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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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선(禹範善, 1857∼1903)

을미사변의 주동자 중 하나이자 천하의 개쌍놈.

세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아들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한 공헌 때문에 그의 아버지로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우범선은 희대의 매국노였다. 오히려 우장춘 박사가 그렇게 한국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견부 밑에 호자 난 것은 사실이다.

1 젊은 시절

1857년 5월 무인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병법 수업을 하였으며, 20세가 되던 해인 187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이후 황해도 청단찰방(靑丹察訪)이 되었으며, 강화도 조약 이후 김옥균, 이주회 등과 교유하면서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국교가 열리고 근대화 운동이 한참 벌어지던 때 조선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군제 개편에 착수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별기군(別技軍)의 창설이었다. 이에 우범선은 별기군이 조선군제를 근대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참가하였다.

그는 별기군 참령으로 있으면서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훗날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깐동안 집권했던 시절 일본에 밀항했던 것이 문제되어 체포되자, 자신이 일본에 건너갔던 이유를 "난국을 헤치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그는 일본과 일본의 근대화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민씨 척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우범선은 평북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평안감사 민병석의 도움으로 장위영 영관이 되었다.

2 개화파 관료

이후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자, 개화파가 일본을 배경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우범선은 그해 8월 군국기무처의 의원이 되어 갑오개혁에 참여한다. 1895년 4월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건의에 의하여 훈련대가 창설되자, 우범선은 그 제2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던 중 개화파 내에서 박영효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1895년 5월 김홍집이 사임하고 박정양 내각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확립에 반발하면서 미국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정치집단이 대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명성황후는 박영효를 축출하려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박영효 등 친일세력들은 훈련대 병력을 이용하여 왕궁을 점령한 후 고종을 폐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우범선도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다. 그러나 그 음모가 곧 누설되어 체포령이 떨어짐으로써 그는 변복을 하고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3 을미사변과 일본 망명

명성황후세력은 1895년 7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력하여 친일세력을 축출하고 그 대신 친러세력을 등용하려고 하였다. 9월 1일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새로 미우라 고로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정국은 왕권이 강화되고 친러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친일파의 몰락이 대세가 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위축된 세력을 만회하고 자파 세력을 부식(扶植)하는 데 최대의 장애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우라는 우범선을 만나 난국을 헤쳐 나아갈 방도를 물었다. 이에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나는 무부(武夫)다. 어떤 정견이 있을까마는 다만 조선의 정치 개선은 즉결적으로 그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비록 어떠한 고재(高才) 양책(良策)이 있을지라도 변개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명성황후 시해를 통한 친일정권의 성립을 주장하였다.

그 계획은 9월 20일경부터 구체화되었다. 즉, 시해계획은 해산위기에 직면한 훈련대를 이용하여 이들에 의한 쿠데타로 위장하고,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세(楠瀨幸彦)와 공모한 뒤에 대원군을 끌어들이고 서울에 있던 일본인 대륙낭인들을 앞잡이로 해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우라는 친일 조선인을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하여, 명성황후시해의 훈련대 동원책임을 우범선에게 맡겼다. 다시 말해 명성황후 시해계획의 주모자는 일본공사관의 마쓰무라(松村濾)와 구스노세,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지도자로 하는 일본 낭인 그룹과 우범선 등의 친일 군인들이었다.

그 당시 경성에서는 친일적인 훈련대와 순검이 충돌하여 난투가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되자 민씨 일파는 훈련대를 해산하고자 하였고, 고종도 이 방침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의 하교가 내려졌고, 이에 미우라는 훈련대를 담당한 우범선에게 군대를 동원하라고 명령하였다. 10월 8일 오전 4시반 경 대원군을 끌어내어 궁성에 들어가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는 계획 하에, 우범선은 대원군 앞으로 나아가 "대원위 대감께 인사 여쭙니다. 훈련대의 대대장인 우범선 참령입니다. 참령 우범선이 지원군을 이끌고 대원위 대감께 충성을 바치러 왔습니다" 하고는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궁궐의 침입자들인 낭인들은 대부분이 일본옷인 하오리 하카마 차림에다 긴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 그 뒤를 일본공사관의 수비대가 따랐고, 그 다음에 선 것이 참령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였다. 훈련대는 그들의 특수한 군복 차림에다 역시 장총으로 무장했다. 경복궁을 침입할 때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소(安達謙藏)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부대는 경회루를 동쪽으로 돌아 옹화문으로 밀려 가고 훈련대가 뒤로 처져 우범선은 주력인 낭인부대를 좌익 후면에서 엄호했다. 명성황후의 용모를 모르는 일본 낭인들은 한참을 찾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눈에 들어오자 미야모토(宮本)와 마치(木熊虎) 두 사람의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낭인 데라자키(寺崎泰吉)라는 자가 명성황후를 칼로 내려쳤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미우라 공사가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의 시체를 확인하였으며, 그는 오기하라(荻原秀次郞)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급히 화장하라고 명령하였다. 오기하라는 낭인들을 인솔하여 옥호루의 동쪽에 있는 솔밭에서 명성황후를 불태웠고, 그 유해는 우범선의 지시에 의해 윤석우(尹錫禹)가 정전(正展)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지고 가서 땅속에 묻었다. 이로써 국모시해사건은 끝이 났고, 그해 9월 훈련대를 파하고 친위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9월 13일 훈련대 제1대대장 참령 이두황, 제2대대장 참령 우범선을 파직시키고, 이범래·이진호가 각기 제1·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기치하에 의병의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일의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정치세력들은 반일 분위기에 편승하여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촉발되어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명성황후시해의 주범인 우범선은 이두황, 황철(黃鐵)과 함께 일본으로 달아났다.

4 망명 이후의 삶과 최후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도쿄 혼교(本鄕)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사카이 나카(坡井)라는 일본 여자를 알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우범선 등 이른바 '을미망명객'들은 국내에서 그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자객을 파견하였기 때문에 늘 암살당할 위험 속에서 살았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고베에서 박영효가 경영하는 조일신숙(朝日新塾)에 있었고, 이곳에서 그는 윤효정(尹孝定) 등과 한국의 고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일신숙이 해산되자 우범선은 1903년에 히로시마 근처의 구레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만민공동회 사건과 폭발약 음모사건으로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한 전(前)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이 1903년 7월 오사카의 윤효정의 식객으로 왔다. 그는 윤효정으로부터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살해한 괴수 우범선이 일본에 망명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였다. 고영근은 일찍이 명성황후의 총애로 병마절도사의 관직을 받았고, 명성황후의 비호 아래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왔다. 이에 그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결행한다면 다시 고종의 환심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과거에 누렸던 권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기 위해 대반전을 벌일 것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 우선 윤효정이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음모를 말하면서 그의 의심을 풀었다. 그후 그들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져 우범선은 고영근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우선 그는 우범선이 거주하는 구레 시에 집 한 채를 빌려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이어 고영근은 1903년 11월 24일 집들이를 겸하여 우범선을 초청하였다. 집들이에 온 그를 고영근은 미리 준비한 단도로 목과 어깨를 찔렀으며, 고영근의 종자 노원명(盧遠明, 혹은 魯允明)이 철퇴로 그의 머리를 몇 차례 내리쳤다.[1] 이로써 우범선은 타국에서 국모시해에 대한 심판을 받았다. 그를 살해한 고영근과 노원명은 즉시 히로시마 경찰서에 자수하였고 '국모보수'의 문구를 보여 주었다.

한편 국모시해범 우범선이 고영근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소식이 그가 죽은 다음날 알려지자, 중추원 의장 김가진(金嘉鎭)이 "도망가 있는 죄인 고영근이 우범선을 일본에서 살해한 것은 충의에서 나온 것이니, 법부로 하여금 고영근의 죄를 면해주고, 외부로 하여금 일본공사관에 조회하여 즉시 호환(護還)케 하여 명성황후와 천하의 인신(人臣)의 원을 풀 것"을 청하였고, 특진관 민영우(閔泳雨), 시종원경 이유인(李裕寅), 정3품 윤이병(尹履炳), 법부대신 이재극(李載克) 등도 고영근의 죄를 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모시해범을 처단한 고영근의 죄를 면해주었다. 반면에 우범선의 친일·반민족적 행위는 죽음을 통한 응분의 대가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잘 살펴보자면, 우범선은 (일제의 야욕을 눈치채지 못한) 바보였던 셈으로, 김옥균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우범곤과 헷갈리면 곤란하다. 물론 천하의 개쌍놈들인 건 비슷하다.
  1. 90년대 방영한 MBC 사극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선 권총으로 고영근이 직접 총살한 것으로 잘못 나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