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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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렇게 바뀌었다.. 윤상 : 자전거를 타는데도 왜 저러냐고...[1][2]
1 기본 정보
출생 1969년 6월 14일
학력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
신체 173cm, 70kg, B형
직업 가수, 싱어송라이터
데뷔 1989년 '춘천가는 기차'
2 개요
시대를 초월한 세련미와 음악성으로 1990년대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
20세의 나이로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된 가수
퓨전재즈와 R&B를 접목시켜 천재성을 인정받은 싱어송라이터
1969년 6월 14일 생으로,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를 졸업했다.
3 어린 시절
1남 1녀 중 첫째로, 아버지가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자금 담당으로 근무하게 되어 온 가족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하여, 초등학생 시절의 대부분을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에서 보냈다. 정확히는 2학년부터 6학년까지 5년간 체류했다고 한다. 귀국 후 서울 청담초등학교에서 학교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음악 말고도 축구를 유별나게 좋아해 일화가 몇 가지 있다. 뚱뚱해서 축구 시합에 끼지 못했던 친구를 두고 "괜찮아. 얘는 골키퍼를 보면 다 함께 놀 수 있잖아!"라 친구들을 설득해 함께 축구를 했다고 한다[3]. 또 축구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났는데, 상대방이 학교 짱이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어린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며 음악과 가까이 자랐다. 본인 말로는 피아노 외에도 바이올린도 6살 때부터 5년 간 배웠다고.
4 대학 진학의 고배, 그 과정에서 가수데뷔
청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북중학교를 거쳐 영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그의 음악 사랑은 계속되었고, 엄마에게 기타를 파손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공부도 제법 잘 했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중 윤상을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전태관이라는 대선배를 연결시켜주는 등 꽤 교류가 있었다. 당시 윤상은 그 동네 독서실 멤버의 베이시스트 중 가장 곱상한 외모여서 뽑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끝엔 탈출
부모님은[4] 그에게 안정적인 진로가 보장되는 의대를 권했고, 그걸 수도 없이 들은 그도 이를 당연시 여겨 고3 때 열심히 공부하여 고려대학교 의예과에 지원했지만 아깝게 낙방하고, 재수를 하였다. 재수학원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어린이날에 함께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놀러 갔었는데, 이 날의 기억이 훗날 〈춘천 가는 기차〉의 모티브가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재수 생활도 망쳤는지, 전기 모집에서 연세대학교(의대인지 아닌지는 알려지지 않음)에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후기 모집에서는 안정하향지원을 하여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에 합격하게 된다. 그 이후 한동안 그는 연고대 두 학교만 생각하면 이를 벅벅 간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지금의 홍대에서 활동하는 젊은 인디뮤지션들같이 데모 앨범을 만들며 음반 판매점에 돌리기도 했는데, 이게 인기가 꽤나 좋았다한다.
대학 합격자 발표날 고모에게 김수철의 공연 티켓을 받아 관람하던 중, 후반부에 게스트로 출연한 그룹 '어떤날'의 공연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그 그룹의 베이시스트인 조동익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말을 걸까 말까 고민했는데, 어느 새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고.(...) 당황한 조동익은 전화번호를 남긴 뒤 연락하라고 했다. 그는 바로 전화를 걸기 뭐해 한달 뒤에 연락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 김현철에게 조동익의 부인은 삼겹살을 구워 주었다.
그렇게 조동익의 집을 자주 놀러가던 어느 날, 조동익의 집에 있던 <오페라>[5]의 악보를 손 봐주고 가 버렸다. 다음날 자고 일어난 조동익은 그 악보를 보고 이거 누가 그렸어?라며 김현철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오라고 한 뒤, 그를 역삼동의 카페 「심플라이프」에 데려갔다. 그 카페는 가수 이장희의 전 부인이 운영하던 곳으로 당시 많은 가수들이 자주 찾았었는데, 전인권, 최성원, 박학기 등을 만나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들에게 "얘 재작년에 죽은 재하랑 비슷하지 않냐?"라는 얘기를 듣게 되고 이후 이들의 도움으로 그의 곡과 앨범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것이 <우리노래 전시회> 3집. 당시 그는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 1학년 신입생이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당연히 학교 생활은 뒷전이었다고 한다.게다가 의대를 지원했을 정도의 우등생이 대충 하향지원해서 아무데나 들어간 곳이라 그렇기도 했겠지 "어느 날 학교를 갔더니 동기들이 문제 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라고 라디오 프로에서 술회하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나중에 졸업은 하였다.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본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보자마자 골프 가방에 돈을 현찰로 담아서 가져가라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러나 당시 김현철은 정 붙이지 못하고 학교 생활을 망쳐 버린 홍익대를 때려치우고 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6] 이를 거부하게 된다. 21세의 가수 지망생에게 뻰찌를 맞아 자존심이 약간 상한 김영 사장은 김현철을 다시 만났을 때, 그 골프가방에 현금 3,000만 원을 미리 넣어 두었다. 김현철은 바로 동아기획과 계약하게 된다.[7]
이 앨범이 바로 자신이 직접 앨범 전체를 작사, 작곡, 프로듀스하여 1989년에 발표한 1집 "김현철 Vol.1"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춘천 가는 기차〉가 상당한 히트를 치게 된다. 또한 동 앨범에 수록된 〈아침 향기〉[8]"라는 곡은 고등학교 시절 만든 곡을 다듬어서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동반자였던 조동익도 받쳐 주는 등 세션 진영도 화려했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꽤 이른 나이에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김현철의 1집과 2집은 비록 당시에는 아는 이들만 아는 앨범이었지만, 소년적인 감성을 세련된 퓨전 재즈 양식에 담아낸 명반으로 평가받았다. 그 중 1집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17위에 선정되는 등 당시의 명문 레이블인 동아기획의 마지막 적자로 평가받았다.
5 대중적 지명도를 높인 이후
그러나 1집 활동을 마친 후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뇌출혈 등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그래서 2년 동안 활동하지 못하다가 1992년에 2집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이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군대는 면제. 같은 해에는 영화 《그대 안의 블루》의 OST를 작업하며 이소라와 불렀던 동명의 곡이 큰 인기를 끌며 대중적 지명도를 높였고, 1993년에 발표한 3집〈달의 몰락〉이 빅 히트하며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95년에 발표한 4집에서는 〈나를〉과 〈왜 그래〉가 인기를 얻었고 앨범 프로듀싱 및 작곡가로 참여한 이소라의 1집이 큰 성공을 거둔다. 특히 직접 곡과 가사를 도맡았던 〈난 행복해〉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무명의 신인 가수 이소라를 단숨에 전국구 가수로 끌어올렸다. 1996년, 5집의 〈일생을〉이 대중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극도의 도회적 세련미를 추구한 그의 음악은 데뷔 당시의 것에서 너무도 멀어져 버려 아쉬워하는 음악 팬들이 많았다. 가요계의 최동훈;후술된 표절 시비와 맞물려 1990년대 중후반 김현철에 대해서는 호오가 극명히 갈리는 모습이었는데, 당시 대중음악 팬덤에서는 '만약 김현철이 요절했다면 유재하처럼 되었을 것이다' 와 같은 투의 분석을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절했네 뭐네 얘기해도, 당시 브라스 편곡에 있어서만큼은 국내 뮤지션 중 따를 자가 드물었다는 평 또한 일반적이었다. 항상 음악만은 열심히 해 왔던 셈. 윤상, 이승환, 토이, 전람회 등과 함께 1990년대 웰메이드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던 한 축이었다. 하지만 2006년 9집을 발표한 이후로 음악 활동이 거의 없어, 동료들에 비해 긴 공백기를 지니고 있다. 2012년 당시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10집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지만, 현재까진 답이 없다.
특히 이소라와 진행한 공동 작업에서 여러 고급스러운 작업물을 내놓으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유재하 10주기 추모 앨범에서도 원곡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현대적인 편곡과 프로듀스로 양질의 트리뷰트 앨범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에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보급한다는 취지로 '키즈 팝'이라는 타이틀의 앨범 두 장을 발매하기도 했다. 동요 앨범이지만 성인이 꼼꼼히 듣기에도 음악적으로 나무랄 곳이 거의 없다는 평.
그의 앨범의 특징이라면 거의 전곡을 자작곡 내지는 공동 작업의 결과물로 배치하며, 가장 최근의 작업이었던 9집(2006년)을 제외하고는 전 앨범에 연주곡을 집어넣는 것 등, 싱어송라이터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9집에서는 당시 데뷔도 하지 않았던 노 리플라이의 멤버 권순관의 재능을 알아보고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
6 흑역사
나름대로 베테랑 뮤지션으로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발자취를 남겼지만, 표절과 관련된 흑역사도 여럿 있다.
꽤 야심차게 준비한 앨범이었던 4집 《Who Stepped on it》의 타이틀곡인 〈나를〉의 후렴부가 일본의 퓨전 재즈 그룹인 티스퀘어의 연주곡 〈Twilight in upper west〉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완전히 베낀 것으로 판명되어 표절 시비가 일어났다. 그 후에 나온 앨범들이 안타깝게도 4집 앨범의 퀄리티를 넘어선 적이 없다.[9] 더불어 이문세가 부른 〈난 괜찮아〉[10]를 작곡했는데, 이 노래도 Bobby Caldwell이 부른 〈China〉의 표절로 드러나면서 이문세의 경력에도 오점을 남겨 버렸다.[11]
이때문에 "김현철의 음악은 2집까지만 듣고 3집부터는 스킵해라"라는 얘기가 엄청 많이 나온다. 여기에 대해서 어느 인터뷰 구절이 하나 있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자.
한 때 '나를...'이라는 곡 코러스 라인이 티 스퀘어(T-Square)의 〈Twilight In Upper West〉와 비슷하다는 얘기가 떠돌았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김현철씨의 입장은 어떠신지요?김현철 :그 게 음악을 좀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리크'(lick)라는 게 있어요. 일종의 '시퀀스'란 게 있는데, (직접 코러스 라인을 흥얼거리며) "띠라란~ 따리리라란~" 그게 이제 비슷하다는 건데. 티 스퀘어는 거기서 발전시켜 나갔고 저는 그 뒤에 리크를 갖고 발전시켜 나간 거죠. 그러니까 그건 어떻게 보면 우연의 일치일 수 있는데 그 뒷부분을 좀 보고 나름대로 "아, 저 사람이 저거 표절이 아니다. 나름대로 리크를 이렇게 이렇게 발전시켜 나갔구나", 근데 우리나라는 그런 시스템이 안 되어 있으니까 일단 멜로디가 똑같으면 다 똑같은 거고. 우리나라, 그렇잖아요. 하여튼 누구에게 나쁜 일이 생겼으면 다 자기가 전문가에요.(웃음) "그 노래 아냐?", "그 노래 그 노래하고 똑같지?" 뭐 이런 식으로. 저는 절대 그렇게 안 보구요. 그 다음에 그건 곡 자체 분위기도 틀렸고,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요즘에는 편곡을 베껴가지고, 그러니까 누구의 편곡을 쫙 베낀 뒤 거기에 노랫말만 다시 붙이는 저는 그런 게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일 수 있다고 봐요.
7 라디오 DJ
1994년 4월부터 3년 간 MBC FM에서 심야시간대에 <김현철의 디스크쇼>를 진행했다. 방송 초기 시간은 밤 11시부터 1시까지였으나, 1996년 심야 시간대에 <FM 음악도시>가 편성되면서 방송시간이 한시간 앞당겨져 밤 10시부터 자정까지로 바뀌었다. 1995년 당시 앞시간대인 <FM데이트>(밤 9시-11시) 진행자가 고소영이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이웃", "옆집 총각"으로 부르며 친분을 과시했다.[12] 4집 수록곡 <왜 그래>의 "그만 만나"라는 여성의 나레이션은 고소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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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경쟁 프로그램이던 KBS 2FM의 <FM인기가요>[13]는 유영석이, SBS 라디오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윤종신이 진행했다. 1995년 9월 7일 동아일보에서 'DJ 3파전'이라고 소개될 정도였다. 한편 김현철은 자신을 국가대표 DJ라고 칭했다.[14]
하여간 당시 '밤의 문교부장관'이라 불리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다음으로 인기 많았던 게 이 디스크쇼였다. 응답하라 1994에서 조윤진이 서태지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에서 <김현철의 디스크쇼> 당시 방송 일부분이 나온다.
이후 2000년~2002년경 KBS 2FM에서 자정시간대에 <뮤직플러스>를 진행하였고, 2007년 MBC FM4U로 돌아와 오후 4~6시에 김원희가 하던 <오후의 발견>을 반년 가량 진행했다.
이후 조용하다가 2013년 9월부터 다시 <오후의 발견>의 DJ로 복귀해, 1980~1990년대 추억의 가요들을 리퀘스트 형식으로 틀어주며 호응을 얻고 있는 중. 그의 라디오 진행은 <디스크쇼> 때부터 즉흥적인 멘트구사, 이른바 개드립에 특화되어 느끼하다가도 엉뚱한 데서 웃기는 데 매력이 있었다.
8 트리비아
초창기 리즈 시절에는 은근히 강원도를 좋아한 듯하다. 데뷔곡으로 큰 인기를 얻은 '춘천 가는 기차' 부터, 3집 타이틀 연주곡인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도 그렇고.군 면제됐으니 당연한 거 아님? 그런데 정작 본인은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거주하며, 성남아트센터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자주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젊은 시절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미가 돋보이던 강원도의 매력에 심취해 자신의 음악 소재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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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발레리나 이경은 씨와 결혼했다. <Loving You>가 타이틀곡으로 나왔던 2002년 8집 <그리고 김현철...>은 결혼 날짜를 미리 잡아놓고 아예 아내에게 불러준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앨범이라고 한다.
뜻하지 않은 삼계탕 프로포즈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때 호텔 식당을 예약해 놓았는데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버려 시간이 지연되어 예약이 아예 취소가 되어버린 것. 주린 배를 주여잡고 삼계탕 집에 들어갔는데, 김현철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닭 안에 반지를 집어넣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아내가 삼계탕 먹다말고 갑자기 나가버렸다. 당황한 김현철은 한손은 아내를 잡고, 한손은 닭 구멍안으로 밀어넣어 반지를 찾았다. 근데 반지가 깊숙이 들어갔는지 오래 걸렸다. 캐치한 뒤 주머니에 보지도 않고 집어넣은 다음 차 안에서 아내에게 반지를 보여주려는데, 그 반지에는 찹쌀, 인삼찌끼, 기름 등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래도 정성에 감격했는지 서로 눈물을 흘렸다고.
슬하에 세살 터울의 두 아들 이안, 정안이를 두고 있다. 2006년에 진행을 맡았던 EBS의 <60분 부모>에서 나는 이제 의학적으로 셋째를 낳고 싶어도 못 낳는다며 묶었음을 시인했다.
현재 연예기획사 후너스엔터테인먼트(현재는 Fe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2009년 라스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회사를 장인어른과 같이 설립했다고 한다.[15] 이 회사는 현재 심현보 등 가수는 물론이고 김갑수, 김뢰하 등 배우들까지 보유하고 있다.
유명한 자전거광이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자택인 분당에서 출발해, 강남에 있는 회사 사무실을 찍고 오후에 여의도 MBC까지 라디오를 진행하러 온다고 한다. MTB 자전거복 차림 그대로. 2014년 5월 라디오 스타에 함께 출연했던 배철수 옹은 "옛날엔 천재였는데 이제는 동네 아저씨"라며 디스했고, 박준형은 “분장실에서 만났는데 빨간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가위들고 코털 깎더라"고 했다. 아아..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프로그램을 하기도 했다. OBS 개국 초기 데일리 요리 프로그램이었던 <김현철의 아이러브 쿡>과 푸드채널(올리브 채널의 전신)의 유아요리 프로그램인 <김현철의 베베쿡>이 그것이다. 베테랑 뮤지션이 이유식을 만들고 있었다....
김원준, 이성재와 더불어 삼성 라이온즈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의 서울 원정 경기가 있을 때 자주 테이블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갑용의 부인과 친분이 있어서 진갑용의 응원가도 만들어 줬고, 최형우의 결혼식 당시 축가도 불러주는 등 선수단들과의 친분도 괜찮은 편. 2012년 당시 엠스플에서 특집으로 방송한 '나는 야구인이다'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또한 2016년 3월 6일자 복면가왕 방영분에서 김구라가 자신을 두산 베어스 팬으로 지칭하자 본인은 삼성 팬이라며 김구라를 타박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16]
여기에도 에피소드가 있는 게, 하루는 라디오 방송 중 "두산이 졌습니다. 미련곰탱이 어쩌고(내용은 정확치 않아 추가바람)"라는 청취자의 사연을 그대로 읽었는데, 김현철이 두산 베어스를 라디오에서 디스한 줄 안 두산 팬들이 라디오 게시판을 습격했다고 한다.(...)
호서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는 경희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 2014년 5월 방송된 라디오스타에서 MC 규현에게 "C 줄만해서 C학점 줬다"라고 했고, 조권에게는 "요즘 할 일 없어서그런지 학교 자주 나와요"라며 아주 조용히 디스했다.(...) 교수가 학생한테 학교 자주 나온다고 뭐라 하는 크라스
드라마에도 간혹 출연하고 있으며, 2014년 2월부터 5월까지 방송한 EBS의 어린이 드라마인 <플루토 비밀결사대>에 전직 대기업 연구원이자 주인공 아버지인 이상식 역할로 출연했다. 아들을 위해 드라마 출연을 결심했다고.
4집에 수록되어 있는 나름 댄스곡인 <왜 그래>를 흑역사격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모다시경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 2015년 6월에 1996년 당시 가요톱10에 출연해[17] <왜 그래>를 부른 김현철을 본 한 청취자가 그 날 오후의 발견 생방송에 "<왜 그래> 부르시는 거 잘봤습니다"라고 사연을 보내자 기겁했다. PD가 기습적으로 <왜 그래> 전주를 틀자 왜 트냐고 하기도... 활동 당시 댄스를 시킨 매니저가 미웠다고 한다. 1996년에 "환장"이라는 라이브 앨범을 한 장 내는데, 이 콘서트 동영상을 보면 <왜 그래>의 댄스는 백댄서들도 그렇지만 특히 김현철 본인의 율동은 차마 오글거려서 봐 줄 수가 없다.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의 패널로 참여하며,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캐릭터는 '성대 전문가'다.요즘은 '가요계의 삼촌'이라더라
9 정규 앨범 목록
김현철(가수)/음반 목록 항목 참조.- ↑ 1996년 5집 <일생을> 활동 때부터 서서히 살이 찌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살이 빠진 상태. 판정단으로 출연 중인 복면가왕을 보면 알 수 있다.
- ↑ 윤상과 김현철은 꽤 오래 된 절친이다. 사실 호적상 윤상이 나이가 한 살 더 많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막역히 지내 현재도 그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 ↑ 이 이야기는 1990년대 당시 TV는 사랑을 싣고에 소개 되었는데, 수필가 장영희 님의 《괜찮아》에 수록되어 있다.
- ↑ 하지만 아버지가 딱히 거센 반대는 하지 않은 듯하며, 지금은 희귀템이 된 신디사이저를 출장 중에 구해 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 ↑ 나중에 가수 김장훈이 부른 그 노래다.
- ↑ 당시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넣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 ↑ 이 때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유영석도 함께 들어갔다. 이 둘은 당시 동아기획의 차기 핵심 멤버로 꼽힌 기대주였고 기대에 부응하듯 차례차례 히트치게된다.
- ↑ '아침향기'는 김현철이 고교 시절 활동하던 밴드명으로, 6집의 '아침의 그 노래는'이라는 곡도 이 당시에 썼던 곡이다.
- ↑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브라스 활용이 절정에 달했던 6집이나, 데뷔 시절의 감성을 일정 부분 회복했다고 평가받는 9집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 ↑ 〈조조할인〉이 수록된 이문세 10집 《화무》에 수록된 곡이다. 이문세의 9~11집을 김현철이 프로듀싱했다.
- ↑ 여담으로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
절대동안황신혜가 출연했다. - ↑ 이후 이 호칭은 FM데이트의 후임 DJ 박소현이 물려받는다.
- ↑ 2001년 3월 KBS 제2라디오로 이관되었다가 종영되었다.
- ↑ 팬들은 다 알겠지만, 이 세 명은 서로 격없이 친하며 서로간의 음악세계를 누구보다 인정해주는 친우. 노총각이란 기믹으로 이현우, 윤상, 김현철, 윤종신 등이 함께 했던 적이 있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김현철은 방송 등에 유영석과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둘은 학창 시절부터 친해 호형호제하는 사이.
- ↑ 본인과 처가 모두 재산 좀 있는 집안이다. 김현철의 부친이 건설회사 중역이라면, 장인은 화학자재회사 사장. 애초에 부인이 발레리나로 미국 유학을 갔고, 김현철과 아내가 만난 것도 미국 교민 연회장이었다.
- ↑ 참고로 김구라 역시 삼성 라이온즈 팬이다. 방송에서 인천 토박이 출신임을 강조해 SK 와이번스나 넥센 히어로즈의 팬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본인이 마리텔 시험방송에서 직접 삼성 팬임을 인증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 ↑ 케이블 채널 GMTV에서 하루 세번 방송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