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타 히데이에

(우키다 히데이에에서 넘어옴)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토시이에모리 데루모토우키타 히데이에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250px-Ukita_Hideie.jpg
宇喜多秀家 (うきた ひでいえ)[1] 우희다수가
(1572 ~ 1655.12.17)

200px-Ukita_mon.svg.png
우키타 가문의 아(兒)문장.[2]

1 개요

일본 전국시대헤엄쳐서 온다이묘. 아명은 하치로.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3]으로,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석의 다이묘였다. 별명은 비젠의 재상(備前宰相). 큰 키(약 170cm)에 미남자였으며, 아버지[4]와는 정반대로 성실하고 인정 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2 일대기

1581년 아버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년 가독을 계승하고 영지를 보장받는다.

이 과정이 우키타 나오이에등의 모략+지략과 히데요시의 인처모에귀부인모에 등이 섞여서 과정이 막장장난이 아닌데. 일단 우키타 나오이에 같은 경우 비젠을 정복하면서, 심지어 자기 형제와 딸, 마누라까지 이용하면서 모략을 써서 비젠을 점령했기에 주변에 적들이 매우 많았었던 데다가, 이미 자기 가문을 먹어치우려는 오다나 모리 등등이 옆에 있었고, 심지어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마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즉 믿을만한 사람없이는 미요시가문이나 오다가문, 아시나 등 전국 시대의 수 없이 많은 예들 처럼 그야말로 딱 망하기 좋은 상황. 이 상황에서 우키타 나오이에는 자신의 마지막 모략을 사용하는데 그게 병석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동맹세력이던 오다 가문의 주코쿠 지방 군단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불러서 후사, 자신의 어린 유자였던 히데이에와 남은 자신의 아내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는것..

히데요시는 나름 명문가이자 이름을 날린 효웅인 우키타 나오이에가 별 친하지도 않은자신에게 최후를 부탁하는 모습에 후사를 맡을 것을 승낙하고 그리고 히데요시는 나중에 이에야스에게 똑같이 써먹는다 이에야스에게는 안 통했지만 당시 대 모리 전선의 동맹군이기도 해서 알았다고 잘 돌봐준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돌봐주는데[5] 우키타 가문의 본령을 그대로 히데이에에게 계승시켜주는 후견인이 된다. 여기까지라면 히데요시의 미담이겠지만.... 문제는 그 돌봐주는 방법으로 나오이에의 과부를 자신의 첩으로 넣어버린다.-,-;;; 나오이에가 이걸 바라진 않았겠지만 약속은 지켰다 어쩄든 덕분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 밑에서 자라면서 히데요시의 양자로 자란다.[6] 양자취급 정도가 아니라 진짜 양자로서 토요토미 성 씨와 이름 중 한 자(秀)를 하사 받았고, 실제로도 사석에서도, 공식 석상에서도 항상 자신을 토요토미 히데이에(풍신수가)로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틀린 말.그냥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었음을 아는 용도가 되는 성씨

가토 기요마사 등 자기 진짜 일족들은 양자로 안삼으면서 생판 남은 양자로 삼는 히데요시의 놀라운막장 인사 능력도 대단하지만, 반면에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 친족들보다도 더욱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 정도로 품성과 외모가 뛰어난던 것 같다. 심지어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태어나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관련되어 처형을 당할때에도 히데이에를 향한 히데요시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반면에 차별 대우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 등 네네가 기른 무장들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가토 기요마사 같은 경우에는 평민출신에 정실부인 네네가 기른 친족 취급이었는데, 히데이에는 명문가에 히데요시가 첩과 함께 직접 기른 양자취급이었으니 그럴만도 하겠지만.. 실제로도 임진왜란이나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도 가토 기요마사 등과는 별로 교류하지 않았으며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친하게 지낸다.

어린 시절에는 당시 츄고쿠 지방을 공략하던 중인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편입되어 빗츄 다카마츠성 공략 등 에 명목상으로 참전했고 아직 어렸으므로, 실제 지휘는 숙부인 우키타 다다이에가 대신하였다.


성인이 되면서는 히데요시의 이름에서 한 자(히데)를 받았으며, 1586년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인 고히메(豪姫)를 정실로 삼는다. 이러한 경위로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이에 부응하여 히데요시 생전에는 5대로의 한 사람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였으며, 사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참가 무장중 가장 많은 수의 군사[7]를 이끌고 참가하여 분전하는 등, 충성을 다했다. 실제로도 자신을 우키타 히데이에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우키타 가가 아닌 도요토미 가의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총대장이 되어 참전하였다가 행주대첩권율의 조선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다. 독성산성에 포위된 권율이 쌀로 말을 씻기는 걸 보고, 조선군측에 물이 풍부한 줄 알고 포위를 풀어 버렸다는 설화가 유명하다. [8] 하지만 벽제관 전투나 제2차 진주성 전투[9]에서의 승리로, 주나곤(中納言)에 임명되기도 했다.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를 귀여워 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게 되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도 한다.[10] 조선의 유학자이자 포로인 강항의 <간양록>에 의하면 약탈을 금하는 등 민심수습책을 펼쳤으나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다고 한다. 거꾸로 약부터 주고 병을 준 건가 또한 모리 테루모토와 함께 코가 베인 조선인들을 동정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때는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친다.

곧 시마즈씨가 그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이에야스가 체포를 명하자,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는 사실을 인정하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넘겼다. 이후 다다쓰네와 처남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탄원으로 구노산 도죠쿠에 유폐되었다가 곧 일가족이 이즈 제도의 하치죠지마(八丈島)[11]로 추방된다. 이는 탄원 때문이라기보다는 우키타 개인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별다른 능력도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고 실제로 그 자신이 노력하긴 했지만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전략이나 전술, 정치적 사안 처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몫이었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이에야스도 별다른 위협은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가 반역을 꾀한다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거나 도울 만한 인물들은 이 시점에서 죄다 처형되거나, 자기 목숨 지키기도 급급한 판이었다.

시마즈 가와 마에다 가의 후원으로 유배지에서도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하나, 풍랑으로 인해 잠시 하치죠지마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 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죠지마의 대관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또 밥을 더 달라고 해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일화, 뜸을 만들어 잡곡과 바꿔 먹으며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일화 등, 그가 불우하고 궁핍하게 일생을 보냈다는 안습전설도 있다. 다만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그를, 게다가 이미 살려주기로 결정한 판에 굳이 잔혹하게 대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온정을 베푸는 게 민심을 사는 데도 도움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안습전설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은 생활을 한 쪽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 유배된 뒤 50년이나 장수한 것이나 가족이 대대로 살아남아 가문을 이은 걸 봐도 대우는 의외로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유배지에서 50여 년을 보내게 되고, 결국 본토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55년, 83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여담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다이묘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인물이다.

히데이에가 하치죠지마에서 낚시를 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로 해변에는 1997년에 오카야마현에서, 오카야마성 개성 400주년[12]을 맞아 히데이에와 부인 고히메의 석상을 세웠다. 우키타 가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섬에서 평화롭게 가문을 이어 왔는데, 근대에 도쿄로 나왔다가 최근 다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섬으로 귀향했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멸문되어 버린 여러 가문들 중에서 살아남아 평온하게 혈통을 보전하는 데 성공한 점에서는 승리자일지도.

두 석상은 옛 영토인 비젠과, 옛 거성(居城)인 오카야마성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 해변은 하치죠지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듯.

3 평가

어린 나이에 가독을 승계하고, 당대의 절대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신뢰와 지원을 받았던 축복받은 전반기와, 그와는 반대로 유배지에서 50여 년간이나 곤궁한 생활을 하고 여생을 마친 중후반기. 말 그대로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격이었다.

팬들 사이의 애칭은 도련님(坊ちゃん)...이었으나 2ch의 한 글 때문에 현재 일본에서는 '수영의 달인'이라는 조크에 가까운 이미지가 정착돼 있다.

발단은 2ch의 한 스레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역사를 잘 모르는 어떤 유저가 '히데이에가 오사카 공방전에 참전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일본에서는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주력을 담당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하치죠시마에 유배되었다는 것은 국사교과서에서도 배우는 기본 상식에 가까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럼 하치죠시마에서 헤엄쳐서 오라는 거냐w' 식으로 그 유저가 비웃음을 받는 흐름이 조성됐다.

그런데 갑자기 한 유저가 매우 진지하게 우키타 비젠 츄나곤 하치로 히데이에, 도요토미 가의 위기를 듣고 하치죠시마에서 헤 엄 쳐 서 왔 다!!라는 위엄 넘치는 글을 작성했고 이것이 히데이에의 캐릭터와 이상하게 들어맞아서[13] 스레를 읽고 있던 유저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그 글을 퍼날랐고, 일종의 밈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 덕분에 나무위키와 흡사한 유희적 성격인 니코니코 대백과의 우키타 히데이에 문서는 모든 단락이 ~로부터 헤엄쳐서 왔다!!라고 작성돼 있다. '개요로부터 헤엄쳐서 왔다!!' '관련 동영상으로부터 헤엄쳐서 왔다!!' 하는 식(...) 이 영상이 그 이미지를 말해 준다.

4 창작물

임진록 2에선 도끼를 들고 싸운다. 때문에 한국 위키백과 내용에 무기가 도끼로 되어있다. 흠좀무. 2에서는 사실상 조선 침공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는 사령관급의 위치로 그려지고, 심지어는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의 다툼도 말리는 등의 스토리 비중이 많은 편인데 반해, 차기작인 조선의 반격에서의 스토리 비중은... 공기다...사실 이시다랑 성우가 같은 게 결점

창조pk의 세키가하라 이벤트 합전에선 조건을 만족시켜야 서군편에 서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제외하고 가장 군사수가 많은 아군이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능력자체가 좋지 못하지만 부관으로 아케이시가 딸려있어서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다, (애초에 해당 이벤트 합전에서 요시츠구 외에는 죄다 B급이다.. 반면에 도쿠가와 측은 이이 나오마사, 토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혼다 타다카즈...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s~a급이 포진해 있어서 실력보다는 운에 거는 싸움..)

또한 서군 멤버 중에 유일하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의심하지 않는 도련님이기도 하다..(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게임 상에서 도요토미가와 이시다 미츠나리에 원한을 품고 있다)

daum_net_20150515_120226.jpg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능력치는... 말을 말자. 전형적인 C급 무장이다. 창조에서 B급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향되었다. 일러스트까지 꽃미남 스타일로 바뀐 건 덤.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4편까지 클론 무장 신세.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만큼 추가 참전 투표 10위는 되니까 못 나올 법은 없다. 서군에 추가된다면 그 말고는 가토와도 엮을 수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모리가와 엮을 수 있는 안코쿠지 에케이 뿐이다.

지휘봉의 행방에서도 등장한다. 비주얼 신장 168cm, 비주얼 연령 21세, 취미는 독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우키타 가의 당주. 상당히 프라이드가 높고 제멋대로 구는 성향이 있어 초반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다루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한 번 미츠나리를 인정한 뒤로는 그를 신뢰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누구보다 분노한 인물. 사실 지금의 성격은 어린 나이에 우키타 가를 이었기 때문에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의 발로.

명실공히 서군의 주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중앙 전선을 유지. 그러나 잇다른 배신으로 서군이 무너지면서 가신 아카시 테루즈미에 의해 정신을 잃고 강제로 전장에서 이탈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비젠 57만 석을 아까워하지 않고 반납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도쿠가와를 따르도록 다른 다이묘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3년 후 하치죠시마에 은거.

태합입지전5 에서는 통솔이 79에 전투쪽에 치우친듯한 능력치이다. 군학이 1레벨인게 실로 안습하지만 족경은 그나마 3레벨이고 기마, 철포도 2레벨이라 그냥저냥 써먹을 수 있다. 의외로 건축도 2레벨. 문제는 등장하는 시나리오 2개에서 모두 다이묘인데, 1582년은 노부나가->히데요시 천하이며, 1598년은 세키가하라에서 서군가담해서 승리하면 히데요리 천하가 되는지라 천하를 잡기 위해선 심히 귀찮아진다는 것. 사실 이건 다테 마사무네도 마찬가지이지만.

센고쿠히메에서는 여체화되서 등장. 성실하고 착한 성격에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2ch의 드립을 그대로 수용해서 어째서인지 수영만큼은 엄청 잘한다. 심지어 최종스킬이 '헤엄쳐서 등장' 이며 이로인해 난데없이 수상전을 잘하는 캐릭이 되었다. 게임 특성상 수상전을 할일은 별로 없지만.

징비록 / 김리우 - 명색이 바지사장총대장이긴 한데 가토고니시간의 사이에서 맨날 중재만 하다가 열받을대로 받은 상태. 어찌나 열을 받았던지 영지를 걸고 싸움붙던지아님 조용히 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할 정도. 덤으로 경주성 전투에서는 비격진천뢰에 피격당해, 행주대첩에서는 변이중화차에게 저격당해 중상까지 입는 등 수난이 상당하다.

205749_78491_5418.jpg
삭발을 한후 촌마게 가발을 쓰고 연기 했다.[14]

DC인사이드 징비록 갤러리에서는 일본 개그 3총사중 하나로 웃기다로 불리우고 있다.

임진왜란 1592 에서는 한동호가 맡았다.
  1. '우기다' '우키다' 따위로도 알려져 있지만, 현행 표기법도 그렇고 실제 발음도 그렇고 우키타가 맞다.
  2. 우키타 가문도 백제계 도래인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 중 하나인데, 선조가 일본에 들고 온 깃발이라고 한다.
  3. 의붓형 미우라 도쥬마루는 나오이에의 친아들이 아니다.
  4. 아버지 나오이에는 평생을 모략과 암살, 음모로 점철한 인물.
  5. 물론 비젠에 대한 영향력 등 복합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면 딱 욕먹을 일이기도 하고..
  6. 어릴 때부터 직접 가까이에 두고 엄청나게 귀여워했다고 한다.
  7. 1만 7천명. 1위는 동군의 이에야스로, 약 3만명.
  8. 세마의 역명이 여기서 유래됐다.
  9. 1차 진주성 전투의 조선군 지휘관은 김시민이었고 일본군 측의 지휘관은 호소카와 타다오키였다. 결과는 일본군 참패.
  10. 가장 신뢰받는 양자였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1.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나 떨어진 섬.
  12. 400년 전인 1597년은, 히데이에가 오카야마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한 해이다.
  13.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굉장히 강했으며, 또 범용하지만 성실한 성격이어서 주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헤엄쳐 온다는 우스꽝스러운 글의 내용이 의외로 그럴싸하게 들릴수 있기는 있기 때문(...)
  14. 극중 일본계 인물 중 비중있게 나오는 출연자 대부분이 삭발을 한후 촌마게(일본식 상투) 가발을 썼다. 단, 풍신수길역은 삭발없이 가발을 써서 단독샷에서 가짜티가 많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