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유모레스크 No.7. 연주자는 Balazs Szokolay.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음악.
1 개요
풀네임은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년 9월 8일 ~ 1904년 5월 1일)
체코의 작곡가. 체코의 네임드 클래식 작곡가 중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본좌이자, 소위 '국민악파' 라고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민족주의 악파의 거두로 손꼽힌다.
이름에 ř라는 발음이 들어있는데, 굉장히 괴랄한 발음으로 대충 설명하자면, /r/(치경 전동음, 스페인어의 rr)과 /ʒ/(유성 후치경 마찰음, 영어 pleasure의 s)을 동시에 발음하는 느낌이다. 한글로는 어쩔 수 없이 ㄹ와 ㅈ[1]를 나눠서 표기하지만 체코어에서는 동시에 발음한다는 소리(...) řá를 정확하게 표시 안하고 알파벳 ra로 써버리면 누가봐도 드보락[2] 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표기이다. 자세한 내막은 치경음 항목 참조.
2 생애
프라하 근교의 시골 마을인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프란티셰크 드보르자크는 도축업이 본업이기는 했지만 치터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업을 잇게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아들 안토닌도 도축업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클래식 작곡가들 중 유일한 백정 도축업 자격증 보유자(…).
하지만 결국 안토닌은 음악을 본업으로 택했고, 1857년에 연주실기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해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동시에 작곡도 시작했고, 졸업 한 지 2년 뒤인 스무 살에 첫 현악 4중주를 작곡했다.
1860년대 중반에는 갓 설립된 프라하 국민극장의 부속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단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대선배인 스메타나로부터 작곡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권유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드보르자크는 이 시기에 두 곡의 교향곡을 쓰는 등 창작 쪽에서도 분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장에서 주는 월급은 집세 내기도 빠듯했고, 비올라 연주 외에도 생계 유지를 위해 중상류층 자제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나가야 할 정도로 현시창인 상태였다.
1873년에 결혼한 뒤 박봉과 격무에 허덕였던 극장 악단 연주자 생활을 청산하고 프라하의 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는데, 여전히 살림살이는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나마 봉급은 약간 더 후한 편이었고 매일같은 연주 활동도 없어서 작곡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주어졌다. 실제로 드보르자크의 작품들 중 중요한 초기작들은 대부분 이 해를 전후해 쓰여지기 시작했다.
1877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날리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슬리크는 당시 젖뉴비에 불과했던 자신이 쓴 음악을 당대 본좌였던 요하네스 브람스가 은근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슬리크의 중개로 드보르자크는 브람스를 직접 만났고, 브람스는 후배를 대단히 환대하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할 것을 종용했다. 심지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출판사 중 하나였던 짐로크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맺도록 주선까지 해줬다.
이듬해인 1878년에 바로 짐로크를 통해 피아노 3중주 제1번, 현악 4중주 제2번, 현악 합주를 위한 세레나데, 교향곡 제5번 네 작품이 출판되었고,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1880년에는 종교음악 분야에서 처음 나온 걸출한 대작인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가 초연되었고, 약 3년 뒤인 1883년에는 런던에서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직접 영국을 방문해 연주 여행을 할 정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90년에는 러시아에 가서 차이콥스키를 직접 만나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프라하 음악원에서는 작곡과 악기론 정교수 직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부터 전속으로 있던 짐로크 출판사와는 관계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인세 수입 등의 교섭이 자주 파토나기 때문이기도 했고 체코인임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던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자꾸 독일어식으로 악보에 기입하는 등의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짐로크에서 출판된 초판본 악보들 대다수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아닌 '안톤 드보라크(Anton Dvorak)'라고 표기하고 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뉴욕에 새로이 설립된 내셔널 음악원에 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면 강한 향수병에 시달릴 까봐 몇 차례 고사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거액이었던 연봉 15000달러가 음악원 측에서 제시되고, 짐로크와의 관계가 끊겨 수입이 급감할 것을 걱정했는지 결국 초빙 요청을 수락하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보르자크는 음악원장에 부임한 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 음악 전공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의 학생들도 물론 입학할 수 있었다. 한 예로 흑인 바리톤 가수 겸 작곡가인 해리 벌리(Harry Burleigh)는 당시 음악원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드보르자크는 이 때 들어온 학생들로부터 흑인 영가나 원주민 민요 등의 미국 토착 전통음악을 전수받는데 힘썼고, 이 때의 경험은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3],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 첼로 협주곡 등의 후기 대작들에 차례차례 반영되었다. 드보르자크는 흑인 영가나 아메리카 원주민 민요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라 극찬했고 미국 작곡가들은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보르자크의 발언처럼 현대 미국 대중음악의 대부분은 흑인 음악이 원류라고 할 수 있는데, 록과 메탈 등은 원류가 블루스, 힙합도 결국엔 흑인 음악이 원조이다. 재즈나 블루스는 말할 것도 없다.
1895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영국 등에 연주 여행가는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고국 체코에 정주하면서 실내악과 교향시, 오페라 작곡에 주력했고, 1901년에는 탄생 60주년 기념식이 국가 행사로 성대하게 열리고 프라하 국립음악원 원장에 추대되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초 건강 악화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비소카의 별장에서 요양했는데, 잠시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지만 결국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겹쳐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행해졌고, 유해는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 교향곡, 현악 4중주, 협주곡 등 절대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여러 편의 표제가 달린 연주회 서곡, 5편의 교향시를 짓는 등 표제음악도 적지 않다.
- 체코 모음곡, 슬라브 춤곡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 많다.
3.1 교향곡
- 교향곡 1번 C단조 '즐로니체의 종' (1865)
- 교향곡 2번 B플랫 장조 (1865)
- 교향곡 3번 E플랫 장조 (1873)
- 교향곡 4번 D단조 (1874)
- 교향곡 5번 F장조 (1875)
- 교향곡 6번 D장조 (1880)
- 교향곡 7번 D단조 (1885)
- 교향곡 8번 G장조 (1889)
- 교향곡 9번 E단조 '신세계로부터' (1893)
3.2 관현악곡
- 7개의 간주곡 (1867)
- 비극적 서곡 (1870)
- 연주회 서곡 F단조 (1871)
- 교향시 F단조 (1874)
- 교향 변주곡 (1877)
- 3개의 슬라브 광시곡 (1878)
- 체코 모음곡 D장조 (1879)
- 축전 행진곡 (1879)
- 프라하 왈츠 (1879)
- 폴로네즈 E플랫 장조 (1879)
- 프라하 학생들을 위한 폴카 (1880)
- 갈롭 E장조 (1881)
- 나의 집 서곡(1882)
- 스케르초 카프리치오소 (1883)
- 후스교도 서곡 (1883)
- 자연 속에서 서곡 (1891)
- 사육제 서곡 (1891)
- 오텔로 서곡(1892)
- 교향시 '물의 정령' (1896)
- 교향시 '한낮의 마녀' (1896)
- 교향시 '황금 물레' (1896)
- 교향시 '산비둘기' (1896)
- 교향시 '영웅의 노래' (1897)
3.3 관악, 현악합주곡
-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1875)
-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1878)
-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 B장조 (1875)
3.4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G단조 (1876)
-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1879, 1880년과 1882년 두 차례 개정)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마주레크 E단조(1879)
- 첼로 협주곡 A장조 (1865)
- 첼로 협주곡 B단조 (1894~95)
3.5 실내악
- 현악 5중주 1번 A단조 (1861)
- 현악 4중주 1번 A장조 (1862)
- 현악 4중주 2번 B플랫 장조 (1869)
- 현악 4중주 3번 D장조 (1869-70)
- 현악 4중주 4번 E단조 (1870)
- 피아노 5중주 1번 A장조 (1872)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F단조 (1873-77. 1877년 바이올린과 관현악용 편곡)
- 현악 4중주 5번 F단조 (1873)
- 현악 4중주 6번 A단조 (1873)
- 현악 4중주를 위한 안단테 아파시오나토 F장조(1873)
- 현악 4중주 7번 A단조 (1874)
- 현악 5중주 2번 G장조 (1875)
- 피아노 4중주 1번 D장조 (1875)
- 피아노 3중주 1번 B플랫 장조 (1875)
- 현악 4중주 8번 E장조 (1876)
- 피아노 3중주 2번 G단조 (1876)
- 현악 4중주 9번 D단조 (1877)
- 현악 6중주 A장조(1878)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1878)
- 현악 4중주 10번 E플랫 장조 '슬라브' (1878-79)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폴로네즈 A장조 (1879)
-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 (1880)
- 현악 4중주 11번 C장조 (1881)
- 피아노 3중주 3번 F단조 (1883)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D단조(1884)
- 단악장 현악 4중주 F장조 (1885)
- 피아노 5중주 2번 A장조 (1887) [4]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3중주 C장조 (1887)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미니어처 (1887)
- 피아노 4중주 2번 E플랫 장조 (1889)
- 피아노 3중주 4번 E단조 '둠키(Dumky)' (1890-91)
-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가보트 (1890)
- 4대의 트럼펫과 팀파니를 위한 팡파르 (1891)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론도 G단조 (1891)
- 현악 4중주 12번 F장조 '아메리카' (1893)
- 바이올린 소나티나 G장조 (1893)
- 현악 5중주 3번 E플랫 장조 “아메리칸” (1893)
- 현악 4중주 13번 G장조 (1895)
- 현악 4중주 14번 A플랫 장조 (1895)
3.6 피아노곡
- 물망초 폴카 C장조 (1856)
- 2개의 미뉴에트 (1876)
- 둠카 D단조 (1876)
- 주제와 변주곡 (1876)
- 슬라브 춤곡 제1집 (1878, 피아노 연탄곡. 같은해 관현악용 편곡)
- 6개의 피아노 소품 (1880)
- 10개의 전설 (1881, 피아노 연탄곡. 같은해 관현악용 편곡)
- 모데라토 A장조 (1881)
- 즉흥곡 D단조 (1883)
- 피아노 연탄을 위한 6개의 소품 '보헤미아의 숲으로부터'(1883, 헨크 데 플리헤르가 관현악으로 편곡함)
- 둠카 C단조 (1884)
- 유머레스크 F샤프 장조 (1884)
- 슬라브 춤곡 제2집 (1886, 피아노 연탄곡. 이듬해 관현악용 편곡)
- 2개의 작은 진주들 (1887)
- 8개의 유머레스크 (1894)
- 아메리카 모음곡 A장조 (1894, 관현악으로 편곡됨)
- 2개의 피아노 소품 (1894)
3.7 가곡
- 바리톤과 피아노를 위한 2개의 가곡(1865)
- 18개의 가곡 '사이프러스(Cypřiše)' (1865, 1887년 열두 곡 발췌해 현악 4중주용 편곡)
- 4개의 가곡 '모라비안 듀엣' (1875)
- 소프라노와 알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 제1집 (1876, 총 다섯 곡)
- 소프라노와 알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 제2집 (1876, 총 아홉 곡)
- 가곡 '저녁 노래' (1876)
- 소프라노와 알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 (제3집) (1877, 총 네 곡)
- 가곡 '아베마리아' (1877)
- 7개의 가곡 '집시의 노래(Cigánské melodie)' (1880, 독일어 가사)
- 2개의 저녁 노래 (1882)
- 2개의 체코의 시 (1885)
- 10개의 가곡 '성서의 노래(Biblické písně)' (1894, 이듬해 독창과 관현악용 편곡)
- 자장가 (1895)
3.8 합창곡
- 스타바트 마테르 (1876-77)
- 오라토리오 '성 루드밀라(Svatá Ludmila)' (1885-86)
- 체코 농민의 송가(頌歌) (1885)
- 미사 D장조 (1887)
- 레퀴엠 B플랫 단조 (1890)
- 테 데움 (1892)
- 축전 노래 (1899)
3.9 오페라
- 알프레드 (1870)
- 고집스러운 정부(情婦) (1874)
- 반다(Vanda) (1875)
- 영리한 농민 (1877)
- 디미트리(1881~2)
- 왕과 숯쟁이(1887, 최종 개정)
- 야코빈 (1888)
- 루살카(Rusalka, 1900)
- 아르밀다 (1903)
4 창작 성향
관현악단 연주자 생활을 오래 한 탓인지, 관현악을 구사한 작품이 꽤 많다. 피아노곡이나 실내악 중에도 관현악용 혹은 관현악 반주를 붙여 편곡한 곡들도 있으며, 자신의 장기 악기들이었던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가 들어가는 현악 위주의 실내악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연주 수업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인지, 초기 작품들에는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여러 결함이 발견된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슈베르트나 멘델스존 등 초기 낭만파 선배들의 강한 영향이 엿보이며, 아직 고향의 전통음악 어법 응용 같은 면모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짐로크에서 출판을 시작한 1870년대 후반 이후의 작품들은 주목할 만한 역작이 많으며, 1880년대 초반에는 그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보헤미아(체코어로는 체히)와 모라비아(체코어로는 모라바) 지방이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나마 자치를 허용받기 시작하면서 드보르자크도 애국심을 발휘한 작품들을 과감히 내놓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동안은 고향인 체코의 전통음악 외에 이웃 국가나 지방들인 폴란드나 헝가리,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지방 전반의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전통음악 어법에 대한 탐구는 피아노 3중주 '둠키' 나 슬라브 춤곡집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890년대 초중반의 미국 생활 중에는 그 쪽 전통음악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등 음악에 대한 식탐은 굉장했던 모양이다.
다만 오페라 영역에서는 '루살카' 빼면 대부분 범작 아니면 졸작, 심하면 괴작으로까지 까이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드보르자크가 오페라라는 장르를 홀대하거나 얕본 것은 절대 아닌데, 마지막 작품도 오페라 '아르밀다'였을 정도로 이 장르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드보르자크의 오페라들이 실패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작곡가가 대본 작가를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개나 소나 대본 갖다주면 그대로 작곡하는 닥돌 스타일이었으니, 오히려 음악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오페라가 망했어요 상태가 되면 즉시 때려치고 딴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왕과 숯쟁이(Král a uhlíř)'에서처럼 그 절망적인 대본을 그대로 붙잡고 아예 음악을 새로 쓰거나 전면적인 개작을 단행하는 지경에 이른 파란만장한 사례[5]도 있다. 1871년에 처음 완성된 건 극장 지휘자였던 선배 스메타나로부터 연주 불능이라고 반납당했고, 1874년에 완전히 새로 작곡한 것은 평은 좋았지만 이번엔 드보르자크 자신이 성에 안 찼는지 1887년에 대본 일부 개정을 포함한 대규모 개작을 단행했다. 그야말로 캐근성.
모든 오페라의 대본이 비교적 마이너한 언어인 체코어로 쓰인 것도 국제적인 보급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데, 그나마 루살카는 독일어 등 다른 언어로 번안되어 외국에서 여러 차례 공연되어 명성을 유지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원어 중시의 바람이 불면서 외국에서도 체코어 그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살카 빼고 다른 작품은 여전히 상연이 안되든가 극히 뜸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안습. OTL
상대적으로 라틴어로 된 가사를 쓰는 종교음악 분야는 그나마 오페라보다는 훨씬 국제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스타바트 마테르 이후로 작곡된 대규모 종교곡들은 대부분 지금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가곡 중에서는 독일어로 작곡된 가곡집 '집시의 노래' 중 네 번째 곡인 '내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Als die alte Mutter sang)'가 명곡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5 사생활
비교적 안정적인 도축업을 포기하고 음악인의 길을 과감히 선택했다고는 해도, 초기에는 생애 란에 쓴 것처럼 그야말로 인간극장 삘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난로나 화덕에 불 지필 종이가 없어서 자기가 썼던 곡의 악보를 불쏘시개로 쓰는 등 그야말로 안구 건조증에 직효인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
하지만 곡이 연주가 되든, 출판이 되든, 혹은 둘 다 안되고 불쏘시개로 쓰이든 간에 드보르자크는 정말 열심히 작곡에 임했고, 이러한 근면함은 생애 후반에도 계속 이어졌다. 주변인들이 보기에는 낭만적인 음악인보다는 부지런하고 다소 고지식한 농사꾼 같았다는데, 실제로도 프라하 같이 번잡한 도시보다는 고향이었던 넬라호제베스나 별장을 지어놓았던 비소카 같이 고즈넉한 시골에서 지낼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극장 일로도 돈이 한참 부족해 피아노 레슨을 늘 뛰어야 했던 초짜 시절에는 첫사랑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레슨 제자들 중 요제피나 체르마코바라는 미녀와 눈이 맞은 것이었다. 드보르자크는 요제피나에게 가곡집 '사이프러스'도 써바치고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 마음을 얻지 못하고 차이고 말았다. 후새드. 그 대신 요제피나의 여동생이었던 안나 체르마코바와 1873년에 결혼에 성공했는데, 어찌 보면 좋아하던 여자랑 연애에 실패하고 그 여자의 여동생과 결혼한 모차르트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드보르자크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고, 유년기에 사망한 셋을 빼고도 여섯 아이들을 남겼다.[6] 바람피우는 일도 절대 없었다고 하는데,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강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듯하다.
6 사후의 영향력과 평가
드보르자크가 생전에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 중에도 작곡가로 성장해 20세기 체코 음악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례가 많으며, 사돈까지 되었던 요제프 수크 외에도 비테슬라프 노바크, 오스카르 네드발, 프란츠 레하르 등이 문하의 유명한 제자들로 손꼽힌다. 제자는 아니었어도 후배들인 야나체크와 마르티누 같은 작곡가들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성을 경애할 정도로 광범위한 존경을 받았다.
1904년에 타계한 뒤로도 계속 체코 음악의 국부로서 존재감을 과시해오고 있지만, 꼭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선배였던 스메타나를 높이 평가하는 쪽에서 늘 태클을 걸어왔다고 하는데, 특히 2차대전 이후 체코가 슬로바키아와 통합해 사회주의 체제가 된 후 알게 모르게 드보르자크까들이 친소 성향의 초기 실권자들과 결탁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요직을 차지해 드보르자크를 '스메타나의 모방자' 정도로까지 폄하하는 병크를 저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론은 해외 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국내에서도 까가 빠를 만든다는 법칙에 따라 더 큰 반대 여론에 직면했고, 음악학자 야르밀 부르크하우저 등이 드보르자크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출판을 과감하게 행하면서 이내 묻혀버렸다. 드보르자크 생전에는 불과 다섯 곡만 출판되었던 교향곡들 중 미발표/미출판작들의 악보가 발견되고 작곡 연대가 판명되어 현재의 번호로 수정된 것도 이 시기였고, 소실 작품과 편곡 작품 등 거의 모든 곡의 목록화나 초판본의 인쇄 오류를 수정한 새로운 드보르자크 전집 악보 발간도 대부분 1960~70년대에 완료되었다.
7 그 외
- 극렬 철덕으로 유명하다.[7] 당시 운행하던 거의 모든 열차의 차종과 제원, 분류 번호, 노선도, 시각표 등을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미국에서도 수업 도중에 '기차 들어오는 거 보러 가야 되니까 오늘은 휴강'이라면서 기차역으로 뛰어갔다는 일화까지 있다. 그 유명한 유모레스크의 초반 멜로디는 열차 바퀴가 레일에 닿으면서 나는 소리에서 따왔고,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의 도입 부분,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바바바~' 하면서 점점 빨라지고 높아지는, 죠스바 광고에 나오는 그것은 증기기관차의 발차 소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도 한다.
- 애니메이션 가이킹 대공마룡의 전설에서는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초마룡 드보르작이라는 게 나오기도 했다. 얼핏 보면 이름만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놈이 등장할 때의 BGM이 이 사람이 작곡한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이었던 데다가 이 곡이 흐를 때에 나온 등장 대사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자!"였다.
시대를 초월한 고인능욕?
- 문명 4에서는 플레이어의 문명이 산업 시대로 들어서면 드보르자크의 작곡이 BGM에 대량으로 등장한다. 브람스나 베토벤도 등장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드보르자크가 많이 나온다. 목록은 여기서 참조.
요하네스 브람스보다 1곡 많은데?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르네상스 시대 음악의 2/3를 차지한다.현대 음악은 전부 다 존 애덤스#s-2 꺼다.특히 슬라브 춤곡이 총 4곡 등장하는데, 이중 제2집 2번 e단조 작품번호 72-2가 는 애수에 찬 멜로디가 일품인 곡으로, 문명 시리즈를 플레이해보고 나서 원곡을 찾아보는 플레이어들도 적지 않다. 혹시 정말로 그 곡 찾으러 이 페이지 들른 분들을 위하여...
- 소설가 이외수는 오래 전 어느 신문에 중편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 소설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잠시 언급했다. 그러나 교정부에서 그 음악을 '드보르'라는 사람이 지은(作, 지을 작) 음악으로 잘못 이해해서 '드보르 작' 신세계 교향곡으로 고쳐 놓는 병크를 터뜨렸다. 이외수는 잘못된 교정을 발견하고 '드보르작'으로 바로잡았으나 막상 연재가 시작한 후 다시 확인한 결과 교정부에서 또 고쳐서 결국에는 '드보르 작'으로 인쇄되어 있었다고 한다.
- 그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신세계 교향곡)의 4악장은 죠스의 상어 등장시의 배경음과 유사해서 종종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죠스의 등장음악은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곡이다.
- 대한민국 초딩들이 음악시간에 가장 먼저 배우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오르트의 '시계포'가 3학년 1학기,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가 2학기에 나온다.
최근 음악시간은 어떤지 현업 교사 위키러가 수정바람
- 미국 뉴욕에 있는 Julliard School of Music을 세운 장본인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