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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沃祐
1914년 12월 04일 - 1984년 03월 15일
1914년 전라남도 무안군 비금면(현재는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무안군 을(도서지역으로 현재의 신안군)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하여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안군 을 선거구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시절에는 구파 소속이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에서 의원 내각제에 따라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나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후보로 무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배길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한일기본조약 반대 발언 때문에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배길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현재의 동대문구 동부와 중랑구) 지역구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강상욱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해 11월 괴한들에게 폭행당하기도 하였는데 정치 테러로 추정된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송원영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본인은 민주공화당 강상욱 후보와 신민당 송원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목포시-무안군-신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영철 후보와 신민당 임종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이 설치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 1번 후보로 당선되었다. 제11대 국회 임기 중인 198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