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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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오태호
출생1968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신체176cm, 65kg
학력대한신학교 법학과
데뷔1987년 그룹 아카시아
수상경력1992년 대한민국 음반가요대상
1993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사가상
1994년 뮤직박스 최우수 작곡가상

1 개요

서정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로 1990년대 초중반 발라드계의 최고의 작사가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레전드급 뮤지션이다. 기본적으로 작사/작곡은 물론이거니와 기타리스트로도 수준급의 실력을 겸비하였으며, 개인 정규 앨범도 3집까지 취입한 나름 싱어송라이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작사가작곡가로 더욱 유명한 인물.

2 데뷔 과정

유년시절 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서울고등학교 시절 기타리스트를 꿈꾸며 교내 밴드로 유명했던 '리자드'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국내 록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의 아들인 신윤철그룹 H2O박현준을 조우하며, 헤비메탈프로그레시브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만난 신윤철, 박현준과는 무척 친한 사이여서 현재까지도 인터넷 밴드를 만들어서 석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날 정도라 하는데, 당시에 왕따 같은 것도 없이 서로를 위해주고 배려해 주면서 성장한 순수한 환경이 그가 작사, 작곡활동을 할 때 감수성 풍부한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 수 있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며 오태호 본인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1987년 이승환과 함께 아카시아라는 인디밴드로 데뷔 후에, 이듬해인 1988년 공중전화라는 소프트록 성향의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몸담았다. 신대철이 주축이었던 메탈컴퍼니 소속의 대표 그룹 시나위에서 신대철이 잠시 공석일 때 그의 기타 세션을 대리해서 담당했고, 신대철 스스로도 라이벌로 생각 했을 정도로 기타 연주 실력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작곡가로 전향한 시절에도 이문세 콘서트 투어에서 기타 세션을 담당하면서 그가 작곡가가 되는데에 음악적으로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이영훈과 조우하여 호흡을 맞추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조용필로 부터 기타 세션 제의가 정식으로 들어오기도 했었으나 당시에 얼굴 알려지는 게 싫었던데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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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당시만 해도 국내 헤비메탈계에서 촉망받던 기타리스트 였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발라드 작곡가로 전향한 것이 의아할 정도인데, 1980년대 당시 국내에서 기타리스트로서 몸담을 만한 음악 장르가 록, 혹은 헤비메탈 계통이 전부였기에 몸담았을 뿐 헤비메탈의 외골수적인 음악적 성향이 오태호의 둥글둥글한 개인 성격과 맞지 않았고, 때마침 이영훈이 만든 이문세소녀라는 곡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발라드 계통 작곡가로의 전향을 최종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 당시만 해도 락부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기에 전향 후에 꽤나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3 작곡 활동

그룹 ‘공중전화’의 음반을 만들면서 자작곡이 필요해 곡을 써본 것이 작곡가로서의 발걸음을 딛는 계기가 되었고, 그룹에서 보컬로 함께 활동했던 故홍성민(가수)[2]에게 '기억날 그 날이 와도'[3]라는 곡을 통해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성공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이후 친분이 두터웠던 이승환의 데뷔앨범의 프로듀싱에 비중있게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990년에 앨범이 입소문을 타고 뒤늦게 대히트를 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자연스레 작곡에 집중하게 된다.

전성기때 만든 그의 대표곡들을 들어보면 오태호 특유의 코드 진행을 느낄 수 있으며, 화려하지는 않아도 잔잔하면서도 순수한 감성을 자극하는 90년대 스타일의 발라드표 멜로디에 시 한편과 같은 서정적인 내용의 가사들이 잘 어우러져 오늘날까지도 명곡들로 평가받고 있다. 여타 유명 작곡가들과 달리 다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만든 곡들의 퀄리티는 작품에 따라 들쭉날쭉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편이다. 이는 그가 작사와 작곡을 함께 하다보니 만든 작품들이 자연스레 자식같이 여기면서 아무 가수에게나 주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잘 어울릴 만한 가수에게 추천해주는 그만의 신조 때문이다. 만약 가수 섭외 중에도 가수가 곡에 애착을 가지는 모습이 안보이고 소위 앨범에 묻히는 곡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 "미안하지만 들어보고 안맞으면 돌려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가수 섭외 스타일은 자신이 직접 통기타만으로 어쿠스틱하게 연주하며 본인이 직접 노래한 데모판을 들려주고 말기에, 당시 데모판을 위해 편곡까지 마치고 보컬을 섭외해 녹음해서 들려주는 관행과는 거리가 멀어서 아직 유명하지 않았던 초창기에는 가수들이나 제작자들에게 성의없어 보이거나 무시한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4] 다만 이것은 긍정적으로 보면 가수들에게 음악 스타일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실제로도 오태호는 가수 선정이 완료된 이후로는 편곡이나 창법 같은 것에 관여하지 않고 해당 가수나 제작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덕분에 원곡가수들과의 관계도 좋은편이라[5] 그가 10여년 만에 외부활동을 재개했을때도 이승환이 그를 위해 이오공감 이후 22년만에 피쳐링도 기꺼이 참여해 주었으며, EBS 스페이스 공감 공연에서도 상당수의 원곡가수들이 게스트로 출연을 해 주며 그의 공연을 빛내 주기도 하였다.

전성기 당시에 가수 이승환의 발라드 시절 콤비로 활약한 것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는데, 이승환의 데뷔전 인디 시절 부터 동고동락하며 공동 프로젝트 그룹 '이오공감'까지 결성하여 큰 인기를 얻는 등[6] 이승환이 발라드의 왕자로 올라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을 정도로 오태호가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 당시의 이승환과 오태호의 관계는 가수 이문세와 작곡가 이영훈의 관계가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콤비였기 때문에, 실제로도 이승환의 발라드 시절 팬들은 오태호를 무척 그리워한다.[7]

1993년 이승환이 3집을 기점으로 기존의 오태호표 스타일의 음악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김광진, 정석원, 박용준, 조규만 등의 당시 새로운 뮤지션들과 실험적인 시도를 하며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록으로 전향을 시도하면서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결별하게 되었으며[8], 이후에 오태호는 당시 신인으로 데뷔를 준비중이었던 서지원과 조우하여 데뷔앨범 제작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며 새롭게 활로를 모색했으나 그마저도 2집을 발매하기 직전인 1996년 1월에 요절하며 곁을 떠나가게 되었고, 그 후 오태호는 개인 앨범이나 일부 의뢰된 곡들만 간간히 내다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10여년간 현업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2년에 그가 작사, 작곡한 곡들로 기획한 뮤지컬 '내사랑 내곁에'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대외 활동을 재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이영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표곡들로 이루어진 뮤지컬이 기획되는 영광을 얻으며 이영훈의 계보를 잇는 한국 발라드계의 전설 뮤지션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2013년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그가 만든 곡이 무려 10곡씩이나 등장하여 1990년대 당시 오태호의 음악적 위력을 다시금 실감케 하여 재조명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드라마의 경우 유명 가수들의 곡뿐만 아니라 오태호의 개인 앨범에 수록된 곡들까지 BGM으로 넣은 덕분에, 오태호 본인도 상당히 놀랄 정도로 자극이 되어 작곡활동을 재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14년 5월에는 그가 저술한 에세이집 '비 갠 아침 바람의 향기'(비아바향)를 출간했다. 사실 맨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그의 기타리스트 경력을 알고서 기타 교재를 의뢰하였지만 기타를 독학한 사람으로서 이론서를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오태호는 이를 거절했고, 그 대신에 대외 활동을 중단한 채 10여년간 작사가로서 메모지나 휴대폰 등에 가사로 못다한 지나간 낙서 같은 순간순간의 느낌과 생각들을 수시로 적어둔 것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책에는 신곡 2곡이 담긴 CD를 부록으로 실었는데, 이승환과 22년 만에 함께 부른 '추억 속에서 만나요'와 그와 알고 지내던 신인가수 최승호가 피처링한 '비 갠 아침 바람의 향기' 등 두 곡이 수록됐다. 이 곡들은 앞으로 오태호가 '메이플라워'란 프로젝트 그룹으로 꾸준히 발표할 음원의 첫 작품으로, 30, 40대 전후의 대중이 비록 소수더라도 편히 듣고 공감하거나 위로받을 만한 음악을 묵묵히 발표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도 밝혔다.

국내 심야 음악프로그램으로 유명한 EBS 스페이스 공감의 2014년 11월 6일 목요일 방송분에 출연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급 뮤지션의 공연 답게 김성면(피노키오), 이범학, 이상우 등 그가 만든 곡을 부른 원곡 가수들이 게스트로 대거 출연하며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으며,이승환 까지 나와줬으면 대박이었을텐데(...) 엔딩곡으로 김현식내사랑 내곁에를 기타 솔로로 연주하는 모습은 가히 레전드 급이라 할 수 있다.[9]

4 대표곡

※ 특이하게 대표곡들 거의 모두 작사 작곡을 함께 수행했다. 작사나 작곡만 수행하거나 공동 작업한 곡들의 경우는 별도로 병기한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 1집 Memory (1993)
  • 2집 허무, 그 진실한 시작, 그 자유로움 (1994)
  • 3집 On & On (1996)

5.2 프로젝트 앨범

항목 참조
  • Mayflower (2014)
2014년 5월에 발간된 오태호의 수필집 비 갠 아침 바람의 향기에 CD형식으로 같이 수록되었다. 처음에는 이오공감이 다시 재결성된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지만... 정확히 말하면 유희열토이처럼 객원 보컬을 섭외하는 식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1. 이런 오태호와 달리 이승환은 계속 헤비메탈을 하고 싶었으나 헤비메탈 시절 동료들로 부터 창법이 너무 뽕끼가 강하다며 많이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함께하던 보컬로 김종서까지 나오는 바람에 주눅이 들어 발라드로 전향했다고 하는데... 발라드로 가니 김현철이 있어서 또 절망했다고...
  2. 2007년 뇌출혈로 사망
  3. 1989년 Rock In Korea 프로젝트 앨범에 발라드 넘버로 수록되었으며, 홍성민의 1990년에 발매된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4. 이는 가수 김성면이 그룹 피노키오 시절에 직접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5. 특히 김성면의 경우 술친구일 정도로 사이가 정말 좋다고 한다.
  6. 이승환과 오태호가 각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만든 일종의 기념비적인 활동으로, 앨범 A면은 이승환이 만든 곡들을, B면은 오태호가 만든 곡들을 수록했다. 하지만 실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곡은 오태호의 곡인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으니 사실상 오태호의 공이 컸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이승환도 오태호의 발라드 덕분에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라고 인정했다.
  7. 위에서 서술된 오태호 특유의 코드 진행으로 이루어진 멜로디와 서정적인 내용의 가사가 당시의 이승환의 속삭이는 듯하면서 맑은 목소리와 어우러져 내는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8. 덕분에 절교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후에 언급된 프로젝트 메이플라워의 추억속에서 만나요를 작업할 때도 오태호 혼자서 전 부분을 부르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이승환에게 같이 하자고 요청했고, 이승환이 수락. 그래서 이 듀엣곡이 나온 것이다.
  9. 여담으로 저 당시 사용했던 기타 스탠다드 스트라토캐스터 HSS 모델이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가 이런 걸 보고 말하는 건가… 아… 이래서 "기타가 펜더면 뭐하냐. 손가락이 펜더여야지."라는 말이 있는 거구나…
  10. 1989년 신촌블루스 기타리스트 시절 어느 지방공연에서 오태호가 대기실에서 이 곡을 습작으로 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모습을 우연히 본 김현식이 그 자리에서 바로 오태호에게 취입을 부탁하여 김현식의 유작이자 역대 최고의 곡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11. 처음에는 그와 공중전화 밴드에 같이 몸담았던 친구인 홍성민이 참여한 Rock in Korea 컴필레이션 앨범 수록곡으로 내정되어 실제 녹음 일정까지 확정되었으나, 녹음 바로 전날에 절친이었던 이승환에게 시험삼아 들려주자 이승환이 곡이 너무 좋다며 자신에게 달라면서 당시 만원 어치의 붕장어 한 접시(...)를 대접해 준 덕분에 결국 이승환에게 주기로 결정하여 오늘날의 명곡이 된다. 여담으로 오태호는 자신의 곡을 기다리던 친구 홍성민을 실망 시키지 않기 위해 밤새서 하나 더 쓰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하룻밤 만에 노래를 하나 더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다름아닌 홍성민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기억날 그날이 와도'다.흠좀무
  12. 이승환에게 최초 의뢰가 갔으나 퇴짜를 맞고 그 다음 강수지에게 의뢰가 가서도 다시 퇴짜를 맞은 곡으로 결국 이승환에게 다시 오게 된 곡이었다고 한다. 앨범 작업 당시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이승환 본인도 스타일에 있어서 그렇게 탐탁치 않았던 곡이었지만 앨범 출시후 실제 대중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이승환의 가수인생에서 첫 1위를 안겨준 명곡으로 자리잡게 된다.
  13. 연인의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가고, 결국 친구보다 어색한 사이로 멀어짐을 표현한 곡이다. 처음에는 군복무를 마치고 2집 컴백을 준비중이던 인기가수 김민우에게 의뢰가 갔다가 퇴짜를 맞고서 김성면이 보컬로 있던 록그룹 피노키오에게 최종 낙점되었다. 1992년 11월에 데뷔곡으로 발표했지만 무명에 가까운 신예 그룹에 지나지 않았기에 한동안 묻혀있었다가, 라디오 신청곡을 통해 입소문으로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여 당시 노래방 애창곡 1순위로 등극하는 등 인기의 가속도가 붙더니 1994년 초에 가요톱10 1위까지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