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3대 정종 왕요 | ← | 4대 광종 왕소 | → | 5대 경종 왕주 |
묘호 | 광종(光宗) | |
시호 |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 |
연호 | 광덕(光德) 준풍(峻豊) | |
능묘 | 헌릉(憲陵) | |
성 | 왕(王) | |
휘 | 소(昭) | |
자 | 일화(日華) | |
배우자 |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1] | |
아버지 | 고려 태조 왕건(王建) | |
어머니 |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 | |
생몰년도 | 음력 | 925년 ~ 975년 5월 23일 |
양력 | 925년 ~ 975년 7월 4일 (51세) | |
재위기간 | 음력 | 949년 3월 13일 ~ 975년 5월 23일 |
양력 | 949년 4월 13일 ~ 975년 7월 4일 (26년 88일)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정궁 |
1 개요
고려 초기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과감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던 고려사 최초의 개혁 군주.
고려의 제4대 왕.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신명왕후 유씨의 소생. 형인 혜종과 정종이 젊은 나이에 각각 급사하자 형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2 왕권 강화
고려 초기 왕권 다툼의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으며 여러가지 정책을 통해 고려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왕이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안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호족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이 당시의 노비는 단순히 하인이 아니라 소작농 겸 사병이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한다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올수 있는 정책이었다.
또한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 출신의 쌍기를 등용한 후 그의 제안으로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 '당'이 그랬듯,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가 시행됐지만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그 외에도 백관들의 공복 제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등 자주의식을 표방한다. 하지만 뒤에 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두 개의 연호 가운데, 광덕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이견이 없지만 청주 용두사 철당간과 일본의 조련사 동종에서 확인되는 준풍은 이게 독자적 연호인지 그 당시 송에서 쓰던 연호 건륭[2]의 피휘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후 960년에 문화적,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고려와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북송와의 윈윈 통교를 시작했으며, 연호와 칭호는 송의 것을 따른다. 당연히 거란은 개무시.
3 공포 정치
잇따른 왕권의 강화 정책에서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암살 위협에 대응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호족이나 반대 세력들을 무참히 제거하는 공포 정치를 단행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효은태자[3]를 처형하는 것은 물론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인 흥화군과 경춘원군을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들은 후 가차없이 죽여버리기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도 의심해 걸핏하면 그를 협박하고 야단을 쳤는데 그 영향인지 경종은 훗날 왕이 된 후 말년에 정사에 흥미를 잃고 어딘가 병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4].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어 쌍기에게 주었다.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셈'하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한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광종은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대우를 줄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 서필의 아들이 훗날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 외교 담판으로 고려를 구원한 서희이며, 그 손자는 서눌이다. 서필, 서희, 서눌 3대는 살아서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에 봉해지는 등 큰 영광을 누렸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쌍기가 고려에서 귀빈 취급을 받자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오른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이제현의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국내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자신에게 충성을 하기 좋은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 때 활약한 최승로가 광종의 귀화인 우대정책과 호족 숙청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그 광종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호족들을 죽여놓고는 그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지 절을 세우고 툭하면 그들을 위한 제를 지냈고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 전해졌었다. 원래 글쓰던 유학자들은 한중 가리지 않고 불교가 조금이라도 득세한 듯보이면 목숨 바쳐서 물어뜯곤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원들을 국가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승려들은 전부 죽게 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바뀌는데 일조한다.
결국 개국 초 수백에 이르던 호족들이 대부분 숙청되어 불과 수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사실 얼마만큼의 호족이 죽었는지는 기록의 부실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테지만)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꾀하는 과정에서 외척,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면에서 통일신라의 신문왕[5]이나 조선의 태종, 세조와 비교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왕조의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발전의 기반을 쌓았다는 업적에서도 비슷하지만 왕권에 장애가 될 존재들을 제거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유사하다. 특히 조선 태종의 숙청은 이복동생들과 그 관련자들, 처남들과 그 관련자들의 목숨을 뺏었다.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면 처남들도 그 가족들을 연좌해 죽이진 않았으며 특별히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진 않았으므로 광종이 숙청의 양쪽에서는 더 위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호족연합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면, 이런 고려를 군주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왕권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조선과 고려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비는 29명이나 되며 이들들은 대부분 호족집안 출신이다. 자연히 광종이 제거하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태종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왕권에 도전할 만한 왕족이나 호족들도 딱히 없었다. 이미 광종 스스로가 제일 강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자였고 형인 정종도 왕권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형 대에서 많이 숙청되었다. 그런데 또 숙청의 질로 따진다면 아무래도 태종과 비교하기 어렵다. 당장 광종의 숙청은 광종의 죽음과 함께 그 효과를 대부분 잃어버리지만 태종의 숙청은 세종대왕의 안정적인 치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찰을 대규모로 건립한 부분도 알고 보면 무서운데, 이게 바로 대각국사 의천 보다 이른 시기의 불교통합 시도이다. 광종은 교종인 귀법사의 균여를 중심으로 화엄종(신라 때부터 대표적인 왕권을 옹호하는 성격이 강한 종파)을 통합하게 한 다음, 천태종을 후원하여 법상종(고려초기 문벌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은 종파)까지 포함한 교종 통합을 하려 하였다. 여기에 또 중국에서 법안종(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시도한 종파)을 들여와서 선종을 통합하고, 이걸 다시 앞의 교종과 통합해 불교의 완전한 교선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광종이 죽으면서 법안이 쇠퇴하였고, 이 시도는 물건너간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과정은 좀 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따라한 인물이 바로 의천이다. 의천의 선교양종통합은 불교사에서만 주로 언급하지만, 왕족이었던 의천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왕권의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4 평가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모두 그 숙청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 때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왕이 광종인데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마구 죽임, 궁실을 크게 만들고 사치스러움, 특정 집단(쌍기)을 편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함, (안검법으로)귀천의 구분이 없어짐, 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둠 등등 온갖 이유를 들어 거론할때마다 비판 받는다. 시무28조에서 지적되는 사회의 폐단=최승로가 보는 광종의 폐단이라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조 앞에 실린 5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광종 시기 죽지 않고 살아서 성종 시기까지 이어간 호족들은 문벌귀족들이 되어 고려 중기를 지배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권력욕이 강했고 능력도 있었으나 편집증적 사고관으로 인하여 피해망상이 심하여 쓸모없는 인명피해를 주었다. 그는 강박증이 있었던 탓에 날이 갈수록 미쳐갔다. 바로 이점에서 태종과 비교된다. 그가 만약 조선의 임금이었으면 반정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여러모로 조선 태종과는 포지션이 겹치는데, 고려 광종은 지나친 숙청으로 인해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에게까지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는 점에서 조선 태종과는 다르다. 태종에 의해 숙청된 인물들 중 진짜 억울한 사람은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 정도 뿐인데 그마저도 심온만 제거하고 남은 가족들은 관노로 삼는 정도에 그쳤으며 그 가족들도 곧 복권된다. 심온도 억울하긴 했겠지만 태종이 워낙 외척 세력을 경계해서 그랬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아들의 왕권 확립에 도움이 됐다. 그러니까 태종은 최소한 아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다음 대에까지 숙청의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하게 하진 않았다. 물론 정말 일부만 제거해서도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조선 태종과는 달리, 고려 광종은 수많은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립해야 했기 떄문에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아마 태종이 광종을 모티브로 삼아 배울건 배우고, 버릴건 버린게 아니냐는 얘기를 했었다.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으로 불교 전적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는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5 능침
파일:Attachment/rhkdwhd.jpg |
개성특급시 송악산 기슭에 남아 있는 광종의 헌릉.
광종의 능호는 헌릉(憲陵)이다.[6] 2009년에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의 모습이 일부 공개되었는데 헌릉은 2009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의 고려 왕릉 보존 상태로 보아 저 사진보다 많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 가족 관계
정비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장남인 경종을 비롯한 2남 3녀를 보았다. 이 중에서 막내딸이 성종의 1비 문덕왕후 유씨[7]인데 성종은 대목왕후의 친남매인 대종의 아들이다. 즉, 대목왕후와 대종은 남매인 동시에 사돈이다.
후궁으로는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임씨와 현비 김씨가 있지만 후궁 소생의 자식은 없다. 현비 김씨는 궁인 출신으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종 20년에 광종의 궁인을 현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경화궁부인은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딸이며 광종에게 시집간 것은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실의 풍습인 족내혼의 전통에 의해 어머니 의화왕후의 성을 따라 임씨로 칭하였다. 왕의 딸임에도 왕후에 이르지 못한 것은 혜종의 미약했던 왕권과 동복남매였던 흥화궁군이 광종에 의해 숙청된 것이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7 미디어믹스
미디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 고려 초기의 임금들 중에서는 미디어 매체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군주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려의 창건자이자 아버지인 왕건보다도 더 많이 창작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편.
태조 왕건 이후 제작된 전 드라마, 제국의 아침은 이 광종이 주인공이다. 배우는 김상중. 광종 그것이 알고 싶다 [8]
네이버 웹툰 문아가 광종 연간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작중의 시대적 배경은 광종 7년(956)이다. 작중에 실제로 등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모에선 맞은 광종 실제로도 꽤나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게임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에서는 정규 캠페인 외에 패치로 추가된 '제국' 캠페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해당 캠페인에서 아버지와 유닛 스킨을 계승 공유했다(...).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의 배우는 이준기.
- ↑ 태조 왕건과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로, 광종과 대목왕후는 이복남매 사이다. 혜종과 정종은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호족들과의 정략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광종과 다른 자식들에게서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여긴 왕건은 광종 이하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 시켰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혼인은 그 첫 케이스.
- ↑ 건은 왕건, 륭은 왕건 아버지 왕륭의 휘이다.
- ↑ 태조왕건과 개국공신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의 아들이다.
- ↑ 조선의 숙종과 영조를 합친 케이스.
- ↑ 삼국통일로 이전 경상도의 신라보다 몇 배로 커져버린 통일신라를 사실상 새로운 국가로 본다면, 문무왕이 첫 번째 개국 군주이고 신문왕이 두 번째 왕이다.
- ↑ 공교롭게도 그와 많은 면에서 대조를 이루는 조선 태종의 능호도 헌릉이다. 다만 한자는 다른데 광종의 헌릉은 법 헌(憲)자를 쓰고, 태종의 헌릉은 바칠 헌(獻)자를 쓴다.
- ↑ 할머니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성을 따랐다.
- ↑ 드라마는 별로 흥행하지 못했으나 김상중의 광종 연기는 매우 뛰어났기에 2003년 KBS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