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엄상궁에서 넘어옴)

純獻皇貴妃 嚴氏
1854 ~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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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종황제후궁으로,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고종의 황후나 마찬가지였던 여성이다. 영친왕의 어머니로 보통 엄 귀비라고 불린다.

2 생애

8살 때 궁녀로 입궐해서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명성황후는 엄 상궁을 궐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불렀고, 아관파천에도 개입해서 고종,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42세에 영친왕을 낳은 후[1] 정식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되어 귀인, 순빈(純嬪), 순비(純妃)로 봉해졌다. 고종황제는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큰 반대에 부딪쳤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평민이었고,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 때문.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는 걸로 이 문제는 정리되었다. 그러나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황후로 대우받았고, 복색도 황후의 복색이었다고 한다.[2][3]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귀비로서의 의전일뿐, 황후의 의전은 아니었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조선 왕조 500년 역사상 국왕의 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계비(繼妃)를 들이지 못한 채 후궁으로서 정궁(正宮)의 지위를 사실상 대신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 민씨의 국장까지 치른 후에도 고종은 황후 자리를 비워둔 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했을 뿐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를 잃은 황태자 순종이 부황의 정비 자리가 비었음에도 부황보다 먼저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사진을 보면 그리 미인은 아닌데, 이를 두고 조선 시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당대에도 엄씨는 박색으로 평가됐다. 야사에 의하면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겨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카더라 고종의 특이한 취향 그거보다 명성황후의 외모가 저거라면 ㄷㄷㄷ 그런데 또 고종을 모시던 시종원 부경 정환덕의 말에 따르면, 선녀가 하강한 듯 하여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고종과 비슷한 취향이었을지도

성격이 당찬 여걸이었는지, 일본인들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고 간 영친왕을 귀국시키지 않자 "학교에 방학도 없느냐?! 홋카이도로 여행을 갔다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것보다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냐!!"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드세기로 이름난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에게 말이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7월 20일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일본은 장티푸스에 전염될 수 있다며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국한 영친왕이 그녀의 시신 가까이에 가는 걸 막았다. 한 때 이 이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이 일이 일본의 만행으로 잘못 알려져 있던 적이 있다. 혐한초딩들은 이걸 근거로 한국이 역사왜곡을 한다고 조롱했던 적이 있다 황귀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이며, 같은 울타리 안에는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잠든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영친왕을 일찌감치 순종황제의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영선군, 의친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의친왕은 생모가 죽은 뒤였던데다 살아 있을 때도 명성황후 때문에 별 다른 힘이 없었던 탓에 엄 귀비가 원하는대로 영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 후계자에 탈락한 건 의친왕의 탕아기질 때문이였다고도 하는데 판단은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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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있는 여자가 순헌황귀비 엄씨, 왼쪽은 아들인 영친왕.

3 근대 교육과의 접점

나름대로 여성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숙명여자중학교ㆍ숙명여자고등학교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4]의 전신인 진명여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설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의 전신인 양정의숙[5],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에도 기부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숙명여자대학교의 경영권의 일부를 구황실과 영친왕이 갖고 있었는데, 광복 후 이로 인한 소송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가 이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아 결국 황실 측이 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 귀비가 기부한 토지는 숙명여대의 소유로 인정을 받아서, 서울시가 몇 번이나 뺏으려고 했지만 매번 재판에 지고 있다. 정작 엄 귀비로부터 하사받았다는 토지 문서는 행방이 묘연하여, 숙명여대에서 계속 찾으려고 하고 있다. 문서 관리는 소중히, 제대로 하자.[6]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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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상당히 외모가 버프되어 나왔다. [7] 버프 맞아?
  1.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들을 낳기 위해 북한산에 산신각까지 짓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만든 약사불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서울 남산에 있는 와룡묘(臥龍廟) 제석전에서 엄 귀비가 빌어 영친왕을 낳았고, 나중에 엄 귀비가 와룡묘 안에 삼성각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2. 이 귀비 칭호가 정해진 것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화가 있다. 엄 상궁이 황후가 되지 못하자 다른 칭호를 정해야 했는데, 이 때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당나라 양귀비의 예를 들어 귀비라는 칭호를 올렸다. 그러자 엄 상궁은 내심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던 터라 자존심이 상했고, 이용익의 반대파를 움직여 이용익을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용익은 충신이었는지라, 고종은 꼼수를 부려 겉으로는 들어주는 척했지만 어물쩍거리며 미루다가 이용익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 위기를 피하게 했고, 뒤이어 베트남으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는 명을 내려 공을 세우게 해 없던 일로 만들었다. 꼼수 대마왕 그리고 나중에 엄 상궁도 '황후가 못 될바엔 미녀인 양귀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3. 송우혜,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 2010
  4. 진명여자중학교도 있었으나 1987년 폐교되었다.
  5. 기부한 것뿐만이 아니라 애초에 설립자가 순헌황귀비의 친정 조카이다. 지금도 이사장이 그 후손으로 엄씨이다.
  6. 비슷한 사례로 남태평양의 피지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증명한 독립 증명서를 분실했다.
  7. 원래 박시백 화백이 초상화가 있는 인물의 경우 버프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