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 데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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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유프 데어발 (Jupp Derwall)
생년월일1927년 4월 10일 - 2007년 6월 26일
국적독일
포지션스트라이커
소속팀알레마니아 아헨 (1949 - 1953)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53 - 1959)
빌 비엔나 (1959 - 1960)
FC 샤프하우젠 (1960 - 1962)
지도자빌 비엔나 (1959 - 1960, 선수 겸 감독)
FC 샤프하우젠 (1960 - 1962, 선수 겸 감독)
포르투나 뒤셀도르프(1962 - 1963)
FC 자르브뤼켄 (1965)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1970 - 1978, 수석코치)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1978 - 1984)
갈라타사라이 (1984 - 1987)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헬무트 쇤
(1964~1978)
유프 데어발
(1978~1984)
프란츠 베켄바우어
(1984~1990)


독일 출신 축구 감독으로 1978년부터 1984년까지 6년동안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유로 80 우승과 82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명장이다.

1 선수 시절

1938년 스트라이커 겸 미드필더로 축구를 시작한 유프 데어발은 당시 5개의 지역리그로 나뉘어진 독일 리그에서 1949년 부터 1953년 알레마니아 아헨, 1953년 부터 1959년까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활동했다. 아헨 시절에는 1953년 DFB 포칼 결승전에 진출했고 득점까지 했으나 끝네 1:2로 패배하여 준우승을 머물렀다. 아헨에서는 4년동안 활동하며 132경기에 51골을 넣는 스코어러이기도 했다. 뒤셀로르프 시절에도 꾸준히 활동하여 110경기에 45골을 기록하며 두 차례 DFB 포칼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2번 모두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1954년에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 되기는 하였으나 1954 스위스 월드컵 엔트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2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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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59년 스위스의 비엘-비엔느로 팀을 옮겨 선수 겸 감독 생활을 하였는데 스위스에서도 1960 스위스 슈퍼리그 준우승을 맛보게 된다. 1960년에는 같은 스위스 리그인 FC 샤프하우젠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였고 1962년에는 독일로 복귀하여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감독, 1965년에는 FC 자르브뤼켄 감독을 역임했던 유프 데어발은 1970년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헬무트 쇤의 부름을 받아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임명된다.

그리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감독과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울리 회네스, 오트마르 히츠펠트 같은 선수들을 지도 하며 독일 올림픽 대표를 8강까지 이끌었다.데어발은 헬무트 쇤을 1978년 월드컵 까지 보좌했고 헬무트 쇤이 78월드컵 이후로 은퇴를 선언하자 같이 헬무트 쇤을 보좌 하기도 했던 에리히 리베크와 감독직 물망에 올랐다. 독일 축구협회는 유프 데어발을 선택하여 헬무트 쇤의 후임감독으로 유프 데어발이 임명되었다.

감독으로 임명된 직후 참가한 유로 80 지역예서는 초반 두경기 몰타터키를 상대로 원정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불안하게 출발하였지만 그 이후 웨일스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각각 2-0, 5-1로 승리를 거뒀고 터키를 홈에서 2-0, 몰타를 홈에서 8-0를 기록하며 조 1위로 본선진출에 성공했다. 본선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네덜란드, 그리스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체코,네덜란드를 상대로 1-0, 3-2 승리를 기록했고 그리스와 0-0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1위로 결승에 진출한다.[1] 결승전에서는 호르스트 흐루베슈를 앞세워 결승전에 오른 벨기에를 상대로 2:1승리로 유로 80우승을 차지한다.

82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오스트리아, 불가리아,알바니아, 핀란드와 같은 조에 속했으나 이 4국가를 홈과 원정에서 모두 무너뜨리며 8전 전승으로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1차 본선에서는 오스트리아, 알제리, 칠레와 같은 조에 속한다. 첫 경기 상대는 알제리. 알제리를 아주 우습게 본 유프 데어발은 "알제리를 이기지 못하면 바로 기차타고 집으로 가겠다" 라며 호언장담을 하지만 1:2 패배를 당해 개망신을 당한다. 22년 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도 어느 인물이 알제리를 우습게 보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일이 일어난다

알제리에게 패배하면 기차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약속과는 달리 패배를 한 뒤에도 졸렬하게(??)계속 스페인에 남아 대표팀을 지휘했고 칠레를 상대로 루메니게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4-1 대승, 본선에서 다시 만난 오스트리아와 접전 끝에 1-0승리를 거둬 2승 1패를 기록하지만 오스트리아와 알제리 역시 2승 1패로 3자 동률을 기록한다. 다만 골득실차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진출을 하는데 칠레를 상대로 대승이 아니었다면 본선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를일이다.

2차 본선[2]에서는 잉글랜드스페인과 같은조에 배정되었다. 잉글랜드와 0-0 스페인을 상대로 2-1승리를 거워 조 1위로 4강에 진출한다.

4강전에서는 프랑스를 상대로 1:1 무승부 후 돌입한 연장전에서 92분, 98분 연속으로 득점을 허용하여 패배가 확실시 됐으나 102분 루메니게의 득점과 108분 클라우드 피셔의 득점으로 극적으로 승부차기로 승부를 몰고간다. 승부차기에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울리 슈틸리케가 실축한걸 제외하곤 5:4로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에게 3:1로 패배하여 유프 데어발 통산 5번의 준우승을 기록한다.

그 뒤 유로 84 지역예선에서는 북아일랜드 와 80 월드컵 지역예선과 1차본선에 이어 3번 연속 만나게 된 오스트리아, 역시 유로 80에서 만난적이 있는 터키, 82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만난 알바니아와 같은조에 배정된다. 첫 경기 북아일랜드 원정에서 패배를 당하며 불안하게 시작한 유프 데어발은 알바니아 원정, 터키 원정에서 승리,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무승부(0-0) 후 홈에서 승리(3-0), 홈에서 터키를 상대로 5-1대승을 거두며 유로 84 진출을 확정짓는듯 싶었으나 홈에서 북아일랜드에게 다시 패배한다. 알바니아를 상대로 2-1승리를 거뒀으나 당시 북 아일랜드와 5승 1무 2패로 동률을 이뤘다. 다만, 이길떄는 확실히 대승을 거둔 덕에 골득실차로 본선에 진출한다.

유로 84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루마니아와 같은 조에 배정된다. 그러나 포르트갈과 무승부, 스페인과 경기에서 패배를 하며 1승 1무 1패로 조3위로 4강 진출에 실패한다. 4강 진출에 실패한 유프 데어발은 성적 부진에 책임을 느끼고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감독직을 물려준뒤 사임한다.

국가대표직에서 물러난 유프 데어발이 차기 행선지로 택한곳은 다름아닌 터키. 당시 터키의 클럽들은 국제 무대에서 큰 인상을 준 적이 없고 축구 발전에서 뒤떨어져있었으나 갈라타사라이 감독으로 부임한 유프 데어발은 곧바로 자신이 그 동안 서독 국가대표팀을 맡으면서 경험한 교육 기술방법과, 트레이닝, 전술 아이디어를 터키에 도입하여 터키 축구의 선도자가 된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시즌동안 갈라타사라이를 맡으면서 한차례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파티흐 테림과 같은 터키의 명장들을 지도하기도 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87년,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 제의나 분데스리가 클럽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6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터키내에서도 터키 축구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2000년 앙카라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뒤 노후 생활을 보낸 유프 데어발은 2007년 6월 26일 사망했다. 사망 후 갈라타사라이에서는 헌정의 의미로 내부 훈련장의 이름을 유프 데어발의 이름을 차용하여 건설했다.

3 경력

3.1 선수 시절

  • 알레마니아 아헨 (1949 - 1953)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53 - 1959)
    • DFB-Pokal 준우승 (2) : 1957, 1958

3.2 감독 시절

  • 빌 비엔나 (1959 - 1960)
    • 스위스 슈퍼리그 준우승 (1) : 1960
  • 갈라타사라이 (1984 - 1987)
  1. 유로 80은 8국가가 두 조로 나뉘었고 조 1위가 곧바로 결승진출, 조2위가 3-4위전을 치뤘다.
  2. 1982 월드컵은 24개국 1차본선과 12개국 2차본선 뒤 4강->결승으로 진행되었는데 자세한 대회진행 방법은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