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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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우장춘(禹長春), 우 나가하루(Nagaharu U)
생몰월일 : 1898년 4월 8일? ~ 1959년 8월 10일
활동분야 : 농학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 번 치니라
온갖 채소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 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 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 우장춘 박사 묘비에 새겨진 추모시

이휘소 박사와 더불어 세계에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과학도.
씨 없는 고자수박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농학 박사.
환상향산 수박 에도 품종개량을 했다고 카더라[1]

1 생애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다. 아버지는 1903년에 암살되었으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에 가정 상황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중학교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지원으로 학비를 지급하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진학을 지시받아[2] 1916년 도쿄제국대학 실과 농학과의 청강생으로 입학[3]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에는 가정교사를 한 인연으로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는데, 코하루 집안에서는 결혼을 반대했고 고하루 본인은 집안과 의절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을 얻었고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씨 성을 사용했다. 단 이름은 일본식을 사용한 것도 같다.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다.

1936년에는 아래에 언급하는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농학박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직급이 낮은 것에 불만을 품고[4]연구소를 퇴사하였다.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퇴사했다. 이후 4년 반을 실직자로 보내다 고국에서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져 귀국하였다. 이 때 일본에서는 우장춘을 잃을 수 없다고 온갖 수를 동원했으며 그를 감옥에 가두는 꼼수까지 부렸으나 우장춘은 한 발짝 앞서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5]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까지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대한민국이 우장춘을 그토록 원했냐 하면, 독립 후 대한민국의 식량 사정은 그야말로 바닥을 쳐서,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던 것. 그래서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을 스카웃 비용으로 줬으나, 가족들 주라고 한 돈을 우장춘은 한국에 뿌릴 우량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고.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 간 지내며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말이야 대우를 해 줬다고 하지만 열악한 한국 사정상 그야말로 자리만 내준 거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듯.[6] 대통령으로부터 농림부 장관 부임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7] 연구에 몰두하다가 1959년 서울 메디컬 센터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이 악화되어 8월 10일에 타계했다.

2 진실?

우리에게는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교토대학의 "기하라 히토시"선생이다. 우장춘은 일반 농민들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육종학과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종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 한마디로 충격요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해진 것은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서 최초로 시연한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잘못 알려졌기 때문. 우장춘 박사 본인이 "내가 씨없는 수박을 발명했다"고 말한 것이 절대 아니니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2.1 실제 연구 성과

오히려 우장춘이 이룬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1935년 '배추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논문을 통해 '종의 합성'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박사는 배추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밝혔다.덕분에 창조설은 다시 한번 파묻혔다. 이 이론은 결국 종의 기원의 내용 일부가 수정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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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 위키피디아 링크. 참고로 해당 논문은 아직까지도 십자화과 식물 (배추, 유채, 양배추) 의 연구 논문이면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논문이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과학 이론으로는 이휘소 박사와 쌍벽. 씨 없는 수박 자체는 이 연구 업적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

아직까지 해외 과학 교과서에 한국사람 이름으로 나오는 거의 유일무이한 이론의 창시자인 우장춘이, 국내에선 단지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 외에도 제주도감귤 농업을 제안하였고, 일본 배추양배추를 교배해 한국 토양에 맞는 배추를 개발, 피폐해진 한국 국토에 원예와 농업을 발전시켰고, 그 당시 열악했던 한국 농학분야에 선구적인 일 들을 많이 했다.

3 여담

이승만 정권 하에 정치인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어느 정도 그에 대한 괄시가 있었는 듯. 일본에 오랜 시간 있었고, 본인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연구를 중요시했기에 한국어가 간단한 읽기나 듣기만 가능했을 정도로 서툴렀으며, 이 때문에 단지 한국어를 못 한다고 무시하는 정치가도 있었다고. 특유의 우직한 성품으로[8] 정권의 경향과 다른 직언을 했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 일본에 거주하던 어머니의 장례식과 딸의 결혼식에 출국금지를 당하여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9]

한국에서는 '현지처'를 두고 살았다 한다. 그래서 아내는 아이들이 독립하면 한국에 와서 같이 살려고 했다가 포기했고 위독해지자 한국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이 때 간호사로 위장해서 우장춘과 면회했는데, 한 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사망하기 3일 전에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 포장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한 말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는구먼...근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 라고...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국의 입장에서 우장춘은 반역자 우범선[10]의 아들이고, 그가 성장하고 업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줘야 하는 데 당시 신생 대한민국 사정상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뒤늦게나마 보상한답시고 훈장을 줬긴 했으나, 그의 심정이 착잡하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대단한 애국자로 살아 갔던 인물로, 일본에서 조금만 굽혀(성을 바꾼다든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11] 조선, 대한민국,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하에 열심히 일한[12] 위인 중 위인.

그의 업적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씨 없는 수박의 창시자라는 와전된 사실이 계속 전해지는 데다가, 그에 대한 내용은 고작 책 모퉁이에 짧게 나오는 수준. 오히려 일본에서 우장춘의 연대를 공부하고 그에 대한 책을 내는 형편.

그가 남긴 유언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가져온 [13]를 손에 쥔 채로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 였다.

수원시에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인 원예시험장 한 가운데에 이 분의 흉상이 있다. 거기에 속한 여기산(麗岐山)에는 우 박사의 묘소가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그 앞 길의 도로명도 우장춘로이다.

조봉암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해에 죽은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의 넷째 사위가 일본의 전자기기, 세라믹 제품 등을 생산하는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자 및 전 회장이자 일본항공의 회장을 역임한 이나모리 가즈오다. 여기에서 박지성과의 인연도 생기는데, 교세라에 속한 구단 소속 시절에 동료가 후에 배우자가 되는 애인과 미팅을 주선하여,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펴낸 책에서 나오는데, 가토 다이스케의 배우자 가토 로사는 고등학교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고향 가고시마에 있는 가고시마농림고등학교 졸업자이다. 헌데, 여기 졸업자 중에는 한국 및 동양의 파브르로 평가될 석주명 박사도 포함되어 있다. 헌데, 이나모리 가즈오는 세라믹으로서 찰스 다윈과의 연관성이 나오고, 석주명은 다윈이 파브르와의 교류라는 연관성으로 다시 한번 그 공통점에 주목을 주는 셈이다. 더욱이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이란 항목에도 연관이 되는데, 링컨과 다윈이 같은 해에 같은 날 출생자이고, 케네디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다윈을 지원하고, 지지한 학자 토머스 헉슬리의 손주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와 같은 해 같은 날에 사망하였다. 위 사진을 보아도 불독상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우장춘 박사가 딱 닮았다. 마치 다윈이 비로소 인류를 위해 세운 학문을 다시 수정 보완하려는 선각자가 살 생애에 대한 위로였을까란 말도 있다.

  1. 정작 본인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지 않았다. 자세한 건 밑을 참고. 아마 당시 본 사람들은 "우왕 짱 신기하다."반응을 보인 뒤 소문의 소문을 타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원래는 공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농대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과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공과대학에 진학했다면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공밀레로 전쟁 무기 개발에 투입되어야 했을 테니 결과적으로는..
  3.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과 실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장춘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되는데, 그 일화를 소개하자면. 어느날,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 다니던 한국인 출신 유학생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그런 사건을 보게 된다. 이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4. 일본독일과 더불어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나라라고 한다. 한 때는 도쿄대학 교수진 중에도 박사 학위 있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
  5. 불법 체류자가 된 한국인들을 모았다가 송환하는 곳
  6. 그치만 우장춘이 농림부에 지원을 요청하자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서절하자 대통령에게 가서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다는 등 고생은 심해도 대우마저 엉망은 아닌듯하다.
  7. 아예 뿌리는 무, 위는 배추로 구성되어있는 '무추'를 연구하기도 했다.
  8.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어서 별명이 불독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오만하게 비춰질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9. 일본에 가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을까봐(...) 출국 금지를 시켰다는 말도 있다.
  10. 을미사변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우범선이다!견부호자
  11.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일본 정부는 우장춘의 한국 귀국을 감옥에 보내는 꼼수까지 써가며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심지어 쓰시마 섬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우장춘만은 내줄수 없다고도 할 정도 한 마디로 당시 일본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재로 우장춘을 인정했다는 소리다. 그가 만약 조금만 자존심을 굽히고 일본에서 생활했으면 상당한 지원을 등에 업고 더욱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개인 연구에 투자해 지금 보다 학술적으로 개인 커리어에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적으로는 가족과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포기한 것. 게다가 순수 한국인도 아닌 한일 혼혈이다.
  12.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그는 그저 과학자로서 묵묵하게 일하였다. 그런데 장관을 시켰어도 한국어를 못 하는데? 그땐 웬만한 식자층은 일본어가 가능하던 시절이라...
  13.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