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선수 경력

야구인 이만수의 선수 경력을 다룬 항목이다.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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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1호 홈런을 때려내는 이만수.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타자로서, 바로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MBC청룡과의 개막전에서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을 기록했으며, 5회초 두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1982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한 한국프로야구 원년멤버 중 한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동안 활동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다.[1] 별명은 헐크.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결번이다. 현재 삼성의 영구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지만[2] 이만수의 22번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다.

삼성의 초대 본좌. 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된 본좌라인 계보 중 한축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삼성 본좌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경험은 전후기 통합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다. 등번호에 2가 2번 들어있어서(…) 그런 걸지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연습+새벽 개인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군 출신으로 삼성의 3대 레전드 본좌 라인 중 유일하게 대구광역시 출신이 아니다.(양준혁이승엽은 대구 출신) 단지 이건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복무지인 철원군에서 그를 얻어 그렇게 된 거고 아버지가 군에서 전역한 후, 어릴 때 대구로 이사해서 정착, 대구에서 자랐다. 학교도 대구상고[3]를 나왔고 삼성에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출생지만 철원일 뿐 완전한 대구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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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위대한 타자 중 하나이지만 박철순과 마찬가지로 흑역사가 존재했던 선수인데 트리플 크라운을 이룰 당시 김영덕 감독이 홍문종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며 기록 밀어주기를 하는 바람에 덩달아 이만수도 욕을 먹고 그 대가로 MVP를 최동원에게 빼았겼던 흑역사가 있었다.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낸 기록조작 감독 ㅅㅂㄹㅁ 그리고 선수시절 말년 삼성의 은퇴 제의를 계속 거절하자 은퇴식도 치루지 못한 채 1997 시즌 후 방출당해 결국 은퇴했고,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가게 되었다. 또한 과거 선수시절에 팬들에게 캔 투척을 했다는[4] 웃지 못할 흑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삼성의 슈퍼 인기스타. 기량이 떨어진 1990년대에는 거의 나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경기가 끝나가면 팬들은 이기건 지건 대타 이만수를 외쳤고 이만수가 나오면 병살을 치든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팬들에게 환호성을 받았다. 이만수가 타석에 나오면 그날 삼성이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 옛날 에스에스패션(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위크엔드[5]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바로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자.


이 때만 해도 이만수는 어린이들에게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당시 야구 선수가 이런 광고에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초창기 크보의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말년에 대타로 2루타라도 때려내면 원정팀에서도 기립박수를 쳐주기도. 삼진을 당하면 다들 만수바보~ 만수바보하고 관중들이 놀렸는데 그게 비웃는게 아니고 정말 동네 친한 바보형(..)을 놀리듯이 한것으로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이만수는 1985 통합우승, 장종훈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걸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삼성은 1985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이다. 조정 OPS는 무려 155. 어느 타격의 신사자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특히 타격이 약한 포수로서 이 정도의 타격을 기록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역대 홈런왕 3번[6],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레전드이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 타격 성적만으로는 KBO 최고 포수라고 할 수 있고, 정교함과 장타를 종합한 전반적인 타격 능력을 놓고 보면 박경완은 통산타율 2할 5푼의 공갈포에 불과하다고 봐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정교한 타격과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 당시 리그에서 푸홀스미기나 다름없던 위엄을 뽐내던 타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이만수가 전성기이던 시절은 꾸준히 투고타저였다. 경기 수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경기 수, 년도별 득점 상황에 맞게 조정한 스탯으로 이만수의 기록을 뜯어보면 이만수는 훨씬 더 위대한 타자임을 알 수 있다. 스탯티즈 기준 통산 wRC+[7]159.0으로 리그 평균의 1.59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의 wRC+가 160.0이다. 포지션을 감안하면 정말 장재호에 버금가는 안드로메다급 수치이다. 그리고 모든 시즌의 경기를 144경기로 환산하였을 때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8]는 81.94로 75.44인 박경완을 뛰어넘으며, 역시나 97.32를 기록한 양준혁에 이은 2위를 차지하는 기록이다.

다만 수비실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은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김성근감독 역시 이만수를 보고 "이만수의 경우에는 단순하고 착한 친구다."라고 평했다. 단순해서 상대팀 감독으로서 상대하기 편했다고.

김성근 감독 강연에 보면, 늘 나오는 이야기중에 하나가, OB코치 시절, 이만수 팔뚝에 힘줄바뀌는 것만 보고도, 구질을 다 알아내서 써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상식선에서만 봐도 이만수 깎아내리기의 일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뒤를 보면서 이만수 팔뚝을 보고 사인은 읽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포수 이만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발언이라는 평가가 있다[9].

이만수의 수비 능력을 까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는데 바로 1990년 한국시리즈 3차전 당시에 백인천 감독이 일부러 홈런을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당시 LG가 3-0으로 앞선 9회말 상황에서 백인천 LG감독이 자기팀 배터리에게 직구 승부를 지시하였고 이만수는 3-2 추격 홈런을 때렸었다. 후일 이 사건에 대해서 백인천 감독은 이만수를 다음 경기의 선발 포수로 출전 시키기 위한 볼배합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만수가 그만큼 만만했다고 이야기했다. 따지면 한국 시리즈에서 1점차 추격 홈런을 일부러 맞아 줬다는 말이니. 사실이라면 대단한 배짱이 아닐수 없다. 흠좀무 다만 삼성팬들 사이에서는 당시 홈런을 때렸든 말든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며 백업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던 포수를 상식적으로 다음 경기에 뺄리 없다는 점. 홈런 더비에서도 몇개 못치는 홈런을 무슨 수로 의도 했냐며 예지안이라도 있었냐는 점. 한국시리즈에서 일부러 1점차 추격을 당하는 감독이 실존 한다면, 그거야말로 정상이 아닐거라는 점을 들어 그냥 백인천 감독의 자기 변명성 인터뷰로 받아들이고 전형적인 이만수 깎아내기와 자기미화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백인천 감독 말에 따르면 홈런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안타 한 방 맞아주려는 의미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며, 다른 포수인 박정환의 임기응변식 스타일을 어려워하여, 이만수를 계속 내도록 정상흠에게 높은 직구를 던지도록 한게 여러 책 및 인터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만수의 수비 능력이 뛰어 났다는 주장과 기록도 많고, 같이 뛰었던 김시진롯데 자이언츠감독에게 그의 수비 실력에 대해 묻자,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뤘을 때 가끔 포수와의 사인 없이 던지는 노 사인 변화구들을 모두 다 받아낼 정도로 좋은 수비실력을 지녔었다고 하였다. 실제 이만수의 현역 시절 수비스탯을 비교해 보았을 때 1990년대 이후 최정상급 포수로 인정받는 박경완과도 큰 차이가 없고 도리어 수비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1급에 위치해 있었다. 바보 만수로 대표되는 희화화 이미지+4번타자 포수+당시 일선 지도자들의 짠 평가가 이미지를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당시 리그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현역 시절의 포수 이만수는 공격, 수비 모두 흠잡을 곳 없는 완성형 포수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투수 리드(게임콜링)에 대해서는 특출난 장점이 없었다고 하지만 일단 이선희, 김일융, 김시진 등 80년대 삼성의 투수들은 다들 리그 초일류 투수들이었기 때문에 이만수가 투수 리드를 잘한다고 티가 나지도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만수의 수비력은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만수의 현역 시절 공격력이 거의 푸홀스급이다 보니 수비력이 심하게 저평가 당하는 편이다. 사실 이러한 수비 문제는 지금까지도 떡밥 던져졌다 하면 순식간에 콜로세움이 열리는 이만수vs박경완 비교 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지금도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타격은 역대급,수비는 테러급'일 정도이니.. "이만수의 어깨가 약하다 ,물어깨다."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있지만 사실 이만수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0.377이다. 물어깨라고 욕먹기에는 정말 억울한 성적이다. 당시 선수들의 도루성공률이 형편없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저 정도 도루저지율이면 준수하다는 소리 들으면 들었지 절대 물어깨라고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또한 이만수의 게임당 에러율(포수 포지션)은 0.047로 박경완의 0.057, 진갑용의 0.069보다도 낮다고 하나 여기에는 헛점이 있는데 박경완, 진갑용하고 이만수하고 경기수 차이가 2배 이상난다. 이만수 에러율은 100경기에서 3할친 선수보다 10경기에서 3할5푼친 선수가 더 낫다는 논리. 야구 전문 사이트조차 이만수를 편견에 사로잡혀 까는 극성팬들임이 많음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만수가 포수를 보던 시절의 투수들의 구위나 변화구, 그리고 박경완이 활약하던 시절의 투수들의 구위나 변화구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당장에 이만수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었으니...... 게다가 야구가 발전하면서 늘어나게된 포수의 역할까지 고려하면 박경완이 객관적인 수비 기량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는 발전하기 마련으로, 과거의 대선수가 현재에서 비슷한 기록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이는 의미 없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이만수 vs 박경완 논쟁이 개싸움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SK 와이번스 팬덤과 관련이 깊다. SK 감독으로서 논란을 야기해왔던 이만수와 SK의 레전드로 여겨지는 박경완의 비교이기 때문에 이만수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하기 좋은 비교 환경이 되어버리게 된 것도 원인이다. 사실 선수 시절에도 과도한 리액션 등등으로 야구계에서 적을 많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폄하당하는 측면도 있다.

한편으론 1996년 6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쌍방울 경기에서 박진석과 빈볼시비로 추격전까지 벌였는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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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험악해야 정상인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둘의 표정이 훈훈하다. 그래서 관중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설마 이거 노리고 서로 짜고 친건 아니겠지? 이 때 박진석의 발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던 이만수가 제풀에 지쳤다고... 그런데 더 웃긴건 이만수가 추격을 하면서 삼성 후배선수들한테 "저거 잡는 사람 내가 빵사준다"라고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원조 빵 사건?

참고로 이만수를 말리러 뛰어가는 이광길 코치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이만수 수석코치와 SK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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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출처 : 포토로)

그의 마지막 현역 선수시절 웬지 초라해보여!!!

2 연도별 성적

  • KBO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82삼성 라이온즈78270.2897816
(6위)
113
(4위)
51
(5위)
46650.500
(7위)
.400
(9위)
198398357.294
(8위)
105
(7위)
12027
(1위)
74
(1위)
53
(4위)
049.555
(2위)
.379
(6위)
198489300.340
(1위)
102
(6위)
17
(8위)
123
(1위)
80
(1위)
45
(9위)
338.633
(1위)
.414
(3위)
1985103357.322
(5위)
115
(5위)
19
(9위)
222
(1위)
87
(1위)
63
(5위)
756.571
(2위)
.414
(2위)
198659212.321688016
(3위)
3931127.585.367
198785299.344
(2위)
10314118
(2위)
76
(1위)
56
(6위)
651.579
(1위)
.431
(2위)
198886285.323
(6위)
9213018
(3위)
58
(4위)
47648.558
(2위)
.419
(3위)
1989110359.28410211020
(3위)
64
(4위)
55
(10위)
452.482
(4위)
.373
1990110359.28710313026
(2위)
5750359.540
(2위)
.386
(9위)
1991118378.317
(5위)
10218017
(7위)
74
(6위)
51664.500
(6위)
.413
(4위)
199293305.2898811022
(6위)
7050760.541.402
199378193.207403152021024.311.294
1994109233.25359140123724033.468.343
199597158.2153410052717132.373.344
199697193.2855512163814224.451.359
19973952.231122029205.385.298
KBO 통산
(16시즌)
14494310.2961276193725286162552672.519
(8위)
.388

3 은퇴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급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우승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선수의 성적과 결과만 보고 가차없이 결정하던 삼성그룹 특유의 방식때문에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은퇴식도 없이 1997 시즌 후 방출당했고,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했다. 당시 삼성 팬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은 덤.

안좋게 커리어를 마무리한 레전드의 대표 사례격으로, 제아무리 초특급선수라도 나이먹고 노쇠하면 구단도 처치곤란인데 발이 느린데다가 나이를 먹은 후 포수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면 다른 포지션으로 전업하지 않는한 지명타자외에는 자리가 없는데도 이만수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포지션 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은퇴할 당시 이만수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반면 팬들의 지지가 여전히 두터웠고 현역 연장 욕심이 있었던 이만수의 입장과 달리 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타 외에는 보직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11]

위에서 1990년대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라 언급했지만, 실제로 주전 포수 자리를 내놓은 건 1993 시즌부터이고 사실상 대타 외에 기용이 어려웠음에도 1993~1996년 4년 동안 대타로 총 777타수를 기록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타석에서의 기회는 상당히 많이 받은 셈. 1997년의 경우 무릎 부상 악화로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 치른 시즌이라 52타수에 불과. 그리고 삼성은 재계약을 포기한다.

은퇴식을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이만수가 떠나고 2년 후에 은퇴한 유격수 류중일. 은퇴 경기를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양준혁. 이만수의 탈단과정과 이로인한 연고팬들의 반발 & KBO 레전드에 대한 KBO 구단들의 예우에 대한 야구팬들의 반발이 공론화되면서 한때 우승에 눈먼 토사구팽구단 이라는 악명까지 있던 삼성 라이온즈[12]도 이러한 악습이 많이 시정되었고 2003년에 22번을 이만수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삼성 구단의 레전드 죽이기의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많은 삼성 팬들은 한 동안 '이만수 감독 복귀' 설을 꾸준히 밀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가 이만수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준비까지 다 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그냥 그들만의 꿈일 듯.[13] 사실 이때문에 당시 삼성에서는 김응용 - 선동열 라인이 매우 건재했었다. 2010년 시즌 후 준우승 감독인 선동열을 갑자기 내치긴 했으나 후속 감독은 이만수가 아닌, 삼성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이 맡게 되었고, 4년 연속 우승까지 안겨주게 되어 프런트나 팬들에게도 신임이 두터워져 이래저래 이만수의 삼성 복귀는 힘들 듯하다. 근데 류중일이 짤렸다

양준혁, 이종범에 이어 무릎팍도사 출연이 확정, 2010년 3월 3, 10일에 2편으로 나뉘어 방영되었다.

해당 자료
  1. 실업야구 경력이 있긴 있었다. 육군 경리단(통합후 현재의 상무) 소속으로.
  2. 허규옥, 장효조, 정성룡, 김기태, 김주찬, 김승권 등 무려 7명이나 된다.
  3. 대구상고 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대신 감독이 되면서 이자까지 덤으로 저주를 받는 중이다
  4. 1990년 해태와의 3연전 중 2패를 하고 병살타를 친 뒤에 관중석에 날아온 맥주캔을 맞았는데, 분에 못이겨 이것을 다시 던졌던 것. 그러다가 1:12000(!)의 대치상황이 되어 결국 마이크 들고 직접 사죄하고 한달 동안 경기에 출장도 하지 못했다고.솔직히 누구든 빡칠만하다..[1]
  5. 후일 라피도, SS311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2007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이후 후부제일모직 스포츠 브랜드 중 유일하게 남아 있었으나 역시 2013년에 판매 부진을 이유로 없어졌다. 현재 삼성물산에는 빈폴이 스포츠는 아니지만 아웃도어상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6. 그것도 83~85 3년연속으로 달성했다. 장종훈과 이승엽, 그리고 박병호 이외엔 그 누구도 이루지못한 전인미답의 대기록.
  7. wOBA를 기반으로 한 조정 득점력
  8. 공헌도
  9. 막상 본인이 언급한 그 경기를 보면 이만수는 긴팔을 입고 있었다 세이콘이또
  10. 이만수가 2회와 4회, 박진석에게 2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맞았다. 그래서 뛰어간것.뉴스라이브러리
  11. 게다가 후배들에게 종교를 강요했다가 구단에게 경고를 먹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팬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구단의 눈밖에 날 짓을 많이 했다. 이만수항목의 기타 내용 참조.
  12. 물론, 이맘때 프로야구판에는 그렇게 은퇴선수 예우하는 팀은 단 한팀도 없었다. 레전드 예우로 나름 좋은 평을 받는 한화 이글스도 안 알려진 8~90년대 레전드의 소리소문없는 은퇴사례가 적지 않고, 우승을 이끈 99년 이후에야 장종훈,송진우등의 선수의 은퇴를 예우하면서 좋아진 케이스. 사실 그마저도 일종의 으리에 가까운 케이스다.
  13. 사실 통수 이미지 씌운건 이 사건이 제일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