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운동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자
李容翊
1854 ~ 1907
구한말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이며 아호는 석현(石峴). 함경북도 명천 출신. 대한제국 시기 정부 인사로, 홍종우 등과 함꼐 몇 안되는 충직하고 유능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본래 보부상(북청물장수) 출신이었으나 민영익을 만나게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고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을 한 명성황후와 고종간 정보통 역할을 해 왔던 공로를 인정받아 단천 부사로 임명되었고, 1902년 탁지부 대신[1]으로 임명되어 친러파로 활약,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방지에 힘쓰기도 하였다.[2]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3], 이듬해 보성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힘썼다가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를 반대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석방 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피살되었다. 2012년 그것이 알고싶다 발표.
후에 그가 세웠던 보성전문학교는 해방 후인 1946년 지금의 고려대학교로 승격되었다.[4]
김주영 소설,이두호 만화 객주에서도 조연이긴 해도 꽤 비중이 있게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천봉삼이 모시던 쇠살쭈(상단 행수-사장-) 조성준을 돕던 젊은 보부상으로 나오다가 자신이 알아서 길을 가겠다고 독립하더니만 나중에는 금괴를 가득 찾아내 민영익에게 바친다. 민영익이 비웃으면서 금괴를 뇌물로 준다고 내가 널 알아주기라도 한다냐? 냉소를 비쳤으나 굴하지 않고 배짱있게 대꾸하여서 그가 마음에 든 민영익이 나가려고 하는 그를 막으며 "들어오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나가는 건 내 마음이다." 라며 측근으로 고용한다.
이렇게 민영익 휘하로서 조선 보부상 상단을 떨게 만들며 막대한 수익을 거두게 되었으나 거만하지 않고, 한때 행수로 모셨던 조성준을 크게 우대하며, 선배 격인 봉삼에게도 잘 우대했다.민영익이 봉삼을 쥐어 짜내려고 할때도 가장 두둔하기도 했다. 더불어 임오군란 당시 민군의 칼날에서 민영익을 구해준 인물로 나와서 민영익은 이용익이 유능한 점도 있지만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일설에는 보법 - 흔히 축지법이라고 불리는 - 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하루 만에 걸어간 적도 있었고(...)[5] 이 능력 덕분에 임오군란 당시 맹활약할 수 있었다고...
1.1 관련 항목
- ↑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
- ↑ 다만 이와는 별개로 친러파라 독립협회로부터 맹공을 받았는데, 내장원경 시절에는 독립협회에 의해서 고등재판소에 고발당하는 일이 있었고 죄목중 하나가 화폐를 잘못 주조한 것인데 화폐정리사업과 관련된 일로 잘못된 동전을 풀었던 일이다. 이래저래 고종의 비자금 관리 일을 맡다보니, 고종에게는 부를 안겨주었지만 민중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줬다고 할 수 있다.
- ↑ 고려대학교의 전신.
- ↑ 미(美) 군정청령(領) 의거 승인
- ↑ 고종의 명으로 갔다고 한다. 심지어 전주에서 인증까지 받았다고(...)
- ↑ 보성전문은 현 고려대의 전신이다. 현재는 이 학교를 그로부터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설립자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