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4대 광종 왕소 | ← | 5대 경종 왕주 | → | 6대 성종 왕치 |
묘호 | 경종(景宗) | |
시호 | 지인성목명혜순희정효공의헌화대왕 (至仁成穆明惠順熙靖孝恭懿獻和大王) | |
연호 | 태평(太平) | |
능묘 | 영릉(榮陵) | |
성 | 왕(王) | |
휘 | 주(伷)[1] | |
자 | 장민(長民) | |
배우자 | 헌숙왕후(獻肅王后), 헌의왕후(獻懿王后), 헌애왕후(獻哀王后), 헌정왕후(獻貞王后) | |
아버지 | 고려 광종 | |
어머니 | 대목왕후(大穆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955년 9월 22일[2] ~ 981년 7월 11일 |
양력 | 955년 11월 9일 ~ 981년 8월 13일 (27세) | |
재위기간 | 음력 | 975년 5월 13일 ~ 981년 7월 11일 |
양력 | 975년 7월 14일 ~ 981년 8월 13일 (7년)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정궁 회경전 |
1 소개
고려의 5대 왕으로 광종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사실 어머니는 태조와 태조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이다. 복수를 허용하는 병크로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경종
연호 태평(太平)은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 있는 보물 981호 마애약사여래불의 명문(銘文)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씌여져 있다.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태평이년정축칠월구일 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
태평 2년[3] 정축년 7월9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석불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광종의 호족박멸정책으로 인해 태자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는데,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광종은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광종이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일단 광종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까닭에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을 승인하여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지만,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두 삼촌이 살해당했기 때문에[4] 놀란 왕은 입안자를 처벌하고 복수법을 폐지시켰다. 이 부분을 두고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된다.
이후,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체제를 확립(시정전시과)시켰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무난한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말년에는 여색과 바둑에만 몰두하였는데 이는 광종 시절의 공포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만력제와 비슷하다.
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는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 때문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고려사》
죽기 한달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다음달인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 동생 성종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는 유지를 남기고 붕어한다.
2 가족관계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 유명한 천추태후와 목종. 자매덮밥을 실현한 왕이기도 하다.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동생 헌정왕후도 비로 맞아들였다. 헌정왕후에 대해서는 현종 항목 참고.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최철호가 열연. 강한- ↑ 학자에 따라 유로도 읽힌다.
- ↑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최초의 국왕이다.
- ↑ 977년.
- ↑ 고려 태조의 왕자였던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 사후 효성태자로 추존)과 진천낭군(진주낭군, 사후 원녕태자로 추존). 최승로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으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왕에 영합한 간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광종대에 등용된 신진 세력으로 해석되기도)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라고 하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다만 광종이 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들의 뒷배경이었던 천안과 진천이 광종의 외가였던 충주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광종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출처: 김창현 <광종의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