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원(음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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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B 리즈시절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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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인터뷰 당시 모습.(40세)
어째 나이 든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이다.

1 기본 정보

1968년 12월 23일생. A형.
출생지 : 대구광역시
가족사항 : 친형 정기원(장호일)

2 데뷔 과정 그리고 무한궤도(밴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재학중이던 1989년, 그 전 해인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대상을 수상한 무한궤도가 정규 앨범 레코딩을 준비하던 시기에 키보디스트로 음악신에 데뷔하였다.[1] 사실 그 이전인 1988년에는 '실험실'[2]이란 밴드로 강변가요제에 나갔었다가 1차 예선에서 광탈(…)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신해철은 2000년에 본인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처음 음악을 하던 그 시절"이란 에세이 형식의 인터넷 연재물에서

서울대에서 왔다는 괴상한 3인조는 째즈도 아닌 가요도 아닌 골 때리는 곡을 연주했는데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었으며, 바벨 2세에 나오는 요미와 흡사한 키보디스트가 피아노 연주로 관객들을 으악 죽이고 있었다.(그의 이름은 정석원이었다..훗날 그의 별명은 요미가 된다…)"

라고 회상했으며 정석원은 '공일오비 스토리'라는 에세이에서 언급하길, '아기천사'(신해철이 대체 멤버였으며 3차 예선에서 탈락했다고 함.)라는 밴드의 멤버로 출전했던 신해철은 이 때 정석원의 연주가 끝나고 객석의 예의상 쳐 주는 박수가 끝난 후에도 계속 객석에서 일어나 혼자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냈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다가가 "음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반년 후 무한궤도가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대상을 탄 직후 음반 레코딩을 앞두고 신해철의 제의로 세번째 키보디스트로 영입되어 레코딩과 및 방송 활동을 함께하게 된다.[3] 그리고 앨범 활동 시기의 무한궤도가 방송에 출연할 때에는 보컬에 주력하는 신해철을 대신하야 정석원의 친형이었던 정기원(장호일의 본명)이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3 1990년대, 015B의 발족

1990년, 무한궤도의 해체 후 솔로로 데뷔한 신해철[4]과 별개로 무한궤도의 소속사였던 대영AV에서 친형 장호일(위에서 언급하였지만 본명은 정기원)과 역시 무한궤도의 베이시스트였던 조형곤[5]과 함께 015B 결성 후 데뷔, 015B라는 이름은 무한궤도에서 차용하여 장난스럽게 바꾼 것이 확실하다.[6]

형제의 아버지가 대구 MBC의 이사였기에 조용필의 매니저 출신이자 대영AV 사장인 유재학과도 원래 안면이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이미 무한궤도의 리더 시절 부터 스타덤에 올랐던 신해철에 비해서 소속사의 지원과 기대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 소속사에서 015B라는 이름 조차 제대로 기억 못해 녹음실에서는 "궤도이탈"로 불렸다고 하니 그 설움이 오죽했을까. 아 눈물 좀 닦고

사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그들 또한 다른 무한궤도의 멤버들 처럼 전업 음악인으로서의 데뷔를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친형인 정기원의 경우 '나라기획'이라는 광고회사를 다니며 동시에 이를 숨기기 위해 본명인 정기원 대신 "장호일"이라는 사촌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고 한다. 솔로 데뷔 앨범에서 이미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신해철에 비해 1집 "015B"는 발매 초반 큰 반향이 없었으나 타이틀 곡 "텅 빈 거리에서"가 라디오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 30만 장 판매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두자 2집 발매가 결정 되었다고 한다. 2집 때는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조현찬이 드러머로 합류하였다.

이 시절, 단 한 사람의 작곡가가 매 앨범마다 각기 다른 여러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수록하고 그것도 빼어난 멜로디 감각으로 친숙함마저 겸비하여 대중 앞에 내놓자, 열광적인 반향이 뒤따랐다.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상에서 '작곡계의 독재자', '황제'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7] 특히나 절정의 인기를 누린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수록된 015B 3집부터 5집까지의 활동 시기가 가히 정석원 본인의 리즈 시절이라 부를 수 있는데,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기로 불린 1990년대에 소위 신세대의 대변자로 불렸던 서태지가 당대 10대들의 감성을 대변한다면 015B는 그보다 조금 높은 연령대인 20대(X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한 축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015B 음악의 핵심이었던 정석원은 앨범마다 수없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도 대중성과 음악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키는 솜씨가 빼어났다. 그런 실험적 시도 가운데에서도 앨범마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감성적인 발라드들이 항상 2~3곡 이상 배치되었는데, 본인이 스스로 존경한다고 밝힌 데이비드 포스터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편곡과 더불어 그 시대 대중의 감성코드를 잘 잡아낸 이 발라드 곡들이 팀의 인기를 유지시키는 요소이기도 하였다. 훗날 015B와 유사한 컨셉의 프로듀서 중심 그룹 토이를 성공시킨 유희열도 앨범의 곡 구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석원의 앨범 곡 구성과 컨셉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015B 2집[8] 60만 장, 015B의 3집부터 5집까지는 모두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고 4집에서는 가요톱10 골든컵도 015B의 이름으로 수상, (당시)여고생 가수 이가희의 앨범 제작과정에서 정석원이 쓴 글들을 읽으면 본인도 이 시절의 자신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작곡가 및 프로듀서로서도 활발히 활동, 윤종신, 이장우, 성지훈, 김태우 등 015B 객원가수 출신들의 음반 및 드라마 "연인", "파파"의 O.S.T에 참여했고, 이승환과의 친분으로 당대의 명반인 이승환 3, 4집의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였다. 특히 4집 "HUMAN의 경우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적 퀄리티를 위해 돈을 쏟아붓는 성향의 이승환과 함께 미국에 가서 David Campbell 등의 프로듀서 및 해외 세션과 함께 작업하는 등 당대 대한민국 대중 가요의 문법을 새롭게 쓴 이 앨범 작업과정의 전반을 함께했다. 자연히 "천일동안", "악녀탄생" 등의 곡에서 정석원 본인의 음악적 색채 또한 짙게 드러나있다. 아울러 이 앨범 제작에의 참여 경험은 이후 이가희 솔로앨범, 박정현 4집에서의 음악적 성과로 드러나게 된다.

1996년, 그간 몸담아 왔던 유재학 사장의 대영AV에서 새롭게 음반시장에 참여하고자 했던 대기업 계열사인 LG미디어로 이적, 사실상 015B로서의 은퇴를 염두에 두고 "The Six Sense"라는 부제로 015B의 6집을 발매했다. 이번엔 팬들에게 대한 작별의 의미를 담은 이장우의 발라드 "나 고마워요"를 제외하고는 현대 클래식을 가져온 "작곡과 출신" 유희열의 도입곡 "일식"부터, 인더스트리얼, 헤비메탈, 테크노, 일렉트로니카 등 비주류 장르의 조합으로 미친듯이 질주하는 당대의 문제작, 독일의 바우하우스 운동의 재현을 표방하며 소위 "음악 장인"으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타이틀 곡 "콩깍지"의 객원보컬은 박용찬(MGR)[9], 앨범 판매량은 24만 장으로 대중적으로는 명백히 실패했지만[10] 훗날 정석원과 함께 작업한 박정현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데뷔시(1996년) 감상했던 국내 음반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한국 대중음악 앨범으로 꼽았고 당시와 이후에도 이 앨범에 대한 많은 평론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음악성에 있어서는 당대 주류 작곡가 중 최고 수준임을 새삼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성과물, 단 병역문제를 이유로 대중에게 은퇴를 선언한 그가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것도 이 직후다.

4 2000년대, 프로듀서 겸 작곡가, 그리고 015B의 재결합

2001년 친형인 장호일의 기획사 플래티넘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이가희라는 신인가수를 데뷔시키며 작곡가 데뷔, 사실상 객원가수 1인을 쓴 015B의 앨범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앨범의 발매를 통해 프로듀서로서 컴백, 그간의 인맥을 총동원한 화려한 피쳐링과 작곡가 군단[11] 이 함께했지만 결과는 완전 망했어요. 소속사의 무능과 무력함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언밸런스"를 내세운 파격적인 노랫말[12]과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천재 소녀" 컨셉, 무엇보다 그녀만의 개성이라 내세웠으나 아무리 좋게 들어도 미성숙한 아마추어 수준의 보컬도 한 몫 했다. 초반의 발매 홍보 이후 가사 때문에 온갖 곡들이 방송금지를 먹은데다 소속사의 힘이 없어 방송 출연도 거의 없었으니 이미 대형 기획사 위주로 재편되던 음악 시장에서 신생 기획사의 "문제작"(여러가지 의미에서)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높이 평가받은 편곡과 편집증적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공들인 사운드였기에 되려 아쉬웠던 앨범. 판매량 4만 5천장. 초고속 인터넷과 MP3 불법 다운으로 앨범시장의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 조성모 등이 200만 장씩 팔아제낀 것이 바로 그 전 해의 일이다. 그냥 망한 거.

그러나 2002년, 그는 국내 최고 수준의 여성 보컬을 만나 한국 음반사에서도 손꼽히는 결과물을 내놓았으니 바로 박정현 4집 OP. 4의 전체 프로듀서를 맡은 것. 그간 가창력은 높게 평가받았으나 대중적으로는 그저 R&B 특화 보컬로만 기억되어 있던 박정현의 역량을 최대치로 뽑아낸 이 앨범은 꿈에의 기록적인 히트와 대중적 인기를 획득하면서 가수와 작곡가 모두에게 영광의 순간을 안긴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블록버스터식 편곡" 및 "오리엔탈 발라드"의 결정판으로 불릴 수 있는 타이틀 곡을 비롯, "Plastic Flower", "미장원에서", "생활의 발견" 등 수록곡 다수가 대중적 인기와 음악적 명성을 모두 획득하면서 "역시" 정석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015B 이후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된다. 판매량은 약 30만 장 이상.

이후 박정현 OP.4 라이브 앨범의 수록곡 "앤"과 박정현 5집의 수록곡, 윤종신 솔로 앨범 참여, 그 외 이승환 7집 앨범 참여 및 그의 드림팩토리 사단의 소속 가수 "하루"의 작업에도 참여한다.

결국 2006년 015B가 재결합함으로써[13] 대중음악 전면에 나섰다. 특이하게 힙합 장르를 표방하면서 당시로서는 신예였던 버벌진트, 요조를 비롯, 케이준, BONI(신보경), 조유진, 유효림 등의 신인들을 기용, 그와 친분이 있던 기존 음악인들 중에서도 박정현, 다이나믹 듀오, 클래지콰이호란, 거기에 유희열까지 참여한 호화로운 객원가수진을 자랑했다. 그외 이 앨범의 수록곡을 리믹스한 곡에 신곡을 덧붙였던 미니앨범 "Cluster vol.1"에서는 최근 주목받는 황치열페이지오현란, 그리고 그룹 E.O.S 출신으로 015B 및 토이의 객원가수로 인지도를 얻다가 "그랬나봐"의 성공 후 솔로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던 김형중이 이 미니 앨범 타이틀곡의 객원가수로 다시금 정석원과 작업했다.

다만 마음먹고 내놓은 015B 컴백 이후의 음악 치고는 90년대 그들의 인기만큼 대중적 인기를 크게 끈 곡은 사실상 없다. 신보경이 부른 "잠시 길을 잃다"가 음원차트에 올랐지만 그 이전의 히트정도 비하면 미미한 편이었다. 다만 정작 처음엔 타이틀로 내정했던 "처음만 힘들지"를 부른 요조나 초기부터 제법 우호적인 반응이 나왔던 "잠시 길을 잃다"를 부른 신보경 또한 앨범 활동을 고사함에 따라 인기를 끌만한 곡을 타이틀로 활동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객원가수제의 부정적인 면이 작용한 듯, 판매량도 1만 7천 장 정도로 썩 좋지 못했다.다만 음악적평가는 우호적이라 '잠시 길을 잃다'는 그 당시 많은 가수지망생들의 오디션 연습곡이 되었고 - 너무 많은 이들이 이 곡으로 오디션을 보는 바람에 mnet의 '슈퍼스타k'에서는 이 곡을 오디션금지곡 리스트에 올리기까지 하였다.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371193820525428010). 한류스타 장근석은 이 엘범을 본인의 인생엘범으로 꼽으며 명반이라 칭했고(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110021134151112) 그 영향인지 장근석은 일본공연시 이 앨범의 객원랩퍼였던 버벌진트를 동행했다고 알려진다.


015B 활동으로는 1장의 정규 앨범 "Lucky 7", "Cluster vol.1"(2007), '20th Century Boy'(2011) 등 2장의 미니앨범과 몇 곡의 디지털 싱글이 발매되었지만 그이후 음악인생 동반자격인 윤종신이 미스틱89라는 회사를 만들자, 전담 프로듀서로 합류했고, 미스틱 소속 가수들의 음악 대부분을 프로듀스 하느라 015B의 새 음반 소식은 아직 없다. 컴백 직후엔 라이브 콘서트 등도 자주 있었으나 점차 2006년 컴백 이후의 신곡은 거의 세트리스트에서 빠지게 되자 추억팔이용 우려먹기 공연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2011년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내걸었던 공연 실제로는 21주년이었음은 넘어가자 이후 현재까지 역시 공연 활동은 없다.

015B 복귀 후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활동으로는 박정현 8집에의 일부 참여 및 나는 가수다에서 박정현이 부른 "나 가거든", "겨울비" 편곡으로 언론에서 잠깐 주목을 받았고 로엔 소속의 브라운아이드걸스(현재는 윤종신의 미스틱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함)의 제아가인 미니앨범과 싱글, 아이유 2집과 3집, ZIA의 미니 앨범에 수록곡을 제공했다. 특히 제아와 ZIA의 경우 타이틀을 맡았고, 지아의 '일년째'는 음원차트 올킬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비치, 옥주현, 빅마마등의 최근 음원에도 참여했다.

최근 10년간의 작업 중에서는 "015B 정석원"의 그 명성만큼 기억되는 국민 히트곡들은 없는 편이다. 정석원 본인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끔찍히도 싫어 한 이유도 있지만, 본인의 병역논란으로 생긴 인터넷상의 믾은 안티, 기획사의 홍보부실 등 무능력함도 한 몫 했다는 것이 팬들의 판단이지만, 음악 작업만 놓고보면 신인도 아닌 꽤 인지도 있는 이들의 작업도 담당했었음에도 현재의 대중음악신에서 히트하지 못한 것을 보면 사실상 지금의 음악시장에서 먹히기에는 대중과는 많이 멀어진 것이 사실인 듯 하다. 박정현 8집 앨범 제작 인터뷰에서는 곡이 잘 써지지 않아 작곡 학원을 다녔다고 농담식으로 인터뷰를 한적이 있으나, 실제로 다녔는 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현재는 윤종신의 미스틱 엔터테인먼트 전속 작곡가, 김연우, 퓨어킴, 김예림의 앨범 프로듀서로 작업했고 주로 월간 윤종신의 작곡가로 활약중…이긴 한데 "" 한때 객원가수로 '부린' 윤종신임에도 이제는 정석원 본인이 유희열, 하림, 이규호, 조정치에 이은 윤종신의 음악노예라 불려도 할말 없는 듯, 그런데 그만큼 그의 음악적 입지가 많이 협소해진 상태이다. 아 옛날이여 또 눈물 좀 닦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본인의 성향상 그가 프로듀스했던 앨범은 예전부터 박정현, 윤종신, 이승환등 그가 친했던 상대가 대부분이었고, 그와 처음으로 작업해본 국민가수 김연우는 "석원이형은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http://enews24.interest.me/news/article.asp?nsID=411299)

사실 2015년 겨울 현재, 활발히 공중파 및 케이블 예능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유희열", "윤종신", "윤상", "정재형", "이적", "이현우" 등의 90년대의 작곡가-프로듀서 라인을 통틀어도 전성기 시절을 놓고 보았을 때 "015B 정석원" 만큼의 음악적 성과를 인정받으면서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중적 영향력을 누린 이는 단연코 없었다. 각종 음악 관련 예능이 만들어지고 무한도전 토토가 등의 기획에서 90년대 당시의 영향력과 인기도만으로도 이슈가 되는 등 정석원 본인의 전성기 시절 음악계가 화려하게 재조명되는 것이 최근 몇 년간의 방송 트렌드인데, 이러한 와중에서 철저히 앞으로 나서지 않는 그의 행보는 정말 그의 외골수적 성향때문 인 것인지, 온라인상에서 회자되는 그의 병역 논란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고의 전성기 시절 방송출연을 거부하고, 심지어 '가요탑텐'이라는 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연속 1위를 하면서도 단 한번도 출연하지 않은 그의 성격은 여전한 것 같다.

5 평가

한창 활동을 하던 그 시절에도 "보여줄 것이 없다"면서 TV 예능 뿐만 아니라 음악방송까지 출연을 거부했는데 PC통신 하이텔 오디오란에서 본인 인증 후 '잘난 척'을 자주 해서 네임드 유저들에겐 까였다고 한다. 현재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강명석은 1995년 출간된 "서태지를 읽으면 문화가 보인다"에서는 '자기들 자화자찬을 그렇게 공공연히 쓰는 그룹은 처음 봤다'고 표현하며 굳이 015B를 말 그대로 '비난"하는 데만 10여 페이지를 할애했다.

사실 정석원 또한 앨범 속지에 "평론가들의 호평을 앨범에 기재하는 이들도 있다"고 쓰면서 실제로 N.EX.T나 본인의 솔로 앨범에 그런 관행을 따르던 신해철을 디스하거나, 1994년 "리메이크"를 컨셉으로 내건 015B 5집의 도입곡 "바보들의 세상"에서 음악성에 대하여 015B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내리던 평론가들에 대한 디스를 정면으로 시전하는 등 까칠함을 그대로 노출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14]

상대적으로 비판받는 작사 능력만 해도 아직도 무려 25년 전 015B의 데뷔곡인 텅빈 거리에서야윈 두 손엔 외로운 동전 두 개뿐이 계속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 특유의 감수성과 감성 넘치는 가사의 매력만큼은 압권이다. 다만 015B의 곡들 가운데에서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신인류의 사랑' 같은 곡의 가사가 여전히 비판받는 것은 설사 풍자라 할지라도 그의 생각 저변에 대중을 낮춰보는 다소 오만한 사고방식이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 또한 계속된다. 본인은 2006년 015B 컴백 이후의 인터뷰에서 어떤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해당 시기의 이슈와 유행어 등을 재빨리 받아들여 이를 반영한 가사를 쓸 뿐이라 밝혔다. 팬들 사이에서는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지만 팬심과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는듯.

작곡이나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은 또한 높이 평가 받"았"다. 그러나 2006년 이후의 행보로는 이 것도 과거형이라 불러야 할 듯. 다만 빠르게 변하는 대중음악 신에서 무려 27년 가까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평할 수 있다. 동년배임에도 여전히 메이저 음원 차트에 자신이 작곡한 곡을 올려두고 있는 윤상 같은 프로듀서가 진짜 괴물일 뿐…[15]

2011년 8월에 발간된 '대중음악 사운드' 3호에서 '최고의 프로듀서 10'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유희열은 자주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도 한다.유희열이 주류 작곡가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정석원이기 때문이다.[16] 유희열이 군대에 있을 때, 유희열에게 전화를 걸어 이장우의 앨범에 도움을 요청했고 유희열은 3곡을 제공한다.

정석원과 무한궤도를 함께 했던 신해철은 "그(정석원)는 우리 나이 또래에서 드물게 코드 변환, 전조, 텐션 변화에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배킹형 키보디스트"라고 표현했으며[17] "아무리 보컬이 개떡같이 불러도 알아서 키를 맞춘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작곡가와의 역량과도 분명 관련이 있겠지만 음악 비전공자임에도 건반과 피아노 연주 실력은 대중음악신의 동료들 중에서도 특히 높이 평가받는 듯. 여러 앨범에서 세션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의견도 있어서, "너무 잘난 척 한다 기술적으로 파고 든다", "머리로 음악을 한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젠 비판을 받을 만큼 주목받지도 못한다 물론 명문대 출신이라는 이미지도 한 몫 한 듯. 음반작업을 할 때 철저히 1인 독재형이라서[18] 함께 작업했던 음악인들 중에서도 갈등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예전 박정현의 인터뷰나 옥주현의 라디오에서의 멘트, 최근 아이유 등의 작업 노트를 보면 그것도 아닌 듯. 물론 40대 아저씨가 여동생 혹은 딸 뻘인 어린 여성 가수에게 엄하긴 어렵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하는 뮤지션 이승환이라든가, 유희열이라든가, MGR이라든가, 윤종신이라든가, 박정현, 케이준 등등 들도 많으니 어느정도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임은 확실한 듯. 위에서 언급한 박정현 앨범의 성공 이후 여타 기획사와의 작업이 대부분 엎어진 사례도 그 예, 015B 영광의 순간을 함께한 김돈규 같은 경우 '음악적 견해 차이로' 정석원과 완전히 결별하여, 2006년 015B 컴백 이후 모든 콘서트에 나오지 않았다. 김돈규가 부른 곡은 콘서트에서 대부분 "단발머리"의 객원가수 조성민이 대신 불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서태지와 마찬가지로 몇몇 곡은 표절 논란이 있었는데 '정석원은 해외에서 성공한 장르를 조금만 바꿔서 가져온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본인 스스로는 015B 5집에서 대놓고 레니 크래비츠의 음악을 모방한 "시간"이라는 곡을 통해 이러한 표절논란에 대응했는데 창작과정에서 장르의 차용과 모방은 해외 대중음악신에서 자유롭게 나타나고 있고 이는 "표절"과는 다르며 단지 일부 비슷하게 들린다고 표절로 부를 수는 없다는 창작자의 입장을 피력했다. 다만 해외 장르의 도입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을 하는 듯 하다. "사실 외국음악의 이식이라고는 생각해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6 故 신해철과의 인연 이제는 악연이라 부르지 말자

데뷔를 이끌어준 것이 사실상 신해철이었다는 인연도 있고, 별개의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동일한 음반사에 소속된 음악적 동료로서 무한궤도 해체 직후에는 서로를 존중하며 꽤 절친한 듯이 보였던 신해철과 정석원의 관계였다.[19] 그러나 본래 무한궤도에서 함께하던 시절부터 서로 추구하는 음악 장르 및 지향점의 차이가 있었음을 애초부터 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파격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의 신해철과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향을 지닌 정석원의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결국은 두 사람이 앙숙으로 바뀐 까닭은 그러한 성격적 차이로 인해 양자가 몇번 극단적인 갈등을 빚음으로 불거지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된다. 실제로 90년대 초반 아이돌스타로서 압도적인 인기와 지명도를 얻었던 신해철이었지만 N.EX.T를 결성한 다음 본인이 추구해왔던 음악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의도적으로 대중의 취향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날아라 병아리"가 히트한 "The Being" 앨범 이후 탁월한 음악적 성과와는 별개로 인기와 앨범 판매량에 있어서 완연한 감소세가[21] 분명했는데, 동일한 시점에서 정석원이 이끈 015B는 POP계에서 등장한 최신의 장르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다음 한국적 감성에 바탕을 둔 대중적 취향을 솜씨좋게 결합해내면서 음악적 실험성과 대중성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는데 성공했고, 그리하여 3집부터는 판매량 밀리언 기록 및 가요차트까지 완전히 석권하는 속칭 대박을 친다. 여전히 같은 음반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부터 신해철과 정석원의 작품 속에서는 양자의 음악적 교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고 활동 중에 상호 언급조차 없는 것을 보면 사실상 이 때부터 앙숙으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22]

한편 팬들의 또다른 추측으로는 그전까지 그닥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하더라도 앙숙까지는 아니었는데 "슬픈 인연", "단발머리" 등의 리메이크 곡들이 수록된 015B 5집 앨범 재킷에 적힌 글 중 친분있는 평론가들의 찬사 일색의 평론을 자기 앨범 속지에 자랑스럽게 써두는 몰지각한 음악인 운운하며 디스하는 구절이 있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신해철의 앨범 및 그가 결성한 밴드 N.EX.T의 앨범에 이러한 립서비스성 평론글들이 종종 실렸던 것도 사실이기에 그로 인해 상호 친분이 완전히 갈린 것으로 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정석원 스스로 '공일오비 자서전'에서 데뷔 당시에 몸담았던 밴드 무한궤도를 그 당시 정석원 자신보다 상당히 앞서가는 음악성을 지닌 밴드로 평가하였고, 015B 1~2집 활동 때에도 신해철 솔로앨범에 인기와 평가 면에서 완전히 밀린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그리고 015B라는 그룹명 자체를 무한궤도에서 차용한 점을 보면 적어도 데뷔 초기까지의 정석원은 당시 동갑내기이면서도 평단의 주목이나 인기도 측면에서 상당히 앞서가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신해철에게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신해철 또한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은 한 번 [23] 밖에 기록해보지 못한 밀리언 셀러를 세 번 씩이나 기록하며 90년대 신세대의 대변자로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게된 015B에 대해서 역시 그리 편한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4년 의료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신해철의 빈소에 장호일을 비롯하여 무한궤도 멤버들과 함께 찾았다고 한다. 음악적 동료에서 시작하여 반목하고 있음이 팬들에게도 알려졌던 두 대중음악 거장의 화해는 생전에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2015년 10월 27일, 故 신해철 1주기를 맞아 윤종신의 주도로 추모곡으로 기획된 "월간 윤종신" Special 싱글 "고백"(원 신해철 1집 수록곡)의 편곡 및 프로듀서로서 참여, 수익금은 전액 신해철 유족에게 기부된다고 한다. 윤종신은 보도자료를 통해 "신해철의 초창기 음악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으면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뮤지션인 정석원과의 작업이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실제로도 윤종신이 故 신해철의 후기 보컬 음색과 음악적 색채를 잘 표현해냈다. 이 곡이 고인에 대한 정석원의 음악적 화해의 제스쳐임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다.[24]

7 사생활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나 결혼 후 두 아이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말 장호일, 정석원 형제의 모친 사망 시 팬들이 식장에 조화를 보내다가 알아냈다고… 이정도면 흠좀무

8 병역논란

정석원은 1996년 당시 연예가중계에서 그는 머리를 깎고 고별 콘서트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며, 언론이나 팬들은 그가 정말 군대에 가는 줄 알았다. 인기그룹 '015B' 해체 리더 정석원 군입대. 실제로 그가 훈련소까지는 가서 중도 퇴소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25] 아무튼 그러게 이후 바로 캐나다로 출국했고 스티븐 유 등과 같이 병역기피 대상자로 지정되어 귀국을 권고받았으나 당연히 귀국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 체류끝에 캐나다의 영주권을 획득하여 병역기피에 성공했다. 이후 입대 제한 연령이 끝나는 2001년 바로 한국에 돌아와 음악활동을 재개한 것은 덤."

팬들과 언론에게 군대에 가는 것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이것은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다.[26] 팬클럽에서 입대 기념 파티를 차려주었단 증언도 있으니 사실이라면 이것도 문제. 그래서 팬들도 대체적으로 저 문제는 할 말이 없다… 라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건덕지가 없다.

" 최근들어 정석원의 병역기피 사례가 인터넷을 통해 알음알음 전파되면서 이와 비슷하게 병역기피를 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스티븐 유도 언급되고 있다. 둘 다 공인+음악적 재능과 인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 입대 언플+출국후 영주권을 이용한 병역기피' 테크를 밟았다. 이를 두고 스티븐 유만 입국을 금지당하고 가혹한 처지에 놓였다는 의견도 있으나, 해당 항목에 있듯 스티븐 유는 국가에서 파격적인 혜택[27]을 받았고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여 병무청까지 속였으며 결국 병역법까지 바뀌게 하는 보다 악질적인 병역기피를 했다. 물로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얌전히(...) 병역기피를 한 정석원의 잘못이 깎이는 것은 아니며, 둘 다 병역기피를 한 것이다.

정석원은 음악적 능력은 문제 삼는 이가 없을 정도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탁월한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 능력을 모두 갖추고 활동한 음악인이었으나, 이 병역논란으로 인해 현재 그에 대한 대중[28]의 싸늘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9 참여 앨범

연도순. 작사 작곡만 포함. 굵은 글씨는 프로듀싱한 앨범

무한궤도 - 「無限軌道」(1989)
신해철 1집 (1990)
015B 1집 - 「공일오비」(1990) - 이후 015B 앨범은 해당 항목 참고.
윤종신 1집 (1991)
성지훈 1집 (1992)
윤종신 2집 - 「Sorrow」 (1992)[29]
'92 내일은 늦으리 (1992)
이규석 3집 (1992)
김태우 1집 -「Mutant」(1993)
이승환 3집 -「MY STORY」(1993)
윤종신 3집 -「The Natural」(1993)
정석원 - 「연인」 (1993)[30]
박주연 3집 (1994)
Styles 1집 -「Styles」(1995)
이장우 1집 -「이제, 그녀는 이 도시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1995)
윤종신 4집 -「共存」(1995)
이승환 4집 -「Human」(1995)[31]
파파 OST (1996)
이동규 2집 (1996)
이장우 2집 -「長友」(1996)
이장우 3집 -「슈퍼마켓 러브송」(1999)
이승환 6집 -「The War In Life」(1999)
이승환 7집 -「Egg」(2001)
이가희 1집 -「leegahee」(2001)
박정현 4집 -「Op.4」(2002)
Haru 1집 - 「Really」(2003)
박정현 5집 - 「On & On」(2005)
윤종신 10집 - 「behind the smile」(2005)
신혜성 1집 -「오월지련」(2005)
박신양 -「연人」(2005)
제이민 -「손뼉을 쳐」(2007)
윤종신 11집 -「동네 한바퀴」(2008)[32]
윤종신 13집 -「行步 2011 尹鍾信」(2011)[33]
아이유 2집 -「Last Fantasy」(2011)
가인 - 「Talk About S.」(2012)
제아 - 「Just JeA」(2013)
다비치 2집 - 「Mystic Ballad」(2013)
아이유 3집 -「Modern Times」(2013)
브라운 아이드 걸스 - 6집 「BASIC」(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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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앨범 표기에는 피아노 담당으로 되어있다.
  2. 널리 알려진 정석원의 안티이며 소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를 자부하는 강명석이 이 이름가지고도 깠다."실험성"에 대한 집착이라는 평을 덧붙여서.
  3. 이 부분에서는 정석원과 신해철의 기억이 다른데, 신해철의 글에서는 "팀 전력의 강화"를 위해 세 번째의 키보디스트를 영입했다고 되어있고, 정석원의 "015B 스토리"에서는 전업 음악가로서의 데뷔를 부담스러워 했던 건반 멤버 두 사람(조현문-효성가의 차남인 그 사람 맞다, 김재홍)의 탈퇴 의사가 이어지자 신해철이 급히 대타로 정석원을 영입했고 정석원의 영입 이후 해당 멤버들이 다시 복귀했다고 한다.
  4. 무한궤도가 계약 기간 내에 해체시 나머지 계약 기간을 본인이 솔로 앨범으로 채워야 하는 계약조건이었다고 한다.
  5.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정석원과 코드가 맞았다고 전한다. 훗날 015B 가스펠 음반이 나오게 된 배경, 015B 4집 이후 버클리 음대 유학으로 015B 탈퇴, 이후 그의 친형인 조형민과 함께 '삶사람사랑'이라는 2인조 CCM 그룹으로 활동하였고 지금은 백석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6. 무(無)=0 한=1 궤도(orbit)=5B
  7. 강준만이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책에서 그를 서태지와 비슷한 반열에 올릴 정도면 말이 必要韓紙?
  8. 이름과 음악에서 무한궤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 空一烏飛라는 어색한 조어로 팀 이름을 썼다.
  9. 이승환, 이소은의 앨범에 참여, 특히 이수영 및 조용필 19집의 바로 그 프로듀서로 명성을 떨친다.
  10. LG의 손해도 막심했던 듯 오디오 구매시 테이프를 사은품으로 주었다는 목격담도 있다.
  11. 이승환, 윤종신, 하림, MGR, 유희열, 윤상 등등
  12. 여성의 심리를 여과없이 묘사했다는 노랫말이 역겹다는 평도 일부 있었다.
  13. 사실 형인 장호일이 015B 헌정 앨범을 기획하던 중에 정석원 본인이 먼저 컴백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간 고용살이 프로듀서를 하면서 기획사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꿈꾸었다는 듯.
  14. 이 곡의 가사와 컨셉이 신해철에 대한 디스라는 해석도 있다. 이 시절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이었다고.
  15. 참고로 정석원은 "우리 시대 뮤지션들 중에서 윤상 씨 영향 안 받은 사람은 드물 거에요."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16. 실제로 유희열이 이승환 4집에 참여하게 된 것도 정석원의 힘이 크다. 그래서 유희열이 준 곡은 변해가는 그대, 최진우와 함께 공동 작사작곡인 부기우기.
  17. 위에서 언급된 2000년의 "처음 음악을 하던 그 시절" 에세이에서, 무한궤도의 앨범이 처음 나왔던 1989년 기준의 평가.
  18. 별명이 6집 수록곡과 같은 "독재자"였다고 한다. 사실 독재자라는 말은 015B 2집 부클릿 속 멤버 소개에 이미 언급되었던 말이다. 영어로 'Dictator'라고 써있지만.
  19. 신해철은 공일오비 1집에 수록된 '난 그대만을'이란 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보컬까지 맡았으며, 015B 2집 수록곡인 불후의 명곡 '이젠 안녕'에서 단체 보컬 중 1인을 맡는 등 한 때 정석원과 상당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신해철의 데뷔 앨범에도 정석원의 곡인 'P.M 7.20', '인생이라는 이름의 꿈'이 수록되어 있다.
  20. 정석원이 그러한 부분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015B 자서전의 내용과 무한궤도의 마지막 방송출연이었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신해철이 무한궤도가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될 것이며 이후 신해철 자신과 정석원을 중심으로 새롭게 결성된 밴드로 나뉘게 될 것임을 밝히면서도 특별히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거나 그러한 의미를 담은 어휘를 선택하지 않은 채 가볍게 언급하는 점을 감안해보아도 그렇다.
  21. 물론 대중적 인기 하락에는 대마초 사건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2. 2008년 과거 무한궤도 및 넥스트 멤버와의 재결합 가능성을 묻는 당시 인터뷰에서 정석원과의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 단칼에 고사하며 "정석원이랑은 절대 안하죠" "재수 없으니까요, 그대로 쓰셔도 돼요"라면서 거침없이 디스하는 언행을 보였다.
  23. 솔로 2집
  24.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인을 이용해 장사질을 하는거라는 평가도 있는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게 살아생전에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막장스러운 관계였는데, 정작 죽으니 갑자기 추모곡에 참여하는게 좀 찜찜하긴 하다. 그래도 자세한 건 확실치 않으니 함부로 평가하진 말자.
  25. 1996년에 군대를 간다는 사람이 2001년 당시까지 해외 체류로 입영 연기 상태
  26. 정석원이 이런 식으로 병역기피를 했다는 설을 몇몇의 네티즌들이 제기한 후, 최근 015B 관련 뉴스기사에는 정석원을 까는 댓글이 많이 보인다. 캐나다 이민은 오랜 기간 동안 준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정석원 측이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았나 하는 심증이 가능하다.
  27. 공익 복무기간 동안 연예활동을 보장받았다.
  28. 특히 군필 남자들
  29. 윤종신, 김형석, 신재홍, Andy 서와 공동 프로듀싱.
  30. 드라마 OST 앨범을 겸한 정석원의 솔로 앨범으로, 정작 정석원 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8개의 수록곡 중 3곡이 연주곡이고, 그나마 타이틀곡인 '연인'은 오리지널 버전과 3가지 리믹스 버전을 합쳐 4곡이 수록되었는데, 오리지널 버전과 2가지 리믹스 버전(3곡)은 장호일이 불렀고, 나머지 리믹스 버전 1곡은 조성민이 불렀다. 남은 한 곡인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꺼야'는 김돈규가 불렀다. 이건 뭐 솔로 앨범이라 하기도 애매하다(…).정석원의 보컬이 좀 못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않아 있긴 하지만 솔로 앨범에서까지 안 부르는 건 좀... 정말 정석원의 보컬을 듣고 싶다면 차라리 2집 '4210301'이나 4집 '교통 코리아', 5집 '시간', 6집 '그녀의 의자', 7집 '모르는 게 많았어요'를 듣는 게 낫다.
  31. 이승환, 데이비드 캠벨과 공동 프로듀싱.
  32. 윤종신과 공동 프로듀싱.
  33. 월간 윤종신의 7월, 10월호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