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魏洪
(?~888년)[1]
1 개요
통일신라 말기의 왕족으로 성은 김씨, 경문왕의 동생이자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의 숙부다.
'각간 위홍'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간(=이벌찬)은 관등이다. 신라 17관등 중 1품. 사후에는 대각간으로 추숭되었다.
2 생애
초기의 생애는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고, 헌강왕 때 최고위 계급 상대등에 올랐다.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그의 위치상 진성여왕 시대까지 실질적인 권력자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천년 신라를 완전히 몰락시킨 책임자.
조카 진성여왕 치세에는 그녀의 총애를 받아서 그녀와 근친상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근친혼은 비교적 흔했으며, 특히 신라는 골품제의 특성상 근친혼을 장려하였다. 예를 들자면 김유신 또한 자기 조카와 결혼하였고, 김춘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5촌 관계다. 고려 초기에도 근친혼은 계속된다. 진성여왕과 위홍의 근친상간이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죽고 나서는 진성여왕에 의해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업적으로는 2년(서기 888년) 왕이 각간 위홍(魏洪)에게 명하여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그 책 이름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이 있었으면 고대 한국어 연구에 큰 기여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3 창작물
후삼국시대를 다루는 매체에서 위홍이 진성여왕과 놀아나는 장면은 난세 후삼국시대를 여는 왕조 말기의 프롤로그격으로 주로 등장한다. 이 정도로 막장이었다 정도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김주영이 연기했다. 노현희가 연기한 진성여왕과 불같은 로맨스(한편으론 오글거리는)를 연출한다. 극중에선 그저 평범하게 살긴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위홍에 대한 사랑은 거의 순애보급이다. 그래도 아내 딸린 숙부와 젊은 조카 간의 사랑은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역시 문제가 많았는지(...) 위홍의 아내가 그것을 두 눈 뻔히 뜨고 다 지켜보면서 분노보다 하늘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에 떨 정도.
그러다 20년 만에 자신이 죽이려 했던 궁예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눈앞에 나타났고, 그래도 서라벌 정계의 큰손답게 의연하게 그를 맞이한다. 궁예를 그간 계속 찾아 헤맸다는데 맨 처음에는 죽이기 위해서였지만 두 번째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왕위를 잇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무슨 병주고 약주는 소리인지 어이없어 하는 궁예에게 하는 다음 대사가 극중 위홍의 캐릭터 설정을 한 눈에 보여준다.
"남아 있는 손이 없느니라. 네 아버님이신 경문대왕께서 가신 이후로 네 이복형들인 헌강대왕과 정강대왕마저도 후사 없이 옥좌를 버렸느니라. 오죽했으면 나이 어린 네 누이로 왕위를 이었겠느냐. 지금 내게는 우리 가문과 왕실밖에 없느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를 죽이려 했고 세인들의 욕을 얻어먹어가며 어린 임금인 조카를 취했느니라. 왕실을 잃는 것보다야 그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느니라.""허나... 이젠 나도 지쳤다. 더 이상 나라를 지켜줄 왕손도 없느니... 아무도 없어. 세상의 온갖 오물은 내가 다 뒤집어쓴 채 우리의 가문은 서서히 시들어 가고 문은 점점 닫혀지고 있는 게야."
제딴에는 가문을 지킨다고 그랬다는 자기합리화였는데, 물론 이에 대한 궁예의 반응은 "개소리 집어쳐! 무슨 왕실을 지킨다는거야" 결국 '욕심'. 궁예가 그래도 한때는 숙부라고 '출가하여 절에 들어오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나 당연히 그는 거부했다. 그런데 궁예가 말했던 '마지막 기회'가 정말 마지막이 된 것이, 바로 그 화 마지막 부분에 위홍은 복상사라는 심히 아스트랄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 ↑ 형인 경문왕이 875년에 승하했을 때 나이가 30세였는데 이로 보아 그의 나이는 많아 봤자 40대 초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