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

  • 삼국지의 지명과 관계된 전투는 이릉대전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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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몰년도? ~ BC 74
이름이릉(李陵)
소경(少卿)
출생지농서군(西郡)

중국 전한(前漢) 한무제(武帝) 시기의 무장. 명장 이라고 말하기에는 실질적으로 행한 군사 작전은 오직 단 하나 뿐이었고, 이마저도 패전으로, 보여준 것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 단 한번의 작전에서의 처절함비극, 임팩트 때문에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각종 시와 비극의 소재가 되었던 인물. 한 시대에 뛰어난 무장으로 명성을 떨칠 가능성도 있었지만 인생이 더럽게 꼬이면 어떻게 될 수 있는가 보여주는 표본이 되어버렸다. 행운의 아이콘인 곽거병과는 완전히 반대의 무장. 조상인 이신, 할아버지인 이광(李廣), 작은 아버지인 이감(李敢) 그리고 이릉에게 이르기까지. 이 집안은 계속해서 지독한 불운에 시달렸다.곽거병이 이씨집안 행운을 다쳐먹었나보다

2 집안 내력

이릉의 집안 자체는 이전부터 상당히 유명한 집안이었다. 이릉의 조상은 바로 이신인데, 이신은 (秦)의 시황제가 통일 전쟁을 벌일 무렵의 지휘관으로, 초나라 정벌전 등에 종사했다. 그러나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이신이 가장 유명세를 떨친 초나라 정벌전에서 그가 대패했다는것은……

그리고 이릉의 할아버지인 이광 역시, 한문제의 시기부터 무제의 시기까지 전장을 누빈 역전의 명장으로, 그 인품과 용맹으로 인해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항목을 찾아보면 확인 할 수 있지만, 이 인물도……

이광의 맏아들인 이당호(李當戶)는 낭관이 되었는데, 한언(韓嫣)이라는 신하가 무제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그를 두들겨팼다. 한무제는 이당호가 용감하다 생각해 좋아했지만 당호는 빨리 죽고 말았다. 바로 그 이당호의 아들이 이릉(李陵)이었다.

3 한나라의 장군

젊은 시절 이릉은 조정에서 시중(侍中)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같은 시중이었던 소무(蘇武)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곽광(霍光)과 상관걸(上官桀)하고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1], 역시 이광처럼 아랫 병사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한무제는 이릉에게 이광의 기풍이 있다고 여겨, 이릉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했는데, 기도위는 기병 지휘관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이릉은 그 후에 단양(丹陽)과 초나라 지역 출신 병사 5천여명을 거느리고서, 감숙성 등에서 활쏘는 법을 가르치며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무탈하기만 할 듯한 상황이었으나……

4 구렁텅이로

4.1 위풍당당한 출정

이릉이 활동할 당시, 한나라는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이라는 전대의 위대한 지휘관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흉노에 공세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죽은 뒤의 일이다.

곽거병과 위청의 시대가 끝난 후, 한무제가 중용하던 장수는 이광리(李廣利)였다. 이광리는 서쪽의 대완(大宛) 정벌을 성공시킨 바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히 고생했고 별달리 기민한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본래부터 여동생인 이부인이 한무제의 총애를 얻어 창읍왕(昌邑王) 박(髆)을 낳아 빽으로 장수를 한 인물에 가깝다.[2]

BC 99년, 여름이던 5월에 한무제는 이광리에게 3만의 기병을 주어, 주천(酒泉)을 출발하여 흉노의 우현왕을 치게 하였다.

이때, 한무제는 이릉에게 이광리를 위해 보급을 담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릉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청을 올렸다.

"신이 거느리고 있는,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은 형(荊), 초(楚)의 용사들로서 기이한 재주를 가진 검객이어서, 힘으로는 능히 호랑이를 잡으며, 을 쏘면 명중시키니, 바라건대 스스로 한 부대를 맡을 수 있다면 난우산(蘭于山)의 남쪽에 이르러서 선우의 병사를 나뉘게 하여, 그들이 전력으로 이사장군[3]에게 향하지 않도록 하게 하여 주십시오."

즉, 자신이 흉노의 주위를 끌어 전력을 분산시켜, 이광리에 대한 압박을 덜어주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지만 무제는 기병 전력이 부족하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장차 다른 사람에게 소속되기를 싫어하는가? 나는 군사를 많이 발동하여, 너에게 줄 기병이 없다."

그러자 이릉은 기병을 쓸 일은 없고, 적은 숫자로서 많은 숫자를 격파하고자 하며, 보병 5천여명이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무제는 참 장하다고 여기면서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복파장군(伏波將軍) 노박덕(路博德)으로 하여금 이릉의 부대를 영접하여 도와주게 조치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 당시 노박덕은 남월(南越) 정벌 등에서 활약하고, 곽거병의 시대부터 싸웠던 이름난 장수였던 반면에, 이릉은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내려는 신인이었다. 애송이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박덕은 이를 쪽팔리는 일로 여겼고, 한무제에게 따로 상주하였다.

"바야흐로 가을이어서 흉노의 말은 살 쪄 있으니, 아직 그들과 더불어 싸울 수 없으므로, 바라건대 이릉을 봄까지 머물러 있게 하다가, 함께 출정하게 하여 주십시오."

자신이 후방에서 머무는게 아니라, 기다렸다 같이 나아가자는 이야기였는데, 문제는 한무제가 노박덕의 이 서한을 보고 터무니없는 오해를 해버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한무제는 이릉이 앞에서는 "적은 숫자로 대군을 박살내겠음!" 하고는, 막상 전쟁터에 나가자 겁을 먹어, 노박덕에게 부탁해서 서한을 올려,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해버린 것이다.

이에 열을 받은 한무제는 노박덕을 감숙성 쪽의 전선으로 옮기고, 이릉은 홀로 준계산(浚稽山)[4] 남쪽을 배회하면서 흉노를 감시하고 보이는것이 없으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제 이릉은 북으로 진군하면서도, 후방에는 지원군이 없어지게 되었다.

4.2 절망적인 싸움

그렇게 된 이릉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릉은 보병 5천여 명을 이끌고 30일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 준계산에 머물러 군영을 만들고 근처의 지도를 그렸고, 휘하의 기병인 진보락(陳步樂)을 한무제에게 파견하여 그 전과를 보고했고, 무제는 이에 기뻐하면서 진보락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릉은 이광리를 돕기 위해 흉노의 시선을 돌리는데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 선우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말았다. 즉, 적의 주력을 그대로 만났다는 말이었다.

당시 흉노의 전력은 무려 기병 3만. 이릉 휘하의 기병인 진보락이 한무제에게 파견되기도 했으니 한군도 기병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당초부터 한무제가 내줄 기병이 없다고 말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릉의 부대는 기병전력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기병 전력이 전혀 없이 적의 기병을 막아내기 힘들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때, 이릉은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한서 - 자치통감의 언급은, 이 당시 한나라 군의 기병 방진에 대해 몇 안되게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는 순간이다. 이릉은 적에게 포위들 당하자, 우선 큰 수레를 둘러 진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릉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가 1선에는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을 배치하고, 2선에는 궁과 노를 가진 병사를 배치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부대가 숫자가 자신들에 비해 적자, 이를 우습게 여기고 바로 진격을 하여 다가왔다. 이에 이릉은 1천개 노로 삽시간에 공격을 가해, 흉노군은 대파되었고, 이릉이 기세를 타고 역공을 가하자 순식간에 수천명이나 되는 흉노 병사가 죽고 도망을 쳤다.[5]

그러자 놀란 흉노 선우는 주변의 모든 전력을 소환했다. 그렇게 되자, 이릉의 적은 8만 흉노 기병으로 변해있었다.

그 후로부터는 끝없는 지옥의 순간이었다. 흉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이릉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막아내었다. 이릉은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조금씩 조금씩 전선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는데, 며칠이 되자 산골짜기 지역에 도착했고, 이릉은 여기서 부상자들을 점검하여 세 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에 태우고, 두 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를 끌으며. 한 군데만 다친 사람은 무기를 들고 싸우게 하였다.[6]

싸움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름은 병사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가다가, 과거 위청이 진군하던 길을 따라 계속 후퇴했고, 늪지대의 갈대밭 속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흉노는 위에서부터 바람을 따라 불을 질렀고, 이릉은 여기에 대해 맞불을 질러 대항하였다. 이릉의 부대는 조금씩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싸움은 하루에도 수십번을 이루어지고 있었다. 흉노 선우는 이릉의 공격에 한번 도망가기도 했을 정도. 이때 이릉은 흉노의 포로를 한명 잡았는데, 포로로부터 흉노 선우가 "적의 공격이 너무 심하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는데 아마 복병이 있을 듯 싶다. 후퇴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7] 흉노가 걱정하는 복병은, 이미 노박덕이 전선을 이동하여 한 명도 없는 상황. 하지만 조금만 더 싸웠다면 흉노가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벌어졌다. 이릉의 군후(軍候)였던 관감(管敢)이라는 인물이 교위에게 모욕을 받자 흉노로 도망하여, 이릉군의 상태를 낱낱히 밀고해버린것 천하의 개쌍놈

"이릉의 군사는 뒤에 구원군도 없으며, 화살도 또 소진되었고, 다만 장군의 휘하와 교위인 성안후(成安侯) 한연년(韓延年)[8] 뿐이며, 각기 800명씩 앞에서 가는데, 황색과 백색을 깃발로 쓰고 있으니, 마땅히 정예의 기병을 보내서 그들을 사격하면 바로 격파됩니다.

관감의 말에 요시 그란도시즌을 외친 선우는 총공격을 가했다. 이제 이릉의 군사는 단 하루에 50만개의 화살을 모두 소비하였고, 수레도 죄다 버렸다. 남은 병사는 이제 3천여명이었다.

4.3 어쩔 수 없는 투항

빈털이 되어가는 이릉의 군사가 어느 산골짜기로 들어갈 무렵, 흉노 선우는 이를 포위하고 돌을 골짜기로 굴려서 수많은 한나라 병사를 죽였다. 이제는 피해가 너무 크고, 적이 포위하고 있어 더 이상 진군도 불가능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밤이 되자 이릉은 편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을 따르려는 병사들을 모두 저지하면서 말했다.

"나를 따르지 마라. 장부(丈夫)가 선우를 잡을 뿐이다.

즉, 혼자서 선우를 어떻게 잡으려고 나선것. 그게 될 일도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한참 뒤에 돌아온 이릉은 크게 탄식하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졌다.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느 군리가 이릉에게 권하였다.

"장군의 위세는 흉노조차 벌벌 떨게 하였습니다. 단지 천명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임시로 흉노에 항복을 한 뒤, 훗날 다시 길을 찾아 한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착야후(浞野侯)[9]도 포로가 되었다가 훗날 도망쳐 오니, 천자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장군은 어떠하겠습니까."

이 제안을 이릉은 "장부가 죽음을 두려워 할 순 없다." 면서 거절하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뭉쳐 있으면 모두 죽을 뿐이라, 이릉은 이에 병사를 모두 해산시켜 각자 알아서 잘 숨어 적의 눈을 피하기로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두 되의 마른 식량과 한 조각의 얼음 덩어리를 가져 가게 하고는 다른 곳에서 도착해서 만나기를 기약했다. 밤중에 병사들을 깨어 작전을 시행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북을 두드려도 이미 북도 다 찢어져 울리지도 않았다.

이릉은 한연년을 비롯한 10여인과 함께 말을 타고 탈주했다. 그 뒤를 수천명이나 되는 흉노 기병이 무시무시하게 질주하여 추격해왔고, 결국 한연년도 전사하였다. 이릉은 "폐하를 뵐 면목이 없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 흉노에 항복하였다. 5천여 병사 중, 무사히 빠져나간 사람은 400여명이었다.

이때, 이광리는 한군주력을 이끌고 천산으로 진군해서, 우현왕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수급 만여급을 얻고 대승을 거두고 귀환하였다. 귀환 도중 지금의 이오현 동남쪽에 도착했을 때, 흉노선우의 대군과 부닥쳤고, 완전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조충국(趙充國) 의 활약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5 사마천, 이릉을 변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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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처음 이릉의 패배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차라리 투항하기보다는 이릉이 장렬히 전사했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막상 이릉이 죽었는지 확인해보려고 점을 쳐보고 해도 이릉이 죽었다는 점괘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나중에 듣자하니 이릉이 흉노에 항복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한무제는 엄청나게 화를 냈고, 이릉의 부하로 소식을 전했던 진보락에게 이를 추궁했다. 진보락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다. 참고로 이때 한무제는 "원군을 보내려 했으나 이릉이 스스로 거절해놓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근데 위에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후방에 멀쩡히 있던 지원군을 별것도 아닌 이유로 철군시킨건 다름아닌 무제 본인이었다. 아무래도 벌써 노망이 나신듯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며 최악의 상황에서 가능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이릉이었지만, 되려 사람들은 한무제의 분노에 편승하여 여러 대신들이 "이릉 그놈, 못된놈." "때려 잡아야 함." "벌을 주어야 함." 하고 각박한 소리만을 내뱉어 대었다. 그때, 오직 단 한명만이 이에 반발하였다.

바로 사마천(司馬遷)이었다.

"이릉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성스러웠고, 병사들과는 신의를 지켰으며, 항상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서 국가의 위급함에 종사하였는데, 그가 평소에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것이니, 국가의 선비라는 기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거사에서 한 번 불행하였으나,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존한 신하들이 그 단점을 부풀려서 매개하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이릉은 보졸 5천이 못되는 것을 들어가지고 융마들의 땅을 깊이 짓밞아서 수만 명의 군사를 억눌렀으며, 오랑캐는 죽은 자를 구하고 다친 자를 부축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활을 쏠 수 있는 백성을 다 동원하여 함께 그를 에워싸고 공격하였는데도 이리저리 싸우면서 1천 리를 돌아오다가, 화살도 다하고 길이 막혔으나 병사들은 빈 활만 당기다가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적과 죽기로 싸우고 사람의 죽음을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하여도 지나치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몸은 비록 함락되어 패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꺾어서 패배시킨 일은 족히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마땅히 한에 보답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

참고로 사마천은 이릉과 친하기는 커녕,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릉을 변호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한무제는 되려 사마천이 이광리를 까려고 이릉을 변호한다고 생각했고 홧김에 그에게 사형을 때려버렸다.

사형을 안 당하려면 속죄금을 내거나[10], 자결을 해야 했는데 사마천은 돈도 없고, 사기의 저술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마천은 결국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감내했다.[11]

그런데 또 나중에 한무제는 생각이 바뀌어서, 이릉을 구하지 못한 것과 사마천을 궁형시킨 일을 후회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상을 주고 이를 위로해주었다. 사실 이릉이 한 전투는 존 린의 A History of Combat and Culture 등에서도 매우 대단한 평가를 받은 전투이다. 까놓고 지금으로 치면 보병 부대로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기갑 부대를 상대로 엄청나게 분전한 것이다. 이릉이 흉노 선우의 사위가 되어 고위직인 우교왕이 된 것도 이해가 될 정도.[12] 그러니 생각이 있다면 후회를 할 수밖에(...) 아마 냉혹하고 폭군 같은 면모와 명군[13] 같은 면모가 공존하는 한무제답다고 할까.[14]

6 끝없는 불운

BC 97년, 한무제는 이광리에게 명령을 내려 기병 6만, 보병 7만을 거느리고 진군하도록 했고, 이에 흉노 선우가 병사 10만으로 맞서면서 양군은 10여일간 격돌하다가 별 성과 없이 서로 전투를 그만두었다. 이때, 한무제는 이릉이 염려 되어 공손오(公孫敖)[15]에게 흉노 깊숙히 들어가 이릉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공손오는 이는 실패하고, 대신 포로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산 사람을 체포하였는데, '이릉이 선우를 가르쳐서 군사들로서 한(漢)의 군사를 대비한다.' 고 말하였으니, 그러므로 신은 소득도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한번 화가 난 한무제는 이릉의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씨 집안의 명망도 땅바닥에 떨어져, 농서의 모든 사대부들은 이씨 집안을 부끄럽게 여기는 지경이 되었다. 흉노에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이릉은 분개하여, 한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이를 따져 물었다.

"나는 한을 위하여 보졸 5천여명을 이끌고 흉노 땅에서 횡행하였지만, 구원이 없던 까닭에 패배하였소. 이것이 어찌 한을 저버린 것이겠소? 왜 우리 가문을 주살하였는가!"

"한에서는 장군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릉이 아니라 이서(李緖)고!"

이릉의 깊은 빡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건 기분탓...이 아니다

사정은 이러하였다. 이서는 한의 새외도위로 있다가 흉노가 공격하자 항복한 사람이었는데, 흉노 선우는 그를 빈객으로 대접하여 항상 이릉의 윗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병법을 가르친 사람은 이서였는데, 한나라에서는 그 사정을 모르고 이릉의 집안을 결딴을 내버린것. 너무나 화가 난 이릉은 사람을 시켜서 이서를 칼로 찔러 죽였고, 흉노 선우의 어머니는 이에 화를 내었으나, 흉노 선우가 이릉을 북방에 숨겨 놓았다가 어머니가 죽자 다시 돌아오게 하여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가문까지 박살난 이릉에게 흉노 선우는 딸을 부인으로 주었고, 그를 우교왕(右校王)으로 삼았다. 졸지에 흉노의 왕이 되어버린 이릉은 선우의 옆에 있지 않고 항상 밖에 있다가, 큰 일이 있을때만 돌아와서 선우에게 몇마디 조언을 해주었다.

7 나는 이미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다.

이때, 흉노에 붙잡혀 있던 사람 중에, 과거 이릉이 알고 지내던 소무가 있었다. 소무는 바이칼호 부근에서 양을 기르면서 빈곤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릉은 소무와 잘 알고 지냄에도 불구하고, 흉노에 항복한 사실이 부끄러워 감히 그를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우가 이릉으로 하여금 소무를 데려오게 해서, 이릉은 소무가 사는 곳으로 나아가 그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소무는 이를 전부 거절하였고, 마침내는 이렇게 말하였다.

"스스로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지 오래입니다. 왕[16]께서는 반드시 이 소무를 항복시키려고 하신다면, 청컨대 오늘의 이 즐거움을 마치고 바로 앞에서 죽어서 보답하겠습니다."

이에 이릉은 감탄하고 울면서 소리쳤다.

"아! 그는 의로운 선비구나. 이 이릉과 위율(衛律)[17]의 죄는 하늘에 닿았겠구나!"

이후 이릉은 소무의 생필품을 지원하였고 나중에 한무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릉은 소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18] 소무는 피를 토하고 대성통곡하였다. 본래 한나라는 소무가 죽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정말 우연한 계기로 그의 생존이 알려지고, 마침 한나라와 흉노과 화친을 맺기도 하면서 소무의 귀환이 강하게 추진된 끝에 소무는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이릉은 소무에게 축하연을 베풀어 주면서 그를 배웅했다.

"이제 족하께서 귀환하시는데, 흉노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한실에서는 그 공로가 드러났으니, 비록 옛날의 죽백에 기록되었고, 단청에 그려진 사람이라고 한들, 어찌 자경[19]을 넘어서겠습니까? 이 이릉은 비록 나약하고 어리석지만, 한이 이 이릉의 죄를 용서에 가까웠을 만큼 관용을 해주어 그 노모를 온전하게 해주어서 나로 하여금 큰 모욕을 당하며 쌓아 두었던 뜻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 설 수 있게 해주었더라면, 거의 조가의 맹약처럼 했을 것인즉[20], 이것이 이 이릉이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릉의 집안은 몰수되고 족주되었으니, 세상에서도 아주 커다란 살육(殺戮) 이었는데, 이 이릉이 아직도 다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끝났습니다. 그대 자경으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 뿐입니다."

이리하여, 이릉은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는 소무를 몇걸음 배웅하다가 헤어졌다.

한무제 사후, 정권을 잡은 사람은 곽광(霍光)과 상관걸(上官桀)이었다. 그들은 본래 이릉과 친한 사이라, 그를 귀환시키기 위해 이릉의 친구인 임립정(任立政) 등을 보내 이릉을 귀환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임립정은 선우를 만나면서 이릉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위율도 있었고, 둘 다 흉노의 옷을 입고 있었다. 선우의 앞이라서 감히 사적인 이야기는 못하는 대신, 임립정은 환도의 고리를 어루만지면서[21] 이릉에게 눈치를 주었다.

다시 자리를 옮겨 위율, 이릉과 따로 편한 자리를 가지게 되자, 임립정은 일부러 "지금 중국에서는 대사면령을 내렸고, 주상은 어리시고, 곽광과 상관걸이 모든 일을 해먹고 있다." 라는 식으로 대놓고 말을 하며 이릉을 떠보았다. 하지만 이릉은 임립정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한마디만 짦게 하였다.

"나는 이미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소."

잠시 후 위율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임립정은 이릉을 본격적으로 설득하였다. 하지만 이릉은 거부했다. 밖에 나갔던 위율은 들어오면서 이 이야기를 들었고, 그리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소경은 현명한 사람이라 굳이 하나의 나라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습니다. 예전, 범려는 천하를 두루 유랑했고, 유여서융을 버리고 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그리 사이좋게 나누고 계셨습니까?"

결국 자리는 그런 식으로 끝장이 나버렸다. 임립정이 마지막으로 이릉에게 "그래도 돌아올 마음이 없느냐." 고 묻자 이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부는 두 번의 치욕은 받지 않는 법이오."

이릉은 이후 흉노 땅에서 20여년을 지내다가 B.C 74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8 이야깃거리

이릉이 떠나는 소무에게 남긴 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良時不再至 좋은 때는 다시 오지 않으리
離別在須臾 이별은 눈 깜짝 할 새 왔네
屏營衢路側 불안해하며 네거리 옆에 서성였고
執手野踟躕 손잡고 들판에서 주저했었네
仰視浮雲馳 하늘을 보면 뜬구름 달리고
奄忽互相踰 갑자기 서로 아득히 멀어지고 있네
風波一失所 바람에 한번 머물 곳을 잃고 나니
各在天一隅 각자 하늘가 멀리 떨어지게 되네
長當從此別 응당 오래가겠지 이 이별
且復立斯須 또 다시 이렇게 잠시 멈추어 선다
欲因晨風發 바라건데 새벽 바람 부는 것에 의지해
送子以賤軀 이 천한 몸으로 그대를 전송할 수 있었으면

이 시를 남길 당시 이릉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 비감이 정말……. 이 작품은 양나라 대의 왕자이자 학자인 소명태자의 문선에 나오는 작품이다.
워낙 처절한 삶을 산 인물이다 보니 그 비감 때문에 여러 시의 소재들이 되었다. 특히 당나라 시기의 변새시(邊塞詩)가 전한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은지라 이릉을 다룬 시들도 있다. 개중에 진도(陳陶)의 농서행(隴西行)은 내용이 다음과 같다.

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深閨夢裡人

결단코 흉노를 치고 오겠노라고, 일신의 안위를 돌봄이 없이 전쟁터로 나갔지만은,
담비 가죽과 비단 옷을 입은 오천의 병사는, 오랑캐의 땅에서 티끌로 화해버렸네.
애석하게도, 그들의 뼈는 무정하 일대에 흩어져 있건만.
머나먼 고향에서, 아내와 애인들이 그들의 귀국을 꿈꾸고 기다리고 있으려만은.

일본에서도 그 용맹과 장렬함은 유명했던듯, 일본의 군기물인 장문기(將門記)에서도 요시마사는 물을 얻은 용의 마음처럼 힘을 내고, 옛날 이릉(李陵)의 분투함을 이루었다. 라든가, 이릉(李陵)의 채찍을 들어, 바람같이 통과해 지나가고, 새같이 날아서 도착했다. 라는 표현들이 보인다.

《신당서》의 “회골전”에 따르면 키르기즈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크고 덩치가 컸으며 붉은 머리털,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검은 머리털은 거의 없었다. 그 중에서 눈동자가 검으면 반드시 이릉의 후예라고 했다." 고 나온다. 이것은 전부 붉은 머리털,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를 가진 키르기즈 사람들 속에 간간히 눈동자가 검은 사람이 있으면 이릉의 후예라 불렸다는 이야기다. 실제 이릉의 후예는 키르기즈 땅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세력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이에 따라 이신의 후손을 칭한 당나라 황실도 키르기즈를 친척으로 보았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1940년 경 예니세이 강 상류에서 이릉의 저택으로 보이는 한식궁전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직접적인 근거는 부족하다.

중국 전통음악 중에는 "이릉이 한나라를 그리다(李陵思漢, 이릉사한)" 이라 불리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은 문명 5 확장팩에서 훈족 문명 BGM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작곡가가 흉노=훈족 가설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 이광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 집안은 대대로 활쏘는 법을 가법으로 전수해 왔다.
  2. 사실 명장이던 위청도 출세는 누나 빽으로 하긴 했다.
  3. 이광리를 말함이다.
  4. 울란바토로 북쪽. 권중달 자치통감
  5. 이런 전과가 나온 결과에는 한나라가 당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탓도 있다. 사실 동아시아쪽 문명이 이전까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는데, 자기 혼자 쭉 달려서 큰 차이가 나던 문명권들을 역전하는 수준이니(...) 자세한 사항은 동아시아 항목의 역사 참조. 고구려도 2만 기병이 관구검의 소수 보병들에게 어이없게 몰살된다.
  6. 이때 이릉은 병사들이 데려온 여자들도 찾아내었다. 병사들이 군중에 여자를 데려와 그렇고 그런 식으로 쓴것. 이릉은 이들을 모두 '처리' 했다.
  7. 다만 만약 여기서 물러나면, 한나라가 흉노를 더욱 가볍게 여긴다고 부하들은 선우를 저지했다. 대신, 평지에서 한번더 싸워보고 그때도 안되면 후퇴하자고 하였다.
  8. 아버지인 한천추가 남월에서 전사하여, 성안후로 책봉되었다.
  9. 조파노(趙破奴)를 말함이다.
  10. 근데 이 속죄금이란게, 현대 한화 기준으로 천억 단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그냥 내지 말고 죽으라는 것.
  11. 사형 아니면 궁형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사형을 택하면 박수갈채를 받으며 죽고(...) 장례도 융숭히 치러줬지만 궁형을 택하면 목숨을 구걸한 찌질이로 취급해서 이후 대우가 상당히 안습했다.
  12. 자기들 군대와 싸워고 여러번 격파한 사람에게 왕이라는 직책을 줄 정도의 공훈인 것이다. 적한테도 존경받을 정도의 무공인 것.
  13. 한무제가 성군은 결코 아니다.
  14. 젊은 시절 한무제는 성격으로 보면 거의 진시황 상위호환 같은 인물로 신하들도 자기 기준으로 볼 때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15. 위청의 친구였다.
  16. 흉노의 우교왕이 된 이릉. 혹은 흉노 선우
  17. 역시 한나라 출신으로 흉노에 항복한 인물. 이릉과는 달리 항상 선우의 옆에서 머물렀다.
  18. 정말 사망한건 아니고 오보였다.
  19. 소무의 자
  20. 춘추시대 노나라와 제나라의 회맹에서, 노의 대장인 조귀가 제환공을 붙잡아 노의 땅을 돌려받은 이야기.
  21. 고리環와 돌아오라還는 발음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