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김응룡에서 넘어옴)
[[파일:/image/295/2011/08/10/%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25B9%25DA%25B5%25BF%25C8%25F1.jpg|220px]]220px
전설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새로운 전설을 창조하던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준우승 2회[1] 및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만들어 준 명감독.[2][3]2013년 3월 30일 프로야구 개막전에서의 위풍당당한 모습.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았다.KBO 2015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하러 나온 모습. 그리고 KBO 사상 초유의 감독 은퇴식[4]
이름김응용(金應龍)
생년월일1940년 4월 8일[5]
신체185cm
국적대한민국
출신지평안남도 평원군
학력성지초-개성중-부산상고-우석대학교[6]
포지션1루수
투타우투우타
소속팀남선전기 (1960~1961)
크라운맥주 (1964~1965)
한일은행 (1966~1973)
지도자한일은행 감독 (1973~198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77~1980, 2000)
해태 타이거즈 감독 (1982~2000[7])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0[8]~2004)
한화 이글스 감독 (2012~2014)
(U-23)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단장
프런트삼성 라이온즈 사장 (2004~2010)

1 소개

감독 통산 최다 우승, 최다 승 기록을 보유한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우승 청부사.
프로 최초로 1위와 9위를 모두 경험해본 감독.[9]한국시리즈 우승10회 역대 우승 1위감독[10]

" 그럼 이긴 자기는 가 되느냐 "

김성근, 김응용의 "신" 발언 직후 한 인터뷰[11]

"내 은퇴식 때 김응용, 김성근 두 거장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양준혁[12]

야구 사상 첫번째로 왕조를 만든 대감독이자 한국시리즈 9회 진출 및 9회 전부 우승[13]을 만든 명장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전 해태 타이거즈,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전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감독 통산 최다승 1위이자 최다 우승(해태 9, 삼성 1) 대기록을 보유한 지도자다. 여기에 삼성 사장 시절까지 합치면 12회, 고문 시절까지 합치면 13회가 된다! 등번호는 39번(해태 1983~1996), 70번(해태→삼성→한화 1996~2004/2013~2014)

"김응룡"으로도 많이 불리는데, 유니폼이나 현수막 등에 쓰이는 공식 명칭은 김응이며, 본인의 호적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발음상 '룡'이 맞지만 집안에서 '용'으로 쓰기로 했다고... 김응용 감독 본인도 이에 대해 기자들에게 자주 질문 받은 모양인데 '용'이든 '룡'이든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용이라고 쓰고 룡이라 읽는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는 본음대로 적되, 모음이나 ㄴ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률'만 '열,율'로 적는다. 따라서 엄격하게는 김응'룡'이 맞지만, 실제로는 사람 이름 등의 고유명사는 규정상 두음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고 본인 의사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도록 되어 있다. 본인은 "그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며 "기분 내키는 대로 써도 좋다"고 했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보면 김응용보다 김응룡으로서 검색어 결과가 훨씬 많다. 선동렬과 같은 케이스. 하여 응용과 응룡 혼용

2 현역 선수 시절

호적상으로는 1941년 생이지만 실제로는 1939년 음력 3월 1일생으로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6.25 전쟁 발발로 아버지 손에 끌려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이북에 있었을때는 축구를 했었다고 한다. 1954년에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었으나 야구부 주장이 와서 넌 이제 야구선수다라고 하는 바람에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상고 졸업 후 당대 최고팀이었던 농업은행[14]입단이 좌절되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이란 이유로 입단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뒤늦게 농업은행에서 불러서는, 입행하라면서 입행서류를 내밀었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서류를 찢는것이 예의는 아닌지라 방에서 나오면서 서류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여 한국운수 야구단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각고의 노력끝에 실업리그 최고의 강타자로 등극. 장종훈이나 김현수, 서건창으로 대표되는 연습생(신고선수) 신화는 바로 김응용이 원조다. 실업리그 홈런왕으로 장기 독재를 했는데, 이걸 막아낸 선수가 OB 선수였던 김우열. 참고로 이후 '10년은 갈 것이다'라는 평이 나왔던 김우열의 홈런왕 독식체제는 5년여 만에 김응용의 해태에서 만년을 보낸 김봉연이 무너뜨렸다. 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의 홈런왕 계보는 박현식-김응용-김우열-김봉연으로 이어진다. 한편, 김우열은 실업리그 통산 100홈런을 넘긴 선수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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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김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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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체중은 120kg에 신장이 무려 190cm에 달했다.[15] 1950년대 한국남자의 평균 신장이 160cm 조금 넘었을 때다..요즘으로 환산하면 2미터도 넘을 듯. 나이를 먹은 탓에 키가 줄긴 했지만 지금도 굉장히 큰 체구다. 승승장구에 나왔을 때 키 180cm의 MC 김승우보다 더 컸으니... 때문에 선수 시절 1루 수비를 볼 때 동료 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코끼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다리도 코끼리 다리 사장까지 올라가면서 '코사장'으로 승격하기도 했다.[16] [17]냉장고에 넣어보면 어떨까 물론 이런 큰 덩치에 맞게 싸움실력도 출중하다. 거구로 유명했던 해태 포수 장채근이 전지 훈련중 술에 만취해서 대들었다가 50이 다 된 김응용에게 넙치가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카더라통신도 있다. 당시 장채근이 갓 입단한 신인이었을 때 시합중에 장채근 타석이 될 때마다 대타를 돌려 타석에 나가지를 못하게 한 것에 대해 열이 단단이 받은 장채근은 맥주 여러병을 비우고 한 손에는 맥주병, 다른 한 손엔 돌을 들고 다짜고짜 김응용이 묵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장채근의 KO패...[18]

1965년 크라운맥주 시절 김응용의 타격자세.

1963년 제 5회 아시아 선수권 야구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3-0으로 사상 첫 국제전 우승과 사상 첫 일본전 승리를 거둘때 1회 선취타점, 8회 투런 홈런 등 전 타점을 혼자 기록하면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고, 우승 당일 밤 너도나도 건네는 축하주에 꼼짝없이 대취하여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창단한 중앙정보부 야구단[19]에 입대하여 병역에 임했지만, 얼마 안가 중정 야구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남은 복무기간은 육군 야구단에서 보낸 경력이 있다(...).

이후 한국운수가 매각으로 팀명이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야구단[20]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끝까지 4번타자 자리를 고수하던 김응용은 1966~1972 시즌에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3 지도자 시절

김응용/지도자 경력 문서로.

4 프런트 및 야구원로

4.1 삼성 라이온즈 사장

야구계 인물로는 최초로 2004년 12월 1일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에 삼성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을 확실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한때 실세중의 실세로 불렸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그 인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같이 갈려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응용은 이학수와 부산상고 동문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학수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같이 경질된 김재하 부사장은 애초부터 이학수 인맥으로 유명했고,[21][22] 재계약 1년차에 뜬금포로 경질된 선동열 감독도 그 유탄을 맞은 거라는 설이다.[23] 삼성내부에서는 선감독 해임사유로 유력하게 퍼진 2010년 한국시리즈의 졸전보다는 이걸 더 정설로 치고 있다고 한다. 후임은 삼성 SDS 사장으로 활동했던 김인.

사실 사장을 시킨것은 김응용이 야구인으로서 맡을 수 있는 최고직을 맡겨 다른 팀으로 자신의 계급을 낮추고 감독으로 이전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2 야구원로

[[파일:/image/295/2011/08/12/%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25B9%25DA%25B5%25BF%25C8%25F1.jpg]]
삼성 라이온즈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제주도에 본인의 의견을 조율하여 조성한 "야구인의 마을"에 거주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 고문으로 재직중인 것 외에는 조용히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24] 그런데 2012년 9월 13일 현장 복귀를 암시하는 듯한 기사가 올라왔다. 재미난 사실은 희망없는 모 팀이 9월 말 감독을 정하겠단 기사가 나온 후 몇 시간 뒤에 나온 기사란 것. 설레발이 아니길 일각에서는 희망없는 모 팀이나 답이 없는 모 팀 또는 만년 하위권인 모 팀 감독으로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9월 17일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 경질로 인해 감독시장은 혼돈의 카오스가... 이장석 : "뭐? 무보수로 일한다는 감독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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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2~3년 안에 우승시키고 싶다."라신다. 야구팬들의 반응은 최강 커리어의 명장 컴백이 기대된다는 의견, 최고의 명장이었던 것은 맞지만 너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실전감각이 떨어져서 안될 것 같다는 의견, 삼성 맡았을때부터 슬슬 거품 빠지는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현장복귀해봤자 김재박 꼴밖에 더 나겠냐는 비아냥, 후진 양성 차원으로 2번째 독립야구단이라도 창단해서 서로 비슷한 전력의 팀으로 김성근 감독하고 붙어보면 재미있지 않겠냐는 의견 등 실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응용 감독 재임기간의 삼성 성적은 2-1-4-2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팀의 전력과 감독의 명성에 비하면 영 초라한 성적이고 때문에 김응용 감독의 까들이 그를 거품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 절하가 말이 안되는게 20년 동안 코시 우승 못 하고 있던 콩라인 팀 우승시킨 게 영 초라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국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복귀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연령대의, 독수리요새나 칰갤따위는 전혀 모르는 충청도 연고 빙저씨들이나 국내야구 갤러리 상주 칰키워들 같이 거의 원리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골수 이글스 팬들도 김응용 부임에 대해 최소한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김응용의 감독 스타일이 지금의 한화에게 제일 필요한 요소인 '패배주의 탈출'과 가장 잘 맞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2012년처럼 경기 분위기 망치면 즉시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잘 돼서 성적 오르면 그 동안의 악행에 대한 속죄 좋고, 설령 망하더라도 과거의 철천지원수를 확실하게 잘근잘근 씹어줄 수 있으니까 왠지 선거를 전후한 유권자들의 주요 패턴이 생각나지만 넘어가자 어차피 팀 상태도 개막장이겠다 손해볼 건 없는 셈이니까. 게다가 현재 언급되는 후보군 중 류현진의 팀 잔류에 연연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인물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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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감독일을 끝낸 뒤에는 2015년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10개 구단 감독들이 전달하는 공로패와 꽃다발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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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2016년부터 가칭 '김응룡 필드'라고 불리는 야구장을 짓는 중. 그외에 아마야구와 사회인 야구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5 인물평

김응용/인물평 문서로.

6 김응용 vs 김성근

김응용 vs 김성근 문서로.

7 역대 감독 성적

보유 기록
1983년 1986년 ~ 1989년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 2002년[25]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역대 감독 전적
년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83해태 타이거즈100554411위우승
1984100435435위-
1985110575213위-
1986108673742위/2위[26]우승
1987108554853위/2위[27]우승
1988108683821위/1위우승
1989120655142위우승
1990120684932위3위
1991126794251위우승
1992126715412위3위
1993126814231위우승
1994126655923위[28]4위
1995126645844위-
1996126735121위우승
1997126755011위우승
1998126616415위-
1999132606934위[29]/7위[30]-
2000133577244위[31]/6위[32]-
통산2147116493451­
년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2001삼성 라이온즈133815201위준우승
2002133824741위우승
2003133765343위4위[33]
2004126744842위준우승
통산53231220416­
연도소속팀경기정규시즌포스트시즌
2013한화 이글스128428519위-
2014128497729위-
통산256911623­
총계29351567130070­

8 기타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임창정,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까메오로 나온 적이 있다. 극중 경기는 대부분 LG 트윈스해태 타이거즈의 경기이다 보니 특별출연한 듯. 영화 DVD의 특전영상에 김응용의 NG씬도 2컷이나 들어가있다?![34]

역대 야구감독 중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할 만하며 선동열이종범이 모두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인터뷰에서 나온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명언(?)은 그 당시 최고의 유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연예인들이 김응용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철옹성같은 카리스마의 대명사였던 김응용 감독의 이미지가 "푸근한 옆집 아저씨"로 개선되기도 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프로야구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야구 종목에서 딴 첫 메달이자 역대 국가대표팀 가운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의 금메달 다음가는 성적.

2004년 8월 5일 문학구장. 12-5로 삼성이 앞서 있던 8회 초 삼성 진갑용이 타석에 들어서려고 할 즈음, SK 덕아웃에서 느닷없이 김기태가 뛰쳐나와 백스톱 쪽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삼성 덕아웃으로 달려갔다. 다만 김기태는 싸우러 간게 아니라, 삼성의 덕아웃을 급습하던 브리또 를 말리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그리고 SK 선수들이 그 뒤를 따라 삼성 진영으로 줄줄이 쳐 들어갔다. SK 외국인 선수 호세 카브레라가 김응룡 감독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이 포착됐으나. 김응룡 감독이 카브레라의 목을 휘감고 제압했다 당시 64세.노익장(...).
다음날 김응용 감독에게 헤드록을 당한 카브레라는 구토와 어지럼증을 느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삼성 포수 진갑용에게 역시 헤드록을 당했던 SK 포수 박경완 역시 목 부상을 입었다.나이는 숫자에 불과...ㅎ...웁웁...

2009년 WBC 감독 선발 문제가 뜨자 선동열 삼성 감독이 김응용 삼성 사장을 대표팀 감독으로 추천하며 자기가 불펜에서 대기하겠다는 농담을 했다.

2009년 WBC 결승에서 임창용스즈키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내 준 것과 관련하여 '임창용이 자기 고집으로 벤치의 사인을 무시하고 정면승부한 것'이라고 말하여 많은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예전에도 메이저리그의 박찬호가 부진한 이유를 총각이라 밤에 놀기 때문, 삼성 감독 재임중 본헤드 플레이를 한 박한이를 두고 '정신병자'라고 인터뷰해 구설수에 올랐었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몰래 온 손님이 이종범양준혁이었다. 두 선수 모두 김응용이 감독으로 있던 팀의 대표적 선수들이라는 것이 이색적이다.

가족으로 아내와 딸 둘이 있다. 아내는 서울대학교 음대를 나왔고, 두 딸도 모두 음악을 전공했다고. 꽤 오랫동안 기러기 아빠 신세였다고 한다. 어차피 야구 감독은 가족이랑 지내기 힘드니 가족이 한국에 있어도 기러기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서 대부분 홀로 지내다가 해태 말기에는 방세조차 내기 힘든 신인선수들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지내게 했다. 그런데 해태 말년에는 해태가 가난한 팀이라 그런지 두 [35] 딸의 미국 유학비를 대느라 월급에서 남는 게 거의 없었고 이전에 저축한 돈도 까먹었다 한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1$=1800₩ 수준의 살인적인 고환율을 자랑하던 외환위기 시절이라는 건 감안해보자. 그래도 삼성 감독과 사장을 지내는 동안 어찌어찌 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한 듯. 신인 투수 조지훈김강래에게 한우를 사줬다가 손의 쥔 60만원짜리 계산서를 들고서 '통장 잔고 확인해봐야겠다' 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한화 감독 수락때 2년 계약금 연봉 3억씩 9억 계약을 맺었다

애정통일 남남북녀에서 스승의 날을 기리기 위해 양준혁과 김은아가 김응용과 만나게 되었다. 용인에 소유한 대지에 농사를 짓고 여생을 보내는 중. 방송을 보던 야구팬들은 탈칰으로 신수가 훤해졌다고(...).
양준혁이 김은아에게 김응용 감독은 뜬금없이 직구를 던지는 걸 좋아한다면서, 김응용에게 고기 사먹게 용돈 달라고 하자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줬다. 하지만, 밭을 메냐고 사람쓰면 일당으로 백만원 정도 드는 평수를 양준혁이 하게 됐다. 중간에 양준혁은 경운기로 밭메다가 모종심어놓은걸 뒤집는 바람에 김응용의 속을 뒤집어 놨다.
김응용 감독의 덩치가 20대에도 키가 190에 달해서 엄청나게 크다는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신발사이즈가 300mm이라는 얘기에 다들 놀라는 기색이다.
방송 막바지에서 이북출신인 김은아양이 이북식 반찬을 해와 김응용에게 전달하자 눈시울이 붉히는 모습을 보여 야구팬들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이북식 음식을 보자 김응용이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북식 닭곰탕인 온탕을 떠올리며 어린시절을 이야기 했다.
의사가 하루에 한잔만 술을 하라고 했다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괜찮다면서 여러번 마시며 고향의 어머니와 가족을 그리워 하는 모습을 보여 시청자를 애잔하게 만들었다.

2015년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최초의 그의 공로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제안자는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이며 이날 김응룡 감독은 나눔 올스타팀의 감독인 염경엽(넥센 히어로즈) 감독을 대신해 1회의 감독을 맡을 예정이다.

9 둘러보기

해태 타이거즈 역대 감독
김동엽[36]
(1982)
김응용[37]
(1983~2000)
김성한[38]
(2001~2004)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김용희
(2000)
김응용
(2001~2004)
선동열
(2005~2010)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한대화[39]
(2010~2012)
김응용
(2013~2014)
김성근
(2015~)
  1. 2001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 후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으나 막상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 3위 팀 두산 베어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기록, 김응용 감독 생활 첫 준우승을 맛보았다.그리고 14년 후 같은 팀끼리 이 일이 다시 재현되는데...
  2. 1985년 통합우승이 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첫 우승으로 구분해서 부른다. 다만 그 전까지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 전패라는콩성 불명예 기록이 따라붙고 있었던지라 2002년 한국시리즈와 김응용 감독에게 큰 의미를 두는 편이다.
  3. 같은 해태 출신인 선동열 감독이 2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줬음에도 불구하고 양준혁 은퇴 등 여러가지 안 좋은 일로 인해 삼성팬들의 금지어가 된 반면 김응용은 삼성이 그리워하던 첫 우승을 안겨주었기 때문인지 삼성팬들에게 김응용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4. 이것은 10개 구단 감독들이 이미 논의를 미리 한 것이고 김응용 전 감독은 마지 못해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5. 음력 3월 1일. 호적상 1941년 9월 15일생이지만 실제는 1940년생이라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6. 전북 완주군의 우석대가 아니라 고려대에 합병된 우석대이다. 해당 문서 참조
  7. 10월 30일 오전 10시 구단 사무실에 들러 작별
  8. 10월 30일 오후 2시 입단 기자회견
  9. 8위만 경험해 보지 못했고 모든 순위를 경험해 보았다.
  10. 역대 2위는 4회로 김재박, 류중일이 가지고있다.
  11. 흔히 '야구의 신'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당시 인터뷰에서는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고 말했다.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인터뷰에서 "저는 야신이라고 안 하고 그냥 신이라고 했었는데, 신도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해명했다.예를 들면 ㅄ
  12. 그의 은퇴경기 당일 상대가 SK 와이번스여서 김성근 감독이 자리해 있었고,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이 김응용 전 감독이었기 때문. 구단은 당시 특별예산을 편성하면서까지 양준혁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해주었다.
  13. 즉, 승률 100%. 아직까지도 이 기록은 계속되고 있다.
  14. 농협.
  15. 체중증가는 크라운 맥주 시절 늘었다고 한다. 위의 사진과 아래의 사진을 보면 확연이 다른데.... 크라운 맥주 당시 영업을 뛰면서 맥주를 많이 마셔서 체중이 늘었다고 한다.
  16. 이 썰 외에도 또 다른 썰은 당시 야구 중계를맡은 해설자가 지어낸 썰로 해당 해설자가 경기를 중계하는 도중 김응용 선수가 공을 잡아내는 장면을 보고는 "참~ 체격도 큰 거구의 김응용 선수가 꼭 코끼리가 과자 받아먹듯이 공을 잘 잡아서 아웃시킨다" 라고 말하며 표현했고 이것이 코끼리란 별명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썰을 말해준 사람은 故 하일성 해설위원으로 당시 KBS N Sports에서 방영된 '한국야구 레전드(현 The 레전드)' 김응용 감독 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 썰을 풀게 되었다.
  17. 후배 강병철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김응용의 동료이자 절친 박영길도 키가 크고 한 덩치했던지라 둘을 엮어 코코 브라더스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18.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김응용은 오히려 자기에게 대드는 배짱을 높게 평가했다는 거다. 이 후 김무종이 부진할 때마다 김응용은 바로 장채근을 투입시켰고, 결국 장채근은 김무종의 뒤를 이어 해태의 주전포수로 활약하게 된다. 어찌보면 대인배스러운 측면. 류중일도 이와 비슷하게 코치시절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응용에게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해 도리어 높게 평가했던 일화도 있다. 류중일 문서 참고.
  19. 당시 먼저 창단했던 양지 축구단과 함께 지금으로 치면 야구판 실미도였다...그러나 양지도 창단 3년만에 해체되었다.
  20. 한일은행은 당시 실업리그 최강팀이었다. 김응용과 같이 뛰던 멤버로 5년 선배인 투수 김영덕, 후배로 3루수 강병철 등이 있었다.
  21. 이학수는 제일모직 경리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해서 이 시절 인맥을 구조조정본부와 주요 계열사에 대거 중용했다. 김재하도 그 중에 하나이다. 2010년의 대숙청에서 이 인맥들은 모조리 갈려나갔다.
  22. 김재하 부사장은 바로 대구 FC 단장으로 옮겨갔다.
  23. 12년만에 포스트시즌 탈락에도 불구하고 재계약에 성공한건 오로지 김응용 사장의 지원때문이었는데, 그 방패막이 사라졌으니 바로 out , 한편 해태 출신 코치들이 이와 동시에 해임됐다는 말이 있지만, 해태 출신인 정회열,김평호 코치는 선동열이 기아감독으로 부임하기 전 까지 1군 배터리코치, 주루코치를 하고있었다.
  24. 고문시절에도 스카우트들을 갈궈서 구자욱을 뽑기도 했다.
  25. 2002년만 삼성, 이외는 해태 감독 당시 우승 기록
  26. 전·후기 각각 2위
  27. 전기 3위, 후기 2위
  28. 빙그레 이글스와 공동 3위.
  29. 드림리그
  30. 양대리그 합산
  31. 드림리그
  32. 양대리그 합산
  33. 정규시즌 4위인 SK 와이번즈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
  34. 재밌는건 이때 김성한 당시 코치도 김응용 감독과 같이 출연하였고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며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론 그 연기력이 너무 어색한점이 함정이지만...
  35. 해태가 돈이 없다보니까 김응용 감독이 10회 우승을 거두었어도 연봉을 많이 못줬다. 2000년 김응용 감독이 받은 연봉은 이름값에 걸맞지 못한 겨우 1억 3천만원에 불과했다.
  36. 해임 후 조창수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37. 중도사퇴로 김성한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38. 시즌 도중 경질로 유남호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39. 시즌 도중 경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