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역대 미국 대통령
26대27대28대
시어도어 루스벨트윌리엄 하워드 태프트토머스 우드로 윌슨
공식 초상화
풀네임William Howard Taft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57년 9월 15일 ~ 1930년 3월 8일
재임기간[[ 1909년]] 3월 4일 ~ 1913년 3월 4일
서명
18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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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크다.그런거아냐 스모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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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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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 in the hole! 실은 그가 던지는 것은 야구공.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시구를 한 대통령이다 미국이라고 다를줄 알았지?.[1] 그리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가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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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3월 3일. 사망 5일 전. 업무가 너무 고되서 그런지 휠체어 밀어주는 직원 눈초리가 심상치않다 더럽게 무거우시네

"백악관은 세계에서 제일 고독한 장소다."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쓴 편지. 물론 현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부터가 인간말종이었는데 뭘.

1 소개

William Howard Taft. 1857년 9월 15일 ~ 1930년 3월 8일(대통령 재임 : 1909년 ~ 1913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한국인이 미국 민주당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예일대를 2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신시내티 로스쿨을 다녔는데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오하이오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대단한 공부벌레였던 듯.

이후 오하이오주에서 연방판사로 일하고 1900년 에스파냐로부터 얻은 필리핀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4년간 필리핀에서 일했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 1904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육군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보좌관으로 뛰었다.

1905년에는 루스벨트의 특사로 훗날 총리가 되는 일본가쓰라 다로와 밀약을 맺는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미국이 묵인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묵인한다는 밀약을 맺었다. 요게 바로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이 밀약이 우리에게 초래한 결과? 바로 그 유명한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과 나아가 경술국치이다. 여담으로 이 둘의 재임기간은 겹친다. 대략 1909년 3월부터 1911년 8월까지로 그들의 재임기간에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정말 돋네요

어쨌든 루스벨트의 참모로 중용되면서 그의 신임을 받았고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히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지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고 그 결과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미국 제2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써는 루스벨트 정권의 방침을 계승했지만 이른바 '달러 외교'라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한 무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적인 외교를 목표로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강대국들이 중국을 잠식해 가는 걸 억제하면서 강대국 권리의 평등한 분배를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연히 제국주의에 혈안이 된 강대국들이 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중앙아메리카에서도 유럽 열강의 자본을 배제하여 중앙아메리카의 개발을 추진, 정세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력 개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오히려 중앙아메리카의 정세는 불안해졌다.

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능동적이고 패기 있던 루스벨트와는 정 반대로 몇몇 실력 있는 상원의원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대학 동문을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게 마음에 안 든 루스벨트는 측근을 보내 장관을 교체하라고 말했지만 태프트는 반대로 그 측근을 경질시켜 버렸다. 근데 당시 공화당 내부에는 루스벨트의 추종자가 적지 않아서 루스벨트와 다른 노선을 걷는 태프트의 정책에 반대를 일삼아 계속 태클을 걸어댔다. 이걸 보면 태프트가 열받는 것은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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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루스벨트와 태프트를 풍자한 만평불쌍한 루즈벨트 저 태프트가 위로 올라가있다니

어쨌든 이에 열받은 루스벨트는 '저 친구 대통령 시키느니 내가 다시 한번 더 뛸래'라며 다시 한번 대통령에 출마했고 태프트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태프트가 루스벨트를 누르고 후보 지명을 받았는데 루스벨트는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진보당을 차려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 결과 공화당의 표는 분산되었고[2]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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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후. 아...망했어요

윌슨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준 후에는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921년 워렌 하딩에 의해 연방대법원장이 되어서 9년간 활동하고 사임하였다.[3] 이로써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행정부 최고 수반과 사법부 최고 수반을 모두 지낸 인물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써의 업적은 그다지 별볼일 없었지만 연방대법원장으로써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고.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법관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던 듯. 본인도 대통령보단 연방대법원장이 되는게 꿈이었다고 이야기 했다. (태프트의 부인은 그가 대통령이 되길 원했고, 그걸 따랐다고 한다. 공처가? 태프트는 애시당초부터 대통령보다는 연방대법원장 자리를 더 간절히 바랬다고 한다.) 루이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필릭스 프랑크푸르터[4]에게 저렇게 대법원장 노릇 잘 하는 사람이 왜 대통령 할때는 그 모양이었을까 하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5]누구 생각난다. 대통령 은퇴 후 활동은 달랐지만

대통령 자리에 있었을 적에 찰스 에반즈 휴즈를 대법관에 임명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면 대법원장으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가 바꿨다. 이유는 47세 밖에 안 된 휴즈가 연방대법원장으로 올라가면 오랫동안 있을테니 자긴 대법원장 자리엔 못 앉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65세의 대법관이었던 에드워드 더글라스 화이트를 대신 임명했다. 화이트는 다행히도(?) 적절한 시기에 죽어주어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After White died on schedule"이라는 표현을 썼다. ㅋㅋㅋㅋㅋ) 하딩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9년간 자신이 그렇게 바랬던 꿈의 직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태프트의 욕심 때문에 대법원장에 못 올라갔던 휴즈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서 1930년에 대법원장으로 승진해서 11년간 지냈으니 메데타시 메데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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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연방대법원장 취임 기념 단체사진.

연방대법원장으로서의 태프트는 뛰어났다고 여겨졌지만, 태프트 법원도 흑역사가 하나 있는데, 버지니아 주민들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적장애자들을 강제불임시키는 버지니아 주 법을 합헌이라 판결한 Buck v Bell 사건이다. 영향력이 큰 판례를 많이 만들어내 위대한 대법관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과[6] 태프트 외 여섯 대법관의 지지, 즉 8대 1로 합헌판결이 났다.[7] ㅎㄷㄷ 유일하게 반대를 한 대법관은 피어스 버틀러 대법관. 근데 이것도 반대의견을 쓰지 않고 반대표만 던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버틀러 대법관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반대표를 던진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는 듯 하다. 1920년대엔 우생학이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우생학이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는 21세기의 관점에서는 흑역사이다. 논란이 많았던 판결이지만, 연방대법원은 2015년 7월 기준으로 Buck v Bell 판결을 뒤집지 않은 상태이다.

미국에서는 그저 '제일 뚱뚱한 대통령' 정도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자는 미국 역사상 최고로 인기 많은 대통령 중 하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이고 후임자 역시 업적이 있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우드로 윌슨이다보니 그 둘 사이에 끼여서 많이 존재감이 없는 안습한 인물.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카츠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인 만큼 좋게만 볼 수는 없는 게 사실. 대통령으로써도 시원찮은 인물이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나름대로 혁신주의 운동을 이어 나갔지만 루스벨트와 윌슨의 그늘에 가려서 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대법원장으로서 내린 판결은 되려 루스벨트나 윌슨보다 진보적인 성격을 띄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2 본격 비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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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아름다운 태프트의 전용 욕조. 후술하겠지만 평범한 체형의 성인 3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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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밑에 깔린 소가 힘들어 보인다. 야, 저 소는 무슨 죄냐 검은소가 누렁소보다 일을 잘하는 것을 증명했다카더라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고로 뚱뚱한 인물로 유명하다. 최고로 몸무게가 나갔을 때는 175kg이나 나갔다고.[8] 그래도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120kg대나 되었는데 대통령이 되면서 백악관에서 50kg나 불어났다고 한다. 그 당시에 붙은 별명이 "빅 빌 태프트(Big Bill Taft)." 친구였던 루즈벨트가 활동적이고 운동을 즐겨 근육질을 가진 것과 대조된다.[9] 사실 태프트가 이렇게 비만이 된 이유로 아버지의 책임도 큰데, 태프트의 아버지는 굉장히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행위 자체를 천박하다고 여겨 싫어했다. 그때문에 아들 태프트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안에 틀어박혀 하라는 공부만 하고 먹기만 하다보니 저절로 살이 쪄 비만이 되고 말았다.몸이 저 지경이 되었는데 예일대 차석이라도 해줘야지...

그의 비대한 체중은 지금도 미국에서 유머의 소재로 쓰이곤 하며 체중과 관련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 태프트가 필리핀에서 식민지 조사를 할 때 당시 국방장관 엘리후 루트에게 "하루 종일 걷다가 다행히 40km은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는데, 루트의 답장은 "그래, 그 말은 멀쩡하오?" 위의 사진을 보면 전혀 멀쩡하지 않다
  • 마찬가지로 필리핀 여행 도중 체스터 니미츠가 함장으로 있던 구축함 디케이터에 탑승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해군 표준보급품 의자에 앉을 수가 없어서 니미츠는 결국 안락의자를 2개 사온 다음 목수를 시켜 손잡이를 제거하고 하나로 합처 더블사이즈 의자로 만들어 제공했다고 한다.
  • 목욕을 하다가 욕조에 몸이 끼는 바람에 간신히 구조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의 체구에 맞춘 크고 아름다운 욕조가 특별히 설치되었다. 성인 남성 3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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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나이스샷
  • 골프를 무척 좋아했는데 비대한 뱃살 탓에 허리를 굽힐 수 없어서 페어웨이에서도 골프공을 티에 올려놓고 칠 정도였다고.
  • 보다 못한 영부인이 다이어트하라고 바가지를 긁었지만 계속 쳐묵쳐묵. 하루는 간식을 먹고 싶어서 몰래 백악관을 빠져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먹다 남은 음식을 짱박아놓기도 했다. 이쯤 되면 식탐 정도가 아니라 가히 글자 그대로 식신이잖아.
  • 이런 자학개그를 한 적도 있다. "얼마 전 전차를 타고 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그 자리에 숙녀 셋이 앉더군요."
  • 하루는 동생과 함께 극장에 갔는데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러스(태프트의 동생). 이 극장에 불이 나면 난 덩치 때문에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내 몸에 불이 붙고 말 거야."
  • 매사추세츠 베벌리 만에서 수영을 했는데, '면적이 넓은' 그가 수영하자 지역 주민들이 수영을 하지 못하고 물 밖에 나오거나 아예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태프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가진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이 병원을 갔다. 간호사가 소년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그거 계속하면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단다"라고 말하자 소년은 그 버릇을 고쳤다. 이후 그 소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들어온 태프트를 만났는데 대뜸 그의 비대한 배를 보더니 "아저씨는 손톱을 물어뜯는군요!"라고 외쳤다.
  • 절친한 친구이자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촌시 디퓨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대통령을 만나자 태프트의 비대한 배를 만지면서 "이 배 안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이름을 뭐라 할 건가?"라고 묻자 태프트는 "음, 아들이면 윌리엄(자신의 이름)이라고 짓고 딸이면 시어도라(전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여성형 이름)라고 지을 거야. 그런데 이게 그냥 뱃속의 가스라면 촌시라고 부를 걸세."라고 받아쳐 데꿀멍하게 만들었다. 비대한 이미지 때문에 둔할 것 같지만 아주 재치가 없지는 않았던 듯. 이 글을 보는 위키러가 자신이 비만이라면 주변에서 저런 질문을 할 때 써 먹어보자.
  • 먹성과 덩치에 어울리게(?) 식사 후에는 항상 졸아서 보좌관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영부인이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한 의원은 "대통령께서는 제가 정치 경험을 통틀어 완전히 잠재운 최대의 청중(the largest audience)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
  • 고위관료들과 오찬을 가지던 중 축음기로 음악을 틀라고 요구해 놓고 첫 곡이 끝나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깨서 두 번째 곡을 요청하고는 또 잤다. 당시 동석한 재무장관 맥베이가 이건 아니다 싶어 활기찬 행진곡을 틀게 해 놓고 "죽은 사람 아니면 누구라도 깨겠지요."라고 장담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이를 본 맥베이는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게 틀림없네요." 이런 잠탱이가 어떻게 예일대 차석을 차지했는지 진실은 저 너머에.
  • 백악관에서 가족 만찬을 하던 도중 막내아들인 찰리가 부친의 정책에 반대하는 민감한 발언을 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남편 눈치를 보던 영부인이 막내를 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묻자 태프트는 "저 아이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요."라고 허허 웃으며 넘겼다. 가히 덩치에 어울리는 관대함.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처음에는 친밀했지만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1919년 루스벨트가 죽자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그날 비가 왔는데도 루스벨트가 안장되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묘를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뚱뚱했다는 것, 행정부와 사법부의 최고 수반을 모두 지냈다는 것 외에 그가 세운 사소한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지금까지의 미국 대통령 중 마지막으로 수염을 기른 대통령[10]이다. 이후의 미국 대통령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태프트 이후로 수염을 기른 인물이 없다.정말 쓸데없는걸로 기록이 남았다 안습.
  1. 한국프로야구도 최초의 시구자가 대통령인 전두환 대통령이다.
  2. 참고로 이 때 선거에서 진보당은 공화당에 대해서는 완승을 거두었다.
  3. 사실 태프트가 어떻게 연방대법원장에서 물러났는지 여러 기록이 있다. 어떤쪽에서는 은퇴했다고 하고, 또 어떤쪽에서는 사임했다고 하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미국 연방대법관 직은 종신직이라 은퇴하고 싶으면 사임해야한다.그게 그거
  4. 1939년 1월 20일에 FDR의 지명을 받고 취임하였다. 브랜다이스는 1939년 2월 13일에 은퇴했기 때문에 짧은 기간동안 동료였던 것.
  5. 원문: "It is difficult for me to understand why a man who is so good a Chief Justice...could have been so bad as President."
  6. Buck v Bell 사건의 다수의견을 작성하였다. 다수에 있었던 태프트가 집필자를 홈즈로 지정한 것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세한 건 미국의 연방대법원 항목 참조.
  7. 다수의견엔 "Three generations of imbeciles are enough."라는 흠좀무한 문장도 있다.
  8. 태프트의 키는 182cm. 182cm 기준 표준체중은 73.7kg. 그리고 182cm에 175kg면 BMI 52.83(!!!)이므로. 미국의 고도비만 기준점은 BMI 40이니 그는 고도비만(...)
  9. 다만 운동 중에서 복싱을 너무 즐기다 눈이 찢어지고 한쪽 눈은 시력을 아예 상실했다.
  10. 참고로 링컨 이전에는 수염 기른 대통령이 없었다가 링컨 이후 앤드루 존슨과 메킨리를 제외하면 거의 연속으로 수염을 길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