군자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20. 참여자들이 모여서 한 사람이 첫 구절인 발구를 읇으면 거기에 맞추어서 차례대로 바톤터치를 해 가며 시를 짓는 시짓기.
  21. 에도 시대에 무사의 관직명으로 기피되는 것이 몇가지 있었는데, 미츠히데의 관직명인 휴가노카미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인 지부쇼유 등이 그것이다. 반란자나 모반자의 관직명이라 자연스레 재수없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22. 정확히는 전신인 도쿄12채널
  23. 여담이지만 츠노다 토모시게는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군 육군소좌를 지낸 사람인데 도조 히데키와 내각을 증오해 쿠데타로 박살내려 한 용자다! 안타깝게 무산됐지만.. 다만 죽진 않고 헌병대장인 히라바야시 모리토가 그와 형제 같은 친한 관계여서 면직 처분 정도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