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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翊
1860년 ~ 1914년
1 소개
조선 개화기 친청 온건 개화파을 대표하는 정치인.
명성황후 민씨의 친족. 순종황제의 첫 부인인 순명효황후의 친오빠이다.
젊은 세도가로 개화 정책을 주도했으나 개화기 격동 와중에 망명길에서 죽은 비운의 정치인이자 민씨 일족 중에 그나마 양심이 남아 있던 사람이다.
2 젊은 세도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발해 몰락하던 여흥민씨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863년 아버지 민태호, 숙부 민겸호와 김정희 밑에서 수학하던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고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자(명성황후)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거기다 숙부 민겸호는 여흥 민씨 일가 중 왕비 간택 이전에 과거에 합격한 몇 안 되는 케이스였기에, 명성황후가 권력을 쥐면서 민겸호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거기에 힘입어 아버지 민태호도 1870년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민영익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1874년 명성황후의 유일한 오라비였던 민승호가 폭사한 사건이었다. 명성황후가 민영익을 마음에 들어해서 죽은 민승호의 양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민태호는 민영익이 외아들이라서 양자로 보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명성황후의 뜻이 강경하고 형제들마저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친조카가 되면 집안 사람 모두가 부귀영화를 누릴거라고 강권해서 결국 일이 성사됐다. 이 때부터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로서 순식간에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민태호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민겸호의 장남, 즉 사촌인 민영환이 민태호의 양자가 된다.
1877년 과거에 합격한 후 별기군의 운영을 주재하고 이조참의·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군무변정기연사당상·협판통리아문사무를 역임하였는데 불과 20세 약관에 당시 인사권,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겸해 담당했다. 그야말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젊은 세도가였다.
3 급진 개화파에서 온건 개화파로
젊은 세도가 민영익은 주변에 개화파를 끌어모았다.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어윤중(魚允中) 등이 민영익의 사저였던 죽동궁에서 자주 회합하면서 이 사람들을 죽동팔학사라 불렸고 개화 정책을 선도하는 젊은 정치인들로 자리 잡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숙부 민겸호가 사망하고 민영익의 집도 공격당했으나 살아남았고, 그 후 사죄사절로 박영효와 일본에 다녀와서 3개월간 머물렀으며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톈진에 머무르면서 해관 사무를 교섭하다가 1883년 보빙사의 정사·전권대신이 되어 미국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예방했고 각종 시설을 시찰했으며 돌아올 때는 구주를 경유해 돌아와 한반도인으로는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사례가 됐다.[1]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귀국 후 그간 들렀던 곳 중 어디가 명승지인지 묻는 고종황제에게 "양인들은 다들 빠리가 좋다던데, 제가 본 바로는 빠리는 뉴욕만 못한거 같네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째 뉴요커 기질이...
1884년 귀국 후 이조참판으로 승진하고 금위대장과 신군좌군영관을 겸임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다시 장악했으나 이때부터 김옥균을 위시해 급진 개화파와 처지를 달리한다.
급진 개화파는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이 때 생부였던 민태호는 보수파 거두라서 암살당했고, 민영익도 공격당해 왼쪽 얼굴을 칼에 맞아 크게 다치고 오른쪽 귀가 잘렸다.[2] 한국사 강사인 강민성에 따르면 이때 무려 칼 11방을 맞고도 살아 남았다고 한다. 갑신정변을 주동한 홍영식에게 우조받아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돼 미합중국인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에게 치료받고 이 사람이 어의하지.구사일생했다. 아버지가 죽고 자신도 죽을 뻔한 이 일로 민영익은 앙심을 품고,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고자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암살을 시도했다.
4 망명과 사망
갑신정변 후 민영익의 인생은 망명과 귀국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명성황후의 조카였으면서 명성황후와는 다른 정치상 신념이 있어서 정치상 위기를 자주 겪었다. 그로 말미암아 개화파이자 젊은 세도가로 개화기 초창기를 주도했던 민영익의 이름이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 개혁기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원인이 됐다.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판서, 한성판윤,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해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몰래 보고했다가 정치상 처지가 난감해져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 후에 귀국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나 위안스카이가 방해해서 실패했다. 그 후 선혜청 당상이 되었으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망명했다. 돌아와서 대한제국의 의정부 찬정이 됐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친일 내각이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해 병합 후에는 술로 소일하다가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 비용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자금 갹출을 거부, 일본 경찰의 호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망명지에서 결국 세상을 뜨게 되었다. 민씨 척족 상당수가 친일파가 되어서 호위호식하면서 호강했던 것과 비교하면 가장 촉망받던 민영익의 최후는 참으로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5 예술 활동
행서에 능했고 많은 묵화 중 묵죽도(墨竹圖)·석죽도(石竹圖)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나서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화가들인 오창석 등과 자주 교유했다.
6 미디어
이두호가 만화로 그린 객주에서는 돈을 밝히지만 그렇다고 돈에 미친 것도 아니며 학문에 뛰어나지만 아이들과 제기차기를 대낮에 한다든지 괴짜인 모습을 보인다. 임오군란이 터져 구식 군대가 집으로 쇄도하자 분노해 칼을 달라면서 저항하려고 하지만 충직한 부하로 나오는 이용익(1854~1907/역시 실존인이다)이 민영익을 기절하게 해 데려가 겨우 생존한 뒤로 행방을 감추고자 머리를 박박 밀고 승려로 위장해 잠적해 지낸다. 나중에 주인공 천봉삼에게 강제로 수만여냥을 바치게 하라는 등, 좀 악역같은 이미지로 나오지만 봉삼을 사모하던 무녀 매월의 활약으로 그를 풀어줘야 했다.
유명인들의 닮은꼴 사진들이 유행할 때 민영익이 에릭(신화)과 닮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SNL 코리아에 신화가 출연할 당시 '신화생명' 꽁트에서 실제로 써먹었다. 에릭이 옷까지 민영익과 닮게 맞춰 입어 확인사살 급.
SBS의 전 월화 드라마 제중원에서는 장현성, KBS 2TV의 전 수목 드라마 조선총잡이에서는 오민석이, KBS 2TV의 전 수목 드라마 장사의 신 - 객주 2015에서는 안재모가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