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남도의 시, 군 | ||||
시 | 해주시 | |||
군 | 강령군 | 과일군 | 룡연군 | 배천군 |
벽성군 | 봉천군 | 삼천군 | 송화군 | |
신원군 | 신천군 | 안악군 | 연안군 | |
옹진군 | 은률군 | 은천군 | 장연군 | |
재령군 | 청단군 | 태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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甕津郡 / Ongjin County
옹진군 甕津郡 / Ongjin County | |
국가 | 대한민국 |
광복 당시 면적 | 822㎢ |
광역시도 | 황해도 [1] |
광복 당시 행정구역 | 1읍 10면 |
시간대 | UTC+9 [2] |
1 개요
북한 황해남도에 위치한 군. 면적 696제곱km. 광복 당시에는 옹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북한 치하에서 1954년 남동쪽 절반이 강령군으로 분리되어 반도의 서남단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옹진반도의 대부분은 38선 이남에 있어서, 한국 전쟁 이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남한령이었다. 38선 분할로 인해 옹진군 교정면, 가천면의 북부 2/3이 북한령이 된 대신, 38선 이남에 있던 벽성군 해남면, 동강면, 송림면(연평도 포함), 장연군 백령면(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을 더하여, 옹진읍 온천리에 있었던 옹진군청에서 관할하였다. 또한 옹진군과 연백군을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휴전 협정 이후 서해 5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완전히 북한 치하로 넘어갔으며, 군청 역시 인천으로 옮겼다. 옹진고등학교도 부천으로 옮겨 가서, 현재의 부천시 범박동에 있는 시온고등학교가 되었다.
옹진군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개전 초기 옹진지구 전투 당시 군과 함께 남쪽(대부분 인천)으로 피난한 경우가 적지 않다.[3] 그래서 인천에는 옹진군 출신 및 그 후손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한다. 또한 1.4 후퇴 당시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바닷길로 피난한 사람들 역시 옹진군 도서지역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2008년 북한 인구조사에서 옹진군과 강령군(구 옹진군+벽성군 3개면[4])의 인구를 합치면 26만 명에 달한다. 통일되면 옹진시로 승격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저 인구조사 결과는 북한군을 제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5]
더군다나 옹진반도 지역에 주둔하는 북한군들이 상당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한군들이 통일 후 고향에 가지 않고 눌러앉는 경우도 상당히 많을테니 옹진시로 승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통일 후 이촌향도 문제도 불거질수 있으니 일단 어떻게 될지 기다려보자. 하지만 신도시가 건설된다면 어떨까?
전쟁 전까지만 해도 금광과 온천업으로 지역경제가 튼실했던 동네였다.그 녀석이 오기 전까지는...
2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황해도의 하위행정구역 (이북5도위원회) | |||||||||||||||||||
시 | 해주시 | 사리원시 | 송림시 | ||||||||||||||||
군 | 벽성군 | 연백군 | 금천군 | 평산군 | 신계군 | ||||||||||||||
장연군 | 송화군 | 은율군 | 안악군 | 신천군 | |||||||||||||||
재령군 | 황주군 | 봉산군 | 서흥군 | 수안군 | |||||||||||||||
곡산군 | 옹진군 |
광복 당시 기준 1읍 10면이다.
- 옹진읍
- 1938년 읍으로 승격되기 전에는 마산면(馬山面)으로 불렸으며,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교정면, 가천면과 함께 해주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된 곳이다. 군청 및 읍사무소 소재지인 온천리에는 15세기 중엽부터 발전하여 온 마산(馬山)온천이 있다[6]. 또한 이 지역 경제의 트레이드 마크인 옹진금광이 수대리에 있었다. 해옹선 냉정역과 종착역인 옹진역의 소재지. 인구 32,965명(1949년).[7] 평양의 공산정권에게 강점당하지만 않았어도 무난하게 시승격을 노릴 수 있었던 동네다.
일본인한테 옹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있으면 한국의 사도가시마라고 해주면 바로 이해를 할 것이다. - 소속 리 : 온천(溫泉)·당현(堂峴)·도원(桃源)·냉정(冷井)·개평(開坪)·수대(秀垈)·송정(松亭)·구계(龜溪)·양암(陽巖)·단천(丹川)·노호(蘆湖)
- 가천면
- 광복 당시에 면사무소 소재지는 장현리이다. 38선이 설정될 때 면의 남부 3분의 1 지역이 이남에 있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38선 이남이었지만 북면이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 소속 리 : 장현(長峴)·한현(閑峴)·성변(城邊)·삼괴(三槐)·옥천(玉泉)·사산(沙山)·가암(架巖)
- 교정면
- 광복 당시에 면사무소 소재지는 송림리이다. 38선이 설정될 때 면의 남부 3분의 1 지역이 이남에 있었는데, 서면이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정리에는 면 이름의 유래가 된 판정우물이 있다.
- 소속 리 : 송림(松林)·국봉(國峰)·건전(乾田)·비파(琵琶)·난천(蘭泉)·월암(月巖)·판정(判井)·구포(鷗浦)·송현(松峴)·낭암(浪巖)
- 동남면
- 동남면임에도 군의 중앙에 있다. (구) 옹진군의 동면과 남면을 1914년 행정개편 당시 합면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당장리이다. 사곶 일대에는 북한 해군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주요 부속도서로는 어화도(漁化島), 용호도(龍湖島)가 있다. 어화도의 경우, 결코 외지의 자금을 차입해오지 않아서 황해먼로주의란 기록이 남아있으며, 인천광역시에는 어화도 출신 실향민들의 단체인 어화도민회가 있다. 용호도의 경우 과거 용호도수산학교가 있었고 개전 초기 옹진철수 때 피난선을 제공했던 곳이다. 이 두 도서지역의 김 생산은 유명해서 어화도와 용호도에서 생산되는 김을 옹진김이라 하여 알아주는 특산품이었다. 이 지역의 해상교통은 사관리(=사곶)에서 용호도를 거쳐 어화도에 들어가는 기선이 전부였다. 인구 15,184명 (1949)
- 소속 리 : 당장(堂墻)·어화도(魚化島)·송강(松江)·송현(松峴)·장척(長尺)·거답(巨畓)·석교(石橋)·안산(安山)·인평(仁坪)·서장(西壯)·신안(新安)·갈항(葛項)·용호도(龍湖島)·전당(錢塘)·사관(沙串)·무파(茂巴)
- 봉구면
- (구)옹진군의 봉현면과 구주면을 합면해서 탄생되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장수리이다. 옹진반도의 주요 해상 요충지 중 한곳인 부포리가 이 면에 있는데, 부포선의 종착역인 부포역이 있으며 6.25 이전까지는 옹진군이 사실상의 섬이었던 관계로 인천과의 사이에 연락선이 다녔다. 일명 부포항로. 평양리의 개머리 해안포진지와 무도리의 "무도방어대"는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의 도발 원점이기도 했다. 인구 13,414명(1949)
- 소속 리 : 장수(長壽)·광암(廣巖)·신평(莘坪)·도화(都華)·평양(平陽)
(!!!)·부포(釜浦)·건지(乾智)·옥은(玉隱)·향가(香街)·죽교(竹轎)·무도(茂島)
- 부민면
- 면소재지는 강령리이며, (구) 강령군의 중심지이다. 강령탈춤의 발상지. 강령반도에서 해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있다. 부포선 강령역이 있고, 신강령역은 바로 부민면 북쪽 끄트머리에 있다. 인구 11,275명(1949)
- 소속 리 : 강령(康翎)·광평(廣坪)·천상(泉上)·고동(古洞)·성도(聖道)·내동(內洞)·부암(婦巖)·미산(眉山)·금병(錦屛)·석계(石溪)
- 북면
- 군 중앙에 있는 면으로, 1914년까지의 군청 소재지였으며 옹진향교 또한 이 곳에 있었다. 면 소재지는 화산동리이며 화산성(花山城)이 있다. 화산이라는 데에서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월남에서 왔다는 이용상의 유적지인 망국단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 곳은 옛 수군절도사의 본영이 있었기에 일명 '본영(本營)'이라고도 했다. 한편 구곡노동자구[8]에는 북한 중앙식물원 옹진분원이 있다. 인구 10,609명(1949).
- 소속 리 : 화산동(花山東)·고안(古安)·웅현(熊峴)·초일(蕉日)·화산중(花山中)·봉소(鳳所)·상심적(上深寂)·삼산(三山)·하심적(下深寂)
- 서면
- 군 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읍저리. 읍저리는 일명 '소강(蘇江)'이라고도 하는데, 수군첨절제사의 본영인 소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안의 누각인 만하정(挽河亭)과 진해관(鎭海館)은 광복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연봉산에는 오래된 절인 청련사(靑蓮寺)가 있었으며, 주요 부속도서로는 창린도가 있다. 1949년 옹진 전투(6.25전쟁 초기 옹진반도 전투와는 다르다) 때 면의 북부 지역(및 남한에 남은 교정, 가천면 잔여지역)이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인구 15,389명(1949).
- 소속 리 : 읍저(邑底)·동문외(東門外)·연봉(蓮峰)·외전산(外錢山)·장포(長圃)·만진(萬珍)·내전산(內錢山)·동오(東五)·서경(西京)·창린도(昌麟島)
- 용연면
- 군 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송학리. 부포선 철도가 통과한다. 한 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옹진 학 도래지가 용연면의 강령천변에 있던 거다. 인구 8,195명(1949)[9].
- 소속 리 : 송학(松鶴)·한봉(漢鳳)·장릉(長陵)·용연(龍淵)·수계(水鷄)·용산(龍山)
!·봉황(鳳凰)·오산(梧山)
- 용천면
- 군 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포산외리. 포산외리의 용천약수가 유명하며, 주요 부속도서로는 기린도, 마합도가 있다. 인구 11,475명 (1949).
- 소속 리 : 포산외(蒲山外)·대정(大井)·손량(孫梁)·용암(龍巖)·용문(龍門)·마합(麻蛤)·제작(
製作諸作)·포산내(蒲山內)·대기(大機)·마항(馬項)·원산(院山)(!!!)·기린도(麒麟島)
- 흥미면
- 군 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안락리이다. 본토 최남단에는 등산곶이 있으며, 옹진반도 도서지역의 최대도서이자 전국구로 봐도 꽤나 큰 섬인 순위도(巡威島)[10]가 이 면의 관할이다. 인구 12,373명 (1949).
- 소속 리 : 안락(安樂)·식여(食餘)·냉정(冷井)·송산(松山)·석포(石浦)·월계(月溪)·아미(峨嵋)·봉강(鳳崗)·괘암(掛巖)·등산(登山)·창암(蒼巖)·예진(禮津)
3 통일 이후의 전망
옛날처럼 탄탄한 지역경제를 지니게 될 지 의문이다. 부존량이나 채산성을 확인해야겠지만 80년 전 마산면을 옹진읍으로 만들어줬던 수대리 광산이 과연 21세기인 지금에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온천업은 전국구로 보면 온양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황해도 내에서도 연백의 연안, 배천과 송화 등 경쟁자가 너무 많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온천 타이틀로 승부를 볼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암울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 외에는 농업과 전쟁 전부터 유명했던 김 양식 같은 수산업 정도?- ↑ 북한 기준으로는 황해남도
- ↑ 북한 기준으로는 UTC+8:30
- ↑ 개전 초기의 급박한 전황에 피난해서 그런지 가장과 장남 정도만 고향을 떠나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 ↑ 이북 5도 체계 하에서는 옹진군의 면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이북 5도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발행되는 지도에서는 백이면 백 모두 벽성군 땅으로 나온다. - ↑ 북한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역별인구에 나온 전체인구와 전국인구의 전체인구가 다르다. * 특히 지역별인구에 나온 연령별 남녀 인구 총합은 20대에서 성비가 여성이 남성에 비해 2배나 많은 세대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북한군의 인구가 지역별인구 통계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한반도에서 가장 뜨거운 온천이다. 100~104℃ 정도
- ↑ 무려 현재의 영동읍보다도 큰 동네였다.
영동군 안습1949년 당시 옹진읍과 인구가 비슷했던 동네들로는 김해읍, 벌교읍, 밀양읍 등이 있다.벌교읍 안습 - ↑ 고안(古安)·웅현(熊峴)·상심적(上深寂)리를 합친 북한의 행정구역
- ↑ 통계청 포털에서는 용유면으로 되어있는데, 그 당시 용유면(현 인천 중구)은 부천군 소속이었다.
- ↑ 창암, 예진 2개리 관할
- ↑ 단 사곶은 수심이 얕은 게 약점이다. 아무튼 지리적으로 봐도 옹진군은 통일 이후에는 서울, 경인 지역을 대비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될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