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התזמורת הפילהרמונית הישראלית, 영어: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관현악단.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악단이자 세계구급으로 쳐도 꽤 인정받는 메이저급 악단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1 연혁
1933년 나치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자, 독일 각지에서 반유대주의 운동이 격화되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은 공무원을 비롯한 각종 공직에서 강제 추방되었고, 관현악단 단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해직된 많은 유대인 단원들이 망명을 떠났는데, 그 중에는 팔레스타인으로 간 사람들도 꽤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해야 했던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브루니수아프 후베르만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연주자들을 모아 관현악단 하나를 결성했는데, 당시 '팔레스타인 교향악단' 으로 불리던 이 악단이 이스라엘 필의 직접적인 모체였다.
첫 정기 연주회는 본거지로 삼은 텔아비브에서 1936년 12월에 개최되었고, 이 때 지휘는 파시즘에 반대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맡았다. 이후에도 한 동안 상임 지휘자나 음악 감독 같은 수장 없이 객원 지휘 위주로 활동했지만, 극우 정권이나 2차대전을 피해 연합국이나 중립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여러 거물급 지휘자들이 자주 객원으로 출연했다.
종전 후인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악단 명칭도 지금의 것으로 개칭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객원 지휘만 받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여러 유대인 독지가들의 지원과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신예 혹은 중견 유대인 지휘자들의 지속적인 출연 등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실력과 수준이 향상되었고, 1957년부터 59년까지 프랑스의 장 마르티농을 음악 고문 자격으로 초빙한 것 외에는 특정 지휘자를 수장으로 영입하지 않았다.
1977년에는 인도 출신의 지휘자인 주빈 메타가 창단 이래 최초로 음악 감독 직함을 수여받았는데, 몇 년 뒤인 1981년에는 '종신 음악 감독' 으로 한 단계 격상되었다. 194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악단을 지휘했던 번스타인도 계관 지휘자 호칭을 받았고, 종전 후 처음으로 악단과 정기적으로 공연한 독일인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도 악단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아 1992년에 명예 객원 지휘자 직함을 받았다.
메타는 2010년 현재도 계속 직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악단과 해외 공연을 포함한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다.
2 특징
후베르만의 발의가 있기는 했지만, 직장과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망명해야 했던 연주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결성한 악단이라서 단결력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수장이 없던 뉴비 시절에도 특별히 합주력이 망했어요 상태로 뚝 떨어지는 일도 없었고, 특히 현악 파트의 연주력은 여느 세계구급 악단과 비교해도 최상위권을 다툰다는 평을 받는다.
창단 이래 여전히 유대인 단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멘델스존이나 말러 같은 유대인/유대계 작곡가들의 작품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 연주하고 있다. 물론 베토벤이나 브람스, 드보르자크 등 소위 '표준 연주곡' 들의 공연 빈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며, 녹음도 도이체 그라모폰이나 데카, EMI 등 메이저 음반사에서 꽤 많이 취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클래식 작품 위주로 연주하기는 하지만, 오덕계에서 어필할 만한 애니메이션의 OST를 녹음한 전력도 갖고 있다. 칸노 요코가 음악을 담당한 마크로스 플러스였는데, 뉴타입에 작곡자 본인이 연재한 수기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언급되고 있다.
상주 공연장으로는 1957년 이래로 텔아비브의 프레데릭 R. 만 강당이 이용되고 있는데, 이외에도 예루살렘의 인터내셔널 컨벤션 센터에서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3 바그너 음악 연주와 관련된 논쟁
아직도 이 악단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바그너의 음악인데, 사실 1936년에 토스카니니가 창단 연주회를 지휘했을 때만 해도 바그너 오페라에서 발췌한 관현악곡이 공연 곡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인 1938년에 악명높은 '제국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 사건[1]으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 행위가 자행되자, 나치가 끊임없이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 선전 대상으로 삼고 있던 바그너 음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유대인 사회에 확산되었다.
결국 이 사건과 뒤이은 2차대전,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자행된 홀로코스트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일 정도가 되었다. 비단 이스라엘 필 같은 국내 악단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을 방문해 공연하는 음악 단체들도 바그너 작품을 연주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 동의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고, 메타가 1981년에 지휘한 공연에서는 앵콜 곡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1막 전주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몇몇 단원들이 이에 반발해 연주를 거부하고 일부 청중들도 야유와 휘파람을 퍼붓는 등 격한 논쟁과 스캔들이 빚어졌다.
메타의 시도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바그너 음악을 공연 레퍼토리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지만, 바그너 자신의 중2병스러웠던 반유대주의 사고관과 그것을 엄청나게 부풀려 정치 선전에 악용한 나치, 그리고 그것에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의 트라우마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재 진행형인 문제라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바그너 음악에 관한 논쟁과는 별도로, 2차대전 후 가해 당사국이었던 독일과의 관계 개선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에는 번스타인이 악단을 이끌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순회 공연을 했고, 1990년에는 창단 이래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찾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화해와 평화를 위한 합동 공연' 을 개최하기도 했다.
- ↑ 1990년대 이후로는 '포그롬(유대인 박해)의 밤(Pogromsnacht)' 이라는 용어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