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대조국전쟁에서 넘어옴)

독일어 : Ostfront (동부전선), Deutsch-Sowjetischer Krieg (독일-소련 전쟁)
러시아어 :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1][2]
영어 : Eastern Front (동부전선)
한자 : 獨蘇戰爭

독소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3]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진격하는 독일 국방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황폐화된 소련의 마을

1942년 봄 데미얀스크 전선의 독일군과 3호 전차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진격하는 소련군

동부전선에서 사용된 3호 돌격포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6호 전차 티거와 독일군 병사

1945년 참호에서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독일 국민돌격대 대원들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원수
날짜
1941년 6월 22일 ~ 1945년 5월 9일
장소
소비에트 연방유럽 지역, 중유럽
이유
아돌프 히틀러의 세계 지배 야욕(레벤스라움 확보)
교전국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동부군
유고슬라비아 왕국(1941.6)
유고슬라비아 (1944~)
체코슬로바키아 (1943~)
투바 인민 공화국 (~1944)

● 부수적 참여국
루마니아 왕국 (1944~)
불가리아 왕국 (1944~)
핀란드 (1944~)

● 지원국
자유 프랑스 (1943~)
대영제국 (1941)
미국 (1944)
캐나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1944)
핀란드 (~1944)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1944)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스페인국 (~1944)
크로아티아 독립국
지휘관[4]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
바실리 추이코프
로디온 말리놉스키
세묜 티모셴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알렉세이 안토노프
세묜 부됸늬
키릴 메레츠코프
표도르 톨부힌
니콜라이 바투틴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아돌프 히틀러
에른스트 부슈
하인츠 구데리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발터 폰 브라우히치
귄터 폰 클루게
빌헬름 리터 폰 레프
빌헬름 리스트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페도르 폰 보크
페르디난트 쇠르너
발터 폰 라이헤나우
알베르트 케셀링
헤르만 호트
게오르크 폰 퀴힐러
프란츠 할더
베니토 무솔리니
이온 안토네스쿠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호르티 미클로시
결과
연합국의 승리
나치 독일의 패망
영향
유럽 전구의 종결
냉전의 시작, 철의 장막 형성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의 공산화
그리스 내전 발발
병력총 3,450만 명총 1,800만 명
피해규모 소비에트 연방
- 총 피해 1,060만 명
- 전사 및 실종 760만 명
- 포로 52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60만 ~ 360만 명
폴란드
- 총 피해 2만 4천 명
- 전사 및 실종 2만 4천 명
- 포로 수 미확인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1만 7천 명
- 전사 및 실종 1만 7천 명
- 포로 8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불가리아 왕국
- 총 피해 1만 명
- 전사 및 실종 1만 명
- 포로 수 미확인
나치 독일
- 총 피해 430만 명
- 전사 및 실종 310만 명
- 포로 33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37만 명 ~ 120만 명 추산
독일에 가담한 소련인
- 총 피해 21만 명
- 전사 및 실종 21만 명
- 포로 10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28만 명
- 전사 및 실종 8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헝가리 왕국
- 총 피해 30만 명
- 전사 및 실종 10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민간인 피해소련 민간인 2,000만 명 사망

1 개요

"미안하네, 동무. 하지만 지금이 너무 좋은 기회인걸."[5]연합군 : "눈물 좀 아껴놔, 히틀러.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고."
아돌프 히틀러 : "아악! 나 죽네!"

인류 역사상 단일 전쟁으로는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피해를 입힌 전쟁[6]
수도 근처[7]까지 밀리고도 기적적으로 역전승을 한 전쟁[8][9]

제2차 세계대전에 속한 하나의 전쟁이자 당시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 사이에서 일어난 4년 간의 전쟁. 그러나 그 규모는 모 항목인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 크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하면서 발발했으며, 1945년 5월 8일까지 약 4년 간 지속되었다. 전쟁 초중반까지는 평화 협상을 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후반이 되면서[10] 그 기회를 죄다 날려 버린 전쟁.

현재까지 인류가 치른 수많은 전쟁 중 가장 거대한 규모로 치러졌으며, 최악의 피해를 남긴 전쟁이다.[11] 또한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홀로코스트최악의 전쟁 범죄가 횡행한 전쟁이기도 하며, 대부분의 전투가 평야 지대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이후 현대 기동전 교리의 창안과 검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명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는데, 소련군 사상자는 2,962만 명에 달하며, 전사자는 1,128만에 육박한다. 독일군과 동맹국은 1,075만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그 중 전사자는 510만 명.[12] 이 전쟁 한 번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상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단 소리다.[13][14]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에 따르면, 소련은 2,900만 명을 동원했고, 독일은 1,800만 + α(동맹국 + 점령지의 수백만 인구)를 동원했다. 게다가 독일의 동원 인력 중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15] 절대 숫자 단위가 잘못된 게 아니다!

인적 손실도 초월적이지만, 소련은 독일의 초토화 작전으로 도시 1,710 개와 마을 7만여 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그나마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중국은 동원력이 형편없어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병력 동원이 얼마 안 되었으며 일본 제국은 근본적 체급 한계+중국군과 더불어 미국이랑 태평양 전투에서 병력을 투입하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러진 교전의 규모는 꽤 작다. 가장 큰 전투들도 100만 명 안팎이 동원되었다.[16] 게다가 중국군은 일본군을 포위 섬멸할 능력이 안 되었고[17] 일본군은 중국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각각 전투에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 군 합쳐 6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상당히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나 한파, 전염병으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두 배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은 1941년 6월 개전 후 1945년 5월 끝날 때까지 도로사정이 안 좋은 봄-가을의 환절기를 제외하면 계속 대규모 전투가 치러졌고 쌍방 모두 엄청난 병력을 동원했다. 일개 전투에 쌍방이 백 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사례도 꽤 되는데,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양측 합쳐 무려 2백만 명이며 상당수는 군인이었다. 이전의 사례를 볼 때 양국 간의 전쟁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수치의 사상자를 일개 전투에서 소모할 만큼 매우 규모가 크고 참혹했던 총력전 대 총력전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독소전쟁에서의 교훈은, 인종주의나 타국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은 국가의 패망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치 독일도 초기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우리 군대는 세계 최강, 불패"라는 신화에 빠져 버렸고, 객관적인 국력을 고려하지 않은 군사력 만능주의나 모험주의로 흘러가 결과적으로 국가의 패망을 불렀다.

그 규모가 워낙 큰 탓에 핵무기가 개발된 이상 더 이상 이런 전쟁은 어렵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일단 핵으로 무장한 강대국 간의 총력전은 결국 전면 핵전쟁으로 모두의 공멸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과 함께 핵전쟁 시나리오의 두 축 중 하나인 소련이 독소전쟁으로 총력전의 쓴맛을 단단히 본 것도 있어서 크든 작든 가능한 직접적인 전쟁을 회피하려고 했다는 점도 한 몫한다.[18] 여러 모로 인류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가져다 준 전쟁이다.

2 전쟁의 배경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총통게르만-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Unter-menschen)'인 슬라브족을 정복 후 추방,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19] 집권 후에는 이것이 국가 정책이 되었으며, 위협을 느낀 소련은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를 의심한 서방 측의 불신에 의해 이는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을 상실해 버렸고,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2.1 영-프-폴-소 안보 체제의 결렬

  • 이 부분부터 2.3 "불길한 징조"까지의 서술은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를 참조했습니다.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20]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 세 열강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프-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오브엑스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저 새끼들 놀러왔냐? 같은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21]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 주었다. 반면 영-프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사령관 조제프 두망크(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은 한 술 더 떴다.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22]은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인물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은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폴란드(당시 영-프와 동맹국)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때려죽여도 소련군은 우리 땅에 못 들인다![23]는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24] 중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그러면서 독일한테 6주 만에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이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이뭐병... [25][26][27]

영국-프랑스가 저 따위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크게 실망하고,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2.2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28]을 제안했다.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때 스탈린이 한 말은 이렇다.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앞으로 2년 뒤에 또 할 텐데 뭐..

- 이오시프 스탈린,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며[29]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 독일이 준 프레스 기계가 소련에서 T-34를 만들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 분해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독일과 소련의 이해 관계는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고, 독-소 양국 국경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2.3 불길한 징조

그리고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서방 세계와 추축국에서 곳곳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독일 측 암호를 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소련에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30]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스탈린은 '역정보와 도발'이라고 판단하여 그 병사를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라인을 뜯어다 앞에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 모가지가 전부 날아가 버린 데다 제대로 된 장교는 거의 있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개판이 난 붉은 군대가 제대로 싸웠을 리가 없다.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2.4 히틀러의 의중은?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완전한 병크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다. 위에 이유로 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그리고 소련 반대편에는 동맹국 일본 제국이 있었다.물론 현실은 시궁창... 그리고 6달 뒤에 하는 짓거리가..

물론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티고 있어 서부전선을 형성해 줄 수 있었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 때 날려 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영국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는데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두고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 비는 1:2이었으므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독소전쟁 발발 후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손실 차이는 1:5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독소전 양 측의 총 손실 비율을 1:1.5~1.3까지 줄여 버린다. 물론 나치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소련의 사망자(민간인+포로 등)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는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과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대(大)육군 국이었던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한 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31]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 새끼들은 세계 지도도 안 보고 작전 짰나 보다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까 봐 대부분 소련 공격을 반대했다....는건 절반의 진실이고 당시 독일국방군 장성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쪽에 가까웠지,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독일군 장성들이 소련군의 역량을 높게 봤다면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그렇게나 허술했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개전초부터 소련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낙관론이 독일군 전체에 퍼져있었던 것.이러다가 거하게 말아먹었다.# 이 같은 견해는 전쟁 이후 독일 장성들이 서방에 퍼뜨린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장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그리고 그 엉터리 건물 안의 가장 개같은 방에서 깔려죽었다.그리고 그 건물의 피해도 컸지만 어쨌든 약 45년 뒤에나 겨우 무너졌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취한 행동이며 이는 결국 독일에게는 자충수가 되어 버렸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미친 짓이며 독일군의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리고 나서야 이런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그떄는 학살할 대상이 자기들 영향권 밖에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만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인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애초에 소련인을 박멸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 그런 침략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히틀러는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는데, 일단 소련인을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적의 독일군이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대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최강의 육군력을 보유하고 있다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고자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군이 전세를 뒤집고 반격을 개시해 전쟁 막판에 베를린 전투가 벌어져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는 오히려 독일인이 소련인보다 약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독일인은 모두 멸종되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이렇듯 히틀러는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 정보부나 다른 나라들도 소련이 저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개발살이 나자 저 정도의 군대를 잃었으니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과 소련군이 집결하기 전까지는 그러하긴 했다.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이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할힌골 전투에서 크게 참패한 일본이 소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독일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해도 무방했다. 물론 선전포고를 안 하고 무시했다고 쳐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리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32]. 즉 히틀러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 주고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 그만 때리고 소련으로 발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 있긴 했지만 일본은 뭐... 덕분에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제는 물량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에서 세계 1, 2위의 공업국[33]을 상대로 자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살적인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2.5 스탈린은 정말 몰랐을까?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상술하였듯이 충분히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공산주의자 철도 노동자나 폴란드 저항군, 그리고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독-소 국경 지방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리고 독일군이 고도 정찰 비행 중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300회를 넘었고, 외교적인 항의가 반복되었으나 독일 측은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정보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게릴라들이 1941년 봄에 소련 서부를 교란시켰으며,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은 6월 16일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후송했으며, 6월 21일에는 소련이 지배하는 항구에 독일 상선이 단 한 척도 정박하지 않았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공격 능력을 보여 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스탈린은 이를 몰랐을까?

2.5.1 긍정론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 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 광물을 제공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하면 독일에게 중요한 인센티브를 박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독일 침공 전 18개월 동안 소련은 2백만 톤의 석유와 석유 제품을 보냈고, 14만 톤의 망간 단괴와 2만 6천 톤의 크로뮴 광석과 여타 대량의 자원을 독일에 제공했다. 실제로 최후의 화물 열차는 독일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국경을 넘어갔다. 독일 점령 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 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공작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준비 명령을 이미 내린 후에도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낚시를 내걸었다. 전쟁 1년 전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이일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를 나눠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이때 이미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낚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영민한 몰로토프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위성국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특히 당시 막 끝난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몰도바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측에 붙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

"대영제국이 패배 직전이라면, 이 방공호에 떨어지는 폭탄은 누구 것이오?"[34]

스탈린의 문제는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 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똘끼논리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국을 공격하는 편을 택하지 소련을 공격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 아니 아무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스탈린은 단지 독일에게 자원을 공급해 주고 독일 정찰기가 소련 위를 날아다녀도 자극하지만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래서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세묜 티모셴코 원수와 총참모장인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하여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월경해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 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 상황을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개삽질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전선을 막 넓히는, 그것도 양면에서 적과 2:1로 싸우는 미친 행위를 하겠는가? 그것도 영국이란 강대한 적을 놔두고 말이다.[35]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희대의 트롤 이탈리아 왕국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막했고 이탈리아군 보조하면서 대충 시간이나 끌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오히려 공세에 나서면서 지원 더 보내 달라고 난리였으니(...)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싸이코였고 스탈린만 그걸 모르고(혹은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스탈린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내각이나 프랑스의 달라디에 내각도 앞서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뮌헨 협정의 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히틀러가 희대의 정신병자라는 걸 모르고 상식인의 선에서 판단했다가 빅엿을 먹었다.

2.5.2 부정론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특히 독일 내에 상당한 세력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켰으며,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그를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까지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라인'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약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에도 뭣하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가 추축국으로 붙었으니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 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 많은 스탈린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라인을 독일의 앞에 지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 라인'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만들게 됨으로서, 새로운 방어 작전을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지형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되었다.

만약 스탈린 라인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 학자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최소한 미국에게 털리는 중에 뒤치기는 했을 듯하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게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가진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 제3제국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많은 시간도 아니다.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별 수 있나. 뭐,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 벌여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스탈린이 보여 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와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시베리아행 익스프레스를 탈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스탈린에게 주작질을 하여서 왜곡시켜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으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게다가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였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 침공그리스 침공 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숨기는 데 기여했다. 이 침공은 그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침공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은 독일군이 자신들이 침공한다고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하지도 않았으며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6월 하순이 되자 그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것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엄청나게 많고 어지러운 징후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가려내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동장군을 우려하여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는 러시아를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한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이 소련 내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해서 마음을 놓아 버린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였다. 말 그대로 이 당시에는 설령 공격을 결심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시도한다면 소련은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시간을 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히틀러가 대숙청이 일어나기 직전에 공격을 시작했거나, 1년만 늦게 공격을 시작했어도 소련의 기계화 군을 독일의 국방군이라고 해도 쉽게 상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본능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부대가 최상의 전력에 근접하고, 맞닥뜨리는 적이 가장 취약한 시점을 선택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탈린의 내숭과 앞날을 내다본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상대가 스스로 고급유닛을 자폭시키고 짓던 방어선 취소하고 새로운 방어선은 아직 미완성이고(스탈린 라인) 정찰 또한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상대 유닛 위치 다 아는(스탈린의 대응) 최고의 상황을 적이 마련해 준 것이다. 언젠가 한판 붙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제 타격은 말 그대로 필연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병크로 자산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고 나름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 그리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를 우려하여 여름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히틀러의 돌아이 기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스탈린은 방심했고,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시간 끌기는 현명한 도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시작해 버렸고, 독일은 소련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한 가지 큰 허점이 있는데, 히틀러가 전략적인 이유로 소련을 침공했다는 가정이다

전쟁 초에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3 참전국

3.1 연합국

3.2 추축국

4 경과

5 전쟁이 남긴 것

5.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 소련 측 피해
A: 군인 피해
동원군인 총수29,574,900
동원군인 총수(기타 정부부처 포함)34,476,700
총 손실(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11,444,100
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6,885,100
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4,559,000
1941~1945년 사이의 사망자 총 수8,688,400
의학상사상자 총수18,344,148
부상/심리장애15,205,692
질병3,047,675
동상90,880
B: 민간인 인명 손실 추산
소콜로프(Sokolov)민간인 사망자 총 수16,900,000
코롤(Korol)민간인 사망자 총 수24,000,000
코즐로프(kozlov)인구학적 총 손실40,000,000
쿠르가노프(Kurganov)인구학적 총 손실35,500,000
  • 독일 측 피해
독일 국방군 인명 손실(1939년~1945년)
영구 손실(사망, 실종, 영구 장애)
1939년 9월 ~ 1942년 9월 1일922,000(총 인원 중 14%)
1942년 9월 1일 ~ 1943년 11월 20일2,077,000(총 인원 중 30%)
1943년 11월 20일 ~ 1944년 6월1,500,000(추정 인원)
1944년 6월 ~ 11월1,457,000
1944년 12월 ~ 1945년 11월2,000,000
총 손실
1945년 4월 30일까지 총 손실11,135,800
(부상자 포함,
동원된 총 병력의 75%,
1939년 당시 남성 인구의 46%)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전쟁에서 독일이 입은 피해도 피해지만 소련이 입은 피해는 심대하다.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만 따져도 무려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36][37]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38]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만 4천명,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1일마다 작은 도시(한국의 군 정도) 하나, 혹은 도호쿠 대지진 사망자+실종자 정도의 사람이 죽은 것이다.[39]

나치의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슬라브인 민간인 학살로 인해 소련의 민간인 손실은 독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 최소 2천만 명이 사망했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자녀 부양기 시대의 젊은이는 거의 없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 ~ 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고 하며,[40] 다음 세대의 남녀 성비는 1:1로 원상 복귀되었지만 21세기인 현재, 전체 인구 대비 비중은 여전히 여초 현상을 유지하는 중이다. 다만 이것이 오늘날 러시아에 미치는 영향은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 듯하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약 국부의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인 나라 같다.[41]

이 엄청난 물질적 피해와, 전쟁으로 소련 인민들이 입어야 했던 정신적 피해를 고려하면 독일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옛 소련 지역 주민들에게 엄청난 도덕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대적인 주장이지만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슬라브인이나 그에 속하는 인종 3,000만 명을 살해한 것이, 그 20%인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보다 더 대단찮은 일처럼 기억 속에서 잊혀 있는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다. 이 3,000만 명의 희생자의 50% 이상이 민간인이며 소련이 입은 물질적 피해로 인한 소련 인민들의 유무형의 고통은 결코 통계나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웬만한 나라는 수십 번은 멸망할 피해를 보고도 전쟁에서 승리한 게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거기다 이런 피해를 입고도 전후 45년 동안 미국과 패권을 겨뤘다.

독일은 소련에서 잔혹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강간하고 절멸시키려고 했다. 독소전쟁 동안 민간인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로 독일의 전쟁 범죄가 심했다.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다. 미네소타 대학의 웬디 조가 펴낸 논문과 아티나 그로스맨의 저술 등등을 참조해 보면 소련 내에서만 독일군에 의해 1000만 건의 강간이 일어났고, 1942년 독일 국방군 보고서에 의하면 75만 명 가량의 아이가 강간으로 인해 태어났다고 한다. 소련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는 독일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 라는 대사가 있을 정도.

나치 독일에게는 이 전쟁은 말 그대로 파멸로의 행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총 사상자 1,348만 명[42] 중 80%인 1,075만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사상당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 3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280만여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이 수치는 나치가 과연 독소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파멸했을까 하는 의심마저 품게 만든다.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7백만 마리의 말과 1,700만 마리의 염소와 2,000만 마리 돼지와 2,700만마리 양도 학살되었다. 야생 동물들도 영향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으로 인해 늑대와 여우들은 "킬링 존"의 서쪽으로 도망가고, 1968년까지 영국 해협으로 도달하며 서쪽으로 광견병을 확산시켰다.

5.2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

전쟁으로 소련은 초 열강이 되었다. 우선 세계의 주요 강대국인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위 냉전의 결과물이지만 세계를 반분한 초강대국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또 전쟁의 결과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독일에게서 일부 영토를 할양받아 병합했다. 그리고 승전국의 위치로 인해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승전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역할을 매우 축소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러시아인들은 초반에 여러 병크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고집으로 인한 여러 병크들인 대독 경계령 발동 금지, 키예프 후퇴 불허, 모스크바 공세 이후 무리한 반격 작전을 지시하여 전력 낭비를 야기한 것들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볼 때 스탈린이 독소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특히 전후 처리에서 영미와 유리하게 흥정을 하여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의 공이 분명했다. 물론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장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들을 스탈린이 가로챈 것은 사실이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은 주코프는 한직을 맴돌았다.[43] 전쟁 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스탈린은 전쟁 후에는 여기에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한 완벽한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 받게 됐으며 그의 이름은 소련에서 신과 다름없게 되었다.

5.3 독일의 분단과 영토 상실

나치스는 비단 자신들만의 정권뿐만 아니라, 역사적 독일이 동유럽과 가지고 있던 깊은 관계와 유산마저 한꺼번에 싸그리 불태워 버려 아예 민족 국가로서의 독일의 정체성과 영토적 기원 또한 한방에 영원히 같이 말아먹었다. 당장 과거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도 유지했던 동프로이센과 동부의 몇몇 주를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전승 국가인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집어삼킨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대신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여,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겨 주었다. 이에 따라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와 동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고, 이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추방당했다. 이 중 슈테틴, 스톨프 같은 도시들이 위치한 동부 포메라니아 지방 같은 곳은 역사적으로 중세부터 독일계 국가의 땅이었거나, 그단스크 같이 딱히 한 나라가 독점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힘든 지방도 적어도 독일계 상인, 지식인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지방이었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직접적으로 폴란드에게 영토를 뜯긴 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2차 대전 자체의 서곡을 장식한 현대 체코의 주데텐란드 지방, 중세 기사단령 시절부터 독일계 국가들이 지배하거나, 적어도 사회-경제적 엘리트로 군림했던 발트 3국, 역시 수백년 동안 독일인들의 집중 이민으로 큰 독일계 영향력이 있던 트란실베니아의 독일인 등,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하며 일구어 왔고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짙게 발휘했던 지역 모두에서 일괄적으로 독일인들이 싸그리 추방당하여 종전 이후의 독일은 아예 자신들의 지정학적 역사와 뿌리째 단절돼 버린 절름발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동서독 분단 이후 동유럽 공산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고 구 독일제국 국경선을 주장했으나, 1970년대 동방정책 과정에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다. 결국 1990년 독일의 재통일시 구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이 지역을 영구 상실하였다.

결정적으로 양대 강국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어 서독동독이 45년간 대립하는 초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꼬는 의미로 독소전을 게르만 vs 슬라브 인종캐삭빵이었다고 표현하곤 하지만 꼭 생물학적 인종 레벨 까진 아니더라도 근대 이전부터 특정한 지역에서 일구어 낸 공동체로서 민족국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캐삭빵이었고, 그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1차대전과 이전 프로이센의 군사적, 역사적 전통마저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현대 독일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컴플렉스는 결국 주로 독소전이란 역사적 경험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다.

5.4 전쟁범죄

전쟁범죄 측면에서도 독소전쟁은 최악을 달린다. 게르만족 제일주의에 세뇌되어 있던 독일군은 점령 지역에서 소련군 포로와[44][45][46] 주민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했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시 꾸준히 자행되었다. 게다가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똑같이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방군과 무장SS 사단들에게도 '독일군의 수치' 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근데 국방군이 열심히 도와준 게 함정 이렇게 처절한 전쟁범죄 때문에, 지금도 벨라루스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에는 전쟁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해로 지층이 이루어진 곳도 있다.

이 때문에 소련군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복수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련군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 국내에 진입하면서부터는 지휘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약탈 및 강간과 같은 보복성 범죄 행위가 발생하였다..베를린 공방전 당시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독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을 피해 민간인들과 잔존 병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47][48]

당시 벌어진 주요 전쟁범죄들은 다음과 같다.

  • 카틴 학살
  • 바르샤바 게토 봉기
  •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학살
  • 바비야르 학살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 홀로코스트
  • 테오도시아 학살 - 1943년 12월 25일 소련 빨치산과 소련군 유격대가 크림 반도 테오도시아의 독일군 병원을 점령. 환자와 의사 2천명을 죽이고 간호사 대부분을 강간한 뒤 음부에 못을 박아 방치하거나 성노예로 끌고 간 사건. 정작 독일에선 정치적 문제로 묻혀졌다가 미국과 영국 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람들은 네오 나치처럼 물타기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 굼비넨 마을 학살 - 소련군이 독일로 진입하면서 동프로이센 국경에 있던 굼비넨 마을의 마을 주민 줜원을 집단학살한 사건.
  • 폴란드 주민 강간 사건 -- 독일과 소련 양국이 저지른 문제로 독일의 경우 점령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주민들이 동원되거나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잘알려진 상황이지만 독일 패망 시기 폴란드로 들어온 소련군이 폴란드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약탈한 사건도 규모가 크다. 당연히 폴란드의 역사팩과 교과서엔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러시아에선 좀처럼 침묵하는 중.
  • 부다페스트 약탈 -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끝나고 소련군과 공산 폴란드군이 저지른 강간, 약탈 사건. 소련군뿐만이 아니라 자유 폴란드군 상당수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외인 부분이다.[49]

6 진실

독빠들은 독소전이 독일과 소련과의 동등한 빅매치니, 오히려 독일이 더 유리한 싸움이였니 뭐니 하지만 실상은 독소전쟁은 무모하고 말도 안 되는 도박 행위였다. 물론 소련이 초반에 독일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나, 이는 태평양전쟁 초반에 일본에 맞선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과 소련의 전쟁 초반기의 열세는 아무리 초강대국이여도 기습적인 침략과 예상치 못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긴 한다만(...).

게다가 영토 크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인구도 소련이 독일보다 2배 이상은 많았으며, 그것은 곧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독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스트리아와 체코,폴란드,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프랑스 북부를 합병한 대독일제국(나치가 스스로를 칭한 말)의 경제규모는 소련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앞섰다(프랑스 포함시). 그러나 그런 악의 제국은 사실상 유럽내의 식민지로서 자원셔틀,노예노동에 근거한 것이었고 피지배 유럽인들의 끊임없는 저항과(단순한 사보타지부터 레지스탕스/파르티잔 활동까지) 나치 수뇌부의 무사안일주의와 각종 부정부패로 인해서 그들은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했다. 그런 저항이 거의 없는 독일 본토의 경제력은 소련의 70%에 불과했다.

6.1 그 외

독소전쟁은 동물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진출부터 시작하여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공세로 인해 러시아와 동유럽의 "킬링 존" 지역에 있던 늑대 무리들은 유럽 내로 도망을 갔고, 1968년 영국 해협까지 진출하면서 점차적으로 서유럽으로 이주하며 광견병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였지만 그 결과 서유럽의 멸종직전에 있었던 늑대들이 다시 개체수가 복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50]

7 연표

7.1 1939 ~ 1940년

7.2 1941년

7.3 1942년

7.4 1943년

7.5 1944년

7.6 1945년

8 여담

이후 소련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우크라이나CIS 국가들은 매년 대 조국 수호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День Победы: 젠 빠볘디)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이날을 기념하며 수십만 명의 군사들과 신형 무기들을 공개하고 국력을 과시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유럽 최강의 적군을 상대로 수천만 명의 피를 뿌려가며 얻은 승리니 충분한 자격이다. 그것도 처음에 참패하다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소련 시절 붉은 광장을 지나는 군사 퍼레이드는 10월 혁명 기념일(11월 7일)과 승리의 날(5월 9일) 매년 두 차례 실시되었다. 소련 시절 연방을 이루었으나 독립한 공화국들도(독소전쟁 직전 소련에 병합된 발트 3국을 제외하면) 모두 5월 9일은 공휴일로 정하고 비슷한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한다. 소련 시절 한 나라였으니 러시아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도 승리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소련 해체 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지고 5월 9일에만 군사퍼레이드를 실시한다.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기념행진을 하는 경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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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군중이 들고 있는 스탈린 초상에 주목.

과거 소련 시절에는 미군의 정찰기 U-2가 소련을 정찰하다가 박살난 잔해를 전시하는 등 반서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현재는 미군은 물론이고 영국군, 프랑스군, 폴란드군 등 과거 추축군과 맞서 싸운 연합군중국 등 승전국이 함께 모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추축국의 피해국이었던 대한민국의 정상도 꾸준히 초청받고 있으며 1990년대부터는 독일의 정상들까지 초청받고 있다.

이날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문서 참조.

9 의의

독소전쟁 초 처칠을 포함한 연합국 지도자과 추축국 지도자들은 소련이 기껏해야 3개월안에 나치독일에게 패배할것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쉽게 무너질것처럼 보인 소련은 나치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급기야는 반격하여 마침내 유럽전선의 마침표를 찍어 소련의 국력이 제정 러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시킨 전쟁이다.

태평양 전쟁과 함께 2차 세계대전 전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전쟁이기도 하다. 참고로 독일군의 병력 80%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증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는 동부전선에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상 4:50 그래프 주목. [51] 게다가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는 추축군이 다 장악해 버렸고, 사실상 동부전선만 유일한 주요 전장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보듯 미국은 제2전선에 협조적인 편이었으나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트라우마도 있었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미적대다 1944년에 들어서야 처칠이 스탈린의 분노를 맛보고는 그제 서야 서부전선을 개전한다. 소련 입장에선 1943년도 이전부터 제2전선 개시 요구를 했는데 이리 미적대면 혹시 "우리와 독일이 공멸하기 바라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구교도는 무엇인가? 제2전선이 생길 거라 믿는 사람이다."란 농담이 돌 정도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있다. 당장 주코프 회고록에서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 간 회동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나와 있다.

냉전 때문에 이 전쟁의 세부적인 면이나 의의는 일부 밀덕후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서방 연합국들의 전투에 비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도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52] 자고로 나이가 드신 선생님들도 이렇게 알고 계시는 경우가 많다.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전사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실제로는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에 비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대한 소련이나 소련군의 결정적 기여는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렵다. 아니, 그냥 단순히 생각해 봐도 2차 대전 동안 사망한 전체 독일군의 80% 이상이 소모된 곳이 동부전선이었는데 어찌 결정적인 기여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10 IF 시나리오

일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독일이 소련을 이길 수 있었던 시기가 몇 번 존재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미 정해진 승패가 아니라 진짜로 결과가 바뀔 뻔한 적이 매우 많다. 물론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이 더 컸다는건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반대로 항상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독일이 밀리기 시작한 후에서의 국제 정세에 관한 시나리오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이 방어전으로 나왔다든가, 티토를 암살했다든가 반대로 소련이 선공을 가했더라든지 말이다. 이런 경우들은 보다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하게 토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말이 필요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이게 가장 독일로서는 희망적인 경우. 그랬더라면 히틀러와 제3제국의 목숨은 몇 십 년 더 연장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영국이 먼저 소련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53] 그렇게 소련이 추축국으로 참전했다면 붉은 군대는 이란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인도까지 진격하여 뉴델리에 T-34가 질주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54]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하지만 당장 독일-일본 꺾는 데 고생하던 연합군이 소련까지 상대할 수 있었을까? 설령 소련이 추축국이 되지 않는다 해도 동유럽에 가 있을 독일군이 서부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서방 연합국에게는 심각한 부담이다. 만일 존 키건 교수가 말한 대로 히틀러가 원래라면 소련 침공에 동원했었을 병력들을 중동 전선으로 투입했더라면 독일이 유럽과 서아시아 일부를 완전히 장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당시 독일 해군력을 생각한다면 미국 본토까지 침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일본 제국은 독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오히려 유럽전선으로 가야했을 미군의 주력병력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게 패했을 테니 독일-소련-미국 3강 체제로 정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랜드리스가 없었다면?
→ 소련 학자들과 군인들도 인정한 부분인데 미국의 어마어마한 양의 랜드리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도저히 독일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 산업 시설들이 시베리아로 이동되었기에 각종 무기류만이라면 소련도 충분히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는 이미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미국의 식량 지원이 소련 자체의 능력으로는 무기를 만들더라도 전선까지 수송할 보급력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국가 역량을 모두 쏟아내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펼치며 우랄 산맥 너머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대규모 공세를 펼쳐 독일군을 몰아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미국 정치권의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 소련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도착한 뒤 뻘짓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상유지면 모를까 독일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55]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
→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랜드리스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저자가 말했듯이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 나는 상황이 왔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항복했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56]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일이 소련 전선에서 뻘뻘거리고 있다면 미국이 굳이 참전했었을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
→ 모스크바 전투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인 만큼 그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이겼다고 해서 독일이 세계정복에 성공했을 거라는 것은 개소리에 불과하다. 진짜로 그렇게 되려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남하하여 카프카스 유전지대를 장악함으로써 독일군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군의 연료 보급을 차단하며[57][58] 그대로 남진을 계속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영국군을 쌈싸먹고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과 합류하여 이란을 통해 영국령 인도까지 침공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시 독일군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59]보급로 문제도 그렇고, 병력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할 경우 소련을 침공하겠다고 밀약을 체결했었고 바쿠 유전 지대의 상실로 소련군은 발이 묶임으로써 독일군에게 각개 격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생존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북아프리카 군단의 붕괴도 뒤로 밀려졌을 것이다. 붕괴가 이루어졌더라 하더라도 그 연도가 1945년이나 1946년이었을 수도 있다.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
→ 앞의 2개의 가정에 비해선 파급력이 낮은 편이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편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선에 상륙한 병력들도 북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이 이루어짐으로 독일이 패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이후 독일은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동쪽에선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남부에선 이탈리아 방어에 더 치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과 바그라티온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게릴라들도 싸그리 청소함으로써 독일의 목숨이 몇년 연장되었을 것이다.[60]
영국을 완전히 항복시킨 후 침공했다면?
→ 이건 앞의 것들보다는 좀 가능성이 되는 경우. 애초에 영국을 항복시킬 힘이 있었는지는 그렇다 치고 영국이 항복하고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과 식민지 상당부분이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치자. 사실 독소전쟁의 개전부터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 시점까지 독일은 영국과 싸우느라 별로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해전과 공중전은 계속 발생했지만 동부전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그래도 독일이 항복한 영국의 도움을 받고 공군력과 해상 보급도 동원했다면 안습한 보급이 상당 분 나아졌을 것이고 속전속결로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정도는 점령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점령한 후에 유럽에 홀로 남겨진 소련이 강화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이 초반에 발린 결정적 이유가 '히틀러 그놈이 설마 영국이 아직 건재한데 전쟁을 또 벌일까?'였던 걸 보면 영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소련은 최고 경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근데 영국을 항복시키고 나서 소련까지 칠 힘이 남아 있을까 전 유럽 점령은 아니더라도 모스크바와 아르항겔스크, 스탈린그라드를 잇는 광활한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도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이미 독일의 밑으로 들어간 마당에 미국이 유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까지 왔다면 미국은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고 독일과 공존하기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61] 그렇게 영국을 굴복시킨 후 소련 침공도 순조롭게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일대를 제패했더라면 당신들의 조국이 현실화됐을지도.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
→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리적 영향과 소련에 타격은 주었겠지만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적백내전 때처럼 북 사할린 및 연해주, 더 나아가 봐야 바이칼 호 이서 지역만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중국 : 만주는 돌려줘 임마 그러나 일본군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약체여도 막으려고 병력을 보내긴 해야 할 것이고 동부전선에서 시베리아 너머에서 온 많은 부대들이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소련이 독일에게 한참 발리고 있었을 1941년에 공격을 감행했다면 북 사할린이나 바이칼 호까지는 갔었을지도 모르고 그랬었다면 소련군의 병력이 양분되어 독일군의 모스크바 전투 승리에 공헌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애초에 모스크바 공방전의 패배가 일본이 참전 안 한다는 게 들통나서 동부전선에 있던 모든 소련군이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된 결과물이다.무엇보다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없었을 것이고 미국의 참전 또한 늦추어지는 효과를 보게 되어 추축국의 패망도 한참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항복했더라면? 만일 그랬더라면 중국의 광대한 인력과 자원이 일본 본토의 자본과 협력하게 되면서 수십 만의 상비군과 물자가 시베리아를 향해 쏟아져 올지 모른다.[62] 이 경우에 시베리아 주둔군에서 군대를 빼 오기는커녕 오히려 해당 지역에도 군대를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 경우에는 정말 소련에게는 암울한 시나리오가 진행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시나리오대로 가면 진주만 공습이 생길 이유가 없어지니까.[63] 미국이 연합국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다면?
→ 연합군이 만약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었다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결국엔 미, 영, 소 삼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는 결말을 불려왔을 것이다. 단순한 상상력만이 아닌 게, 영국과 소련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죄다 격침함으로써 소련은 그나마 자국에도 막대한 자원과 물량이 있는 만큼 꽤 버텼을 것이지만 반대로 섬나라인 영국은 엄청난 물자난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엔 독일과 강화했을 것이다.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에게 연료를 보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카이로바그다드를 거쳐 스탈린그라드까지 가게 됨으로써 소련군의 숨통을 조이는 것에서부터 랜드리스가 끊어진 소련은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낸다 하더라도 반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기아에 시달리던 영국이 결국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원래대로라면 미국, 영국과 상대했을 병력들이 죄다 동부전선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만큼 소련의 부담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소련과 독일의 단독 싸움에서 독일이 소련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맺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독일 국방군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독일에게 가장 희망적인 시나리오 중 하나,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경우. 만일 독일군이 인종차별과 학살을 하지 않았다면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집시는 물론, 전쟁 초반에 독일군을 해방자로서 반긴 점령지의 수많은 인구가 독일군에게 적극 협조하고, 병력이 되어 소련군과 싸우면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랬을 경우 독일군의 병력은 소련군과 동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 나아가 나치 독일은 그 기반 사상이 게르만 인종 제일주의였기 때문에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인종주의가 독일에 없었다면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 스탈린그라드 이후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뺐더라면?
의외로 가장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진짜로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를 맛본 후 개과천선해서 장군들에게 모든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다면 독일의 목숨이 상당 기간 연장되었을 것이다. 일단 보병들의 화력을 대폭 상승시켜줄 수 있는 StG44의 대량 생산과 보급에서부터 전선 축소에서부터 기동 방어전에 이르기까지 장군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진풍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대로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을 쌈싸먹고 헛된 공세로 병력들을 다 말아먹는 일 없이 드네프르 강변에 구축된 이중 삼중으로 된 방어선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협상을 지속했다면 좋게 말해서 한국전쟁과 비슷한 결말이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미국은 1945년 8월에 독일을 핵공격할 계획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막아내더라도 독일 본토에 핵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64] 히틀러가 모든 군사 문제에서 손을 뗐으니 Me262를 폭격기로 생산하라는 정신 나간 소릴 하지 않을 것임으로 히틀러가 변한 것처럼 헤르만 괴링도 제정신이 일찍 돌아왔다면 충분히 불가능한 시나리오라 할 수 없다.
◆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
→ 만약 소련이 T-34를 좀 더 일찍 배치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다만 그렇게 되었더라도 소련군의 공격은 아무리 잘해 보아야 단치히바르샤바쯤에서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이 반병신이 된 상태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다만 소련의 선공이 있었더라면 모스크바까지 뚫리는 일과 더불어 소련의 침공으로 여력이 없게 된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42년 1월의 일로 독일이 소련을 쳐바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당장 전황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련군 막을 생각을 먼저 하지 유대인을 죽일 생각을 할까? 하더라도 실행은 나중의 일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은 눈앞의 불을 꺼야 할 상황이니까. 그런데 소련의 선공으로 독일이 여념이 없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선 롬멜의 진군과 후퇴도 없이 방어전의 상황으로 지속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북아프리카 군단이 좀 더 오래 견디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지도. 그러나 롬멜이 방어전으로 나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물자 부족으로 무너지고 이탈리아의 상륙도 일어났을 것이고, 스탈린이 폴란드만 먹는 선에서 휴전을 할 리가 없으므로 그대로 베를린으로 go... 결국은 독일 패망. 대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럽 전쟁 종전일이 1945년 5월 9일이 아닌 1944년 6월 22일이라는 것 정도?
◆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
→ 대표적으로 스탈린 라인의 완공 문제와 키예프 방어전이 있다. 폴란드 국경에 건설 중이던 스탈린 라인을 괜히 옮기는 일 없이 그대로 계속했더라면 1941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재고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키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독일군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는 동시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 멍청한 독재자와 무능한 똥별의 결정으로 물거품이 되었으니...
뮌헨 회담이 결렬되었다면?
→ 회담이 결렬되고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치자.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더라도 마른 강 유역에서 막히고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로 진입한 소련군이 전쟁의 진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 상태가 아니었고 폴란드라는 강적이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소련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의 진행 과정을 보면 1차 대전 꼴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히틀러에게는 이대로 마른 강에서와 폴란드-루마니아-북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을 계속하던지 아니면 점령지를 죄다 토해내는 것으로 강화를 하던지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과 비교하면 히틀러 그 자신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성공했다면?
→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히믈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65]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 등 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여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꼴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많이 양보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세웠다고 치자.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프크리트와 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강화는 결렬, 신정부 측은 좋든 싫든 계속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전선 붕괴 없이 방어전에 어찌어찌 성공하고 점령지 대부분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처칠, 루스벨트와 강화했다고 치더라도 독일 혼자만의 여력으로 소련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무엇보다도 연합군이 독일 신정부와 연합하여 소련에 맞선다면 소련과 일본의 동맹으로 이어져 태평양 전쟁의 종결도 미루어지고 전쟁의 종결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이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매국노들로 후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
→ 핵이 개발되어도 독일은 핵 공격을 할 만할 초대형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어려웠다. 핵 투발용 특수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1945년에는 이미 루프트바페보텐플라테 작전 등의 삽질을 통해 갈가리 찢겨 핵 폭격기 호위기도 부족한 상황이고.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자 광활한 시베리아를 전부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V2 개량이라는 묘수가 있긴 했으나 핵무기가 올라갈 플랫폼 수준으로 개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핵 공격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핵을 1940년이나 1941년에 개발하였더라면 동시에 로켓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V2, V3 개발을 완료했다면 런던과 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증발하고 유럽은 제3제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후반에 개발하였어도 연합군을 강화 테이블로 끌어들일 수 있는 히든 카드로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연합군이 핵개발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한 시나리오지만...
◆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
→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폴란드 서부, 발트 3국, [[[몰도바|몰다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내주는 선에서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제정 러시아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 주고 1차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강화의 경우에 독소전쟁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써 소련은 1차대전 전후의 러시아 제국처럼 대러시아 부분만 간신히 유지했을 것이고, 더불어 스탈린의 권력 또한 엄청나게 위험해지게 되어 조기 실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심지어 소련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이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 강화를 맺으려고 하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서방 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번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개같이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 데다가 독일에는 전선을 두 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 아니 애시 당초 승리를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2차 대전[66] 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뭐... 전체적으로 보면 동맹국을 너무 믿었던게 탈이다, 일본 제국은 소련을 협공하자는 독일의 요청을 무시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선전포고를 남발하는 대단한 뻘짓으로 독일군의 작전을 망가뜨리고 독일의 최정예 공수부대도 끝장내 버렸으니 참(...)

==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
> 이 부분은 소련군 전문 이글루스РККА Ставка 이글루스 지부에서 상당 부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독소전쟁에 대해 진실에 근접한 연구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대외적인 독소전쟁 자료와 연구를 선전에 알맞거나 검열을 통과한 것만 공개했고 주요한 1차 사료들은 문서 보관소에 꼭꼭 숨겨 놓았다. 심지어 후일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밝혀진 자료들마저도 공산주의적 강박증이 큰 서술 방식 때문에 믿기 힘든 자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 ===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이 시작되며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 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고 각자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 세계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 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 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 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 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주코프, 바실렙스키, 시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로코솝스키, 코네프, 메레츠코프, 예레멘코, 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모스칼렌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바토프, 갈리츠키, 그레치코, 카투코프,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 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럽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다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 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 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려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 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 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s-3.3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르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소련군의 전차들이랑 맞싸우기 힘든 중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경전차들이었다.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 측 연구 ===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67]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안 하고 공적만 늘어 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 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68]는 오로지 독일 측의 시각으로 독소전쟁을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전술적, 작전적으로 항상 우위에 있던 독일 국방군이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무한한 인력과 자원으로 몰아붙이기만 할 줄 아는 소련군에게 패배한 것인 양 서술함으로서 소련군의 승리의 원인을 거의 "운빨"로 돌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 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팸플릿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 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 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파울 칼 슈미트)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 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의 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69]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에 전쟁에 패하면 자신이나 자기의 가족이 학살될 텐데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장 소련이란 나라 자체가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사건이라 불러도 부족할 만한 거대한 대중 봉기와 항쟁을 통해 생긴 정권이고, 꼭 숙청이나 굴라그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이상에 믿음을 가지고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순종'이나 '억압'이란 측면에서는 오히려 전쟁 이전에는 서방과 비슷한 시민 사회, 소비 문화, 의회 정치를 가지고도 히틀러라는 희대의 또라이한테 권력을 갔다 바쳤다가 모든 걸 싸그리 불태워 버린 2차 대전 세대의 독일인들이 할 말이 아니다.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바르바로사 작전~청색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이것은 병법의 기본이며,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70][71]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2배 정도의 전체 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 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창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문제는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 냉전 이후 ===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 쪽 자료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소전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When Titans Clashed>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르제프 공세"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제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제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 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SS 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 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 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 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채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 독소전을 다룬 대중문화 ==

=== 영화 ===
* 베를린 함락 - 1949년, 소련. 물론 시대에 걸맞는 스탈린 숭배 영화다. 베를린 전투만을 다루진 않고, 독소전의 시작과 끝까지 다루었다. 그래도 소련군의 복식이나 무기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잘 관찰하면 대전 기간 중의 소련군 제복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수백 대의 T-34 전차, SU-76, SU-152 자주포, 카츄샤 로켓포를 실은 트럭들이 소련군 병사와 함께 행진하는 CG 없이 찍은 실사판 장관을 볼 수 있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1958년 미국.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1943년 중~1944년 초가 배경이며 동부전선에서 복무하는 독일 국방군 병사인 에른스트 그래버와 그의 대학 동창인 크루제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그렸다.

* 인간의 운명 - 1959년 소련.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고아 등 피해자들의 고통, 그리고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영화.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숄로호프는 인간의 운명으로 레닌 상을 받았고, 여러 소설들을 저술해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철십자 훈장 - 197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독소전을 다루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어진 1944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철십자 훈장을 탄 독일군 고참 부사관 슈타이너 중사가 훈장을 위한 공명심에 들뜬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현지에서 로케를 해서 T-34 수백 대와 함께 몰려나오는 우라 돌격이 이 영화의 백미. 슈타이너가 실전에서 탄창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하며 허둥대는 상관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모습 또한 명장면이다.

* 벙커 - 1981년, 프랑스. 2부작 TV영화로, 훗날의 다운폴과 마찬가지로 벙커에 갇힌 히틀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뤘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 컴 앤 씨 - 1985년, 소련. 어린 소년을 화자로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영화다.

* 모스크바 전투 - 1986년, 소련. 제목 그대로 모스크바 전투를 다루었다.

* 스탈린그라드 - 1993년, 독일, 스웨덴. 제목 그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전쟁의 참상을 깨달아가며 절망하는 소위 역은 독일군 장교로 자주 등장하는 토마스 크레치만이 맡았다.

* 침묵의 사선 - 1999년 핀란드. 계속전쟁을 다루었다.

* 에너미 엣 더 게이트 - 2001년, 독일, 미국, 아일랜드, 영국. 감독은 프랑스인이다. 배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실리 자이체프를 중심으로 한 영화다.

*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 2차 대전 소련군의 여성 저격수였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에 관한 영화이다.

* 즈베즈다 - 2002년, 러시아. 1944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정찰대 이야기. 즈베즈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련군 정예 정찰 부대명이자 암호명이다.

* 피아니스트 - 2003년,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독소전쟁 자체보다는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가 배경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련군과 패배한 독일군이 나오기는 한다.

* 다운폴 - 2004년,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국내에는 ‘몰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배경은 베를린 전투. 울리히 마테스의 괴벨스 연기와 브루노 간츠의 히틀러 연기가 일품이다. 괴벨스의 대사는 짤방화되어 진지하게 쓰이고, 히틀러의 연기는 유머용 합성 요소로 쓰인다.

* 탈리-이한탈라 1944 - 2007년 핀란드. 1944년 6월 25일~7월 9일까지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의 탈리-이한탈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 자체는 핀란드 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최종 사상자수 차이도 2.5배 가까이 차이 났지만, 전체 전력 차이 때문에 핀란드는 GG 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 함께 독일을 공격한다.

* 베를린의 여인 - 2008년, 독일, 폴란드 합작. 베를린 전투가 배경. 점령군으로서의 소련군과 독일인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소련군의 범죄(약탈, 강간) 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군 병사들의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나 전쟁물 같지만 실제로는 점령군 장교와 피점령국 여인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린 멜로물이다.

* 디파이언스 - 독일군 점령 하의 벨라루스에서 지역 농부들이였던 비엘스키 형제들이 이끈 유대인 게릴라가 주 소재. 이들은 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소련군 유격대와 협력해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 유격대 사령관도 이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서 많이 도와줬다.

* 레닌그라드 - 2009년, 러시아, 영국 합작.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배경이다. KGB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 받아 붙잡힌 영국인 기자(미라 소르비노)가 여자 민병대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추위, 굶주림 속에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내용.

* 브레스트 요새 - 2010년, 러시아. 1941년 6월 22일~29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가 배경이다. 처절한 우라돌격 신으로 유명하다. 불시에 기습당해 무기조차 들지 못한 상태에서 창틀, 의자, 도끼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실제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독일 45사단은 후퇴를 명령받았다. 춘천-홍천 전투?아이러니하게도 이 요새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폴란드에게 뺏어서 소련에 넘겨준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초기에 민간인들과 희희낙락하게 평화로운 삶을 사는 소련군의 모습 따윈 다 뻥이고, 실제로 소련 점령 치하 폴란드는 나치 치하 지역처럼 살벌한 군정이 이루어졌으니, 폴란드인들 말마따나 이건 역사 왜곡이 좀 심한 편이다. 한국에선 개봉도 제대로 안 되고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는 영화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 채널에서 자주 틀어 주었다.

* 마이웨이 - 2011년, 한국. 독소전이 주 배경은 아니지만 주연 둘이 포로로 잡혔다가 독소전에 투입된다. 할힌골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묘사하였다.

* 화이트 타이거 - 2012년, 러시아.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1943년부터 종전까지의 기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일 전차와 이에 대적하는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전쟁으로 나타난 인간 심리를 이야기하는 전차병 나이데노프, 그런 그와 적 전차를 전쟁에 맞추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여기는 상관 페토도프, 베를린의 항복 식전에 등장한 독일군 고관들, 그리고 마지막 히틀러와 누군가의 대화 등을 보면 단순히 전차전만을 그린 영화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ütter, Unsere Väter - 2013년, 독일.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를 5명의 시점에서 다룬다. BoB와는 다르게 '승리의 영광'이 아닌 '처절한 패배'를 다루는 것이 특징. 초반에는 "모스크바까지 OOkm"였지만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베를린까지 OOkm"로 바뀐다. 전쟁을 지속하며 결국 인간성이 마비되어 가는 인물들, 전쟁에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과 처절하게 죽어 가는 병사들을 주로 보여 준다(...)

* 스탈린그라드 2013 - 2013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1993년 독일에서 만든 원조 스탈린그라드를 패러디해서 만든 영화이다.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와는 달리 소련군 시점이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한 러시아 여인의 회상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93년 작품과는 내용도 전혀 다르고 등장인물도 전혀 다르다.

* 1944 - 2015년, 에스토니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어서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버린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같은 민족의 인물들이 한쪽은 독일 무장친위대에, 다른 쪽은 소련군에 소속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이는 이야기. 나바 전투(Battle of Narva)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0무장척탄병 사단[72]이 소련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도중, 상대방으로부터 에스토니아어가 들리기에 싸움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비록 군복과 장비는 달랐지만 같은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소련군 제8 '에스토니아' 소총병 군단[73]이었다.영화로 유명한 국가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전투 장면의 퀄리티가 굉장히 높다. 다양한 독일군 총기와 보존 상태가 좋은 다수의 T-34/85를 볼 수 있다.

=== 게임 ===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 - 2013년, 렐릭 엔터테인먼트 작.
* 콜 오브 듀티 1
* 콜 오브 듀티 2
*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 맨 오브 워
* 레드 오케스트라 시리즈
* 월드 오브 탱크 - 역사전투 모드에서 독소전쟁의 전투를 일부 다룬다.


=== 그래픽 노블 및 만화 ===
* 수리부엉이 - 독소전의 공중전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만화 특유의 정밀한 묘사와 에로한 묘사가 일품.

* 요한의 타이거 - DC 코믹스 산하의 버티고 코믹스의 워스토리의 단편 중 하나. 정확히는 독소전 말기인 1945년 4월의 시점으로 전차장 요한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고생하는 이야기이다. 고증이 다소 좋지 못하지만 작품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74]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애초에 주인공 요한부터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니...


=== 그 외 ===
* 락그룹 새버턴 - Panzer kamft, Attero dominatus 등 독소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 러-일 합작 애니메이션 제 1부대: 진실의 순간'[75]
* 버프소녀 오오라 - 88화에서 '인류역사상 ㅄ같은 결정을 하면 항상 나타나 우는 새' 븟새가 등장하는데, 그때 나온 컷이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다.라고 말하자 창가에서 븟새가 울었다(...).
* 일본의 만화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들
* 잊혀진 병사 (Le soldat oublié) : 프랑스-독일 혼혈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 ‘기 사예르’(처음에는 수송부대로 참전하지만 나중에는 독일의 정예사단이자 전략예비대로 동부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으로 들어감)의 수필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처절함이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타낸다.[76] 화자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어서 프랑스 재건이라는 암묵적인 명목으로 별다른 재판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프랑스인이라는 혼혈, 작품 시작 부분에는 머리가 검고 곱슬이라는 외모까지 더해져, 독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기 사예르는 평범한 독일 병사들과 달리 포로로 잡히어 나름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담으로 2차 대전 후 프랑스 군에서 나름의 지옥 훈련을 받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 겪은 것들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었다 라는 정도로 시니컬하게 쓴다. 하긴 동부전선이 어디 평범한 공간이었던가? 그곳은 인류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귀와 축생의 세게였으니)

많은 밀리터리 서적이 그렇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데, 아마도 기 사예르가 프랑스어로 쓴 것을, 프랑스어 번역가가 번역하지 않고 영어나 일본어 번역가가 프랑스어에서 해당 언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 한 것으로 보인다. 어색한 문장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더하여 번역자가 2차 대전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어서 군사 용어를 쓰는 것도 아쉬움이 많다. 밀리터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아는 단어인 "기갑척탄병"을 "탱크수류탄병" 으로 번역하였고, 슈판다우 기관총을 슈판다우 포나 2호 전차를 마크 2 같은 식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발번역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동부전선에 참전한 독일 사병의 회고록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도 나치 친위대 기갑 트리오와 함께 독일의 정예 사단으로 유명한 "Gross Deutschland" 사단 소속이었다는 점 (기 사예르는 자신의 소속과 군번까지 밝히고 있지만, 오류가 있어서 외국에서 정말 기 사예르가 그로스 도이칠란트 출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등으로 2차 대전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번역 속에서도, 동부전선이 아비규환 같은 상황을 느낄 수 있는데, 소설이 아닌 회고록이긴 해도 주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사망한다. 당시 독일군의 처참했던 상황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과 함께 작품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추위에 관한 것이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추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더하여 이 작품에서는 참 군인의 표상인 "베스라이다우" 대위와 주인공이 "아우구스트 비너" 라는 이름 대신 나름의 애정이 담긴 별칭인 "고참병"으로 부르는 인물이 등장한다. "베스라이다우" 대위의 연설 부분은 발번역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인들 역시 조국애, 민족애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지, 히틀러에 대한 광신이라던가 인종차별적 사상 등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나름 작품의 백미 부분이다. (그런 싸이코들은 대다수 독일군의 모습이 아니었다.그래서 그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전쟁범죄는 대다수가 아니었던 독일군들만이 저질렀다는거야?) 더하여 오랜기간동안 사병으로 근무했으며, 특히 동부전선의 지옥같은 전장에서도 계속하여 살아남은 "고참병"은 사병이지만 어지간한 장교는 저리가라할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맹을 보여 준다. 그런 고참병이 주인공과 그 친구 "할스"를 위하는 마지막 모습은 아마 이 발번역 작품을 나름 끝까지 읽었다면 가슴 뭉클한 느낌을 독자에게 줄 것이다.

처음에는 수송부대원으로 시작하여, 친구 "할스"가 그로스 도이칠란드 부대원을 뽑는 과정에서 강제로 선택이 되는데 주인공은 친구과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그 부대에 자원한다. 그로스 도이칠란드 사단이라는 자부심과 아군 및 적군들 또한 그 사단이 정예 부대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은 주인공이 포로로 잡혔을 때도 나름의 특별 대우를 받게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더하여 그로스 도이칠란드 부대보다 친위대 기갑 1사단 "LSSAH"가 더 정예 대접을 받았다는 내용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2차대전에 관심이 있는, 즉 적어도 이 기나긴 나무위키의 문서를 여기까지 정독했을 만한 분이라면 읽어 보기를 권하는 작품이다. 발번역이 큰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지만, 실제 병사들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또 동료를 위해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작품 전체를 요약한다면 "동료애" 라고 말하고 싶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전쟁에 참여한 여군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이야기 소설'. 1988년 작품이나 소련 당국이 "이 책을 읽고 조국을 위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열한 사실주의에 물든 더러운 속옷 같은 책."이라고 비판하며 압박을 주는 바람에 소련이 망하고 나서야 출판했다. 독소전쟁의 지옥도를 있는 그대로 풀어낸 수작. 링크는 그 지옥도의 일부.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폭풍속의 씨앗 - 실제 무장친위대 참전 병사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 그가 소속된 3 SS 토텐코프 사단 옹호, 자원 입대 여부 등 문제가 있으나 동부전선의 처절함과 당시 독일군의 상황 등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 관련 어록 ==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항복이 뭔지 몰라서 벙커에서 자살했냐?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 아돌프 히틀러

>신병들은 이곳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머니를 찾다가 결국 미쳐서 죽게 된다. 8월 8일, 6중대의 총 사망자 50명 중 우리는 그렇게 35명을 잃었다.
>- 독일 제18보병연대 '호케' 소령[77]

>히틀러의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들의 공격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이 나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 이오시프 스탈린[78]

>'나는 여기서 죽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조국이여 안녕.'
>(I'm dying, but I won't surrender! Farewell, Motherland.)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벨라루스 브레스트 요새(Brest Fortress)의 이름 없는 소련군 병사가 남긴 문구[79]

>졔냐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에 죽었다.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레카가 1942년 3월 17일 새벽 3시에 죽었다.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식구가 죽었다.
> 모두 다 죽었다.
> -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11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 일기장의 주인도 1942년 말 병으로 사망했다.[80]

>죽이고 또 죽여라, 적들의 시체는 예술이며 혁명이다.
> - 이오시프 스탈린

>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81]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자신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I have no intention of shooting myself for this Bohemian corporal).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그 때 1학년 학생이 세 반 있었는데, 이웃 마을에 두 반, 가예보에 한 반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죠. 그래서 나는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압니다. 우리는 100명쯤 됐는데, 전선에서 죽은 사람이 분명히 아흔 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불구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요. 사지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저 한 명뿐이었습니다.
>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 우리 소련의 승리는 제가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낸 것입니다.
> - 이오시프 스탈린, 승전 후에

== 관련 자료 ==
Soviet Storm: World War II — In The East. ep. 1. Operation Barbarossa. StarMedia[82]
World War II in Europe: Every Day[83]
디스커버리 2차 세계대전 재조명 - 4편 히틀러 소비에트 연방을 치다(Hitler Strikes East)[84]
디스커버리 2차 세계대전 재조명 - 8편 소련의 강압책(The Soviet Steamroller)[85]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2차 세계대전 - 3부 유대인 대학살
폴란드볼 에니메이션으로 간단한 독소전쟁 요약 [86]
Pobediteli에서 상세한 자료와 해설, 그리고 한눈에 보이는 지도로 독소전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파랑이 추축국, 초록색이 연합국, 빨간색이 소련군.
  1. 참고로 조국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치른 전쟁이다. 거기에 大를 붙여서 대조국전쟁.
  2. 영어로는 The Great Patriotic War라고 한다.
  3. 2차 세계대전의 일부이지만 스케일로만 본다면 제목처럼 아예 별개의 전쟁으로 취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4. 더 많은 인물을 보려면 제2차 세계대전/관련 인물 문서 참조.
  5. 스탈린이 떨어뜨리는 문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문서이다.
  6. 전투 목록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분류 가능한 '전투'들의 규모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특히 1위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7. 불과 30km정도로, 붉은 광장으로 가는 버스의 종점까지 나치군이 진격했다.
  8. 사실 러시아는 조국전쟁 때 모스크바를 점령당하고도 이겼지만, 그 전쟁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점령을 목적으로 어택땅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러시아 제국군(전투 손실)과 국토의 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사실 러시아 제국군, 나폴레옹의 원정군의 손실 중 거의 반 정도가 겨울의 추위, 병으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였다.) 또한 이때는 수도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 페테르 부르크였다. 하지만 이 때의 소련은 대숙청의 영향으로 장교들이 다 쓸려나가고,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를 실행하기 위해 소련의 유럽 부분을 거의 청소한다시피 나아갔기 때문에, 공장 등의 물자와 군의 손실이 엄청났지만 그러고도 이겼다.
  9. 역사적으로 이런 기적적인 승리는 얼마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조국전쟁, 그리고 임진왜란에서의 조선의 승리, 제 1차 세계대전에서의 프랑스의 승리 정도가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일궈낸 기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6.25 전쟁은 남북한 모두 수도를 점령당하고도 무승부로 끝난 보기드문 전쟁이다 단,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까지 넓혀보면 국공내전에서의 공산당도 있다, 하지만 국공내전에서의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 내부의 문제점이 가장 큰 원인이였음을 생각하면...
  10.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협상 가능성이 사라졌다.
  11.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힌 전쟁으로 국가 단위에서 그것도 서로 극단적으로 전체적이고 사람보기를 벌레로 아는 체제에서 서로를 증오하는 대상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준 사례이다.
  12. 이 수치는 포로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이며 포로 사망자를 제외한 사망자는 소련군이 660만 명, 독일군이 440만 명에 달한다.
  13. 더불어 이 수치는 오로지 군인 사상자만 센 것이고, 민간인 피해까지 포함하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4. 대전말기 국민돌격대나 소련의 노병들을 제외하면 사상자의 대다수가 20~30대의 젊은 청장년층의 남성들이다.
  15.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사상자 총 1,348만 명 중 1,075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하였다. 참고로 독일의 총동원 병력은 1,798만 명.
  16. 예컨대 2차 상하이 사변이나 우한 방어전 등등.
  17. 시도는 많이 했는데 화력과 화생방전의 능력이 취약했으며 물자 및 훈련 부족으로 인해 승기를 잡아도 일본군의 적절한 병력 지원이나 공습, 독가스 살포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힌 것에 만족하고 후퇴해야 했다.
  18.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소련이었으나 먼저 타협한 측도 소련이었다.
  19. 그러나 그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련 인사들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며,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말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확장을 크게 제한받고 국제 사회에서 평판이 추락한 독일과, 세계 각국의 집권층이 전혀 환영할 수 없는 이념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어느 면에서든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
  20.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1.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22.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1880-1967).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
  23.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이란-이라크 관계급으로 아주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 때문에 심한 골치를 앓던 적도 많다. 여기에 1919년-1921년,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을 겪어 국내적으로 아주 혼란하던 시기를 틈타 영토 수복을 위해 폴란드가 선제 공격을 날려 소련-폴란드 전쟁까지 겪어 두 나라는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아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하다.
  24.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25. 섬나라인 영국이 몇십 개 육군 사단을 유럽 본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섬나라면 당연히 해군의 비중이 클 것이므로.
  26.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려할 수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1차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으며 그 결과는...
  27.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면 영어 위키백과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28.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29.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77
  30. "알프레드 리스코프(Alfred Liskov)"란 인물로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다.
  31. 브렌하드 본 루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
  32. 당시 미국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동네 싸움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내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한 방임주의의 영향이 컸다.
  33. 그러나 소련은 초반의 기습으로 공업 역량을 상당히 빼앗긴 반면에 나치는 유럽 전역의 공업력과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 준 것도 1943년에 들어서의 이야기이고.
  34. 출처: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35. 실제로 독일은 1차 대전 때 동서 양쪽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싸운 끝에 망했다.
  36.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1945년 종전 당시에는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 비율을 살펴 볼 때 최대 4,000만의 인명 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문서 참고 바람.
  37. 당연하지만 이런 까닭에 전후 독일 처리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어그로한 태도로 나왔었다. 아예 독일 자체를 갈아 버리려고 했을 정도니까.
  38. 러시아에서는 다년생 검사 기준으로는 3700만 명까지 추산을 하고 있다.
  39. 참고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대중에게 알려진 그 참혹하다고 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오마하 해변의 미군 전사자가 불과 4,649명이다(여단 하나와 비슷한 급). 4,649명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닌게, 이 정도 숫자의 시체면 해변 모래사장은 덮을 수 있다./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류한수 역(청어람미디어, 2007), P.583
  40. 단순하게 따져 보면 이 나이 대 남자 중 절반 가까이가 죽었다는 얘기다.
  41. 355.p, 로버트 서비스, 《코뮤니스트》, 교양인
  42. 이 사상자 수는 나치 독일이 대전 중 투입한 총 병력의 75%에 해당하며, 1939년 기준 전장에 투입 가능한 독일 성인 남성 인구의 46%에 달한다. 대전 중 남성 인구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셈이다. 물론 모든 부상자가 불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심한 부상으로 장애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 수치는 민간인 피해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
  43. 이 점에 있어선 미국더글러스 맥아더와 비슷하다.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성격이 매우 오만했으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정치계에서 견제가 심했다.
  44. 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30%에 육박한다.
  45. 이전 버전에선 70이란 심회 엄청난 숫자가 있었지만 정작 포로 사망률을 가장 높게 잡은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마저 최대 58이라고 잡았지 70이란 소린 안했다. 그마저도 다른 학자들의 경우 너무 높게 잡았다며 대체로 30정도로 추정하는 수준이다.
  46. 유일하게 포로 사망률이 70이라 주장하는 나라는 중국으로 이 마저도 다른 외국 학자들도 너무 높다며 사실상 부정되고 있다.
  47. 실제로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사망률은 서방 연합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지만 소련은 나치 독일과는 달리 일단 국가단위에서는 지킬 건 지켰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단속, 처벌하였으나 점령 초기에는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 뿐이다.
  48. 그러나 최근에도 소련의 포로 대우가 독일과 비교해도 굉장히 나빴다는 내용의 주장이 미국,영국,독일 등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어느정도의 논란도 있지만 그래도 한번은 참고할만 하다. Eastern Front of World War II 1939-1945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
  49. 당시 헝가리와 폴란드는 비록 적이긴 해도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50. 출처 : Bellamy, Chris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Macmillan, 2007. ISBN 978-0-375-41086-4 p.1~7
  51. 역사상 가장 매서운 나치 독일의 총공세를 받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수훈갑이다. 종전 후 소련의 목소리가 컸던 게 당연하다. 더욱이 소련은 무려 1천만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총 전사자의 절반을 넘는다. 소련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52. 사실 둘 다 맞는 말이다. 추운 겨울 날씨에 의한 장비 오작동, 병사들의 전투력 약화나 히틀러의 삽질은 독소전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 문제는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2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53. 실제로 처칠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 바쿠 유전 지대를 폭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처칠이 1차 대전 때에는 오판으로 오스만 제국을 적으로 만들더만...2차 대전 때 소련꺼지 적으로 만들었더라면(...)
  54.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 이루어진 회담에서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소련이 독일을 도와 참전할 경우 아프간을 거쳐 영국령 인도를 침공할 것을 부탁했으며 향후 인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을 묵인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소련 침공으로 없었던 일이 됐지만(...)
  55. 하지만 독일 역시도 추축국의 도움을 많이 받고 독소전을 치루었고 무엇보다도 본인들이 채결한 불가침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 공격ᅟᅵᆫ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대전 초기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독일이 미국의 랜드리스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서 불리하게 싸웠다고 말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56.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
  57. 당시 바쿠 유전에서 나는 석유는 소련군의 전체 보급량의 80%를 차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지역을 상실하는 것만으로도 소련에겐 심각한 부담이다.
  58. 적어도 여기까진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다. 당시 독일군의 계획도 바쿠 유전 점령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
  59. 그런데 ‘만약 이루어졌다면?’이라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그럼 게임 끝난 거다. 진짜로 그렇게 이루어졌더라면 스탈린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고 처칠과 영국 왕실은 캐나다로 갔을 것이다...
  60. 그린힐의 대체역사 전집에서 참고.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
  61. 다만 일부는 영국과 노르웨이가 모조리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미국이 랜드리스를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소련에 도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그냥 틀린 의견으로 그 이유는 랜드리스 수송선의 북극 항로의 비중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에 건네준 랜드리스 물품의 대부분은 북극 항로의 계절적인 위험과 영국을 포위한 유보트 때문에 북극 항로가 아닌 인도양태평양을 통해 옮겨졌다. 북극 항로를 통한 랜드리스는 초기에 시도해 보다가 손실률이 너무 커서 유보트를 거의 다 잡아낸 대전 후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배만 운영되던 비주류 항로이며 랜드리스 물품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과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직접 태평양을 통해 옮겼고 나머지도 대부분은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이 북극 항로의 위험성 문제는 랜드리스가 42년 중반이 넘어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고 그로 인해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태평양 항로가 막힌다고 가정하면 랜드리스 자체에 큰 위험이 되겠지만 단순히 미소 간 랜드리스로 한정한다면 북극 항로는 역사적으로 차지하면 엄청 좋은 항로지만 없다고 랜드리스 운송을 못할 항로는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그나마 대전 총합 20% 수준의 랜드리스 물품이라도 옮긴 건 대전 후기에 유보트를 다 잡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에 이 항로를 애용했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기에 북극 항로를 통한 운송 실패가 워낙 빈번하여 대전 총합 이 항로의 손실률은 7%에 달했다.
  62. 이외로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막부 말에서 1940년까지 일본의 가상 적국 1위는 러시아(소련), 2위가 중국, 3, 4위가 영국과 미국이었다.
  63. 실제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은근히 반가워하고 있었는데 전후 복구 사업에서 대규모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개쌍놈들
  64. 하지만 이것도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 히틀러가 바뀐 것처럼 독일의 제공권을 확실하게 잡는 것이 성공했더라면 미국의 핵 투하도 불가능해졌을 수도 있다.
  65. 진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
  66. 애시 당초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이 잘 돌아가면서 잠시 착각을 했을 뿐 결국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이기지 못하는 독일의 종특
  67. 이 때문에 소련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 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68.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
  69.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
  70.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이 300만인 데 만해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고,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각개 격파당했다.
  71.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있지만 일반화될 수는 없는 사례이다.
  72. 에스토니아 1사단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기도 했으며 제3 SS 의용 에스토니아 여단을 기반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
  73. 에스토니아 동부에서 지원 혹은 강제 징집된 에스토니아인을 근간으로 편성되었다. 산하에 제7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과 제249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을 두었으며, 이들은 전후 각각 제118근위소총병 사단과 제122근위소총병 사단으로 발전했다. 군단 자체도 마찬가지로 '근위'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칭호를 수여받아 제41 '에스토니아 탈린' 근위소총병 군단으로 개편되었다.
  74. 2001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깨끗한 국방군 이론이 주류였을 때였다.
  75. '러시아를 침공하다가 격퇴로 전사했던 유령 기사단'을 부활시켜 써먹으려는 SS 친위대의 음모와,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군 비밀기관의 소녀인 나댜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독일군의 이족 보행병기도 나오는 등 여러 편을 기획한 모양인데, 1편의 흥행 성적이 나빠서인지 유령 기사단을 다룬 1편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후속작 소식은 없다. 사실 스토리나 작화 등은 괜찮은데, 다큐멘터리처럼 실사 인터뷰 내용 등을 집어넣는 등 연출이 나쁘다.
  76. 수송 트럭을 타고 가다가 소련 공군의 기총 소사로 바로 옆에 탄 친구를 잃는다든가 분대원이 너무 굶주려서 소련군이 먹다가 남기고 간 삶은 감자를 먹느라 소련군을 놓치기도 한다. 전선에서 겪는 질병은 덤이다.
  77. 출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제2차 세계대전 4부, 전쟁의 절정
  78. 출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제2차 세계대전 3부, 유대인 대학살
  79. 브레스트는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도시였으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의 침공에 호응해 동쪽에서 쳐들어온 소련군에게 점령당해 이곳을 기준으로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했다. 분할선의 기준점이 된 이상 이곳은 당연히 소련의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요새는 1주일 간 저항하다 결국 함락당했고 요새 내 병력 9천여 명 중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 문구를 쓴 병사가 생존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정황상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구대로 4년 후 이 병사의 조국조국을 유린한 침략자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한다.
  80.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
  81. 다만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82. 독소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Soviet Storm의 1화 바르바로사 작전 편. 본 다큐멘터리는 총 18부작이며 마지막 편은 만주 작전을 다루고 있다.
  83.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의 하루 단위 진행 상황을 설명한 동영상. 독소전쟁은 약 2분 10초부터 시작된다. BGM이 Kevin MacLeod의 The Descent로 바뀌면서 물밀듯 밀려오는 독일군이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84. 바르바로사 작전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를 다루었다.
  85. 소련이 헝가리(당시 헝가리 왕국)를 점령하는 과정까지 다루었다.
  86. 정확히 말하자면 승리의 날 기념 에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