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0년
1970년에 있어서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역사의 창조가 아니라 사건에 반응하고 있을때 브란트 수상은 철의 장막에 드리워진 이후 가장 감격적이고 희망적인 유럽의 비전을 투사함으로써 개혁자로써 부각되었다. (중략) 브란트 수상은 독소 불가침조약과 서독,폴란드 우호조약을 체결한 그는 동향정치[1]를 통해 새로운 동서관계를 낳고 있다. - 타임지.
이 해 12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이 사진 하나면 왜 선정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1971년
금본위제도의 폐지. 이것으로 세계 경제는 혼란에 빠져들고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세계 경제의 판도를 뒤흔든 '닉슨 쇼크'를 이유로 올해의 인물로 선정.
3 1972년
세계의 판도를 변동시키고 냉전시대 이래 가장 깊숙한 세계정치권력의 재편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중략) 중도층 미국의 가치대변자인 "닉슨"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하버드 대학교수 출신의 "키신저"가 묘한 짝이나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의 협력관계를 이룩하여, 비록 월남전 종식에는 실패했지만 세계를 사반세기에 걸친 강대국 대결의 시대로 부터 협상의 시대로 이행시켰다. - 타임지.
중국과의 핑퐁외교를 통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소비시장인 중국과의 교류를 알렸고 이를 조율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가 주목받는 것은 지명한 사실이었다. 거기다 1972년 6월에 벌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올해의 인물이 되기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4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후 콜럼비아 특별구 지방법원 판사에 불과하던 존 시리카는 이 사건을 담당하면서 워터게이트에 관련된 7명에 대한 조사, 처벌, 판결을 주도하면서 일약 최고의 판사에 오르게 되었고 미국을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철저하게 파헤친 존 시리카가 올해의 인물에 수상되었다.
5 1974년
1973년 전세계를 뒤흔든 오일쇼크의 배후,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원래는 1973년에 선정되어야 했으나 미국을 뒤흔든 워터게이트사건이 워낙 커서 1년 뒤인 1974년에 선정. 물론 이해에도 오일쇼크는 엄청난 파동을 몰고 오는 중이었다.
6 1975년
1975년은 여성운동이 모든 분야에 걸쳐 확대되고 단순한 이념적 운동을 넘어 일반적인 지위 까지 성숙했던 해 - 타임지.
<선정인원>
- 베티 포드(포드 대통령의 영부인)
- 엘라 그라소(코네티컷 주지사)
- 빌리진 킹(테니스 선수)
- 칼라 힐스(미국 주택 도시개발 장관)
- 바바로 소단(텍사스 출신 민주당 의원)
- 수전 브라운밀러(『우리들의 의지에 반하여』,『남성,여성 그리고 강간』의 저자)
- 앨리슨 치크(워싱턴 성공회교회 부목사)
- 수지 샤프(노스 캐롤라이나 최고법원수석판사)
- 캐들린 바이얼리(해군 소령)
- 애디 와이어드(육류노조여성문제국장)
- 캐럴 슈턴(루이빌 쿠리어 저널 편집국장)
- 질 커 콘웨이(스미스 대학교 학장)
7 1976년
인상적인 권력의 부상과 그의 당선이 미국인들의 생활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줬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둘러싼 커다란 기대가 가득한 했던 한해.- 타임지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해 공화당은 대선에서의 패배가 예상되었고 민주당의 지미 카터는 그 기대를 확인시키며 미국 동부지역을 싹쓸이 해 미국의 3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8 1977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 패배한 이집트의 대통령인 사다트는 소련은 썩은 동아줄이라고 판단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진영에 붙기로 결심한다.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 대통령의 신분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중동평화안을 연설했다. 이 결과 세계의 화약고 중 하나였던 중동에 평화의 비둘기가 내려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는 의미로 올해의 인물로 선정.
9 1978년
흑묘백묘론을 외치며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덩샤오핑이 올해의 인물에 선정. 더군다나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중국은 친소련도, 친미국도 아닌 뉘앙스를 풍겼기에 미국으로선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선 잠재적 동맹국으로 선언했고 이러한 이유들이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쩌둥이도 선정된 적 없는데
10 1979년
이란의 혁명지도자로써 호메이니는 흔들리는 권력의 불합리성 가운데에서 테러리즘이 손쉽게 정부 정책으로 채택될수 있다는 경악스러운 교훈을 20세기 세계에 제시했다. - 타임지.
이란의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레자 샤 팔레비 2세의 전제통치에 대항한 종교지도자. 이란에서 대대적인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팔레비 2세는 결국 해외 망명을 택하고 해외에 피신해 있던 호메이니가 복귀해서 이란의 권력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이 양반이 권력을 잡자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방향의 정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
- ↑ 東向政治. 동쪽으로 향한다는 뜻으로 독일 입장으로 동쪽에 있는 소련, 폴란드에게 펼친 우호적인 정책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