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48대 경문왕 김응렴 | ← | 49대 헌강왕 김정 | → | 50대 정강왕 김황 |
시호 | 헌강왕(憲康王) | |
성 | 김(金) | |
휘 | 정(晸) | |
생몰년도 | 음력 | ? [1] ~ 886년 7월 5일 (23세 ~ 26세) |
재위기간 | 음력 | 875년 7월 9일 ~ 886년 7월 5일 (11년) |
1 개요
신라의 제49대 왕. 본격 게으른 천재. 휘는 정(晸). 경문왕의 장자, 정강왕의 형, 진성여왕의 오빠로 3남매 왕위계승의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자녀로는 서자 요가 후에 효공왕이 되고, 딸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신덕왕의 왕후가 되고, 하나는 경순왕의 어머니가 된다.
헌안왕의 장녀이자 경문왕의 첫 왕비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혼인한 것은 860년 9월이고 당나라에서 경문왕을 책봉할 때 원자의 존재를 알고 원자에게 비단 40필, 옷 1벌, 은그릇 1개를 내린 것이 865년 4월이므로 헌강왕은 861년에서 864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독서를 좋아하여 한 번 눈으로 보면 모두 외웠다고 한다. 국학과 불교를 통해 나라의 안정을 이룩하려 하였다.
1.1 안정된 나라
삼국사기 헌강왕 대에 따르면..
어느날 왕은 월상루에 올라가 민가를 바라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묻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연기가 나지 않는)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민공은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임금의 어진 덕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즐거워하며 "이는 여러 신하들의 도움 때문이지, 짐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
이거 아무리 봐도 암군이랑 아첨하는 신하의 대화인데요
뭐? 짚이랑 나무가 없다고? 기와랑 숯을 쓰면 되잖아
이 숯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속출한다. 본문의 마리 앙투아네트 드립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민간이 사치했다거나, 보편적인 해석인 신라 귀족들의 사치, 숯의 사용을 통한 공기 청정을 고려한 조상들의 지혜, 심지어 지나친 숯을 만들기 위한 벌목에 따른 산림 파괴가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상당히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위의 숯이나 기와에 대한 비슷한 묘사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데, 서라벌의 영화로움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그 구절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도성인 경주 일대, 즉 귀족들의 것으로만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요절. 일길찬 김신홍 등의 반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헌강왕이 사망하고 불과 5년 후에 신라에는 지방의 세금이 오지 않기 시작해서 곤공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미 신라의 치세가 말기로 달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헌강왕 시기의 저 기록은 역사적 기록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는 증거로도 종종 인용된다.
그리고 처용가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사기에는 동쪽에서 누군지 모르는 4명을 만나서 이들이 춤을 추었는데, 산과 호수의 정령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처용 전설의 원형으로 보여진다. 동쪽이란 말을 통해 울산 지역에서 무역을 하던 아라비아 상인으로 판단, 처용 서역인 설도 존재한다. 이를 보면 신라시대 국제교역은 활발했던 것 같다.
임용한의 대중역사서 <한국고대전쟁사>에서는 헌강왕이 아라비아 상인세력과 교역협정을 맺으면서 돈이 들어와 도성 경주 일대의 경제상황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이 헌강왕 대의 잠깐의 번영을 설명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1.2 기타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포석정 남산의 신령에게 어무산신춤(무상심춤), 금강령의 북악 귀신에게 옥도금을 배우고, 개운포에 나가서 처용을 만나는 등.. 춤을 여럿 배운 것 같다. # 본격 댄싱킹 이런 여러 면모로 도리어 사치와 향략을 즐긴 암군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냥 게으른 천재라는 평가가 가장 적절한 평가일 듯하다. 여하간 신라에서 사실상 마지막으로 왕답게 살았던 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왕의 재위기에 바로 신라 말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는 인물인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에서 출생했다.(877년)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최치원이 헌강왕 치세에 귀국해서 자신이 중국에서 썼던 계원필경을 비롯한 여러 책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헌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위홍을 상대등에, 예겸을 시중으로 삼고 죄수들을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다
二年秋七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三年春一月 태조가 송악군에서 태어나다
四年夏四月 당희종이 헌강왕을 책봉하다
四年秋七月 황소의 난으로 견당사 파견을 중지하다
四年秋八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五年春二月 국학에 행차하다
五年春三月 왕이 순행하다
五年夏六月 일길찬 신홍이 반역하다 목이 베이다
五年冬十月 왕이 준례문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다
五年冬十一月 왕이 혈성의 들에서 사냥하다
六年春二月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다
六年 이찬 민공을 시중으로 삼다
六年秋八月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올리다
六年秋九月九日 월상루에서 왕과 시중 민공이 태평성세를 논하다
七年春三月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다
八年夏四月 일본국 사신이 방물을 진상하다
八年冬十二月 고미현의 여자가 남자 아이 셋을 낳다
九年春二月 삼랑사에 행차하다
十一年春二月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오다
十一年春三月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오다
十一年冬十月一日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十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진압한 것을 축하하다
十二年 북진에서 적국인이 걸어 놓고 간 나무조각을 바치다
十二年夏六月 왕이 병이 들자 죄수를 사면하다
- ↑ 추정 년도는 861년 ~ 864년사이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