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반적인 의미
- 移監 : 수감자를 다른 교도소로 옮기는 것.
2 후한 말의 인물
李堪
(? ~ 211년)
후한 말의 군벌.
194년에서 197년까지 부곡을 인솔해 장안에 들어가 동탁이 쌓아놓은 성채에 기거하면서 산조 땅의 배, 명아주 등으로 식량을 해결했으며, 무덤을 도굴해 의복을 해결했다고 한다.
마초와 조조가 적대했을 때에 함께 봉기해 동관에 쳐들어간 서량의 군벌인 관중 10장 중 한 사람으로 무제기의 기록이나 마초전 등에 이름이 보인다. 반란의 중심 인물인 마초와 한수가 계략에 걸려 사이가 벌어지자 그 기회를 틈타 조조가 총공격하면서 이 때 조조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의 부하였다가 모종강본에서는 한수 휘하의 무장인 기본팔기의 한 사람으로 마초와 한수가 조조에게 모살된 마등의 복수를 위해 거병하자 동조해 장안, 동관을 공략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오는 연의에서의 최후가 심히 안습한데, 마초와 한수가 결국 반목해 조조에게 내통할 계획을 세웠는데, 마초에게 발각되자 후선, 양흥, 마완, 양추와 함께 다섯 명이 마초와 싸웠다가 당해내지 못하자 달아났다. 결국 서량군 사이 난전이 일어나면서 이 틈을 노린 조조군의 습격이 벌어지자 이 와중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마초와 1대 1로 싸우는데, 이 때를 노려 마초를 죽이려던 우금이 마초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마초가 화살을 피해서 이감이 맞았다. 그리고 말에 떨어지면서 죽었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등장은 하나 취급은 좋지 않다.
삼국지 6에서 다른 관중 10장들은 나오는데, 후선과 함께 안 나왔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2/70/32/38. 돌진을 가지고 있다. 안습한 일화 때문인지 궁기병계 병법 숙련도도 0. 당연히 병법도 없다. 마완, 장횡과 함께 마등, 한수의 장수 중에서는 좀 드문 케이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9/67/33/36/34의 안습 능력치에 특기는 돌격, 기합 2개 뿐. 마등군은 무력돼지들도 넘쳐나는 데 이런 녀석 쓸 일은 없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58/69/33/37/45으로 무력만 조금 높은 잉여 무장이다.
삼국지 12에서는 기본팔기 중 혼자만 잘렸다가 삼국지 13에서 재등장.
창천항로에서 마초와 조조의 싸움에 마초에게 가담하면서 마초가 조조와 싸운 것에서 감사하다고 하자 무슨 소리냐면서 참가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조조군과의 싸움에서 장합에게 죽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교로 등장. 등장 컷에서 죽었다(…) 대사도 "쌍쌍바! 나오자마자 죽는 역할이냐?!!!!"
3 전한의 인물
李敢
(? ~ BC 118)
한나라의 장군. 당시의 유명한 지휘관 이광의 삼남이 된다. 낭관이었던 큰형 이당호와 대군태수였던 작은형 이호는 일찍 죽었다.
BC 121년, 이광은 낭중령의 신분으로 4천여명을 이끌고 우북평에서 출발, 박망후 장건은 1만여명을 이끌고 길을 달리해서 출격했는데, 갑자기 이광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흉노 좌현왕의 4만 군대가 이광을 포위했다.
이광의 병사들은 멘붕에 처해 모두 패닉 상태였으나, 이광은 자신의 아들 이감에게 명령하여 적에게 돌격하게 했다. 이감은 수십여기를 이끌고 수만군대에 돌진하여 적기병을 정면돌파하고 다시 돌아온 뒤에, 저놈들 별 것 아니라고 자신감있게 말해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별 것이 아니든 어쩌든 일단 싸워야 했기에, 이광은 부대를 원형으로 하여 밖을 둘러보게 하였고,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흉노병사들을 향해 활을 쏘아대었다. 이광 본인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를 쏘아대어 흉노 부장들을 쳐죽이며 분전했고, 날이 저물고 포위가 여전하자 겁에 질린 병사들도 이광의 이런 용맹한 태도를 보고 용기를 얻어 열심히 싸웠다.
다음 날, 이광이 여전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울때, 장건의 부대가 도착하여 적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너무 지쳐 추격하지 못했고, 이광의 부대는 전멸의 위기를 넘겼지만 몰골은 완전히 패잔병 꼴이었다. 장건은 행군을 지체하여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속죄금을 내어 목숨은 건졌다. 이광은 딱히 공이랄 것이 없어,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도 아무 보상도 없었다. 사기 흉노 열전에 따르면, 이광의 4천여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죽었고, 흉노는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광이 사망했을 당시, 이감은 곽거병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광이 죽자 이감은 낭중령에 임명되었는데, 이광이 죽은 탓을 위청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여 대장군인 위청을 두들겨 팼다! 신중한 위청은 짐짓 이 일을 비밀에 부쳤으나, 곽거병은 이 일을 알아버렸다. 분노한 곽거병은 친척인 위청이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사냥터에서 이감을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 그래도 한무제는 곽거병을 아꼈기에, 사람들에게는 이감이 사냥하다가 사슴뿔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이감의 딸은 태자의 중인(中人)이 되어 사랑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이감의 아들인 이우(李禹)는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이우는 이익을 탐하는 변변찮은 성격이라 이릉의 일도 있고 하여 이 때부터 이광의 집안은 기울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