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연(배구선수)


도로공사의 장샘으로 돌아왔다!

인터뷰어 : 상대가 공격할 때 블로커로서 무엇을 보는가?

장소연 : 공격수나 공이 아니라 세터를 보고 세터의 생각을 읽는다.
- 2015년 1월 19일 GS칼텍스와의 경기 후 인터뷰

이름장소연(張少燕)
생년월일1974년 11월 11일
출신지부산광역시
출신학교경남여자고등학교 - 경기대[1]
포지션센터
신체사이즈신장 184cm, 체중 77kg
소속팀선경인더스트리-SK케미칼 (1992~1997)
현대건설 (1998~2005)
대전 KGC인삼공사 (2009~2012)
경북 김천 하이패스 (2013~2016. 5. 31)

왠지 11과 연관이 많아 보이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이다(...)[2]

1 소개

대한민국 여자배구의 레전드이자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세계 여자배구계를 풍미했던 센터다. V-리그 2015-2016 시즌 기준 여자부에서 두번째로 고령인 선수[3]이자 전 성남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제니스의 플레잉 코치이다. 존칭은 이동공격의 달인.

2 선수 생활

2.1 실업 시절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에이스로 동갑내기 세터인 강혜미와 함께 1992년 고교배구 대회 3관왕을 거두며 일찌감치 대한민국 여자배구계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열렸던 대통령배 배구대회 드래프트에서 1지명으로 경남여고 배구부 졸업생들이 선경 여자배구단에 지명되며 성인무대에서 뛰기 시작했다.[4]

장소연과 강혜미가 선경에 입단할 당시만해도 선경은 대통령배에서 밑바닥을 깔아주던 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남여고 배구단 전체를 지명한 계기로 강팀으로 발돋움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리고 장소연은 고교배구를 씹어먹었던 실력을 성인배구에도 유감없이 보여주며 1992-1993 시즌 대통령배 대회 신인상을 차지했다. 장소연은 후국기(후인정의 아버지)-류화석 감독 시절에 팀의 코어로 성장했고, 성인무대 초창기부터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뛰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호남정유와 한일합섬의 김남순이 같이 다 해먹었던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했다. 세트 후반에 강혜미와 함께 원포인트 블로커로 활약했는데, 당시 노쇠화가 진행됐던 이도희-홍지연을 대신하여 들어갔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 탈락의 충격을 당한 여자 국가대표팀은 장소연, 강혜미와 같은 젊은 피가 절실했던 상황이었고, 이는 두 콤비가 세대교체를 이룰 것이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강혜미-장소연 콤비 플레이는 이도희-홍지연의 그것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소속팀에서 강혜미는 중요한 상황일 때 장소연을 믿고 토스를 많이 전해줬으며 이 콤비가 보여준 속공과 이동공격은 한 팀의 중요 공격옵션을 넘어 스피드 배구의 표본이 됐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선경인더스트리-SK케미칼 배구단은 호남정유-LG정유의 대통령배-슈퍼리그 92연승을 저지하는가 하면, 1996-1997 시즌 결승전에는 1승 2패로 LG정유를 몰아붙이며 7연패를 저지할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철용 감독의 지시에 각성한 홍지연의 맹활약으로 승부가 뒤집히게 된다. 1997-1998 시즌에도 LG정유에 밀려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SK케미칼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이렇게 소속팀에서, 국가대표팀에서 주축선수로 맹활약하던 장소연과 강혜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팀 해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1998 시즌 준우승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4월. SK그룹IMF 외환위기를 핑계로 모기업의 긴축경영을 이유로 팀을 해체하기에 이른다.[5] 이 때문에 장소연을 비롯한 해체팀의 선수들은 1998-1999 시즌을 공치고 만다. 그래도 국가대표 주전선수이니 해체팀 드래프트에서 장소연-강혜미 콤비의 행보도 주목을 받았는데, 결국 둘은 198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현대건설 배구단에 지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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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로 이적한 장소연. 오른쪽은 구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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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연-강혜미-구민정. 캐사기 이적 3인방

당시 현대건설은 라이트-센터 이명희를 중심으로 리빌딩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숙자, 한유미, 정대영, 박선미 등의 초고교급 선수들도 영입하고 여기에 장소연-강혜미에 한일합섬의 주포 구민정까지 가세하면서 그야말로 캐사기 팀을 만들었다. 거기에 SK의 감독을 맡았던 류화석 감독도 영입하였다. 1999-2000 시즌부터 2004 V-투어까지 5연패는 당연했다. 특히 이적생 3인방은 호남정유-LG정유에게 매번 결승전에서 지면서 만년 콩라인이 됐어야 했던 지난 날들의 한을 넉넉히 풀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범 현대그룹 2세들의 주도권 다툼인 왕자의 난과 현대건설의 워크아웃에 의한 산업은행의 관리체제로 현대건설 배구단은 해체설이 한동안 나돌기도 했을 만큼 구단 지원이 썩 좋지 못했다. 결국 현대건설의 노장(?) 4인방은 표면상으로는 결혼 등의 일신상의 이유였지만 소속 팀의 문제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장소연은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4 V-투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6] 아울러 중학교부터 16년 간 함께 해온 영혼의 콤비인 강혜미-장소연 콤비도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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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뒤 장소연은 V-리그 원년에 한국배구연맹의 마케팅의 일환으로 심판으로 변신하여 정선혜, 양숙경과 함께 정식 선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결혼 후 잠시 미뤘던 학업을 임신-육아를 병행하는 등 평범한 삶을 보냈다.

2.2 V-리그에 복귀


클래스가 살아있는 블로킹!

현역에서 떠난 지 4년 만에 장소연은 2009년 드래프트에 깜짝 등장하여 전체 3번으로 대전 KGC인삼공사에 지명됐다. 사실 은퇴 뒤 배구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고 미래에 프로팀 감독을 꿈꾸던 장소연이었기에 실업리그에서 계속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팀에서 불러준다면 얼마든지 복귀가 가능한 몸 상태였다. 2009 드래프트는 역대 최악의 흉작 드래프트라는 박한 평가 속에 유독 장소연만이 빛났고, 실제로도 2009-2010 시즌 신인왕 후보로 조심스럽게 점쳐지기도 했다.[7] 그러나 그가 드래프트라는 절차를 통해 복귀한 것 자체가 애초에 논란이 되었고 결국 그는 신인왕을 사양하게 된다.[8]

V-리그 복귀 첫 시즌었던 2009-2010 시즌 초반에 선수들과 손발을 맞추느라 1라운드에 결장하다 2라운드 들어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첫 경기 교체요원으로 들어갔는데도 블로킹이며 이동공격이며 특히 장소연 복귀경기 중계 캐스터였던 유수호 옹이 '이동공격의 여왕'이라 소개하며 이동공격 하기를 부추기기도 했다(...) 보여줄 건 다 보여주면서 옛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2009-10 시즌부터 2011-12 시즌까지 인삼공사는 여자부의 신세기 甲人 마델레이네 몬타뇨라는 절대적인 주포가 있어 장소연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센터 나머지 한 자리를 차지하며 인삼공사의 블로킹 높이를 올리는데 일조했다. 또한 소심한 공격으로 답보상태에 있던 센터 김세영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며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인삼공사는 강력한 주포, 높은 블로킹 라인으로 2009-10 시즌과 2011-12 시즌에 V-리그 챔피언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약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2011-12 시즌 종료 후 인삼공사가 우승의 주역인 몬타뇨와의 재계약을 포기했고, 여기에 김세영, 한유미 역시 각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장소연 역시 인삼공사에서 더 뛰면서 코칭스탭으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구단에서 노장들을 정리하게 되자 안타깝게도 재계약하지 못했다.

결국 1년 동안 실업리그로 돌아와 몸 상태를 유지하였고, 2013-2014 시즌 성남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제니스에서 선수 생활을 보장받으며 플레잉 코치로 선임되어 프로에 복귀한다. 도로공사의 주전 센터인 하준임과 표승주를 받쳐 주며 원 포인트 블로커로 활약할 것이라 시즌 초에 예상했지만, 표승주가 윙스파이커로 나오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오히려 모든 경기에 선발 센터로 나와 뛰게 됐다. 움직임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뎌졌지만, 3라운드 들어 적응되면서 예전의 블로킹 실력을 다시한번 보여줬다. 그리고 그 덕으로 올스타전에 팬 투표에 뽑히는 영광까지 얻었다. 한편, 플레잉코치로서는, 공격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하준임에게 B퀵에서 A퀵으로 좁혀 들어오는 속공공격[9]을 지도하며 하준임이 한 단계 성장하는데 도움을 줬다. 그렇게 무사히 한 시즌을 마치는가 싶었는데, 2014년 3월 11일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의 인천 원정경기에서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안 될 때 상대 스파이커의 공격을 블로킹 뛰다 내려오는 과정에서 상대 공격수의 발을 밟고 발목이 틀어지는 큰 부상을 당하며 단 2경기를 남기고 시즌아웃됐다. 부상당했을 당시 발목골절상으로 긴급수술이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려졌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발목인대 파열 부상 진단을 받았다.

부상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서 오프시즌에 재활 훈련을 거치고 2014-15 시즌에 건강하게 복귀했다. 물론 불혹에 접어든데다가 센터포지션에 정대영이 FA로 영입되어 2014-15 시즌에는 주로 세트 후반 원포인트 블로커로 나섰다. 그래도 경기 중 언제라도 나갈 수 있도록 웜업존에서 열심히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고었다.

그러다 2014년 12월 15일 대전 KGC인삼공사와의 대전 원정경기에 오랜만에 선발출장하여 부상으로 잠시 빠진 정대영의 공백을 충분히 메웠다. 이날 경기에서 11점을 올리며 경기 MVP로도 뽑혀 수훈선수 인터뷰를 했다.경기 활약상 3분 42초부터 그리고 이 경기를 기점으로 자신보다 15살이나 더 어린 하준임을 밀어내고 당당히 주전 센터로 활약하고 했다. 오히려 하준임이 원 포인트 블로커로 이동했다.

2016년 5월 31일 FA 계약 실패로 은퇴 후 지도자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그 이후 2016년 청주 KOVO컵을 기점으로 SBS Sports의 해설위원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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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연 이전의 홍지연이 장신선수도 스코어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장소연은 그것을 뛰어넘어, 센터가 할 수 있는 공격력의 최대치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센터의 역할에 대한 패러다임을 크게 바꾼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장신선수가 블로킹과 트릭 점프만 뛰고 여기에 중앙 오픈이 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센터라 평가받던 때였는데 장소연의 빠른 속공과 이동공격은 이전 대한민국 선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184cm로 센터를 보기에는 다소 작기는 했지만, 높은 점프와 빠른 발, 큰 보폭은 장소연이 가진 장점이었다. 데뷔 이래 대통령배-슈퍼리그 시절에 블로킹, 속공, 이동공격 부문에서 3위 내에 들었었고, 어느 정도 기량이 국내 정상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이 세 부문에서 밥먹듯이 1위를 했다. 심지어 랠리포인트 기준으로 경기당 20점 이상을 올릴 수 있는 득점력도 있었다.[10]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상대 스파이크 코스를 읽는 능력도 뛰어나 유효블록도 잘 잡아냈고 단독블로킹 성공도 많았다.

그런데 역시 장소연의 주특기는 뭐니뭐니해도 바로 외발 이동공격. 요즘 선수들의 그것들과 비교하자면, 김혜진의 스피드, 김수지의 높이, 김희진의 파워를 모두 갖춘 플레이가 바로 장소연의 이동공격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전성기 때 장소연의 이동공격을 감상해 보자. #1 #2 보통 이동공격이 (백)B속공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장소연의 속공은 (백)C속공에서 이뤄지곤 했다. 특유의 빠른 발에 큰 보폭으로 전위 우측 사이드까지 빠져나가면 강혜미가 전달해준 빠른 토스를 재빨리 받아 처리했다. 그런데 C속공성 이동공격이 이렇게 끝나면 상대 수비수로서는 다행이련만, 장소연은 상대 블로커를 따돌리기 위해 첫 스텝에서 A퀵을 뛰는 척 하며 개인시간차를 가미한다던가, 세터가 전달한 공을 반박자 늦게 때린다던가 하는 등의 트릭을 자주 쓰며 네트 앞에서 맞서는 블로커는 물론 그 블로커 뒤에서 커버를 해줘야 하는 리시버까지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신체 사이즈가 큰 서양선수들은 큰 보폭을 낼 수는 있어도 장소연만큼의 스피드를 내서는 이동공격이 불가능했고, 아시아권 선수들은 애초에 큰 보폭이 나올 수 없었기에 이런 장소연의 플레이는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유니크한 스타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 큰 보폭으로 걷다가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과도 같다' 하여 '학다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차 은퇴 뒤 복귀했을 때는 소속 팀의 동료이자 여자부의 신세계의 甲人인 몬타뇨가 세터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맡았기 때문에 속공과 이동공격의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대신 유효블록과 상대의 공격 코스를 파악하며 막아내는 단독 블로킹을 자주 보여줬다. 다만 도로공사 시절에는 이미 나이가 불혹에 접어들었던지라 예전의 빠른 몸놀림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2013-14 시즌에 하준임, 표승주를 빼곤 높이가 고만고만한 도로공사의 블로킹 높이를 올려줬고, 2014-15 시즌 들어 과거에 백C퀵 정도까지도 가능했던 이동공격이 백A퀵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짧게 파고드는 스피드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짧고 깔끔하게 들어가는 백A퀵마저도 상대팀은 알고도 못 막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추가바람
  1. 선수시절 중 입학하여 석사학위까지 수료했다. 한편, 경기대학교에 여자배구부는 없기 때문에 경기대학교 소속으로 뛴 적은 당연히 없다.
  2. 장소연은 도로공사로의 이적 전까지는 등번호 11번과 인연이 없었다. 참고로 선경-SK 시절 15번과 9번, 현대건설 시절 9번, 인삼공사 시절에 6번을 달았으며, 국가대표팀에서는 15번과 9번을 달았다.
  3. 15-16시즌부터 흥국생명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동중인 이수정이 2살 더 많아 V리그 전체 최고령. 그녀를 제외하고 본다면 V-리그 전체로는 장소연보다 7개월 일찍 태어난 후인정이 최고령 선수였지만 2016년부로 은퇴.
  4. 당시 여자배구 신인드래프트 제도는 구단이 선수를 한 명씩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한 개교 졸업생 전체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5. 당시 농구대잔치 1997-1998 시즌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던 SK증권 여자농구단도 우승 다음 날 똑같은 이유로 팀 해체가 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래 놓고 2년 뒤엔 돈이 몇 곱절은 더 들어가는 프로야구팀을 만들어 참가해 현재에 이른다. 있던 여자팀은 없애고 없던 종목 남자팀을 만든 꼴이 되어 성차별 아닌 성차별이 된 셈.
  6. 구민정은 어깨 부상과 결혼 후 가정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은퇴를 선언했다. 강혜미는 이미 만성이 된 목 디스크로 더이상 선수생활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김사니가 빨리 성장한 덕택에 국가대표팀에서 강혜미는 2003년부터 김사니의 백업 세터로 전환할 수 있었다. 한편, 강혜미는 은퇴 후 현대건설에서 코치를 하다가 2009년 안산시 안산고등학교에 체육교사로 특별 임용되어 2014년 현재 체육교사로 재직 중이다.
  7. 실제로 장소연을 뺀 나머지 드래프트 지명자 중 2014-2015 시즌에 뛰고 있는 선수는 정다은(현대건설), 김혜선(흥국생명) 단 둘로, 이 둘 중에서도 주전 리베로인 김혜선만 사실상 살아남은 드래프트가 됐다.
  8. 장소연의 드래프트 참가가 상당히 논란이 많았다. 드래프트 당시에는 V-리그 출범 이전에 은퇴한 선수들은 드래프트를 통해야 한다는 KOVO 측의 주장이 있긴 했지만, 장소연 드래프트 3년 후인 2012년에 팬서비스로 잠시 V-리그에 복귀한 장윤희는 은퇴 전 소속구단이자 당시 코치로 활동했던 GS칼텍스 서울 KIXX에서 뛰었기 때문에 KOVO의 주장은 모순이 된다. 또한 원소속구단인 현대건설도 그대로 존속돼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장소연 은퇴 이후 현대건설과의 관계는 어른의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상기됐듯 이미 장소연은 실업시절에 신인상을 탔던 경험이 있는데다 4년을 잠깐 쉬었을 뿐 경력은 17년차이니 신인왕을 타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9. 참고로 하준임은 왼손잡이이다. 세터가 공을 넘겨준 공을 때리면 공의 궤적이 오른쪽으로 빠진다.
  10. 다만, 양효진이 몰빵을 당하는 것과는 다르게 장소연의 최전성기였던 현대건설 시절이나 국가대표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했을 때는 장소연 말고도 컨디션 좋을 때 한 경기에 20점 이상은 해 줄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