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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30주년 Legend All-Star BEST 10 in 2011. KBO-NAVER | ||||
장효조 OF / 삼성 | 이순철 OF / 해태 | 양준혁 OF / 삼성 | ||
김재박 SS / MBC | 박정태 2B / 롯데 | |||
한대화 3B / 해태 | 선동열 P / 해태 | 장종훈 1B / 빙그레 | ||
김기태 DH / 쌍방울 | 이만수 C / 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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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롯데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1992년 홈런 신기록인 41호를 터뜨리고 페넌트레이스 MVP를 받을 당시의 모습
"긴 시간, 과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야구선수가 되겠습니다."
2005년 9월 15일 은퇴식에서
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 ||||
강정길 (1994~1995) | → | 장종훈 (1996) | → | 강석천 (1997~2000) |
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 ||||
강석천 (1997~2000) | → | 장종훈 (2001) | → | 김종석 (2002) |
1988년, 1990년 한국프로야구 유격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91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1992년, 1995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롯데 자이언츠 No.73 | ||||
장종훈(張鍾熏 / Jong-hoon Jang) | ||||
생년월일 | 1968년 4월 10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충청북도 영동군 | |||
학력 | 용담초-세광중-세광고 | |||
포지션 | 유격수(입단~1990년), 1루수(1991년~), 지명타자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1986년 빙그레 이글스 연습생 입단 | |||
소속팀 |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7~2005) | |||
지도자 | 한화 이글스 타격코치 (2006~2011, 2013~2014)[1] 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 (2015~2016.08.17)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6.08.18~) |
한화 이글스 영구결번 | |
[2] |
목차
1 소개
영원한 홈런왕
1990년대 최고의 홈런 타자
연습생 신화의 대표주자
이글스의 전설이자, KBO 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의 전 선수이자 롯데 자이언츠 코치.
KBO 리그 최초의 시즌 40홈런 달성자이자 빙그레 이글스의 레전드, 고졸 연습생 신화의 대표격 인물. 홈런 시대 이전에 홈런을 대표하던 선수.
2 선수 시절, 영원한 홈런왕이 된 연습생 신화
세광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자, 세광고 감독이 배성서 감독에게 부탁해 입단 테스트를 받고, 7번째 구단으로 출범한 신생 팀 '빙그레 이글스'에 연봉 300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이후 주전 유격수였던 이광길 선수(現 NC 다이노스 코치)의 결장으로 인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후 주전의 자리를 꿰찼다. 유망주들이 고졸 후 프로 직행을 택하는 경향이 많은 2000년대 이후와는 달리 당시에는 웬만큼 기량이 있다면 무조건 대학을 거쳐 프로에 입단했기 때문에 고졸 신화로 유명했다.[3]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유격수로 출장하며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일원으로 성장해가다가 1990년 28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유격수로는 최초[4]로 홈런왕-타점왕을 동시에 거머 쥐었다.
이후 1루수와 지명타자 포지션으로 이동하여 빙그레-한화의 대표 선수로 군림한다.
이런 타자에게 투수는 뭘 해야 잘했단 소릴 들을까 헛스윙이라도 만들면 강투수
참고로 저 유일한 2위를 기록한 출루율 부문에서 1위를 달렸던 이는 당시 36세의 나이로 타격왕 경쟁을 했던 장효조.
최전성기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의 3년으로, 이 기간동안 홈런, 타점 부문 타이틀을 3연패했으며 연도별 주요 타이틀 및 기록을 보면,
1990년 : 타격부문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최다타점 신기록(91타점), 골든글러브(유격수 부문)
1991년 : 타격부문 5관왕(최다안타, 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신기록(160개), 프로야구 최초 100타점 돌파(114타점), 사상 첫 100득점 돌파(104득점), 20-20클럽 달성, 골든글러브(지명타자 부문)
1992년 : 타격부문 4관왕(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사상 첫 40홈런 돌파(41홈런), 골든글러브(1루수), 최다타점 신기록(119타점), 최다득점 신기록(106득점)
등의 먼치킨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타격 부문에서 도루 부문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에 랭크되었으며, 특히 홈런, 타점, 득점 등의 기록을 스스로 매번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30홈런도 드물던 시절에 홀로 41홈런을 기록하였으며, 이 기록은 98년 타이론 우즈의 42홈런이 나올때까지 부동의 역대 홈런 1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 3년간 기록한 평균 성적은 타율 0.312 홈런 34.7개 타점 108개로 '홈런타자=장종훈'이라는 인식이 명백하게 박혀, 일본의 야구만화인 '4P 타나카군'을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할 때 '4번타자 왕종훈'이라는 제목으로 현지화할 정도였다.
28개의 홈런을 친 1990년 시즌이 끝나고 기자들이 내년의 목표를 묻자 자신의 등번호인 35개 치는 것이 목표라 하였는데, 정말로 35개를 쳐버렸다. 1991년 시즌 후에 또 다시 내년의 목표를 묻자 이번엔 40개라 대답했고, 기어코 40개를 넘게 쳐버렸다. 흠좀무… 게다가 1993~97년 까지의 홈런왕들은 모두 20개중반~30개초반의 홈런을 기록하여 41홈런은 마치 전인미답의 고지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1993년 시즌 전 무릎 통증으로 연습량이 부족했고, 시즌에 들어와서는 허리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시즌을 보내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4년 팔꿈치에 공을 맞아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이 부상으로 인해 배트스피드가 감소하게 되어 다시는 전성기 수준으로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빙그레 전성기를 같이 이끌었던 이정훈, 이강돈의 몰락은 투수들이 장종훈을 집중 견제하는 양상으로 이어졌고, 강병철 감독이 발탁한 경험이 일천한 신인 타자들을 홀로 이끌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1994년 시즌 후 장종훈은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1995년 수술을 마치고 부상에서 회복한 장종훈은 타율 0.326 홈런 22개 78타점 출루율 0.424(1위) 장타율 0.562(1위)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1996년 다시 부상으로 인해 90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하며 15개의 홈런과 57타점을 기록했다.
1997년 시즌 타율 0.293 홈런 22개 76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좋은 성적을 냈다.
그리고 다음 시즌(1998)에서는 타율 0.266 홈런 17개 66타점으로 97년 보다는 약간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한화 이글스 유일의 우승 시즌이기도 한 1999년에 그는 주로 5번에 기용되어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 외국인 선수 듀오와 함께 클린업을 구성, 타율 .284,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은 낮았으나 마지막 5차전, 결승 타점으로 기록되는 희생 플라이를 쳐냈다.[5][6] 2000년 시즌에도 홈런 28개와 81타점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2001년 시즌 4월 한달 동안 타율 - 홈런 - 타점 1위를 기록하면서 좋은 페이스를 유지 했지만, 손목에 공이 맞아 타격페이스가 무너져 타율 0.273 15홈런 54타점으로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체력적인 열세를 보이며 하향곡선을 탔고, 2003년 유승안 감독 취임 이후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되었다. 수비불안을 이유로 3루 수비를 보던 김태균의 보직을 1루수로 변경하는 바람에 1루수 자리를 빼앗겼고, 지명타자에 기용되는 빈도도 줄어갔다.
결국 2005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 9월 15일에 대전구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2005년 그의 성적은 11타수 1안타 1홈런. 마지막 안타가 홈런이었다.[7][8]
한화 구단 최초로 배번(35번)이 영구결번되었으며,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역대 5번째 영구결번이었다.
삼종훈 삼총사 중 두번째이며,[9] 데뷔년도과 은퇴년도도 중간정도.[10] 당연하겠지만 커리어로 보나 인지도로보나 장종훈 선수가 압도적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삼종훈 삼총사 중 우승 커리어가 한개 밖에 없다(1999년). 이는 빙그레 이글스의 4번의 준우승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 만일 그가 빙그레 시절을 포함해서 5번이나 우승을 했다면 우승 커리어면에서도 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11] 이만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 그래도 장종훈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지만 이만수는 공식적인 우승을 하고도(1985 전후기 통합우승)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안습.
3 지도자 시절
3.1 한화 이글스
한화 2군 타격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2008년에 1군 타격 코치로 승격되었다. 2군 코치 당시는 존재감이 희박했으나 그 동안 철저하게 선수분석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후 1군 코치로 올라오자마자 김태균, 이범호의 상승세와 더불어 김태균에 가려 있던 유망주 김태완을 지명타자에 안착시켜 클락-김태균-이범호-김태완의 클린업 쿼텟이라는 공포의 타선을 선보여 '종훈매직'이라고 칭송받았다. 하지만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클락이 거짓말처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타선 전체의 침체가 오면서 미완의 매직으로 끝났다.
그리고 오프시즌에 팀 체질 개편을 선언한 한화의 인사 개편으로 2군 타격 코치로 돌아갔다가 2010 시즌 다시 1군으로 복귀해 타격 코치를 맡았다. 타격라인이 괴멸된 한화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2010년 겨울부터 아예 체급별로 장타자와 교타자를 나누어 양분화시킨 구조로 개편해버렸다. 2루타 안되면 그냥 똑딱이나 해
타격진을 양분화시키는 극단적인 구도의 개편은 타자가 타석에 선 순간 똑딱이를 노릴 지 한방을 노릴 지가 고스란히 노출되며 병살타의 위험과 도루실패확률이 커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2011년 한화 타격진이 개판이라 병살타의 위험은 기본이고 도루는 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점이 문제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3루수도 없이 시작하는 2011년 시즌인걸
오히려 똑딱이가 제대로 똑딱여주거나 뜬금포가 한방 터져주면, 당한 상대는 알고도 당했다는 충격을 안겨주어 기싸움에 유리해졌다. 2011년 시즌 극초반의 시즌 최초 역타석 홈런, 시즌최초 10안타, 시즌 최초 출루 5할기록등이 한화에서 나온걸 보면 이 극단적인 양분화가 꽤나 먹혀들어갔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세월이 흐른 2010년대 중반에 되돌아보면 타격기술의 발달에 따라 타자도 분업화하여 교타자와 장타자가 확실히 분리되는 라인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꽤나 시대를 앞서갔던 타자진구성.
하지만 투수로 믿었던 류현진이 무너지고 2011년 6월초 초, 투수자원이 풍부한 두산 베어스가 방화범 중간계투들의 활발한 교체를 대처법으로 제시하여 사실상 파훼되고 말았다. 투수의 멘탈을 깎아내리는 디버프 효과를 활발한 투수교체로 대처해버린 상황.
2011년 시즌 중반 구단쪽에서 트레이드와 용병고용을 알아볼 때 타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용병 카림 가르시아가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가르시아는 2011년 한화에서 쏠쏠히 활약해주었다.
2012년 시즌에는 소프트 뱅크 2군 타격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2012년 10월 김응용 감독이 부임한 후, 2013년 초엔 2군에 있다가 7월 18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팀 성적이 워낙 바닥인 탓에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송광민을 안정적으로 라인업에 안착시키고 이양기 등 2군에서 묵혀두기만 했던 선수들을 재발굴하면서 차기 시즌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3.2 롯데 자이언츠
[[파일:/image/477/2015/01/09/114615949_%25C0%25E5%25C1%25BE%25C8%25C6%25C4%25DA%25C4%25A1.jpg]]
김성근 체제 하에서 수많은 칰무원 코치들이 야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코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12월 7일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발탁되면서 결국 한화를 떠났다. 한화팬들은 장종훈의 행동에 어마어마한 충공깽에 빠졌다.[12] 이로써 한화의 영구결번 선수들은 모두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13]
아직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3월 19일 한화 롯데전에서 롯데가 한화를 12:0으로, 3월 20일에는 13:2로 두들기고 시범경기 팀홈런 2위를 기록하면서 15시즌에 한화선수가 똥이었는지 본인 코치실력이 똥이었는지 재평가 받을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단 5월 까지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팀 장타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무엇보다도 2년동안 강극혐 소리 듣던 강민호를 강혜자로 부활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 다만, 우타에 비해 좌타 코칭은 다소 약한게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지만 손아섭이 귀신같이 3할 타자로 돌아오면서 이 문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타선이 터질 땐 빵빵 터지지만 숨죽일 땐 숨죽이는 기간이 긴 게 문제로 거론되기는 하나 원래 타격이 투구나 수비에 비해 기복이 큰 편이라 큰 문제는 되지 않는편이다. 진짜 문제가 뭔지 보고싶다면 불펜으로 눈을 돌리면 된다
시즌 초반 삼진율이 높은데다 동일하게 빅볼 스타일인 박흥식 코치 시절에 비해서 볼삼비도 더 악화되었기 때문에, 당장 좋아도 기복이 심할 위험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단은 페이스가 정말 좋다. 전임자보다 롯데에 더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14] 한화 코치 시절 억울하게 받았던 저평가를[15] 다 털어버리고 있다.
다만 한화 시절에는 확실히 뭔가 부족한 타격 코치가 맞았다. 이건 한화 선수진이 나쁘다는 것보다도 스타일의 문제인데, 일단 한화는 스카우트들이 워낙 떡대 애호가들이라 힘은 좋은 빅뱃 유닛이 많긴 하지만 대신 아예 맞추지 못하는 경향이 심했다. 최진행이 왜 떨공삼이라고 불렸는지 생각해보자 즉, 여기는 장타력에 초점을 맞췄다가는 선풍기질만 하기 딱 좋았다는 거. 적어도 배트에 맞춰야 안타든 홈런이든 나올 텐데. 강석천이 1군 타코로 올라오면서 팀 타율이 2푼, 평균 득점이 1점 이상이나 올라간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맞추기만 하면 멀리 쳐낼 선수들이라 장타보단 컨택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한층 더 성장하고 특유의 연습생 근성으로 코칭 스타일도 더욱 정착이 되어 가면서, 롯데 선수들에게는 큰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6월 되면서 팀 공격순위가 전부 최하를 기록하며 이종운과 함께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6월 한달간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팀 스탯은 다음과 같다.
팀타율 .242(9위), 팀 홈런 22개(6위), 타점 73(10위), 득점 79(10위), 팀 OPS .693(9위)
출처 : kbreport
7월 중순까지는 타격관리를 왜 그 따위로 하냐고 팬들에게 까임을 받고 있다. 부분 빼고 다 파업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중.
그래도 꼴무원인 염레기와 박현승보다는 그나마 성과가 보였던 코치인데다, 지금도 착실히 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줘 이승화와 강민호가 받았던 까임과 비슷한 류의 까임이 주류이지. 이종운에게 가해지는 까임의 계열은 의외로 소수다. 의외로 소수인거지 먼지나게 까이다 진짜 먼지가 되어버려도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사람은 평소 태도도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빠따는 홈런은 그렇다 쳐도 상당히 살아났다. 원래 투수진보다 타선이 더 기복이 심한 물건인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팀 홈런 2위라는 등 방망이는 상당히 잘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장 부진했던 6월의 스탯은 저모양이지만 8월까지 시즌 전체 스탯을 보면 팀 OPS, woba, wrc 등의 타격스탯이 전부 5위, 즉 4강팀을 제외한 6팀 중에는 어쨌든 가장 낫다. 스탯만 보았을 때는 롯데가 8위인 이유는 kt를 제외하고 독보적 9위인 투수진 그러니까 델골퍼와 염종석과 인성만 좋았던 전임감독의 삼위일체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
물론 시즌 초반에 기세를 올리다 타선의 기세가 꺾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장종훈식 빅볼의 최대 단점인 높은 삼진율과 적은 볼넷,[16] 그로 인한 심각한 기복, 양민학살 패턴과 비교적 많은 병살타, 적은 희생타로 인해 짜내기가 안 되는 타격이 팬들에게 답답함을 주기도 한다. 통계에 비해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 하지만 델골퍼가 황재균과 강민호를 혹사시켜 타선마저 말아먹고 있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지금껏 장종훈 코치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어쨌든 과도한 면이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뚜렷한데, 삼진율은 단일시즌 최고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고, 병살은 8월 12일 현재 100개 이상 적립을 해 역시 단일시즌 최고치를 향하고 있다. 선수들이 소위 말하는 붕붕스윙으로 당겨치기를 선호하게 되자 삼진과 병살이 뚜렷하게 증가했고, 초구를 치는 성향이 뚜렷해져 롯데전에 유독 힘을 얻고 자신감을 획득하는 투수들이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박종훈, 이태양, 임정우, 이동걸, 심재민, 홍성용, 배영수, 김진우, 이동현, 윤지웅, 류제국, 송창식 등등 상당히 많다. 특히 LG 트윈스 투수들이 만만히 본다. 그 중에서도 임정우가...
2015년 10월 8일 이종운 감독이 갑자기 잘리고 그 자리를 조원우 전 SK 와이번스 코치가 메우게 되자 장종훈의 거취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종훈의 롯데 영입을 적극 추진했던 사람이 이종운 감독이었고, 한화 타격코치 시절 제자였던 조원우가 감독이 되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 장종훈이 롯데에 남느냐, 한화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제3의 팀으로 가느냐를 놓고 롯데 팬들과 한화 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데 아직 공식적인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2015년 10월 13일 장종훈의 롯데 자이언츠 잔류 기사가 공식 보도 되었다. 코치진 개편의 칼바람 속에 현 1, 2군 코치들이 대다수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으나, 능력을 인정 받아 내년에도 롯데 자이언츠와 함께 하게 되었다. 죽어도 다른 팀 절대 못 보내니 그리 알아!
2016 시즌에도 롯데 팀타격은 득점 3위 OPS 2위 woba 2위를 기록중이지만 여전히 욕먹는다. 투수진 떄문에 팀 성적이 개판이고 영웅스윙으로 클러치히팅 안된다고(...). 이 점은 타격성적 상당히 상승시켜놓고도 까이는 전임 박흥식과 비슷. 사실 결론은 답이 없는 롯데의 투수진 그래도 4할타자 김문호가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할 만큼 코치로서 육성에는 힘을 많이 쏟은 듯 하다.
2016년 8월 현재 롯데의 거의 모든 타격지표가 꼴찌만 겨우 면하는 수준의 하위권을 맴돌고 있고, 특히 장타율이 폭망했다. 여름 지나 홈런은 고사하고 2루타 한 번 구경하기도 어려운 타선이 되면서 타격감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한 점 뽑기도 힘든 타선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교타자 육성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1군에서 하는 일이 뭔지 의심받는 상황이다. 중심타선을 꿰차는 1군 붙박이 중고참급 선수들에 비해 몇 경기 반짝이긴 하지만 2군에서 갓 올라온 신인타자들이 프랑코 코치의 지도 아래 타격감을 끌어올렸다는 것이 단적인 예. 물론 안 되는 애들이 있는 건 넘어가자
결국 분위기 쇄신차원에서 2군으로 내려갔다. 반대급부로 올라온 코치는 프랑코코치.
3.3 코칭스타일
코칭 스타일은 타자 본인의 타격폼에 손을 대지 않고 개성을 존중하면서[17] 타격의 기본적인 문제점(퍼져나간다든가, 팔꿈치가 붙어나오지 않는다든가)만을 찾아내서 교정하는 정도에 그치는 대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멘토 역할을 하면서 타자 본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김주형이나 정의윤같은 타자에게 필요한 코치.
천안북일고 학벌과 김인식 연줄을 통해 들어온 대부분 무능력자들의 소굴이었던[18] 한화 코치진에서 한용덕 코치와 함께 제몫을 하는 몇 안되는 인물로, 본인이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거포였던지라 빅 뱃 유망주들을 발굴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김인식 감독의 유망주 죽이기로 전혀 기용되지 못하던 송광민과 연경흠의 자질에 주목하고 그들의 기를 세워주려 했던 유일한 사람으로, 전임이었던 우경하 코치의 무능함으로 인해 타격폼이 무너진 김태완의 스윙을 교정했고 최진행을 1년 만에 30+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로 키워냈다.
이범호 역시 장종훈 코치가 달라붙어서 스윙시 팔꿈치가 떨어지는 문제점을 교정한 후로 타격 실력이 일취월장했었다.
다만, 장종훈의 선수 경력과 경험상 장타자를 키우는데는 능하나, 반대되는 스타일인 교타자의 육성에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단점이 항상 거론되었는데[19] 3년간 노력해서 육성법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고, 그 문제는 롯데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2016년 김문호가 한때 4할까지 쳐 봤지만 그 이후로 점점 타격 페이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특히 예전부터 지적된 퍼져나오는 스윙을 끝내 고쳐내지 못했다(이 문제는 손아섭도 마찬가지다).
4 기타 사항
4.1 오버 트레이닝의 피해자
손바닥 굳은살 깎아내기가 취미였다고...(진짜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이가 들며 서서히 하향세를 탔고 연도별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를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한 '엄청난 연습량'이 양날의 검이 되어 부상으로 그를 괴롭힌 면이 크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이나 스포츠물리학 따위는 없던 시절 엄청난 연습으로 몸을 스스로 망친 것이다.[20]
4.2 인성
촌놈이라 불릴 정도로 털털하고 꾸밈없는 성품이었으며, 사람좋고 인간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타석에서 성질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지 않았고, 선수였을 때는 선후배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코치가 되어서는 지도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공을 돌릴 정도로 인망이 높다. 한마디로 요즘 일컬어지는 대인배.
밑의 두 이야기는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 1994년 데뷔 시즌에 첫해부터 13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태평양 돌핀스의 최상덕. 데뷔 다음해인 1995년 6월 25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벌어진 대 한화 이글스전에서 선발 등판한 그는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앞니가 4개나 부러지고 잇몸이 찢어져 12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인플레이 상황이였기 때문에 1루에 가면 내야안타로 세이프였음에도 쓰러진 최상덕을 보고 너무 놀라 1루가 아닌 마운드로 곧바로 올라가 최상덕의 부상을 염려하며 살폈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고 말았다. 이후 최근, 장종훈 코치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어휴,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미안해 죽겠어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 1999년 7월 10일,대전구장, 쌍방울 레이더스 대 한화 이글스전. 투수는 선발등판한 쌍방울의 에이스 김원형. 타석엔 2회 선두타자로 나온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 김원형이 던진 2구째 공을 장종훈이 정확히 강타했다.
또 투수 정면타구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히 홈-투수-2루의 방향으로 라인드라이브로 나아가게 되었고, 투수 김원형이 이 무지막지한 파워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왼쪽 광대뼈에 금이 가고 코뼈가 함몰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투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투수의 얼굴에 맞은 공은 옆으로 흘렀다. 규정상 경기는 계속 진행 상태. 스톱이 아니다. 이런 경우 타자는 그냥 1루로 뛰면 내야안타로 세이프다. 그러나 그가 달려간 곳은 1루가 아니라 김원형이 쓰러져 있는 마운드. 그리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었다.[21][22] 일단 먼저 1루에 도착한 후에 타임을 걸고 투수에게 달려가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장종훈은 곧장 투수에게 질주해서 상태를 살폈다. 김원형은 그 후로 마운드에 있을 때 장종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항상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김원형은 이 때 맞은 타구로 인해 거의 1년간 그라운드에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전성기때 장종훈의 타구는 라이너성으로 그야말로 총알같이 날아갔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런 공에 얼굴을 직격당했으니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23] 그런 부상을 입힌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다니 김원형도 대인배지만, 그 사고 이후 장종훈이 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장종훈은 상기 제목에서도 언급된 바, 연습생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그와 함께 꼭 붙어다니던 것이 고졸 신화였는데, 사실 이 별명을 장종훈은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느 정도 유명해진 장종훈에게 대전광역시의 어느 4년제 대학[24]에서 입학제의가 들어왔는데,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던 아래의 사연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난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대학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 그런데 나마저 대학을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 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2005.7.3)
5 연도별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6 | 빙그레 이글스 | 1군 기록 없음 | ||||||||||||
1987 | 94 | 281 | .270 | 76 | 15 | 0 | 8 | 34 | 24 | 1 | 30 | .409 | .359 | |
1988 | 108 | 344 | .241 | 83 | 20 (5위) | 4 (3위) | 12 (10위) | 57 (6위) | 53 (10위) | 3 | 43 | .427 | .337 | |
1989 | 112 | 256 | .254 | 65 | 11 | 0 | 18 (4위) | 46 | 49 | 6 | 33 | .508 | .351 | |
1990 | 120 | 411 | .290 | 119 (6위) | 15 | 3 | 28 (1위) | 91 (1위) | 73 (2위) | 8 | 69 (2위) | .545 (1위) | .401 (4위) | |
1991 | 126 | 464 | .345 (3위) | 160 (1위) | 24 (6위) | 4 | 35 (1위) | 114 (1위) | 104 (1위) | 21 (8위) | 76 (1위) | .640 (1위) | .450 (2위) | |
1992 | 125 | 431 | .299 | 129 (10위) | 28 (2위) | 2 | 41 (1위) | 119 (1위) | 106 (1위) | 13 | 106 (2위) | .659 (1위) | .446 (3위) | |
1993 | 97 | 339 | .295 (8위) | 100 | 21 (9위) | 0 | 17 (3위) | 58 (8위) | 58 (8위) | 12 | 58 (5위) | .507 (3위) | .405 (2위) | |
1994 | 한화 이글스 | 79 | 243 | .267 | 65 | 11 | 3 | 10 | 34 | 33 | 5 | 36 | .461 | .365 |
1995 | 126 | 420 | .326 (2위) | 137 (5위) | 25 (8위) | 4 (9위) | 22 (2위) | 78 (5위) | 77 (5위) | 8 | 68 (3위) | .562 (1위) | .424 (1위) | |
1996 | 90 | 289 | .266 | 77 | 18 | 0 | 15 (10위) | 57 | 50 | 8 | 37 | .484 | .368 | |
1997 | 121 | 427 | .293 | 125 | 27 (10위) | 1 | 22 (7위) | 76 (6위) | 74 | 15 | 63 | .515 (8위) | .385 | |
1998 | 118 | 437 | .275 | 120 | 17 | 1 | 17 | 66 | 60 | 3 | 41 | .435 | .344 | |
1999 | 126 | 465 | .284 | 132 | 31 (9위) | 2 | 27 | 86 | 80 | 4 | 54 | .533 | .365 | |
2000 | 127 | 447 | .264 | 118 | 19 | 0 | 28 | 81 | 66 | 1 | 52 | .494 | .354 | |
2001 | 120 | 366 | .273 | 100 | 16 | 0 | 15 | 54 | 55 | 11 | 45 | .440 | .356 | |
2002 | 101 | 302 | .248 | 75 | 15 | 0 | 12 | 42 | 38 | 2 | 24 | .417 | .306 | |
2003 | 83 | 206 | .243 | 50 | 8 | 1 | 6 | 24 | 21 | 1 | 21 | .379 | .317 | |
2004 | 70 | 153 | .255 | 39 | 10 | 0 | 6 | 27 | 21 | 0 | 10 | .438 | .301 | |
2005 | 7 | 11 | .091 | 1 | 0 | 0 | 1 | 4 | 1 | 0 | 0 | .364 | .091 | |
KBO 통산 (19시즌) | 1950 (10위) | 6292 | .281 | 1771 (10위) | 331 (10위) | 25 | 340 (3위) | 1145 (3위) | 1043 (6위) | 122 | 866 (7위) | .504 | .377 |
역대수상 | |
년도 | 수상내용 |
1988년 | 골든글러브 유격수부문 수상 |
1990년 |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유격수부문 수상 |
1991년 |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지명타자부문 수상 |
1992년 | 프로야구 시즌 MVP 프로야구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부문 수상 |
1995년 | 골든글러브 1루부문 수상 |
6 장종훈이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
- 유격수 홈런왕(1990년)[25]
- 단일시즌 3할-30홈런(1991년)
- 단일시즌 100타점(1991년)
- 단일시즌 100득점(1991년)
- 단일시즌 40홈런(1992년)[26]
- 3년 연속 홈런왕(1990년~1992년)[27]
- 3년 연속 타점왕(1990년~1992년)[28]
- 3년 연속 최고 장타율(1990년~1992년)[29]
- 3개 포지션 골든 글러브 수상(1992년)[30]
- 단일 시즌 최고 장타율 4회 수상(1990~1992년, 1995년)[31]
- 통산 300홈런(2000년)[32]
- 통산 900타점(1999년)
- 통산 900득점(2000년)
- 통산 1,000타점(2001년)
- 통산 1,000득점(2002년)
- 통산 1,700안타(2002년)
- 통산 3,000루타(2002년)
- 통산 300 2루타(2002년)
- 통산 1,900경기 출장(2004년)
- 15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1988년~2002년)[33]
- 16년 연속 세자릿수 루타(1987년~2002년)
- ↑ 2012년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코치연수를 갔던 해이다.
- ↑ 신고선수시절 등번호는 52번, 흥미롭게도 2001년 입단한 1루수 김태균은 52번을 달고서 신인왕을 차지하더니 FA대박을 터뜨렸다.
- ↑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는 당시 프로구단의 육성 노하우와 인프라가 부족하고 특히 2군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고졸 유망주들이 기량을 갈고 닦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당시에는 FA제도도 없었고 선수생활을 10년 이내로 짧게 했는데다가 프로 선수라도 해도 대학을 나와야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그래서 장종훈은 한국프로야구 팀의 스타선수 중 거의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 ↑ 최초이자 마지막. 전성기 이종범은 물론 2003년 유격수 최초로 100타점을 달성한 홍세완이나 2014년 유격수 최초 40홈런을 기록한 강정호도 홈런왕은 차지해보지 못했다.
- ↑ 그 뿐 아니라 2차전 1회 선제 3점 홈런으로 4:3 승리를 가져왔고, 4차전은 1:1로 맞선 상황에서 결승 타점으로 기록되는 희생플라이를 쳐 2:1로 승리를 결정지었으며, 5차전 역시 결승 타점을 올렸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가 올린 4승 중 3승의 결승타의 주인공이었으며,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7타점은 양팀 타자를 통틀어 최고기록.
- ↑ MVP는 1승 3세이브를 기록한 구대성에게 돌아갔지만, 전체적으로 투수전 양상을 띈 한국시리즈였기에 타선에서는 그가 제일 좋은 활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그 마지막 홈런이 340호 홈런이다. 흠좀무, 이는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한다.
- ↑ 이후 2012년 7월 15일 이승엽이 장종훈과 홈런 통산 기록과 동률이 되었다가, 2012년 7월 29일 이승엽이 341호 홈런(한일 통산 500호 홈런이다)을 기록하면서 통산 홈런 3위로 밀려났다.
- ↑ 박종훈은 1959년생, 장종훈은 1968년, 김종훈은 1972년.
- ↑ 박종훈 - 1983년~1989년, 장종훈 - 1986년(연습생)~2005년, 김종훈 - 1994년~2007년.
- ↑ 물론 빙그레 4번 준우승, 한화 1회 우승과 맞 바꿔서도 해도 말이다.
- ↑ 칰무원들이 다 나가길 바랬던 한화팬들도 장종훈(간혹 이종범도)은 남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 ↑ 송진우와 정민철은 해설위원으로, 장종훈은 위의 설명대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을 하게 되어 팀내 영구결번들이 전부 한화를 떠났다.
- ↑ 박흥식 코치가 롯데에서 상대적으로 실적이 적고 김시진 사단의 삽질에 묻힌 것이지 커리어 상 한국에서 손꼽히는 타격코치인 것을 감안하면 장종훈 코치가 얼마나 호평받는지 알 수 있다.
- ↑ 사실 최진행, 김태완 등 거포 육성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도 많았으나 한화 드래프트 삽질과 2군 시스템의 폐해를 타격코치 혼자 뒤집어쓴 것이라는 동정론도 많다.
- ↑ 전임 박흥식 코치의 경우 높은 삼진율에도 불구하고 볼넷이 많아 볼삼비가 우수했다.
- ↑ 고등학교때 다들 4번을 치던 선수들이니만큼 기본적인 실력은 다 갖추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였다. 하지만 한화의 잉여들은...
- ↑ 고대감독하면서 뇌물먹고 수감된 우경하가 1군타코를 맡았었다.
- ↑ 그런데 원래 야수는 성장이 투수보다 더디고 프로수준이 워낙 높아져 신인은 3년 가까이 묵혀서 쓰는게 일반화된지 오래인 데다, 지금 한화 이글스의 그 안습한 선수진을 본다면 장종훈 코치를 깔 문제는 아니다.
- ↑ 장종훈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악바리 이정훈도 부상중에도 오히려 훈련량을 늘리는 오버트레이닝으로 몸이 망가지면서 쓸쓸히 은퇴한다.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렇게 사라져간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 ↑ 이 타석으로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 루머가 있는데, 성적과는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 자이언츠의 마해영이였다.
- ↑ 일반적으로 알려진 '타격 1위를 포기한' 일화는 최상덕 때일 가능성이 높다. 1995시즌 장종훈은 타격 2위였고(.326, 1위는 김광림 .337), 사고가 난 6월 중순에는 김광림, 김기태와 함께 타격 1위 경쟁을 하고 있었다.
- ↑ 그의 전성기때 한번은 장종훈이 친 타구를 유격수가 점프해서 캐치하려 하였는데, 그 타구는 유격수 글러브 위를 살짝 지나가 그대로 뻗어나가서 스탠드에 꽃혔다.
- ↑ 목원대학교.
- ↑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
- ↑ 장종훈 이후 타이론 우즈, 이승엽, 댄 로마이어, 찰스 스미스, 트레이시 샌더스, 박경완, 심정수, 호세 페르난데스, 이대호, 박병호, 강정호 등이 40홈런 고지를 밟았다. 그 중 이승엽은 무려 세 번이나 단일시즌 40홈런을 기록했다.
- ↑ 장종훈, 이만수, 이승엽,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
- ↑ 장종훈, 이만수,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
- ↑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
- ↑ 유격수, 지명타자, 1루수.
- ↑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
- ↑ 장종훈 이후 이승엽, 양준혁, 심정수, 박경완, 송지만, 박재홍, 이호준이 300홈런 고지를 밟았다.
- ↑ 장종훈, 양준혁만이 달성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