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기동군

냉전 당시 소련군의 최종필살오의

러시아어: Оперативная маневренная группа
폴란드어: Operacyjna Grupa Manewrowa
영어: Operational Maneuver Group

1970년대 말-소련 붕괴 직전까지 존재했던 소련군의 전략적-작전술적 공세에 운용되는 기동 부대 개념. OMG로 약칭되기도 한다.

1 개요

소련의 종심작전 이론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전차군이나 전차 사단 같은 기동화된 제대가 적 전선에 형성된 돌파구를 통해 종심깊이 천입, 적의 전선복구 시도를 좌절시키고 적 병력과 급속히 섞여들어가 적의 핵무기 사용을 주저하게 만들며 C4I 체계나 보급소, 전술핵무기 등의 전략적-작전술적 목표를 타격하며, 궁극적으로 적을 포위하고 후방지역을 점령함으로서 정치적 타격을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단에서 야전군 수준의 특수 임무군을 말한다.

2 용어의 기원

작전기동군 개념은 1970년대 말에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총국 국장이었던 마흐무트 가레예프 상장이 만들었다. 가레예프는 이 개념을 당시 총참모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원수에게 전달했고 오가르코프는 군의 다른 인물들과 논의를 거치며 이 개념을 채택했다.[1] 하지만 당시 이 개념을 파악했던 서방 군대는 이게 소련군의 공식적인 개념인지 몰랐다. 당시 서방 군대들이 입수할 수 있었던 소련군의 문건에는 작전기동군 용어가 일절 언급되지 않았고 대조국전쟁기에 사용된 ‘기동 집단’(маневренная группа) 용어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작전기동군의 존재를 서방측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인 크리스토퍼 도넬리의 기사 「작전기동군: 나토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서 도넬리는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일원이었던 폴란드군의 문건들에서 작전기동군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2] 또 1970년대부터 소련군의 <군사사 저널>이나 <군사 사상>같은 군사 문건들에서 대조국 전쟁(독소전쟁) 시기의 재래식 기동 작전이 지속적으로 재조명되고, 소련군의 기동훈련에 이를 반영한 변화를 보이면서 서방 측의 문건들에서는 작전기동군이 공식 용어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명기했지만 그것이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새로운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야 작전기동군 용어가 공식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2004년판 러시아 군사 백과사전에도 실리게 되었다.

3 등장 배경

서방에서 작전기동군을 주목한 이유는 1950년대 이후 소련군에서 다시 재래식 기동전이 조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대조국 전쟁 시기에 소련군은 적의 방어가 공고할 시 제1제파인 제병협동군 충격 집단이 돌파구를 형성하면 그 돌파구로 제2제파로 기계화된 기동 집단을 투입하여 전술적 성공을 작전술적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4] 이 제2 제파는 작전술적 수준에서는 전차군과 기병-기계화 집단, 작전술적-전술적 수준에서는 전차 군단, 기계화 군단, 기병 군단으로 구성되어 전과확대와 적의 포위를 담당했다. 이때 충격 집단과 기동 집단의 역할과 운용 개념은 명백히 달랐다.

하지만 1950년대에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군의 편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지상군 사단을 전차 사단과 차량화 소총병 사단으로 이원화하면서, 종래 소련군이 운용했던 방법은 더 이상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일반 소총병 사단이 전부 기계화되고 보유 전차 숫자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딱히 충격 집단과 기동 집단을 나눠서 운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5] 그리고 또한 니키타 흐루쇼프의 집권과 군사교리 수정 이후 소련군은 미래의 전쟁은 핵전쟁이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재래식 전력의 역할은 핵전쟁 이후의 적 잔존 세력 정리와 적지 점령 등으로 제한될 거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재래식 전력을 감축시키고 관련된 작전술적인 발전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6] 흐루쇼프가 축출된 이후에 과도하게 재래식 전력을 평가절하 했다는 비판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장차전이 핵전쟁이 될 거라는 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소련군이 지상군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변함없었으며 핵무기 양산은 미국이 소련에 대한 완전한 핵 우위를 확보하기 전까지만 지속되었다. 그러나 핵 우위의 성과가 시들해지자 미국은 핵 보복 전략에서 더 매력적이고 가능한 전통적인 개념을 다시 내보였다. 소련 군사 과학에서 이러한 전환은 고전적인 재래전이 한동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첫째로 이 생각은 소련이 미국의 핵 능력을 전략적, 작전술적, 전술적 수준에서 재평가하게 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세계가 핵의 위협에 둘러싸이게 되자 핵 감축이 세계적인 정치 경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핵무기를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면 전부 폐기하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소련이 더 잘하고 익숙한 재래전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소련 군사 이론가들은 적의 핵무기 사용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적의 핵무기를 이용하고 최소한 적의 핵공격을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았다. 특히 전략적, 작전술적, 전투 기술의 유형은 적이 핵무기를 비이성적으로 사용하게 만들 것이었다.

소련 이론가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일반적인 재래적 선택과 작전술적 수준의 전쟁이었는데, 특히 작전술적 기동의 연구에 노력을 쏟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동안에 그때까지 조금씩 꾸준히 나오던 작전술적, 전술적 기동에 대한 연구는 이 시기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유럽 전역에서의 핵 위협은 연구를 강화시켰다. 만약 적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적의 대규모 기동 부대가 소련의 후방으로 쏟아져 들어가거나 적의 제2 제파가 최초의 돌파 작전을 지원하고 침투를 수행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군 이론가들은 적의 핵무기 투사를 무력화시키거나 최소화시킬 방법을 찾았고 이 연구에 기초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을 도출했다. 이론가들은 처음에는 고전적인 항공 공세(1942년 말에 개발된)로 공세를 가해 적 핵무기를 파괴하고 부분적으로 적 포병, 미사일, 항공 체계를 전선항공군에서 적 후방으로 침투하여 파괴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지상군을 '대핵 기동'(противоядерный маневр)로 전개하여 처음에는 방어 기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이론가 표도르 스베르들로프 대령에 의하면, 대핵 기동은 이렇게 정의된다.

"적의 핵 투사 상황에서 부대의 생존과 행동의 자유를 얻어 적에게 공세를 하기 위한 핵공격 회피나 생존에 초점을 맞춘 조직적 이동이다. 그리하여 대핵 기동은 기동의 한 형태다."

하지만 곧이어 공세 방법은 "하부 부대를 깊이 분산시키거나 공세 방향을 바꾸고 대량 파괴 무기에 맞서 방해하는 방법을 수행하는 것"으로 기동을 방어적인 면에서 설명했다.

스베르들로프의 저작과 다른 군사 이론가들의 저작은 가장 대핵 기동에 효과적인 기동 수행 방법은 더 거대한 작전술적, 전술적 기동에 달려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했다. 소련군 이론가들은 1970년대 동안 대핵 기동 용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대핵 기동 개념을 방어와 공격에 적용시켰다.[7] 이러한 배경 아래서 순수한 재래식 전력만으로 미래의 전쟁을 수행할 거라 전망이 대두된 가운에 그러한 방법의 일환으로 작전기동군이 탄생한 것이다.

4 운용 방법

현대전에 알맞은 기동 집단 개념에 대한 더 구체적인 언급은 폴란드군의 보이치에흐 미할라크(Wojeiech Michalak) 소령이 쓴 소논문에서 나왔다.

"현대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넓은 정면이나 선정된 축선에서의 충돌 발생
(b) 군의 높은 기동성
(c) 증원 병력의 지속적인 지원의 가능성
(d) 핵무기의 대규모 사용 가능성
(e) 적의 작전술적 대형 종심 전체에 압력을 가할 능력
그래서 공세 작전의 성공은 적에게서 위에서 언급한 능력을 제거해야 하고, 무엇보다 전투의 재래식 단계 동안 적의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병력을 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만들고 있으며 그래서 적의 대형의 응집을 무너트려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적의 생존과 전투 능력에 핵심적인 목표나 요소를 파괴하는 걸로 달성되어야 한다. 지난 전쟁의 전훈 분석에 기초해 볼 때, 현대 전장에서 습격 활동을 하는 분견대와 작전행군집단(뒤에 미할라크는 이걸 작전기동군으로 표기했다)의 재등장이 필요하다. 작전행군집단은 소비에트 군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광범위하게 사용한 기갑 부대로 형성된 소위 고속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행군집단과 습격 분견대의 작전술적 활동의 공통된 특징은 제한된 시간 내에 본대에서부터 이격되어 적 후방으로 종심 깊게 침투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결과적으로 행군집단과 습격 분견대는 본대와 밀접히 공조하더라도 본대에서부터 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하며 항상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부대는 적이 핵미사일 기지, 지휘소, 전자전 장비와 방공 무기를 파괴하는 게 주 목적이다. 행군집단과 습격 분견대는 적 후퇴의 후퇴를 차단하고, 적의 예비대가 후방 지역에서 전선으로 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적의 보급 체계를 마비시키고, 중요한 지역과 목표를 본대가 접근할 때 까지 점령하는데도 운용될 수 있다."[8]

작전기동군은 기본적으로 고도로 기계화되고 기동화된 전력으로 전선군과 야전군 안에서 특별히 편성되고 조직된다. 작전기동군은 대조국 전쟁 때의 기동 집단처럼 적의 방어 종심에 돌파구를 뚫린 곳이거나, 아니면 적 방어가 취약한 곳에 투입되어 적의 방어 종심과 그 후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전술적 성공을 작전술적으로 확대하고, 더 나아가 전략적 수준까지 성공을 확대하는 전력으로 다른 부대와 구분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9] 그리고 또한 한 축선에만 투입되는 것이 아닌 복수의 축선이나, 아니면 전선 전체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투입된다. 전략방면군[10]에서는 전차집단군[11], 전선군[12]에서는 전차군[13], 야전군[14]에서는 전차사단이 그 역할을 맡는다. 물론 단순히 편제 자체만 투입되는 게 아닌 추가적인 지원이 따라붙는다. 이 때 작전기동군은 대조국 전쟁 때와는 달리 제 1 제파에 거의 근접하게 투입되는데. 당시 소련군은 주로 기갑 세력인 제 2 제파를 제 1 제파와의 간격을 너무 벌려서 배치하면 적의 핵공격에 제일 먼저 파괴될 거라고 보고 있었고, 또한 당시 “전쟁의 초기 시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공세에 성공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빠르고 기습적인 기동 부대가 전방에서 단기간에 모든 중량을 투입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의하면 대조국 전쟁 당시에는 요긴하게 쓰였던 대규모 기동 예비는 필요가 없어졌고 전략적, 작전술적인 단일 제파만이 다양한 작전술적, 전술적 기동 부대로 전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5]

소련군의 공세 작전의 정확한 특성은 적 방어의 전력과 종심에 따라 결정된다. 준비가 잘 안된 방어를 공격할 때(적이 오직 엄호 전력만 전개시켰다면), 야전군, 사단, 그리고 연대의 선견대들이 공격을 개시해, 적의 엄호부대 지역을 돌파하고 적의 주방어선을 먼저 점령한다. 적이 부분적으로 방어를 취하고 있으면(엄호부대가 있고 적이 부분적으로 주방어선을 전령하고 있을 때) 야전군과 사단 선견대들이 강력한 화력의 지원을 받으며 경계 지대를 극복하고 적의 강력하고 계속되는 방어를 앞질러 가서 적 주 방어 지역으로 침투해 주력 부대의 제대들과 작전기동군들의 투입을 촉진한다.

준비된 적 방어(적이 방어 진지에 완전히 들어와 있음)를 상대로 공세를 하면, 주력 부대 제대들이 적 엄호부대 지역과 주 방어구역 모두에 공격을 하며 완전한 포병 공세와 공습의 지원을 받는다.몇몇 경우 사단 선견대들이 적 경계 지역이나 주요 전투 지역 내에 있는 특정한 목표들에 대한 후속 공격을 개시한다. 진격이 예정되어 있는 야전군과 사단 선견대들은 대게 제2 제파로 남아 돌파 작전이 거의 끝나기까지 대기한다. 이후 선견대들은 전투에 투입되어 전술적 기동을 하여 작전술적 종심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야전군과 전선군 작전기동군들의 후속 투입에 용이한 조건을 만든다.[16]

작전기동군은 투입되는 동시에 최대한 빨리 적의 방어 전력과 섞여 들어간다. 그걸 통하여 적이 소련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전술핵 사용이 아군의 피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을 망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7] 그리고 대조국 전쟁 시기의 기동 집단과 달리 작전기동군이 우선적으로 달성하는 목표는 적의 지상 전력의 포위와 섬멸이 아닌 적의 핵미사일 기지나 지휘통제 시설을 목표로 진격한다. 폴란드군의 라헤비츠(Lachewicz) 대령과 라이만스키(Rajmanski) 대령은 작전기동군을 다룬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작전기동군의 전개 목표는 적 대형 후방으로 전투의 초점을 돌리고, 다른 수단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중요한 목표(핵무기 기지, 지휘통제 시설 등)를 파괴하고, 적에게서 혼돈과 와해를 일으키고, 적의 기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적의 행동의 효과를 제한하는 것이다."[18]

작전기동군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전선항공군의 30% 이상을 지원받고 상당한 수준의 공중강습 전력을 지원받는다. 작전기동군은 우선 장악할 목표인 적의 핵무기 시설 등의 점령과 파괴가 성공하면 적의 지상 전력을 목표로 하여 계속해서 적 전력을 분산시키고, 진격로 중간에 있는 적 방어를 극복하며 재배치되고 있는 적 예비대를 파괴한다. 그 동안 전차 연대를 근간으로 특별히 편성된 선견대들은 작전술적 기동 전력과 본대 사이에 핵심적인 연결을 제공하고 전체 공세에 응집력을 부여한다. 공세 전체에 걸쳐 중대부터 여단에 이르는 전술적 공중강습 전력들이 기동 전력과 공조를 한다. 공중강습 전력은 항공 제파를 구성해 헬기로 수직 화력지원을 하고 지상군 제파들의 지원 수단이 된다.[19]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적 지상 전력의 완전한 포위와 섬멸로 귀결된다.

4.1 요약 및 정리

시작은 2차대전 당시의 기병-기갑 복합 편제 부대에서부터인데, 넓은 러시아 땅을 배경으로 해서 빠른 기동력을 통해 독일군의 방어선에 뚫린 돌파구로 들어간 다음 방어선 후방에서 위험하지만 빠른 기동을 통해 보급과 적 기동을 저해했었던 역사에서 시작된다. 작전적 기동성을 위해 기갑부대를 중핵으로 편성되며, 돌입 후 일체의 전투지원부대의 동행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

여기서 식량같은 것은 전투식량이나 현지조달로 해결하더라도, 현대전의 군대가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량 말고 다른 자원도 보급받아야 한다, 소련은 이 문제를 탄약 및 연료를 전량 공중보급한다는 결정으로 해결했다. 소련군 작전교리에서도 작전기동군(OMG)에 대한 항공엄호 및 보급을 위해서 전선항공군 전력의 50퍼센트 이상을 할당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돌파구는 적어도 1개 군 이상의 집중 운용을 통해(안되면 전술핵을 쏴서라도) 뚫어내며, 뚫린 돌파구로는 적어도 1개에서 3개 이상의 전차 사단을 투입하는데, 이 투입 규모는 (전선의 군집단 규모 기준에서)전차군(구소련 편제상 4개 전차사단으로 편성), 심지어 전차군 2개로 편성되어 전선급 규모의 전차부대를 운용하고, 지휘관 역량에 따라 타 제대로부터 전차사단은 물론이고 전차군까지도 끌어오는 전차집단군(!!!)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이러한 투입은 (전차군에 한해)전선군사령관 혹은 전략방면군사령관[20]이 택할 수 있는 공격 전술의 하나로써 언제든지 선택 가능한 전투교리의 일부일 뿐이었다. 투입된 기갑부대는 저항을 최대한 무시하면서 종심 자체를 뚫고 지나가 후방의 전략목표까지 돌격하게 된다.역시 전차덕후들....

즉 상대하는 NATO 입장에서는, 후방 예비로 앉아있는 전차 사단이 돌파구 확대를 위해 쓰일 지, 공세종말점을 대비해 준비된 건지, 작전기동군(OMG) 투입을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모두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쪽의 답도 전술핵. 핵전쟁 플래그

5 마비를 추구한 개념이었나?

이전의 본 문서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여기서 적 후방지역이라는 개념은 전선 후방이 아닌, 전선에서 몇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말 그대로의 후방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작전적, 전략적 목표를 탈취하여 적군을 심리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함이다. 수도나 사령부, 보급물자 집적소, 기타 중요 대도시 등의 여러 정치적, 전략적, 작전적 중요 목표를 탈취당했다는 소식은 일선 병사들에게 무력감과 사기저하를 안겨준다. 제2차세계대전 초반 프랑스 침공에서 나치독일군의 고속기동에 유린당한 프랑스군이 바로 이런 심리적 공황에 빠져들어 자멸했다. 물론 독일군의 기동전 교리에서는 이건 모두 부가 조건이었고 진짜 목표는 물리적인 적군의 섬멸이었다.

이는 구 소련군의 기동전 교리가 목표로 하는 마비개념을 '전쟁 자체'에 적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확장했다고 보면 되며 독일군의 섬멸전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에서 해석해야 한다. 독일군의 교리는 "모든 적을 때려부순다"에 가까우며, 기동은 전투를 목적으로 한다. 반면 구 소련군의 기동전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적의 전투의지를 없애버린다"이며, 이는 섬멸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적의 전략적 요소를 없애버림으로서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구 소련군의 전투는 우라돌격으로 대변되는 제파식 전술과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기계화율을 통한 기동전이 섞여있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위와 같은 서술은 서방에서 작전기동군 개념이 적의 마비와 와해를 추구한 개념이라는 한때 있었던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해석에 따르면 작전기동군은 전투를 최소화하고 적이 본격적인 작전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마비가 발생되며 공황이 발생해 적이 스스로 붕괴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21] 그리고 그와 같은 맥락은 미하일 투하쳅스키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소련군의 1920-30년대 이론가들이 당대 전차 부대의 가치를 보고 그걸 “전략적 마비”의 수단으로 운용하자고 주장한 영국의 군사이론가 J. F. C. 풀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소련군이 마비를 강조했다는 주장에서 비롯되었다.[22]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근거문헌이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거나 아예 없으며, 또한 소련군도 독일군처럼 계속해서 적 전력의 마비가 아닌 포위를 통한 섬멸을 강조해 왔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소련군의 군사이론과 완전히 모순된 해석이 된다. 소련군은 1920년대부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적의 물리적 섬멸을 강조하고 그걸 목표로 움직였으며 전투의지의 와해는 섬멸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효과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미하일 투하쳅스키적백내전 이후에 기동전에서 나타나는 마비와 와해 현상이 작전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출한 지휘관 니콜라이 페틴을 1923년에 비판한 적이 있었다.

"적을 와해시켜 파괴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이다. 적군의 와해의 확산은 적국의 사회적 상태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와해의 확대가 적군의 남은 전력에 퍼진다면, 그 결과는 기본적으로 결정적인 부분인 섬멸의 결과다. 와해는 섬멸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섬멸이 가져오는 것이다. 적의 모든 종류의 섬멸은 가장 유익한 능력이다. 섬멸이 단지 전쟁의 목적과 직접 연결될 뿐만 아니라 전쟁의 수행에서 극도로 중요한 후방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페틴 동지는 적의 섬멸을 포기한 경솔한 슬로건을 제기한 것이다!."[23]

이 글에서 투하쳅스키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작전은 군대가 적의 인력과 물자를 파괴하기 위해 수행하는 조직적인 투쟁이다. 무슨 가상적이고 추상적인 적의 신경계통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실제 조직인 적의 부대와 실제 신경계인 적의 통신을 파괴하는 게 작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24]

그리고 소련군의 1936년판 야전요무령은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붉은 군대의 전투 작전은 항상 적의 섬멸이 목적이다. 적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와 섬멸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기본적인 전시 목표다. (중략) 그러나 주 노력 축선에서 저항 없는 추격으로 이끄는 공세만이 적의 인력과 물자를 완전히 섬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25]

그에 따라 대조국전쟁에서 소련군의 대부분의 작전은 적의 와해나 마비가 아니라 적의 포위와 섬멸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26]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작전기동군이 마비를 위한 개념이라는 것은 매우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소련군의 계속되는 적 전력의 섬멸 강조의 맥락에서 볼 때, 작전기동군의 우선 목표인 적 핵무기 및 지휘통제 시설에 대한 공격과 적의 핵무기 사용 방지는 강력한 섬멸 수단인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6 문제점

다만 전략 예비부대를 한방에 소모하는 최종필살오의에 가깝기 때문에 먹힌다면 파죽지세의 돌파가 이뤄지지만 이게 막혀버리면 해당 전략 단위가 동원할 수 있는 예비부대의 질과 수가 급격하게 떨어져버린다는 문제가 있다. 인생 한방?

게다가 공세종말점에 대한 대책이 미흡한데, 소련군은 적의 병력을 계속 마비시키면 자연히 보급 등이 수월해질 테고 이를 통해 계속 공세 의지를 밀어붙일 수 있기에 공세종말점 문제로는 전진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보급과 보충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도 병력을 구성하는 인간은 피로가 쌓이게 되니 실제적으로는 대규모 손실을 무릅쓰고 한발이라도 더 나가는, 수월함과는 거리가 전혀 먼 형태로 전락할 위험이 컸다.

상기 언급된대로 보급이나 보충을 제대로 충족할 방법도 부족하다. 제공권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수보급은 꿈에 불과하며, 일단 전선에 나서게 되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보급선도 얼마든지 끊어질 수 있다. 나토군도 거의 반드시 후방의 보급선과 보급처에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즉 소련의 생각대로 공세가 서로 연결돼서 상대방이 어어어하다가 항복하는 것 자체가 실현되기는 힘들며, 만일 한번이라도 제대로 공세가 막히면 그 다음에는 소련이 역공에 제대로 노출된다. OMG는 사실 Oh My God의 약자라 카더라 게다가 이건 전술핵 사용을 배제한 것인지라 실제로는 제대로 성과가 나기도 전에 핵전쟁으로 번져서 상호확증파괴가 발생, 모두 패배하는 결과가 날 것이므로 엄청난 성공 자체가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해서 일부러 단기전 이후의 대책을 안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치명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냉전 내내 이러한 전술 교리를 유지했던 이유는 그로 인해 소모되는 물량을 충원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군사력을 만들려고 국민 복지와 풍요를 희생한 게 문제였지만. 그 덕분에 전성기의 소련군은 500만이나 되는 대규모 군대[27]를 상비군으로 보유했고, 예비역 동원령까지 떨어지면 스타워즈은영전 뺨치는 수천만 대군을 실제로 선보일 정도의 동원시스템까지 갖췄었다. 이러한 소련발 기갑웨이브의 공포는 서구권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든 데다가 이를 막기 위해 각종 전술핵무기를 만드는 결과까지 초래했다.[28]

7 소련 붕괴 이후

당연한 결과였지만,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 연방은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으로 총체적인 난국[29]에 빠지면서 지상군을 대대적으로 감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작전술적-전략적 수준으로 침투를 할 대규모 전차군은 해체되었고 전차 사단들 또한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감축되어, 현 상황에서 1980년대 수준의 작전기동군의 부활과 운용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작전기동군으로 연결된 1920년대 말부터 내려오던 종심 작전의 원칙은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러시아군에 남아 있다.
  1. John G. Hines, Ellis M. Mishulovich, and John F. Shull, Soviet Intentions, 1965-1985: Soviet Post-Cold War Testimonial Evidence, Washington, DC: BDM Federal, 1995, p.72. 이 부분은 존 G. 하인즈와 가레예프의 인터뷰로 가레예프는 자신이 작전기동군 개념의 창시자임을 밝히고 있다.
  2. Christopher N. Donnelly, "The Soviet Operational Manoeuvre Group: A New Challenge for NATO," International Defense Review, Vol. 15, No. 9, 1982, 도넬리는 이 기사를 Christopher Donelly: O.M.G.: The New Challenge of NATO, Military Review (March, 1983), p.47-58로 재판했다. 본 항목에서는 <Military Review>를 기준으로 인용할 것이다.
  3. 박기련, 「소련군 종심전투교리의 현대적 발전」(1987), 『기동전이란 무엇인가』, 일조각, 1997, p. 203-204. 이 논문은 박기련의 국방대학교 석사학위 논문이다.
  4. G. S. Isserson, "The Development of Operational Art in 1930s,” in The Evolution of Soviet Operational Art, Volume II, pp. 32-33.
  5. 주코프의 편제개편의 결과로 전차 사단이 T-54 전차 254대를 보유했고 차량화 소총병 사단은 210대를 보유했다.
  6. David. M. Glantz, "Soviet Operational Art Since 1936: The Triumph of Maneuver War", in Historical Perspectives of the Operational Art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2005) pp. 269-270. 사실 이런 경향은 소련뿐만 아니라 당대의 미군과 NATO에서도 존재했었다. 대표적으로 서독의 레오파르트1이 이 같은 작전 개념하에 만들어진 전차다. 이때는 핵만능주의의 시대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7. Ibid., pp. 270-272.
  8. Major Wojeiech Michalak, "Aviation Raid and Maneuver Operations of the Ground Forces" Air Force and Air Defense Reiew, February 1982, Donnelly, p. 51에서 재인용.
  9. Hines, p. 73.
  10. 전선군 최소 2개 이상, 보통 3,4개를 거느리고 직할로 전선급 전차부대인 전차집단군을 운용한다. 지상군 규모만 직할대를 제외해도 32개 차량화소총병사단과 32개 전차사단, 이를 구성하는 전차가 2만 대, 장갑차가 3만 대다ㅎㄷㄷㄷ. 또한, 전선 항공군 3~4개와 장거리폭격기 군단, 독립로켓군단을 운용하는 등 냉전 당시 어떤 나라의 군대도 소련의 1개 전략방면군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참고로 소련은 이러한 전략방면군을 3개로 편성했는데, 이는 최소 10개 이상으로 편성된 소련의 군구-전선군 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11. 전차군 2개로 편성된 전선급 전차부대로, 총 8개 전차사단과 각종 직할부대로 구성된다. 지휘관은 전차집단군의 성격상 고참급 상장이나 대장(소련군 대장은 서구권 육군 대장 내지 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이다.)이 맡고,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면 전차군과 전차사단, 전차대대까지 배속받아 해일처럼 적들을 밀어붙이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고 한다.
  12. 전선군은 2~3개의 제병협동군과 1개 전차군+1개 포병사단+1개 로켓여단을 비롯한 각종 직할부대로 구성된다. 평시에는 군구 주둔지 상비부대로 있다가 전쟁이 터지면 부대별 카테고리에 따라 배정된 예비역과 장비를 충원한 다음, 신병교육부대 등의 기간요원들을 제외한 전 부대가 주둔지를 버리고 야전부대인 전선군으로 전환해서 출정한다. 김경진의 소설 3차대전을 보면 시베리아 군구가 트랜스바이칼 군구를 분리-부활시키면서 각각 두 개의 전선군을 쏟아내 총 4개의 전선군을 동원하고, 중앙러시아 쪽에서 물자를 충원받아 전차집단군까지 동원하는 불곰국의 기상을 선보인다. 여기에 극동 군구는 독립적으로 전선군과 함대를 움직이면서 핵공격으로 하치노헤 대잠초계기 기지와 마이즈루 제 3 호위대군 기지를 날리면서 일본 해자대에게 빅엿을 두 번이나 먹인다.
  13. 4개 전차사단으로 구성되는데, 전차사단별로 330대 가량의 전차와 120대 가량의 장갑차를 운용했기 때문에 직할대를 고려하면 총 1,400대 가량의 전차와 500대 가량의 장갑차를 보유했다. 얼핏보면 약해 보일 수 있지만 전선군의 기동군이기 때문에 장비는 가장 좋은 수준이었다고.
  14. 4개 차량화소총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각종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차량화소총병사단마다 200대 가량의 전차와 400대 가량의 장갑차를 운용했고, 전차사단 또한 330대 가량의 전차와 120대 가량의 장갑차를 운용했기 때문에 총 1,300대 가량의 전차와 1,700대 가량의 장갑차를 운용했다고 한다.
  15. Glantz, pp. 272.
  16. David M. Glantz, "Operational Art and Tactics", Military Review (December, 1988), p. 37-38.
  17. Donelly, pp. 56-57; Glantz, "Operational Art and Tactics", p. 35-36. 소련군의 군사이론가 바실리 레즈니첸코는 이렇게 썼다. "높은 속도로 계속되는 전투 수행은 적이 대량파괴 무기를 사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든다. 적은 핵무기 타격의 목표를 정확하게 정할 수 엇고 게다가 핵무기 투사 수단을 자주 옮기게 할 것이다."
  18. Colonal Lachewicz and Rajmanski, Helicopter Reconnassance and Fire Missons in Support of Land Operation at Night" Air Force and Air Defense Review, June 1981, Donelly p. 51-52.
  19. Glantz, "Operational Art and Tactics", p. 40.
  20. 이 직책은 육군원수 이상의 장관급 장교만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소련군의 장성 계급은 소장-중장-상장(소장부터 상장까지 서구권 소장-중장-대장 계급과 동일)-대장(서구권 고참 대장 내지 원수급)-원수로 이어진다.
  21. 박기련, p. 204-205.
  22. Ibid, pp. 152-153; 김명균, 「痲痺戰(Paralysis warfare)의 發展方案에 관한 硏究」,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p. 16-17, 33-39 봉길순, 「痲痺戰에 關한 考察」,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 p. 60-62; 柳在甲 蘇聯ㆍ中共ㆍ北韓의 作戰術 發展傾向」, 한국전략문제연구소, 1990, p.19-22 ;최영렬, 「한국군의 마비전 수행방안 연구」, 조선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p. 14-16; 최완규, 「마비이론의 현대적 고찰과 미래전 적용성 연구 : 풀러(Fuller)의 마비전 사상과 군사혁신(RMA)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3; 윤형호, "영국학파-풀러, 리델 하트의 군사사상", 『군사사상론』, 플래닛미디어, 2014, pp. 303-304. 이 국내 논문들은 하나같이 투하쳅스키가 풀러의 책 『전쟁의 개혁』(Reformatoion of War)의 러시아어판 서문을 쓴 것에서 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근거로 투하쳅스키가 풀러의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실제 투하쳅스키의 원문은 "풀러는 참~ 잘나신 대단한 전략가다"는 식의 빈정대는 어조이며 전체 맥락은 풀러를 제국주의자이자 파시스트인 동시에 시대에 맞지 않고 명백히 비과학적인("말하자면, 같은 소총, 같은 탱크, 같은 항공기를 보유한 미군 180개 사단과 영국군 18개 사단이 전투할 때 영국군이 이긴단 소리를 하고 있다") 소수 정예 군대를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23. Тухачевский, "Война клопов",Избранные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м 1, p. 107. 투하쳅스키는 이 글을 1923년에 썼고, 풀러의 책 중 최초로 소련에 번역되어 들여온 책인 『대전쟁에서의 전차』(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가 1924년에 번역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투하쳅스키는 풀러의 책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풀러의 이론을 반박한 셈이 된다.
  24. Ibid., p. 108.
  25. Provisional Field Revulations for the Red Army, translated b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1986, p. 2.
  26. Военное искусство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 и в послевоенный период (стратегия и оперативное искусство): Учебник. (М.: ВАГШ, 1995), 국방대학원 역, 『러시아 연방군의 전략과 작전술』, 국방대학원 안보문제연구소, 제1권, 1998, pp. 296-338; 363~388.
  27. 웃기는 건 군단급 규모에 이르는 공수부대까지도 모두 기계화 공수부대였고, 특수부대나 견인포 부대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주포병이나 기보, 전차부대였다!
  28. 소련의 전술핵무기는 이와는 반대로 주로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걸로 교리에 설정됐는데, 적의 물자보급기지나 항공기지, 군수시설, 심지어는 적국의 수도까지 전술핵공격의 타격대상범위에 넣었다고 한다. 소련에서는 이를 도끼 이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29. 지금도 그렇지만 붕괴 직후부터 푸틴 집권 이전까지의 러시아는 정말 암흑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리가르히와의 정경유착을 통한 관료 마피아 집단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군사적으로도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된 건 물론이고 벨로루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 스탄 국가들이 모조리 독립하면서 해당 지역에 있던 소련의 군사력이 거의 반감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Tu-160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저걸 둘러싼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세 나라 사이에 얽힌 비화가 유명하다. 그나마 핵무기는 대부분 러시아 본토에 배치되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공군과 지상군, 그리고 방공군 전력(특히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는 대개 국경 지대에 대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 문제를 갖고 러시아가 옛 소련 구성국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이 대거 이탈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군사력은 정말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됐다. 사회적으로도 무상의료가 중단되는 바람에 평균 수명이 무려 10세나 줄어든 것만 봐도 그 당시 러시아라는 나라가 얼마나 막장까지 몰렸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